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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살해지시 혐의 북아일랜드 '게리 애덤스' 풀려나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살해지시 혐의 북아일랜드 '게리 애덤스' 풀려나

CIA Bear 허관(許灌) 2014. 5. 5. 12:54

 

42년 전 10명의 아이를 둔 어머니를 '영국 측 첩자'라면서 살해하란 지시를 내린 혐의로 구금된 북아일랜드 정당 신페인 게리 애덤스(65) 대표가 4일 풀려났다.

애덤스 대표는 이날 구금 닷새 만에 벨파스트 서쪽 앤트림 지역 경찰취조실을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한때 분노한 개신교 시위자들의 제지를 받았다.

익명을 요구한 경찰 간부는 애덤스 대표가 석방됐지만 관련 증거가 검찰에 넘어가 나중에 기소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달 30일 구금한 애덤스 대표를 이날 석방하거나 구금을 연장해야 했다. 경찰은 지난 2일 한차례 구금을 연장한 바 있다.

 

 

30일 BBC, AP 등에 따르면 게리 애덤스(65) 신페인당 대표는 지난 1970년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일으킨 살인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이날 저녁 인근 경찰서에 자진 출석, 곧바로 경찰에 체포됐다. 애덤스는 1972년 지휘관으로 IRA 특수부대를 이끌면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살던 여성 진 매콘빌(당시 38세)의 살인 사건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IRA는 매콘빌을 영국 측 첩자로 몰아 납치, 살해한 후 암매장했으나 이후 2006년 북아일랜드 당국의 조사 결과 매콘빌은 영국에서 보낸 스파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애덤스는 체포 직전 발표한 성명을 통해 혐의를 전면 부인한다고 밝혔다.

애덤스는 북아일랜드와 영국의 평화협상을 이끌며 분쟁 종식에 기여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그의 체포 및 처벌 여부가 영국과 북아일랜드 정세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수 있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애덤스는 영국 의회의 하원의원이었다가 2011년 의원직을 사퇴하고 북아일랜드 총선에 진출, 현재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an McConville, a widowed mother of 10, was abducted and murdered by the IRA in December 1972

 

북아일랜드 유력 정당의 당수가 체포됐다는 소식도 관심거리였는데, 무슨 일입니까?

기자) 네, 신페인당의 게리 애덤스 대표가 1970년대에 벌어진 아일랜드공화국군, IRA가 벌인 살인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지난 달 30일 체포됐습니다. 이 소식, 많은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 조회 수가 많은 기사였습니다.

진행자) 이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 소개해 주시죠.

기자) 네, IRA는 1972년 아이 10명의 어머니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살던 진 맥콘빌을 '영국 측 첩자'라면서 납치해 사살하고 시신은 해변에 암매장했습니다. 애덤스 대표는 사건 당시 '정체불명'이라는 IRA 특수부대를 이끌면서 맥콘빌의 납치·살해·암매장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In October 1984, Margaret Thatcher survived a bomb attack on the hotel where she was staying.
Five people were killed and more than 30 others injured in the explosion, which was carried out by the Irish Republican Army (IRA).
We hear from a government official in the hotel at the time.
Photo: The Grand Hotel in Brighton after the IRA bombing

 

 

*아일랜드 공화국군 ( IRA, Irish  Republican Army)

정식 명칭은 아일랜드 공화국군. 이름 그대로 아일랜드에서 결성된 무장단체다. 1910년대 말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든 독립군으로 시작해, 각 시기별로 IRA의 이름을 쓴 수많은 단체가 있었으나, 다른 설명이 없이 언급할 경우의 IRA는 1969년부터 존재해온 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 즉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라는 단체를 일컫는다. 1970, 80년대에는 많은 테러를 행했으나 현재는 온건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2000년도에 들어서 무장투쟁을 포기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IRA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실패 이후 마이클 콜린스, 리처드 멀카니 등 아일랜드 독립군의 잔여 세력이 재규합하여 결성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1919년에서 1921년까지 영국군과 싸우다가 결국 아일랜드 독립을 이루어냈으나, 1922년 영국-아일랜드 협정에서 영국계 주민이 다수인 얼스터 지방은 영국 내에 잔류한다는 조건이 문제시되어 이에 대한 찬성, 반대 입장으로 갈라져 IRA 또한 양분되었다. 이후 협정에 찬성한 쪽은 현대 아일랜드 국방군의 전신이 되었고, 반협정 IRA (Anti-Treaty IRA)라고 불린 반대파는 여전히 영국은 물론 아일랜드 공화국 정부와도 싸우며 무장투쟁을 계속 해오다가 결국 50~60년대에 들어서는 말라 죽어가는 사멸 직전의 조직이 되었다.


