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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일본 요도호 북한 납치범, ‘일본 조사 받겠다’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일본 요도호 북한 납치범, ‘일본 조사 받겠다’

CIA Bear 허관(許灌) 2014. 6. 1. 12:08

지난 1970년 일본 민항기 '요도호'를 공중납치해 북한으로 망명했던 일본 공산주의 과격단체 적군파 조직원이 일본 정부의 공식 조사를 받을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에 머무르고 있는 적군파 조직원 `와카바야시 모리아키'는 31일 일본 교도통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체포 영장이 발부되지 않는 조건으로 북한이나 제3국에서 일본 조사 당국의 심문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도호 사건’은 지난 1970년 3월, 적군파 조직원 9명이 승객과 승무원 1백29명이 탄 일본항공 요도호를 공중에서 납치한 사건입니다.
 
북한과 일본은 지난 28일 스웨덴에서 열린 국장급 협의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재조사하기로 합의했지만, 요도호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VOA 뉴스

 

*일본의 적군파(김일성주의자)
적군파(赤軍派,Red Army)는 1969년 2개의 극좌파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일본의 테러리스트 단체이다 본래 이름은 연합적군이다 1970년초에 적군파는 일본 항공의 항공기를 여러대 납치하고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황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1972년), 여러 나라에서 대사관을 점거하는 등 주요 터러작전을 잇따라 감행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분쟁을 겪었고 이 파벌 싸움은 결국 1972년에 호전적인 단원들이 동료 14명을 처형하는 사태를 빚었다 적군파 조직은 아주 소규모였지만 1990년까지도 간헌적으로 계속 테러행위를 저질렀다 2001년 5월 조직을 해체하고 합법단체로 거듭날 것임을 선언했다
적군파도 주체사상강습소 김일성주의자들로 알려져 있다

 

赤軍派. 일본 신좌파 도시게릴라, 테러리스트 조직 중 가장 유명한 계열.
정식 명칭은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

1.발단

1970년의 안보투쟁을 위해 1969년 결성되었다. 일본 공산주의자 동맹(공산동)의 극좌파들이 '혁명전쟁을 위한 군대'를 외치면서 공산당 적군파로 등장한 것이 그 시작이다. "혁명에는 군사적인 행동이 필수적이며, '혁명전쟁' 수행으로 혁명을 쟁취한다"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분파다. 모체는 일본 관서지방의 "칸사이 분트"다(이들은 잠시 일본 공산주의자 동맹의 전국 지도권을 장악한 적이 있다.). 대외적으로는 1969년,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전국 전공투 집회에서 처음 등장하며 '봉기관철, 전쟁승리'를 기치로 내세웠다. 테러리즘을 통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전세계 혁명을 달성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내걸고 무차별적인 공격에 가담했다. 타 파벌과의 구분은 붉은색에 흰 글자로 '赤軍'이라 씌어진 헬멧으로 구분되었다.
비슷한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공산주의 돌격대를 형성할 것을 주장하는 전기파(戦旗派)와 대립했고, 적군파의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최우파에 속하는 반기파(叛旗派)와 정황파(情況派)와도 대립했다.
사상은 주로 마르크스주의, 볼셰비즘,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모택동 김일성주의(당군 이론과 무장단체) 였다고 한다.

마스-레닌주의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스탈린이나 모택동, 김일성주의로 분파돼 있다 

NLPDR이론은 마스-레닌주의 기반으로 모택동이나 김일성주의 이론으로 발전돼 공산주의 이론이다(일본 좌파도 소련 공산당 세력으로 친소파이다 모택동이나 김일성은 소련 붉은군대 힘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무장단체는 대부분 당군(黨軍)이론으로 NLPDR(반미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론이다  

 

2.이념과 활동

적군파의 주요이론은 일본에서의 혁명을 완수하고, 세계혁명의 사령부로 기능하기 위해 당과 군대를 형성하고 세계혁명의 최고 사령부인 혁명일본과 혁명의 적 총본산인 제국 미국 사이에서 "환태평양 혁명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소 아이러니컬한 점은 이 부분은 일제시대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범인 이시하라 간지의 "세계 최종전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여튼 그 실현을 위해 PBM전략이 수립되었다(PBM 전략은 아래 "기타" 부분에서 설명).

1969년, 오사카도쿄에서 일련의 파출소 습격을 감행하는데, 이들은 이를 "오사카 전쟁"과 "도쿄 전쟁"이라고 칭했다. 이는 일종의 도시게릴라 전술의 일환이었다. 1970년 2월 22일에는 치바현의 우체국을 털면서 M작전을 개시했다.

