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12일 마감된 총선거의 출구조사에서 야당의 승리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렌드라 모디 총리 후보가 이끄는 인도국민당(BJP)이 승리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는 확실치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인도에서는 과거에도 출구조사 결과가 실제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출구조사를 통해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도 집권여당인 국민회의당(INC)은 고위층 인사들의 부패 의혹과 높은 물가인상률, 지지부진한 경제 상황 등에도 불구하고 십여년동안 권력을 탄탄히 유지해 왔습니다.
한편 인도에서는 지난 5주간에 걸친 총선거 일정이 이날 북부 우타 프라데시 주와 동부의 서벵갈, 그리고 비하르 주를 끝으로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인도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선거에 전체 유권자의 66%인 8억1천500만명이 참여했다고 밝혔습니다. 최종 선거 결과는 오는 16일쯤 나올 전망입니다.
VOA 뉴스

Narendra Modi is seen as a dynamic and efficient leader
Narendra Modi, the prime ministerial candidate of India's main opposition Bharatiya Janata Party (BJP) for the 2014 general elections, is seen as India's most divisive politician - loved and loathed in equal measure
내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인도 제1야당인 BJP(인도인민당)는 나렌드라 모디(구자라트 주 수상)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고 합니다.
- 인도인민당(BJP)이란? Bharatiya Janata Party 라고 불리는 인도인민당은 1980년에 세워진 인도의 정당 중 하나로 가장 큰 야당입니다. 자신들을 인도의 힌두 다수의 사회 종교적 문화적 가치, 보수주의, 그리고 국가 안보를 옹호하는 대변자라고 주장하고 있죠. 대부분 도시지역 중산층, 사업가나 상인계층, 그리고 종교 사회적 보수 계층을 지지층으로 가지고 있답니다.
보잘것 없는 출신인 나렌드라 모디, 그는 누구인가?
모디는 1950년 구자라트 주에서 식료품상을 하는 가난한 하층 카스트 집안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신앙심이 깊어서 힌두 수도자를 꿈꾸었다고 하네요. 10대 후반 아메다바드의 버스정류장 짜이(홍차에 우유를 넣은 인도의 차(茶)랍니다.) 집에서 형을 도와서 짜이 장사를 했습니다. 이 때 단골이었던 힌두국수주의 단체인 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a, 민족의용단) 간부의 영향을 받아 하부청년조직에 입단했습니다.
얼마 후 모디는 RSS의 상근선전원으로 임명되고 구자라트 대학교에서 정치학석사를 받았습니다. 모디의 정치적 관점은 이 당시 형성되고 현재 모디가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것도 이때의 경험 덕택이랍니다.
정치인으로서의 모디
1987년 RSS는 BJP 구자라트 주 본부에 모디를 파견해 당원의 충원과 각종 선거의 후보자 선정 작업을 담당하는 조직담당 비서로 일하게 하는데 이때부터가 정치인생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모디는 장래가 보장되는 선출직에 진출하라는 당의 권유를 거절하고 선거운동의 전략가로 남았습니다. 1995년 주의회 선거에서 모디는 힌두들의 표를 집결시켜 BJP를 압승하게 하여 떠오르는 스타가 됩니다.
그러나 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획득한 구자라트 BJP는 권력투쟁에 휩싸여 분당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 혼란의 중심에 모디가 있었습니다. 델리 BJP 중앙본부는 이 사태 수습을 위해 모디를 그의 정치적 기반에서 떼어 놓는 징계로 델리 근처의 4개주를 담당하는 총괄비서로 임명해 전출시켰습니다. 하지만 모디는 이 위기를 이용해 중앙본부에서 기회로 삼아 훗날 인도 수상이 되는 바즈페이에게 접근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RSS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1998년 수상이 된 바즈페이는 모디를 전국 조직담당 비서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징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BJP와 RSS를 연결하는 중요 역할의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때부터 모디는 대중정치인으로의 시작을 했습니다
구자라트 주 수상 ‘모디’
2001년 구자라트의 BJP는 겨우 정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분은 계속되는 상태로 두 차례의 보궐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하는 등 위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벗어날 새로운 수상으로 모디가 지명되었지만 모디는 자신을 단지 앞으로 다가올 주 의회 선거를 위한 구원투수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디는 그 후로 10년 이상 그 직위를 연임하게 되죠.