 

다 죽어가던 IRA가 다시 힘을 키워 20세기 후반 서유럽 최대의 무장투쟁의 핵심에 있는 단체가 된 것은,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작과 IRA의 분열 때문이었다.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에서는 다시 가톨릭계 주민들과 영국계 성공회 주민들의 분쟁이 터졌는데, 말이 분쟁이었지 사실상 수적으로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인 프로테스탄트(혹은 성공회) 영국계 주민들의 일방적인 가톨릭 박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IRA는 공식적으로 전통적인 가톨릭 민족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세력 자체가 너무도 약해져서 효과적으로 가톨릭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발한 IRA 내부의 세력들이 IRA를 탈퇴하고 PIRA(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를 새우고 잔류한 IRA는 스스로를 OIRA(Official IRA : OIRA)로 부름으로서 IRA는 양분되었다.


 

초기에는 IRA의 그나마 남아있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OIRA가 더 세력이 강하였으나, OIRA는 무장투쟁을 포기한 반면 PIRA는 가열찬 투쟁을 벌여 점점 더 가톨릭 주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2년 영국군 공수부대가 데리 시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13명의 민간인이 죽은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PIRA는 대대적인 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1970년대면 양차 대전이 끝난지도 4반세기가 흘렀고 1960년대의 각종 시위들도 끝물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선진국 중에 선진국이란 썩어도 준치라는 영국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만 해도 북아일랜드가톨릭 주민들은 영국을 적이 아니라 개신교 주민들의 박해에서 보호해 줄 정부의 보호자이자 중재자로 보았으나, 이 날을 계기로 아일랜드에서는 영국 자체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운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이 날부터 IRA는 줄기차게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영국군프로테스탄트계 무장세력을 상대로 나름 의로운, 또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IRA는 1979년 영국 왕족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1]폭탄으로 끔살해버렸는데, 요트에 탄 채로 수행원들과 형체도 없이 박살났다. IRA를 지지하던 현지 언론은 "영국 왕족도 바다 위에서 죽으니까 한낱 물고기이 되었을 뿐이다."라고 찬양했던 적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잉글랜드[2]의 정부요인을 노린 테러를 행하면서 영국군에 대한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해마다 영국아일랜드에 쏟아붓는 인명과 예산은 날로 불어났고 그에 비례해서 IRA의 활동도 더욱 과격해지기 마련이었다.[3]


 

그러나 문제는 영국군만이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민간인들까지 말려들어서 피해를 입는 일이 늘어나는 데에 있었다. 이를 구실로 내부적으로도 IRA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화해 무드도 불겠다, 이래저래 테러활동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1990년대 들어 신 페인당도 강경노선을 전환해서 테러보다 민주적인 정치적 투쟁으로 아일랜드 통일을 달성하겠다고 점차 노선을 바꾸게 된다[4]. 결국 이들은 1998년 아일랜드 공화국 정부, 영국 정부와의 3자 협상으로 굿 프라이데이 조약을 체결했으며, 2005년에는 공식적으로 무장투쟁을 철회하고 비축한 무기들을 파기함으로서 이 아니라 선거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 말이 좋아 화해지, 20년전 당시만 해도 이 문제는 거의 발칸반도급 문제로 답이 없다고 취급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소수의 과격파는 무장해제에 반대하며 지금까지도 산발적으로 테러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런 무장투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이후 레알 리얼(REAL) IRA라고 지칭되고 있다. 그리고 2012년 7월 26일, 이런 잔존 분파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IRA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영국북아일랜드에서 철수해야만 아일랜드의 자유를 얻기 위한 무장투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도발과 분쟁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영국'이라고 주장하였다.


 

북아일랜드에서는 독립군이자 애국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 여가수 시네드 오코너를 비롯한 이들은 틈만 나면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그렇게 따지자면 잉글랜드는 민간인 학살과 고문을 저지른 테러 유발국가 아니던가?'라면서 칭송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 정부나 정부관계처를 공격하는 것 이외에도 경비가 느슨한 민간인, 민간시설을 노리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RIRA는 1998년 8월 15일 민간시설에 폭탄을 장치하여 약 30여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전형적인 테러리스트의 작태를 보였다.


 

이러한 막장성은 RIRA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이전부터 그러한 경향은 있었다. 원래 RIRA가 분열되기 전인 PIRA 시절부터 활동자금을 얻기 위하여 밀수나 협박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고, 그 희생자에는 외국인은 물론이고 정치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포인 아일랜드인까지 포함되었다. 원류가 동일함에도 무장투쟁을 포기했다는 이유만으로 OIRA도 그 공격대상이 된 시기가 있었다.