"적군 버전 군사혁명도 일어날 수 있다"는 발상하에, 일본도, 사제폭탄, 화염병으로 무장한 '군대'로 수상관저 습격을 목적으로 외딴 산속에서 군사훈련을 감행하다 경찰의 급습으로 습격조 전원이 체포된 것이 매스컴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첫 시작이었다. 1969년 11월 5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대보살 고개 사건"(다이보사츠 고개 사건. 大菩薩峠事件)이라고 불린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적군파는 제대로 군사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중요한 구성원들이 죄다 잡혀가는 바람에 세력이 약화되어 활동불능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5,60년대 이농으로 인해 농민 비중도 많지 않았으니...시대적 배경도 환경도 다른 일본에서 마오쩌둥식 전술을 전혀 수정없이 그대로 대입했으니...위에서 언급된 훈련 캠프의 적발도 농민의 신고로 발각된 것이다.

 

NLPDR이론은 마스-레닌주의 기반으로 모택동이나 김일성주의 이론으로 발전돼 공산주의 이론이다(일본 좌파도 소련 공산당 세력으로 친소파이다 모택동이나 김일성은 소련 붉은군대 힘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무장단체는 대부분 당군(黨軍)이론으로 NLPDR(반미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론이다  

NLPDR(반미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론이 인민민주주의(민주주의, PDR) 이론을 무시할때는 민족해방(NL)이론으로 국가사회주의(독일 노동자의 당) 히틀러 나찌즘이나 일본 군국주의(국가주의 즉 국가사회주의 이론) 이론, 북한 주체사상(김일성주의) 이론등이 될 수도 있다

 

무장단체이론 당군론(黨軍論, 무장군대)은 대부분 NL계열이나 NLPDR계열이다

 

*다이보사츠 고개 사건(大菩薩峠事件)

 정작 군대를 자칭하던 놈들이 캠프 바깥에 보초 하나 세워놓지 않았다고 한다


 3.국제근거지 마련과 요도호 사건

1970년 4월 일본도로 무장한 9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일본 항공의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하여 북한행을 요구하는 항공기 납치(일명 요도호 사건)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는 PBM 전술 중 B전술로, 국내에서 불법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해외 근거지가 필요하다는 "해외망명 항전론", "국제 근거지론"에 따른 것이다. 물론, 북한이 좋아서 갔다기보다는 "적의 적"이기 때문이고 "가까운 반미국가"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진하게도 북한에 가서 자기들 방식대로 북한을 좌경화시키고 북한의 "적군"화를 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일본을 떠나면서 남긴 이들의 유명한 말이 "우리는 내일의 좋다"

대외적으로 주목을 끌다보니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추적당했으며 초대 의장을 비롯한 대다수 간부들은 1970년초까지는 모조리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좀 있었는데, 단지 적군파의 멤버라는 이유로 경찰이 집중감시를 하고 있다가, 경범죄(거리에 침을 뱉었다던가)나 도로교통법 위반(무단횡단을 했다던가) 행위만 발각되어도 죄다 이리저리 엮어서 체포하는 일이 꽤 있었다. 쉽게 말해 주의나 가벼운 경고로 끝날 일을 최대한으로 적용해서 체포한 것이다. 이는 미죄체포(微罪체포)라는 단어를 낳게 하였다. 당시 언론과 좌파 단체들 사이에서는 "적군죄라는 죄목이 존재한다"라는 비난이 터져나왔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도한 탄압이 이들에게 순교자 이미지를 씌워주었다는 점이다.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체포를 면한 극소수 간부만이 P 전략에 따라 해외로 도피하여 '적군파 아랍 위원회(아랍 적군)'로 자칭하고 국제 테러리즘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와 합류하고 일본적군(JRA)으로 독립했다.

