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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국(將經國) 중화민국 前 총통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장경국(將經國) 중화민국 前 총통

CIA Bear 허관(許灌) 2012. 2. 26. 12:10

 

중국 대륙에서는 겸손과 청빈의 권력을 구사한 인물이 주은래라면 대만에서는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 전 총통이다(장경국 선생 모습)

장경국(蔣經國,1910년 4월 27일 ~ 1988년 1월 13일)은 중국 국민당의 정치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이다. 장개석(蔣介石)의 맏아들로 중화민국 정부의 요직을 거쳤고, 1972년부터 1978년까지는 중화민국 수상인 행정원장, 1978년부터 죽을 때까지 총통을 지냈다

장경국은 장개석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모복매(毛福梅)의 아들로 저장 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개석은 그를 엄격하게 공부시켰으며 아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192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자 했는데, 당시는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장개석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칼 라데크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열정적으로 공부했으며 어느 정도 트로츠키주의로 기울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따로 그를 불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라고 요청하고 그가 수락하자 그때 소련 공산당에 가입이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장경국은 이를 부인했다.

1927년 장개석가 4.12사건으로 공산당을 학살하자 장경국은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에 남을 것을 선언했다. 그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톨마체프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우랄 산맥의 철강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35년 벨라루스 여자인 장방량(蔣方良)과 결혼했다.

장경국은 1936년에도 아버지의 정책을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나 소련에 체류한 것 등이 모두 강요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1937년, 중국에서 장개석가 공산당과 새로운 연합전선을 구축하자 스탈린은 장경국가 소련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장경국은 아버지의 국민당 정권에서 일을 했다.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인기를 만회하고자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를 엄단했고 화폐 개혁을 하는 등 꺼져가는 국민당의 불꽃을 살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싶었으나, 나중에 그의 계모인 송미령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장개석은 장경국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 후로 그와 송미령과는 평생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 국민당은 타이완(대만)으로 후퇴했다. 장경국은 타이완(대만) 정부의 군대와 안보기관의 책임자로 국민당을 지휘했고, 1965년에는 국방장관이 되었다. 1972년, 행정원장(총리)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장개석가 병석에 누운 뒤에 장징궈는 사실상 중화민국의 통치자로서 군림했다.

1978년, 중화민국 6대 총통으로 취임하여 1988년, 7대 총통 임기중 서거하였다.

그는 정부의 부정 부패를 척결하고 정실(情實) 인사를 배격했으며 본토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입법원과 행정원에 본성인(本省人: 명 말기 본토에서 건너간 한족) 출신 인사들을 더 많이 기용하여 정부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1970년대 국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개방되고 많은 나라들이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위해 중화민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그는 중화민국의 정치적 독립과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애썼다.

1987년 7월 15일에는 아버지 장개석가 타이완에 들어온 뒤 38년 간이나 선포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1988년 1월, 그는 심장 마비와 출혈로 7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장경국은 장방량(蔣方良)과 혼인 관계 중 내연녀 장아약(章亞若)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효엄(蔣孝嚴)과 장효자(章孝慈)를 얻었다. 이 중 장효엄은 자신이 장경국의 아들임을 주장했으나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의 반대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장효엄은 2006년에 장경국의 아들로 본성을 회복하였다

장경국은 중국 국민당 전통과 업적을 계승하고 중화민주공화국(중화민국) 건국 정신 민주공화국 입장에서 나라 안에는 국왕이 없다는 세습제를 부정하고 수평적 권력교체를 인정했다

 

                                                                                     장개석과 장경국 선생 부자(父子) 모습

                                                                                                  장경국 선생 모습

장개석 총통이 사색적 ・귀족적인 반면, 장경국은 서민적 ・행동형인 셈이다. 그는 철저한 대중 정치가로,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까지 파고드는 활동가로 정평이 높다. 지방에 나가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는 '현장의 정치인'으로서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장경국 前총통은 자유사회 중국이 나아갈 방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로 내다보았다  자유사회 중국은 중국(국가안보)과 기업인(기업성장), 국민(의식주 해결과 자산가로 성장)이 생존권(사회권)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을 존중하는 온건 보수주의와 개인의 자유권을 우선시하면서 생존권을 존중하는 온건 진보주의를 표방했다

민주공화국은 나라에 안에 국왕이 없으며(세습제 부정) 국민 주권 입장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인정하는 정부이다

 

중국 대륙에서는 겸손과 청빈의 권력을 구사한 인물이 주은래라면 대만에서는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 전 총통이다

주은래는 사망한 당시 남긴 유산은 단돈 5,000위안(약 65만원)이었고 1976년, 78세로 사망한 주은래는 유언장에 추도식을 크게 벌어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 조국의 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었다

주은래는 27세때 등영초여사와 결혼하여 50년을 함께 살아지만 자녀가 없었다 하지만 순국 동지들의 자식을 7명이나 양자로 키웠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붕 전 총리이다

중국 혁명 성지라는 연안에 가면 주은래의 옛 동굴집을 볼 수 있는데, 건너편 작은 집에서 이붕 전 총리를 키웠다고 한다

장경국은 아버지 장개석 전 총통이 부패로 대륙에서 패배한 것을 너무도 똑똑하게 지켜 본 터라 부정부패 일소와 청빈을 덕목으로 살았다

대만을 강소국으로 만든 그였지만 그의 사후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 기념관 조차 지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옷 몇벌 밖에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