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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한국전쟁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한국전쟁

CIA bear 허관(許灌) 2013. 7. 30. 20:17

 

In June 1950, a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as coming to terms with the aftermath of World War II, a new conflict broke out on the Korean peninsula - and the Cold War turned hot for the first time.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유엔묘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 묘지--
부산광역시 남구(南區) 대연동(大淵洞)에 있는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이다
1951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설립안이 채택되어 참전 16개국 1만 1,000명이 안장되었는데 유해를 본국으로 이장하기도 하여 11개국 2,300여구가 남아 있다
1955년 이후 UN에서 관리해 오다가 1974년부터 이곳에 유해를 남기고 있는 참전국과 한국이 공동관리하고 있다
참전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내외국인이 방문, 참배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3호이다


 

*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전쟁 참전 결의안 선거에서 기권을 했으며 한국전쟁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 이후 소련 공산당 출신 허가이나 박헌영등이 북한 권력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 출신이면서 2차대전 소련군측 국제여단출신 김일성이가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한국전쟁은 동북3성을 점령한 국제여단 출신 조선족 추축으로 전쟁을 추진했다 후방 전쟁지원은 임표등 만주 동북3성 군부 실권자들이었다

 

                                유엔군 16개국 포로 봄볕 즐기는 중국 인민해방군 모습(그들은 이데올로기 모른채 한국전쟁에 참가했습니다 동북 3성 청년들이)

 

                                                                                 한국전쟁 참전한 중국인민해방군 여군 모습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습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습니다(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전쟁 참전 결의안 선거에서 기권을 했으며 한국전쟁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 이후 소련 공산당 출신 허가이나 박헌영등이 북한 권력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 출신 김일성이가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한국전쟁 때 인해전술 떼거리 중국 인민해방군 100만명이 희생했다 중국도 남북지역 구분으로 한국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한족보다는 남부지역 1억 규모 인구 장족과 만주지역 다수 민족인 거란, 만주족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한족이 전쟁에 개입할 때 독립운동과 세력확대로 새로운 군사대국으로 등장을 시도해왔다 중국지역에서 한족 이외 다른 민족의 인구 3억에서 4억 규모이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출신으로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 연합군 소련 극동사령부 88특별여단 소속 대대장 출신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지역과 한반도지역 점령한 후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군 88특별여단 주축으로 중국 내전 공산혁명에 주력부대었다 임표 동북3성 총사령관으로 만주국을 소련군과 함께 점령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중국내전 승리에  결정적  지위와 역할을 했으며 내전승리 이후 조선의용대 출신 지원과 함께 남침을 추진했다 임표, 팽덕회 동북 3성등이 한국전쟁 배후세력으로 활동했다 임표는 모택동 다음 2인자로 문화혁명 주도와 중미수교 이후 모택동을 암살하려다가 실패이후 소련으로 망명 도중 살해되었다 중국정부 내부 반미 친북 김일성세력이 소련군 지원세력이다 임표나 김일성등은 소련군 즉 KGB 조직원이었다 이들 소련방위대로 중국과 북한에서 활동해왔다 중국 동북 3성이 남침을 도와줄때 북한정부가 남침을 할 것으로 본다 중국과 미국 수교이후 조국을 소련으로 생각하는 소련 공산당 전위대가 대부분 제거되었다 중국이나 북한 내부 공산주의 세력 태자당 출신이 과거처럼 외국세력에 아부할 가능성도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북로당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밀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의거,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모체로 하고 있다
같은 해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을 중심으로 지식층, 소시민층을 망라하고 있던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였다 합당선언에서 북조선 노동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중적 정당을 세울 필요에 의해서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통신기관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지급등을 내걸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김두봉(부산출신이며 조선의용대 독립동맹주석 출신-모택동주의자), 부위원장에 김일성(중국공산당과 소련군 극동사령부 88특별여단 정찰국 대대장 출신). 허가이(소련공산당 간부-모스크바의 로모노소프대학 졸업, 우즈베크공화국 타슈켄트주당() 비서 출신)가 선출되었다
북로당은 1948년 8월 정권수립을 위해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권수립(1948년 9월 9일)이후인 194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평양에서 비공개로 열린 남북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1국1당 원칙에 따라 현재의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ㄱ.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ㄱ)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ㄴ)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ㄷ)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ㄹ)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동북3성 소련군이나 구일본군 탱크나 무기와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E.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ㄴ.연안파---조선의용대(모택동부대)<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ㄱ)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ㄴ)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ㄷ)김무정(무정)----함북 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ㄹ)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은 소련군 극동사령부 출신이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 팔로군(중국인민군)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 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한국전쟁 남침 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이었다 조선의용대와 북한 주둔 소련군은 동북3성 팔로군으로 중국 공산화 내전에 투입하여 큰 공헌을 세웠다

*김일성은 중국 동북항일연군 제1 팔로군 제6사장을 역임했으며 소련군 88특별여단 대위로 제4대대장을 역임했다 그래서는 김일성은 중국 모택동과 소련정부 스탈린 전폭적 지원으로 북한권력을 장악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군 이외 유엔군 16개국, 한국군도 유엔군으로 참전 그리고 지금도 휴전 경계병 한국군은 유엔군 지위와 역할)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등 
*2차대전 때 소련측 연합군 만주국 무력점령과 동시에 동북3성 소련군 88특별여단(임표등 팔로군) 장악 그리고 소련군 88특별여단 조선족(한국인) 출신이 소련군과 함께 38도선 이북지역 점령--->동북3성 주력부대 임표등 중국내전 개입-->중국 모택동부대 본토 장악---->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동북 3성 조선족(한국인) 북한 인민군 주축으로 구(舊) 일본 관동군 탱크로 남침-->남한지역 남로당이 지하세력이 무장봉기와 인민위원회 구성--->일시적으로 남한 점령-->유엔 한국전쟁 개입과 유엔군 구성-->유엔군 38도선 이북지역 진격---->중화인민공화국(중공군) 개입과 38도선 이남지역 진격--->정전협정 체결

-중화민국 장개석부대는 중국 남부지역 장악과 인도, 영국군 연합으로 동남아 점령을 했지만 동북3성이 모택동부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만주지역에서 세력 상실

-극동지역과 일본 북해지역 소련군 장악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평민층 지지기반 확대와 인민위원회 설치로 공개재판으로 남한지역 민간인 처형 학살, 전쟁물자 현지에서 조달하는 약탈전쟁 방식등으로 북한정부 전면적 전쟁이 패배했다고 평가.  유엔이 남한과 일본등 그리고 동남아 공산화(공산정부 등장)에 대한 우려  

남과 북 통일은 전쟁이 아닌 민주전선 입장에서 평화통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주전선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민주전선 입장에서 남과 북통일은 만주지역을 중국정부 영토로 인정하며  극동지역은 러시아정부 영토로 인정합니다

만주지역이나 극동지역이 중국 소수민족 영토로 인정하여 독립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사전에 와해(제거)할 수 있는 군사적 동맹을  중국, 러시아정부와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정부는 북한  좌익군정과 협력하여 만주지역이나 극동지역 소수민족 독립운동 세력 등장 그리고 전쟁을 추진하는 세력 등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입니다

 

1단계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와 사회민주주의 세력 북한권력 장악[민주전선 구축]

2단계 민주연합(민주공화국이냐 연방공화국이냐)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 구성]

3단계 국가수립[남북한 권력분배]

동북아(아시아 태평양)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아시아 태평양) 연합군 단일군사기구 창설[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인도, 통일한국등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