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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CIA Bear 허관(許灌) 2012. 3. 19. 13:46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 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최후진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26사건 주요 관련자들의 변호인으로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봤던 안동일 변호사(65)가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랜덤하우스중앙)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10·26사태 26주년에 맞춰 나온 이 책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10·26사태의 성격과 김 전 부장의 ‘범행’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해주는 요소들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담당 변호인이 쓴 본격적인 역사 기록물이라는 데 있다. 이제까지 나온 10·26 관련 저작물은 재판기록이나 수사기록, 관련자의 증언에 의존해 취재기자나 작가가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달리 공판조서와 법정 메모, 피의자 면담 등을 토대로 한 안 변호사의 기록은 10·26의 실체와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10월 26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배재빌딩 사무실에서 안 변호사를 만나 10·26의 실체에 한걸음 더 접근해 보았다.

책을 보면 김 전 부장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혁명가로 묘사돼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이죠. 내가 그걸 혁명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발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것은 사실이에요. 유신 선포 이후부터 ‘이건 민주헌법이 아니다’라며 회의를 품었던 거죠. 1974년 건설부장관에 임명됐을 때는 권총을 넣고 들어갔는데, 바지 담배주머니가 불룩한 그때의 사진을 법정에 증거물로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는 바람에 생각을 달리 한 겁니다.”

생각을 달리 했다는 건 무얼 의미합니까.

“그 전까지는 박정희와 자기가 같이 사라지자는 생각이었는데 중정부장이 되자 ‘아, 이건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며 마음을 바꿔먹었어요. 모든 정보의 총책임자가 되고 항상 대통령과 독대하는 위치니까 유신체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중에 들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등식을 세우기를 박정희가 바로 유신의 핵이다, 박정희가 있는 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없어져야 된다, 이런 확신적인 등식을 하나 만들어 놓고….”

왜 선의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어요.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요. 차지철도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어요.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본인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하니까…. 더 큰 국민의 희생을 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막자는 거였죠.”

그런 취지로 혁명을 위한 거사를 했다면 그 뒤의 행동과는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착각한 거지요. 착각한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유신의 핵을 제거하면 7년여 동안의 유신체제, 더 나아가 박정희 18년 압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모든 국민이 일제히 일어나 자기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본 거죠. 두 번째는 거사가 성공하면 틀림없이 미국이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거사 직후 육본이 아니라 중정으로 갔다면 가능했을 법한데요. 김 전 부장의 판단이 순간적으로 흐려진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정승화씨를 믿었고, 또 육본으로 가도 계엄만 선포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판단이 흐렸다기보다 치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죠.”

김 전 부장이 재직 시절 긴급조치 10호를 대통령에게 건의한 내용이 책에 나오는데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은 얘기 아닙니까.

“긴급조치 9호의 나쁜 점은 죄목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 조치를 비판조차 못하게 하고 헌법 개정 논의는 아예 안 되게 했으니….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완화하고 두 가지 ‘시퍼런 칼날’을 추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노동계와 종교계를 규제할 수 있는 조항을 넣는 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표면적으로는 9호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중요한 알맹이를 빼는 것이었죠. 이게 거의 될 뻔했는데 내부 반발 때문에….”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부분에서 책과 진실위 중간발표 내용이 상치됩니다. 김 전 부장의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그해 10월 초입니다. 김재규씨의 말을 들으면 그걸 자기가 자체조사시켰다는 겁니다. 그 보고를 받지 못하고 10·26이 났죠. 자기가 한 일이라면 굳이 조사를 시켰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아주 분개했어요. 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이느냐고요.”

당시 역학관계상 김 전 부장이 그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김형욱 처리문제에 대해 항상 온건한 방법을 건의했었죠. ‘돈이 필요하면 돈이라도 줘서 막읍시다’ ‘신변 보장이라든가 자리를 요구하면 그렇게 해줍시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을 설득해놓으면 저쪽이 안 듣고 저쪽을 해놓으면 이쪽이 안 되고…. 그래서 안 됐다고 했어요.”

궁정동 안가에서 간 여성이 200명쯤 되고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다 불려갔으며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 박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한 내용이 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닌데…. 김재규씨도 '남자는 벨트 아래 얘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박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돌아가신 다음에는 많이 흔들렸거든요. 권력이란 건 10년 이상 잡게 되면 그렇게 되나 봐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 전 부장의 명예회복 문제로 진통을 계속하고 있는데….

“내게도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요. 책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이걸 자료로 주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어제 책을 보냈고요.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패륜아의 우발적 범행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데 나는 그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안 변호사는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으로 4·19시위 참여 후 민족통일연맹(민통)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에도 깊이 가담했다. 사단법인 4월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4·19세대다. 5·16쿠데타 직후 민통 관련자 일제 검거 때 도피하는 바람에 중형을 면한 그는 1980년 5월 10·26사건 대법원 확정판결 후에도 발 빠르게 잠적했다. 함께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그때 연행돼 곤욕을 치렀다. 10·26 관련자들에 대한 변론을 너무 ‘열심히’ 한 괘씸죄 때문이었다고 한다.