 

*순진하게도 북한에 가서 자기들 방식대로 북한을 좌경화시키고 북한의 "적군"화를 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적군파도 신좌파에 속하는 집단이고 해서, 반스탈린주의적 입장이었고, 북한은 아직 스탈린주의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일본 적군파는 마스-레닌주의로 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 이론과는 구분돼야 한다

북한 노동당은 창당 당시에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김일성(공산주의 계열 당군이론), 김두봉(사회민주주의 계열), 박헌영(마스-레닌 공산당 계열)등 계열이다

마스-레닌주의는 모택동과 김일성등 당군이론과 공산주의 이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론이다

북한 노동당은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정돼 이후 김일성주의 등장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선사회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사실상 변경되었고 김일성을 국가 건국자로 추대했다

일본 적군파는 마스-레닌주의 NLPDR이론이다

미국 적군파 이론은 마스-레닌주의 NLPDR 반미이론으로 모택동 노선 보다는 김일성 노선이다

 

4.연합적군으로 통합 및 아사마 산장 사건

대부분의 간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감되었고, 결국 M 작전을 지휘했던 모리 츠네오가 아직 수감되지 않은 멤버들 사이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적군파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슬로건을 신봉하는 마오주의자 조직인 '게이힌안보공투(京浜安保共鬪)'(일본 공산당(혁명 좌파) 가나가와 현 위원회)와 제휴하기 시작했다. 원래 적군파 내부에도 다양한 전술과 노선이 있었고, 무조건적인 혁명전쟁보다는 위에서 보다시피 도시 게릴라 전술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적군파와 게이힌 안보공투는 어디까지나 다른 집단이었고, 카미아카츠카 파출소 습격사건 도중 사망한 멤버의 추도집회를 합동으로 열거나, 모오카 총포점 습격사건에서 혁명좌파가 탈취한 총기를 원조받아 M 전략에 사용하는 등, 어디까지나 다른 조직간의 제휴활동 이상의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1971년 12월, 두 조직의 주류간부들이 통합하고, "연합적군 중앙위원회"를 자칭하게 되었다. '연합적군(連合赤軍)'이 결성된 것이다.

게이힌 안보공투와 합류하면서 모택동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1920년대 마오쩌둥이 제창한 게릴라 전술인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개념을 전술의 뼈대로 삼았으나 그딴게 1970년대 일본에서 먹힐리가 없잖아! 중국의 경우에는 국민당 실정으로 인해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가 심했고 상대적으로 무지한 농민들을 포섭하기도 수월했기에 유용했던 전법이었다. 그러니 그 때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1970년대 일본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도농간 빈부격차가 적은 편이였고, 정부에 대한 불만도 딱히 많지 않은 농민과 농촌을 기반삼아 거점을 삼겠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망상일뿐이었다.

연합적군은 이제 완전한 무투파로 거듭났고 그에 따라 산속의 캠프로 활동거점을 옮기게 된다. 그러나 조직으로서 구심점이 없는데다 주의주장이 다른 조직과의 연합은 극심한 내분을 불러왔고 결국 1971년 겨울과 1972년 봄에 걸쳐 산속 잠복지에서 12명의 동지들을 참혹하게 린치, 살인하는 산악 베이스 사건이 터지고 국내 조직은 점점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경찰의 추적에 쫓기던 잔당 5명이 여름 휴양지인 가루이자와 소재 아사마 산장에서 10일간 30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 무장농성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일본 방송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쾌거(?)를 올리는 동시에 일본 국내 좌파운동에 있어서는 하나의 조종(弔鐘)이 되었다. 당시 NHK가 기록한 90%에 달하는 전인미답의 시청률은 영원히 깨지지않을 신화로 남아있다. 또한 컵라면이 전국데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 경찰조직도 이 사건에 주목, 특히 LA 경찰이 SWAT를 창설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적군파의 주력부대는 궤멸했다.

이후 캠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 일부와 수감되어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후에 국외로 출국 또는 탈출하여 일본적군에 합류한다. 이 시기 이후 연합적군은 해체되고 적군파는 분열상태에 빠지게 된다.

 

5.그 이후의 적군파의 행보

(1)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프롤레타리아 혁명파)

연합적군사건 후 적군파는 격렬한 내부논쟁 끝에 분열하게 된다. 주류가 된 그룹은 수감중이었던 의장 시오미 타카야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시오미 타카야는 1970년 3월 15일에 체포되어 계속 감옥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74년 7월, 의장 시오미 타카야를 중심으로 적군파 재건을 위해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프롤레타리아 혁명파)"를 결성하게 된다. 적군파는 이렇게 미약한 명맥을 이어가는가 싶더니, 1970년대 말 시오미 타카야가 조직지도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이유로 탈당하게 된다. 그런 뒤 시오미 타카야의 독선적인 조직운영에 반발한 시마네 대학 그룹을 중심으로 주로 도쿄산야 지역의 요세바(寄せ場, 일용직 노동자 숙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활동이 적어지면서 자연히 소멸했다고 한다. 옛 멤버의 일부는 여전히 산야에서 NPO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2)일본적군

일본적군(JRA)은 1971년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무대를 옮겨 시게노부 후사코를 두목으로 하여 이스라엘 텔 아비브 공항 습격사건(1972),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1973), 싱가포르 셸 석유 습격사건(1974), 쿠웨이트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1974),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사건(1974), 콸라룸푸르 주재 일본 대사관 습격사건(1975), 다카 사건(1977) 등을 일으켰다.