 

또한 이들이 자신들의 테러활동에 불법으로 입수, 개조한 미국산, 일본산 무기를 사용한 것 때문에 양국의 IRA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이들이 사용한 소총이 면허생산된 AR-18이었다는 점때문에 무기수출에 대해서 자체적인 규제를 하게 되었고 AR-18은 과부제조기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테러활동만을 폭력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테러활동의 근원은 바로 영국식민 지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IRA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개신교 측에서 조직한 반IRA 폭력단체(예 : UDA(얼스터 방위협회), UVF(얼스터 의용군))또한 극성을 부렸다. 특히 UVF가 1974년에 벌인 더블린 폭탄 테러에서는 약 33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들이 죽인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 또한 수백명에 달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IRA 측은 적어도 가능하다면 민간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사전 경고를 하거나, 테러의 목표도 알반적으로는 개신교 신자 친영파 민간인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왕립 경찰단, 영국군 등의 '교전 상대'를 대상으로 설정했지만, UVF와 UDA 등의 친영파 계열의 무장 단체들은 교전 상대와 일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가톨릭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장 희생자 비율만 봐도 IRA 측은 군대나 경찰, 개신교계 민병대 등이 70%, 민간인이 30% 정도인 반면 개신교계 무장단체는 그 비율이 정반대이다. 물론 IRA의 테러행위를 전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IRA만을 악의 근원으로 몰아세우는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결국 따지고 보면 80년대까지도 주거, 취업, 참정권에서 악질적으로 가톨릭계를 차별했던 스토어몬트의 개신교가 지배하던 북아일랜드 의회와 이를 철저히 방임했던 런던 영국 정부에 있다. 놀랍게도 북아일랜드는 80년대 까지도 1인 1표의 보통 선거제가 아니라 보유한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의 원칙에 어긋나는 제한선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니 당연히 경제력에서 게임이 안되는 가톨릭계가 정치적으로도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러한 차별에 항거해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과 당시 유럽을 휩쓸던 68 혁명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으나, 피의 일요일 사태로 인하여 '평화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무력 충돌이 본격화 된 것이다.

 

 

 

                                                                  아일랜드 공화국군 ( IRA, Irish  Republican Army)  대원들 모습

Gerry Adams: Profile of Sinn Féin leader

 

 Gerry Adams spoke to the media just hours before he presented himself voluntarily to the Police Service of Northern Ireland to be questioned about the 1972 murder of Belfast woman Jean McConville

Gerry Adams has led Sinn Féin, Northern Ireland second biggest political party, for the past 31 years.

The Belfast man is one of the most recognisable and controversial figures in Irish politics and his arrest has captured worldwide attention.

To some he is hailed as a peacemaker, for leading the republican movement away from its long, violent campaign towards peaceful and democratic means.

To others he is a hate figure who publicly justified IRA murders.

For years, Mr Adams has consistently denied that he was ever a member of the Irish Republican Army (IRA).

The paramilitary group is believed to be responsible for about 1,700 deaths during more than 30 years of violence, mostly in Northern Ireland, that became known as the Troubles.

One of those deaths was that of Jean McConville, a widowed mother-of-10 who was abducted by the IRA in 1972, murdered and secretly buried.

On Wednesday, just hours before his arrest over Mrs McConville's murder, Mr Adams said he would tell the Police Service of Northern Ireland that he was "innocent totally of any part in the abduction, the killing or the burial of Jean McConville".

Mr Adams added: "I never will disassociate myself from the IRA. That doesn't mean that I agree with everything that they did because I don't, particularly in the case of Jean McConville, which I think was wrong - a grave injustice to her and her family. But thankfully, thankfully the war is over."

Gerry Adams has consistently denied that he was ever a member of the IRA but said he will never "disassociate" himself from the organisation

 

He was born in October 1948 in Ballymurphy, west Belfast, and both of his parents came from families that had been active in armed republicanism.

His father, Gerry senior, had been shot while taking part in an IRA attack on a police patrol in 1942 and was subsequently imprisoned.

Influenced by his father, the young Adams became an active republican while still a teenager.

He worked as a barman at the Duke of York pub in Belfast where he was fascinated by the political gossip traded among the journalists and lawyers who frequented the bar.

However, as the civil rights movement gathered pace in the late 1960s, the young Adams did not spend long pulling pints.

Soon he was out on the streets, involved in the protests of the time, and in 1972 he was interned - imprisoned without charge - under the controversial Special Powers Art.

According to his own account, he was purely a political activist, but that same year, the IRA leadership insisted that the then 24-year-old be released from internment to take part in ceasefire talks with the British government.

 

                                            Gerry Adams pictured with IRA man Brendan Hughes in the Maze prison in 1983 

The talks failed and were followed by the Bloody Friday murders, when the IRA detonated at least 20 bombs across Belfast in one day, killing nine people and injuring 130.

Security sources believed Gerry Adams was a senior IRA commander at the time, but interviewed after the organisation's formal apology 30 years on, he adamantly denied this.

In 1977, he was acquitted of IRA membership.