모디의 취임을 가장 기뻐한 건 RSS였는데, 바닥부터 시작하여 인물이 주 수상으로 출세한, 개천에서 용이 난 모디의 인생 스토리는 인도 사회의 구조적인 폐쇄성으로 인해 계층 이동이 매우 힘든 현실 속에서 인도의 청년들이 닮고자 하는 롤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자라트의 원로 정치인들은 그를 낙하산이라 취급하며 좋아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그는 반(反)정치인, 친(親)관료의 양면전술을 선택하였습니다. 관료들과 많은 회의를 열어 행정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려 하였고 관료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에게 배우려는 자세를 취했죠. 하지만 정치인들로 구성된 각료회의에서는 자신이 델리 중앙본부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관료들과의 회의와는 달리 권위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혹자는 이런 양면적인 태도가 관계설정이 복잡한 정치인보다는 상하관계가 분명한 관료들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 주정부를 장악하려 했다는 정치공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한답니다.
모디의 수상생활 위기 ‘고드라 사건’
모디가 주 수상으로 적응하고 있을 즈음인 2002년 2월 27일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고드라 사건'이죠
- 고드라(Godhra)란? 구자라트 주 동부에 위치한 인구 약 12만 명의 작은 도시로 열차들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머물며 물 등을 공급받는 간이역이 있는 곳.
인도는 영국 식민지 시절 분할 통치로 인해서 무슬림과 힌두들의 사이가 굉장히 악화되어 있었습니다.(이는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이 나눠지는 원인이 됩니다.) 특히 힌두의 성지라고 알려진 아요디아(Ayodhya)를 순례하는 힌두들과 고드라 역의 무슬림 행상인들 사이에 잦은 충돌이 있어왔습니다. 사건 당일 열차에는 아요디아의 이슬람 사원 자리에 1992년 파괴된 힌두교 사원을 복원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극우 힌두교 신도들이 타고 있었는데 무슬림 소녀 한명이 열차 승객인 힌두들에게 납치되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격노한 무슬림들이 열차를 고드라 정거장 주변에 정차시킨 뒤 칼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차량에 난입하여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어린이 15명을 포함 최소 57명이 사망했습니다.
사건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모디는 뉴턴의 제 3법칙인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인용하였고, 이 말은 무슬림에 대한 보복을 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기자회견 직후부터 구자라트 전역에서 무슬림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1개월 이상 계속된 이 폭동에서 1,200명 이상의 사망, 실종자가 발생했고 약 14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폭동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4월 모디는 BJP 전국회의에서 무슬림에 대한 공개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어 참석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극우 힌두와 BJP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9개월 후 실시된 구자라트 주 의회 선거의 선거운동 기간 중 모디는 ‘구자라트의 자존심’이라는 선거구호를 내걸고, 반 무슬림을 내세워 BJP는 주의회 의석의 2/3를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구자라트 내에서는 모디에 대한 환호성이 높지만 국내와 국외의 비난도 강해졌습니다. 모디가 학살의 배후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것은 2004년 연방의회선거에서 BJP가 패배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모디에 대한 비자발급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국제여론도 악화가 되고 있었습니다.
변신의 모디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모디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포장된 이미지를 버리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정치인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방법으로 부패척결에 나서 이미지 쇄신을 꾀합니다. 구자라트의 관료사회도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부패 수준이 높았지만 경찰력을 동원한 방법은 효과적이었고, 구자라트 주의 부패를 대폭 줄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모디 스스로도 관리를 철저히 하여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썩어가는 인도 정치판에 지친 국민들이 더욱 모디를 좋아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모디가 인기가 많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구자라트 모델’을 통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기 때문입니다. 구자라트를 인도 최고의 면화 생산지로 만들고 전력요금체제를 개선하여 전력부족 문제를 해결하였죠. 또한 열악하던 도로 인프라를 다시 재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디의 업적이 과장된 성공신화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모디의 경제 성장률이 그 전과 비교 했을 때 그렇게 까지 높은 편도 아니고 인도 전체 평균 성장률과 비교해도 약간 높을 뿐이라는 것이죠. 구자라트의 빈곤 감소율도 전국 평균정도의 수준이며 오히려 인도에서 가장 낙후된 주인 ‘비하르’주 보다도 낮은 감소율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11년 발표된 인도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구자라트 주의 5세 이하 어린이의 44%가 영양실조에 걸려있다고 하네요.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디가 유력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 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와 지지층 관리에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죠. 그리고 현재 악화 중인 경제 상황도 BJP가 중심인 NDA(National Democratic Alliance)의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구자라트 경제 성장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모디에 대한 더욱 큰 기대감과 인기로 연결 되고 있습니다

나렌드라 모디의 어린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