최고간부중 하나였던 시게노부 후사코는 2000년 11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시게노부는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 적군파 대원 3명이 주 네덜란드 프랑스 대사관을 점거, 대사 등 11명을 인질로 잡고 프랑스에 수감된 대원을 석방시킨 1974년의 헤이그 사건 등 국제테러를 주도한 혐의로 국제수배중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JRA에 의한 테러리즘은 사라지는듯 했지만 1987년에 발생한 로마 주재 영국 대사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필두로 JRA가 관여한 테러리즘은 간간히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과 유럽 각국의 테러 방지 공조체제가 확립되고, 다른 조직과의 연계가 점점 약해지면서 일본적군의 활동은 점점 미미해졌다. 결정적으로,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결되자, 극좌사상 자체가 완전히 구식이 되어 새로운 지지자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조직의 중심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이스라엘 및 서방국가와 대립하는 각국의 반정부 조직들과의 자금협력과 활동제휴가 끊기게 되자, 1990년대부터는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결국 일본적군은 2001년 4월, 최고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해산을 선언, 이후 정식으로 해산했다.


이후 일본적군의 전 리더들이 정부보조금을 받고 생활한다는 소식이나, 일본적군의 멤버 중 한명인 야마모토 마리코가 도쿄 이타바시구의 슈퍼마켓에서 오징어 2마리와 12,000엔을 훔치다 구속된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 적군파 이론은 마스-레닌주의 NLPDR이론이다

극렬 좌파 민족주의 운동 마스-레닌주의 NLPDR이론 모택동, 김일성 그룹 중 반미이론은 모택동보다 김일성 그룹이다

일본 적군파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 내부 극렬 좌파 민족주의 운동 마스-레닌주의 NLPDR이론 김일성 그룹(반미그룹)을 제거해야 한다 

 

*이스라엘 텔 아비브 공항 습격사건(1972)

적군파 조직원 4명이 공항에서 자동소총과 수류탄을 갈겨 민간인 27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과 일본 사이의 항공 직항노선이 없어졌다. 그리고 2011년이 된 현재에도 이 조치는 유효하다 

 

6.평가

이 적군파의 테러활동때문에 일본의 진보계열 정치단체들이 패망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참고로 적군파가 활약(?)한 1970년대는 일본에서 공산당의 세가 가장 강력했을 때(...)였고 동시에 지자체 선거에서도 진보진영이 가장 많은 세를 확보하고 있었을 때다. 정작 사회당은 지리멸렬했지만...] 


하지만 일본 진보정당이 패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일본 사회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물론 적군파때문에 일본의 좌익운동/학생운동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뭐 좀 하려고만 하면 "과격파 아니냐", "과격노선 아니냐", "민심이 이반할지도 모른다"는 명목으로 자기규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진보정당 패망이 적군파 어그로 이후인지, 아니면 1990년대 사회당 지지율 하락부터인지의 문제는 사실 진보정치운동의 가장 중요한 논점 중 하나다. 적군파때문이라고 하면 극좌적 모험주의가 문제인 것이고, 사회당 몰락은 이와는 반대로 수정주의와 타협으로 인한 변별력 및 동력상실이 문제가 된 것이디. 따라서 이 두 의견은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서는 이 논쟁에서 답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게 낫다

 

일본 사회당이나 진보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노선으로 당 정책을 변경해야 한다

그리고 극렬 좌파 민족주의 노선 NLPDR 모택동, 김일성 그룹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사정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할때 모택동이나 김일성이론이 필요없고 서구식 진보정당(사회민주당이나 민주진보당등)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전공투 시대에 파생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일본적군, 연합적군을 뭉뚱그려서 적군파로 칭하는데, 이 단체들이 사실상 어떻게든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다른 단체다. 적군파가 모체가 되었고 여기서 나와서 따로 국제혁명전쟁을 수행하려는 집단이 일본적군이고, 적군파의 군사조직인 중앙군과 혁명좌파의 인민혁명군이 통합된 것이 연합적군인 것. 일본에서 적군파를 이야기하면 대부분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를 지칭하는 것이고, 나머지 두 단체는 따로 분류한다. 아마도 요도호 사건의 주범이 적군파였기 때문에, 이후 파생된 조직들까지 뭉뚱그려서 적군파라고 칭하는듯 하다