At the height of the 1981 IRA hunger strikes, he played a key role in the Fermanagh by-election in which Bobby Sands became an MP a month before his death.

Two years later Gerry Adams became MP for West Belfast on an absentionist platform, meaning he would represent the constituency but refuse to take his seat in the House of Commons.

Also in 1983, he replaced Ruairí Ó Bradaigh as president of Sinn Féin. Three years later, he dropped Sinn Féin's policy of refusing to sit in the Irish parliament in Dublin.

Despite the tentative moves towards democracy, the IRA's campaign of violence continued and Sinn Féin were considered political pariahs.

 

                           Gerry Adams played a key role in leading republicans away from an armed campaign towards democratic republicanism

 

In the late 1980s, Gerry Adams entered secret peace talks with John Hume, the leader of the Sinn Féin's more moderate political rivals, the Social Democratic and Labour Party (SDLP).

The Hume Adams negotiations helped to bring Sinn Féin in from the political wilderness and paved the way for the peace process.

But treading a line between politics and violence was risky.

In 1984, Gerry Adams survived a gun attack by loyalist paramilitaries, the Ulster Freedom Fighters, in Belfast city centre. He and three companions were wounded but managed to drive to the Royal Victoria Hospital for treatment.

A second murder attempt was made at Milltown cemetery, west Belfast, in 1988 at a funeral for three IRA members. Three mourners were killed but loyalist paramilitary Michael Stone said his real targets were Adams and Martin McGuinness.

The 1993 Shankill bombing confirmed the tightrope Gerry Adams had to walk in order to keep hardline republicans on board with his political project.

He expressed regret for the bombing that killed nine people and one of the bombers, but did not condemn it.

Mr Adams then carried the coffin of the IRA man Thomas Begley, who died when the bomb exploded prematurely.

 

                                                  Gerry Adams outraged unionists when he carried the coffin of IRA bomber Thomas Begley in 1993

But the Hume-Adams talks were beginning to bear fruit. President Bill Clinton withstood pressure from London to grant Gerry Adams a 48-hour visa for a peace conference in New York. The visit attracted worldwide attention and Adams used it as justification to press on with politics.

The Hume-Adams process eventually delivered the 1994 IRA ceasefire that ultimately provided the relatively peaceful backdrop against which the Good Friday Agreement was brokered.

In 1998, 90% of the party backed its president in taking seats in the new Northern Ireland Assembly at Stormont - a remarkable piece of political management given Sinn Féin's "no return to Stormont" slogan in the 1997 general election campaign.

Mr Adams stayed out of the Stormont power-sharing executive, letting Martin McGuinness take a ministerial post.

When the power-sharing deal collapsed in 2003, Gerry Adams became a key player in the government's attempts to broker a new agreement between Sinn Féin and their one-time enemies, the Democratic Unionist Party.

The negotiations foundered at the end of 2004, but in October 2006 both Mr Adams and DUP leader Mr Paisley indicated their support for the St Andrews Agreement, drawn up after intensive talks in Scotland.

The deal led to a once-thinkable situation, a Stormont coalition led by the DUP and Sinn Féin.

A key element of the deal was Sinn Féin support for the police, whom the IRA had once deemed "legitimate targets".

It was unthinkable in the days of the Troubles, but persuading Irish republicans to embrace policing was another step on Adams' personal and political journey between war and peace.

 

                   Gerry Adams helped to negotiate the St Andrews Agreement, leading to a once unthinkable political deal involving the DUP and Sinn Féin

In January 2011, Gerry Adams formally resigned as West Belfast MP in order to run for election in the Republic of Ireland.

The move was believed to be in response to fears that the party was too narrowly focused on Northern Ireland and needed to boost its all-island strategy.

The following month, he was elected as a Teachta Dála (member of the Irish Parliament), representing the border constituency of Louth and East Meath.

However, closer to home, personal turmoil was unfolding in the Adams family.

His brother, Liam Adams, was publically accused of rape and child sexual abuse. The allegations were made by Liam Adams' adult daughter Aine, who waived her right to anonymity in a bid to bring her father to justice.

Gerry Adams publicly named his own father as a child sex abuser as he spoke about the impact the allegations had made on his whole family.

He then became embroiled in the police investigation, when it emerged his niece had told him she had been abused several years earlier.

The Sinn Féin president said his brother had confessed the abuse to him in 2000 and added that he made his first report to the police about the allegations in 2007, shortly after his party voted to accept the Police Service of Northern Ireland.

Last November, Liam Adams was jailed for 16 years for raping and abusing his daughter over a six-year period.

Allegations about Gerry Adams' own past had never gone away, and the case of Jean McConville continues to haunt the entire republican movement.

The Sinn Féin leader has condemned her murder and consistently denies any involvement in the 37-year-old widow's d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