 

 

10·26 사건(궁정동 사태)은 1979년 10월 26일대한민국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 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 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1.사건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2.사건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때가 저녁 7시 10분경이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체크를 하는 순간에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은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가봤다. 차지철이 연회장에 다시 들어오는 때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는 다시 나가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각하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그 때가 저녁 7시 30분이었다.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3.사건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간에, 김재규가 총을 쏘고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고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대기실에서 총을 쏴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 쪽에 조준했고 차지철은 계속 김재규에게 저항하는데 김재규가 총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이 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꿨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는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왔고,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에, 다시 김재규가 들어와 있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을 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피하고 차지철의 배를 향해 총을 쐈다. 차지철은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가 어디론가로 숨었다. 김재규는 총구를 박정희의 머리에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인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맞은 것이었으며 머리에 맞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에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와 함께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범인은 김재규라고 다시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시킨다. 꿈틀거리던 차지철도 이렇게 죽어버렸다.

 

4.김재규 체포와 사형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이를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인계받아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심한 욕도 들어야 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5.사건의의와 박정희 저격 이유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 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 김재규,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다.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같은 주장도 있었다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을 했다고 주장했다

 

6.사건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저격을 당한 뒤 사망.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중정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사살함.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사망자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사망.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정인형 - 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사망.

안재송 - 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사망.

김용섭 - 대통령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생존자

김계원

박상범

심수봉

신재순

 

*사건 처리자들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박정희 유고후 계엄 사령관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전두환 -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처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 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이기주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김태원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석술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서영준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 김재규의 ‘민주인사’ 인정은 정당한가. 박정희 시해 사건 이후 현장검증(80보도사진연감), 선고공판(연합), 사형집행 직전의 모습(연합). (윗쪽부터)

10 · 26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

 

강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1980년 1월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김재규는 3군단장으로 재직 중인 1972년 12월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자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기 위한 헌법으로 민주헌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뒤로 1978년에 긴급조치 해제 건의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등의 ‘민주화 행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적 사회평론가 진중권씨 등은 “유신 체제를 유지했던 가장 강력한 억압기구가 바로 중앙정보부였다.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고 고문했던 기관의 장이 바로 김재규였다. 그런 기관의 장이 단지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반박했다. 진씨 등은 “김재규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미 다른 민주화 유공자로 되신 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8월9일의 민주화심의위 관련자 분과 회의에서도 이런 복잡한 상황이 두루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판정을 일단 보류한 가운데 ‘필요한 자료와 증인을 더 확보하자’, 그러면서도 ‘시한을 정하지는 않은’ 이날 논의 내용도 그런 고민의 산물로 해석된다. 이날 관련자 분과 회의에선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가 ‘8월16일의 (신속한) 결정 반대’ 입장을 밝혀온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8월9일의 분과의 논의로 ‘김재규 심의’에 대한 공론화 길이 한결 넓어진 가운데, 공론화의 절차와 방법을 놓고도 이런저런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심의위의 일부 위원들은 이와 관련해 “김재규에 대한 심의 결과는 불가피하게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을 갖게 마련”이라며 “국무총리 소속의 행정위원회 성격인 민주화심의위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꾀하는 것, 그것도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학계 안에서조차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사안을 서둘러 결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민주화심의위가 지금까지 대체로 이미 판가름난 역사적 인식을 토대로 해당자를 가려 보상책을 강구하는 행정 행위를 주로 해온 반면에, ‘김재규 심의’는 여러모로 성격이 다른 점에 이들이 주목하는 셈이다.

민주노동당의 천영세 의원은 국회 차원의 유신 문제 평가기구 가동 방식도 제안하고 있다. 천 의원은 “당면한 현안 처리를 위해 올가을 정기국회는 넘긴 뒤에 고려할 문제”라며 “그 뒤에 정치권이 나서 현대사 재평가를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애국자가 아니면 좌익군정을 사살한 세력이 애국자인가

귀가 빙빙돌아가는 사람은 의견이 다양합니다

많은 분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습제 좌익군정을 종언하고 수평적 권력교체와 북미수교등을 추진하기를 바랬습니다

나는 세습제 좌익군정 추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제거를 지지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에 관한 상황은 사망일  2년전부터 병원 입원 중국자료로 파악했고  러시아 방문 때 미국정부로부터 머리소리함으로 건강상태 불안으로 전달 받았습니다  

공화국이냐 국왕(전제 군주국)이냐 구분은 국왕제(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이  공화국 이론입니다  공화국에는 국왕 즉 세습제가 없습니다

머리소리함 내부 귀소리팀 중 세습제  좌익군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제거돼야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북한 현체제를 인정하면서 핵무기 포기와 북미수교, 북일수교, 남북대표부 설치등을 점진적 권력교체등을 주장하는 분으로 논의돼 오고 있습니다

 

김재규전중앙부장이 박정희전대통령 암살은 미국대통령 선거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와 부마 항쟁 그리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추진등으로 한국정부 내 주요 인사 문책론(경질론)이 나왔고 최규하 내각 총사퇴는 김재규등 경질로 이어질때 한국정부내 강경파 제거와 온건파 등장이 될때 미국 민주당후보에게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등소평 주석 미국방문이나 권력등장으로 중국정부가 임기제한 5년 중임 국가 주석제 도입으로 유신이론이 폐기돼야 할 상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