 

대부분 좌파 무장단체는 마스-레닌주의 NLPDR단체이다

본래 공산주의는 민족주의 단체가 아니다

그러나 스탈린이후 공산주의 무장단체는   마스-레닌주의 NLPDR단체이다

 

일본 김일성 추종 좌파정치인이나 조종련은 김일성주의보다 북한정부 돈줄이나 원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이나 김일성은 소련 붉은군대 힘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7.기타

(1)PBM 작전

꼴에 군대라고 "PBM 작전"이라는 작전계획도 세웠다. P(페가수스) 작전은 요인을 납치해서 인질로 잡은뒤 감옥에 간 의장 시오미 타카야를 도로 빼온후 마오쩌둥 치하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을 혁명거점으로 삼는다는 계획이고, B(브롱코) 작전은 미국,일본의 중요 정치적 거점을 목표로 삼고 점거하는 동시다발적 테러계획, 마지막으로 M(마피아) 작전은 혁명자금 조달을 위한 은행강도질. P,B 작전은 현실성이 없어서 그냥 구상으로만 끝났고,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작전은 M 작전뿐이었다. 1971년 2월 22일부터 1971년 7월 23일까지 총 7번을 털었으나 나중에 연합적군 간부들이 체포되어 금액의 90%를 토해내야 했다.


 

적군파와 연합하여 연합적군을 만들게 되는 카나가와 현의 게이힌 안보공투(혁명좌파)가 무기조달을 위해 토치키 현에서 민간 총포점을 턴 적이 있었는데(모오카 총포점 습격사건, 여기서 턴 엽총 몇자루가 나중에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쓰인다.), 다들 알다시피 이건 이 두 집단이 숭배해마지않는 마오쩌둥의 "인민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짓이다. 그래서 적군파 일원 하나가 이에 태클을 걸었더니 후에 아사마 산장 사건의 범인들중 한 명인 사카구치 히로시가 "총포점은 경찰권력과 일체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포점은 권력의 말단기관으로 친다."라며 되도 않는 개드립을 쳤다.

 

(2)미디어에서의 적군파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 중 이글 워치의 최종 미션에서는 "붉은 태양 여단(Red Sun Brigade)" 이라는 이름의 적군파 분파 조직이 적으로 등장한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풀 메탈 패닉쿠르츠 웨버가 부모님을 적군파의 테러로 잃고 소년병이 된다는 설정이다. 복수에는 성공했다. 자기 손이 아니긴 하지만.

핑크무비 감독 와카마츠 코지는 1971년 적군 - PFLP 세계전쟁선언(赤軍 - PFLP 世界戦争宣言)이라는 영화를 통해 일본적군을 알렸고, 2007년에는 "경찰주장 일변도의 보도가 아닌 그들의 내면을 조명하기 위해" 실록 연합적군을 촬영,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전세계적인 일대 이슈가 되었다. 애초부터 와카마츠 코지 자체가 당시 신좌파 젊은이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감독이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좌파 운동권을 위해 만든 영화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연합적군이나 일본적군의 몇몇 구성원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와카마츠와 친분이 있던 영화감독 아다치 마사오는 실제로 일본적군의 멤버이기도 했다.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고 했다 - 시게노부 후사코가 일본으로 귀국, 체포된 후 썼던 책으로, 딸인 시게노부 마리와 팔레스타인에서의 활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북사건과 항공기불법탈취(Hijacking)
1.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치사건 개요(1970년 4월 3일)
1970년 3월 31일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탑승객 129명을 태우고 후쿠오카로 가던 일본 항공 소속 여객기 요도호가 일본도등으로 무장한 적군파 요원 9명에게 공중 납치되어 김포국제공항에서 불시착했다
납치범들은 승객을 인질로 북한행을 요구,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일본운수성 정무차관 <야마무라 신지로>를 인질로 잡고 1970년 4월 3일 북한으로 넘어갔다
-일본정부측 일본인 납치 배후 북한정부 책임자 처벌요구, 일본 항공기 요도호 납치범의 무조건 인도와 북핵 6자회담 조기 복귀등 요구
2.항공기 불법탈취(Hijacking)
항공기불법탈취(航空機不法奪取, Hijacking)은 항공기를 불법 탈취하여 운항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이다 보통 하이재킹(Hijacking)이라고 한다
항공기 자체의 강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항공기의 운항을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에 따라 망명형(亡命型), 아랍 게릴라나 일본적군파에 의한 정치활동형, 무목적(無目的) 충동적인 것으로 미국에 많은 이상형, 불황의 상황에서 몸값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불황형등으로 나눌 수 있다
1930년 페루 혁명파의 국내선 여객시 탈취사건이 최초이며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사건은 1948년 6월 마카오-홍콩간 상공에서 발생한 캐세이퍼시픽 항공 납치사건이다 이 사건은 범임을 체포하기 위한 총격전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1960년대 이후 사고가 빈발하였는데 당시 친소(親蘇)적이었던 쿠바를 목적지로 하는 항공기를 대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많았다
1960년대 말 이후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사건, 1970년대 3월 일본적군파 9명이 나고야 상공에서 일본 여객기를 납치하여 북한 평양으로 망명한 요도호사건등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목적의 불법탈취사건이 많아졌다
이 시기부터 사건이 급증하기 시작 많은 해는 100건이 넘어 항공회사에 큰 위협이 되었으나 방지대책이 강화되면서 점차 줄어들고 있다 사건방지를 위해서 경찰의 단속체제 강화, 위험물 반입금지, 국제협력등의 방법이 동원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경호인이나 경관의 순찰과 탑승, 항공기내 조종실의 보안, 금속성 무기 탐지장치와 X선투시 TV활용, 승객과 수하물에 대한 검사등이 행해지고 있다
-1930년 페루 혁명파의 국내선 여객기 탈취사건(최초)
-1948년 6월 캐세이퍼시픽 항공기 납치사건
-1960년말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사건
-1970년4월 3일 일본적군파 9명에 의한 요도호 사건
-2000년 9월 11일 알카에다에 의한 비행기 납치와 뉴욕참사

(3)요도호(號) 사건 자료
ㄱ.실종 두 남성 <속아서 북한에> 요도호 전(前) 아내가 최근수기
-아사히(朝日) 2002년 6월 22일(토요일)- 
<요도호> 하이재크 사건 멤버의 아내였던 八尾惠(팔미혜) 전 스넥주인(46세)이 최근 발표하는 수기에서 1980년 유럽에서 실종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입국했다고 보여지는 홋카이도 출신과 쿠마모토현 출신의 2명의 남성에 대해 <속았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쓰고 있었다 2명의 실종경위에 불명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경찰청은 납치사건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수기는 <사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2002년 6월 26일에 분게이슌쥬에서 발매된다
그 수기에서 전(前) 아내는 북한에 있었을 무렵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로서 2명을 언급 요도호 멤버의 아내들에 이끌려 1개월 정도 여행할 생각으로 북한에 왔지만 <북한이 쉽게 돌려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냈다> <속았다며 노발대발해. 폭행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 프랑스의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던 당시 25세의 남성을 <획득활동>으로서 북한에 데리고 가려했던 것을 밝혔다 도중에 임무를 떠났기 때문에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前) 아내는 금년 3월 코베시 아리모토 케이코씨 납치에 관여했고 토쿄 지방법원에서 증언했다
ㄴ.대남공작 
방중(訪中) 중인 일중우호의원연맹(日中友好議員聯盟)은 8일,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회담에서 호금도(胡錦濤) 국가주석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서 <해결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북정구간 교섭에서 납치피해자의 가족 8명의 조기 귀국에 대해서 해결을 향한 진전이 있었다는 정보를 북한 측으로부터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ㄷ.김정일의 대남공작-3호청사
일본인 납치와 그리고 남한 주민들을 납치하여 간첩교육을 시켜서 공작원으로 파견하는 곳이 바로 북한정부 3호청사로 알려져왔다
<3호 청사>란 북한정부 건국이래 지배해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대남공작부서를 총칭한다 <3호 청사>는 통일전선부(범민련, 범청련등 조직), 대외정보조사부,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작전부라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네개의 부(部)로 되어 있다
납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납치대상은 일본인을 비롯해 한국인, 아랍인, 중국인, 유럽인등이 다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된 후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의 <주체철학>을 교육 교재로 활용할 만큼 김정일가 <3호 청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납치목적은 남한등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술, 생활습관, 언어습관등을 가르쳐야 하고 공작원이 현지화 양성체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은 일본에 가면 일본인, 중국에 가면 중국인, 캄보디아에 가면 캄보디아인이 되어 언어. 습관. 직업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현지인과 동화될 수만 있다면 공작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