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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본문

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탈북민 자료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CIA Bear 허관(許灌) 2011. 12. 25. 22:31

 

                                                            1992년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父子) 사진 모습

김정일(金正日, 1941년/1942년 2월 16일~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인·정치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 조선로동당의 총 비서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 4대 국가 수반 김일성과 독립운동가 겸 공산주의김정숙의 첫째 아들이었다.

6.25전쟁 때에 평양에서 철수하여 만주 지역으로 피신하였지만 중공군에 의해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고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 자리잡았다. 1994년 김일성 국가주석의 사망 이후 공화국의 실제적인 제1통치자가 되었으며,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 이후 6년간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게 되었고, 세계 10대 독재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김정일의 후계자는 김정은으로 지목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 부른다.

 

                                                                        1980년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父子) 사진 모습

 

1.출생과 가정배경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에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는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삼지연군백두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의 학계나 소비에트 연방의 기록에서는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당시 하바롭스크 지방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마을인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이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귀국하였다.

 

                                                                   김정일과 부친 김일성, 모친 김정숙 모습

한편, 그가 태어날 때 쌍둥이 동생인 김슈라가 태어났으나 쌍둥이 동생은 어릴 때 김일성의 관사에서 놀던 중 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였다가 뒤에 김정일(金正一)이라 하였으나 다시 정일(正日)로 개명하였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 김보현과 증조모 리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 김정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고 한다.

 

                                                                                      김정일과 부친 김일성, 모친 김정숙 모습

 

                                                                                                김정일과 부친 김일성 모습

 

1948년 8월 7일 강원도 화진포 앞바다에서 가운데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아이가 김정일(화살표)이고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아이가 북한의 소련 군정 정치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의 아들 알렉산더 레베데프. 그 뒤쪽이 레베데프 소장의 부인, 그 왼쪽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 그 앞이 김정일의 누이 김경희 모습

 

2.유년기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

 

                                                                                          김정일 유년기의 어느 날(1947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김정일과 중학교 학우들 모습

3.청년기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또한 김일성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4.조선로동당 입당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총리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 그뒤 1973년 9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로 여겨졌던 숙부 김영주와 이복 형제로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1980년대 중반에 숙부 김영주와 이복 동생 김평일을 제치고 후계자지위를 확정짓는다. 그리고 1994년 집권 이후 이들은 사실상 정계에서 축출되어,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떠돌게 되었으며, 계모 김성애 역시 정치적으로 숙청하였다

 

5.정치활동

(1)조선로동당 활동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였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3대 혁명 소조운동 주도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되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

 

                                                                      1986년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父子) 모습

(3)인민군 지휘관 취임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년 4월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겸임조항을 정령에서 삭제하면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군권과 함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김정일은 이어 조선로동당의 당권도 장악하였다
(4)정적 숙청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주석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2001년에는 김일성 주석과 주석궁 안마사의 사생아인 김현을 전격 처형하기도 했다

6.김일성 사망 직후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유훈통치기간을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한편,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는 안을 발표한 뒤,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였다. 이후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에서 맡게 하되, 국방과 군권만을 자신이 장악하도록 이원제 정부를 불법적으로 계획, 구성하였다. 1998년까지 국가원수의 대리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통치한 뒤 통수권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넘겼다. 그러나 권한이양 후에도 그는 실권자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7.1차 남북 정상회담과 러시아 방문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8.제2차 남북 정상 회담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9.기타 외교활동

2000년 이후 그는 러시아중화인민공화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미국카터, 클린턴 등의 전직 대통령 역시 수시로 평양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활동의 목적으로 그는 자원 지원을 주로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10.북한 식량난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공산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한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유엔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다.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300억 달러가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북한 내에서는 대한민국과 미국 및 일부에서 식량난을 과대선전하는 사례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1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

12.현장 방문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북조선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 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 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 우렝이양식장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시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13.2008년 뇌졸중 발병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9월 13일에는 양치질을 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이 잠행을 계속하면서 그와 관련된 건강상태도 해석이 제각각이다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 전제 대책에 착수했다는 것을 보도했다 2009년 1월 23일에 김정일은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을 만나 한반도정세의 긴장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9년 3월 19일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이상설에 힘을 실었다 건강 이상설과 함께 대역을 행사장에 보낸다는 주장이 제기되나 근거는 희박하다.

 

14.2011년 사망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을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었다 2008년부터 뇌졸중으로 좌반신 마비 증세를 겪고 있었고, 2010년에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수명이 3년 정도 남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그의 사망이 임박했음을 예측하였다.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에게 고함
2011년 12월 17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는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

우리의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 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 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조선 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100(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시었다는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린다.

주체혁명 위업의 계승 완성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시었으며 사회주의 조국의 강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불철주야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던 우리의 위대한 김정일 동지께서 너무도 갑자기, 너무도 애석하게 우리 곁을 떠나시었다.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 위업수행에서 전환적 국면이 열리고 있으며 우리 혁명이 중첩되는 난관과 시련을 뚫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력사적인 시기에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이신 김정일 동지께서 뜻밖에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에 있어서 최대의 손실이며 우리 인민과 온 겨레의 가장 큰 슬픔이다. 혁명의 성산 백두산에서 빨치산의 아들로 탄생하시어 위대한 혁명가로 성장하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장구한 기간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조국과 인민, 시대와 력사 앞에 영구불멸할 혁명 업적을 쌓아 올리시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위인이 지닐 수 있는 품격과 자질을 최상의 높이에서 완벽하게 체현하시고 심오한 사상리론과 비범한 령도로 혁명과 건설을 백전백승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걸출한 사상리론가, 희세의 정치원로이시고 불세출의 선군령장이시며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숭고한 헌신으로 혁명 투쟁의 전로정을 수놓아 오신 절세의 애국자,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주체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하는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내세우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어버이 수령님의 가장 친근한 동지, 가장 충직한 전우가 되시여 혁명과 건설을 수령님의 사상과 의도대로 줄기차게 전진시켜 오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천리혜안의 예지와 정력적인 사상리론 활동으로 어버이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영생불멸의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전면적으로 심화발전시키시고 자주시대의 지도사상으로 빛내이시였으며 백두의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순결하게 계승발전시키시여 조선 혁명의 명맥을 굳건히 이어놓으시였다. 혁명과 건설의 영재이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온 사회 주체사상화의 기치높이 우리 당과 군대, 국가를 김일성 동지의 당과 군대, 국가로 강화 발전시키시였으며 민족의 존엄과 국력을 최상의 경지에 올려 세우시고 반만년 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륭성번영의 대전성기를 펼치시였다. 혁명적 도덕의리의 최고 화신이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인류정치사가 알지 못하는 수령영생위업실현의 위대한 귀감을 창조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존함과 불멸의 혁명 생애와 업적이 주체조선의 무궁한 력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을 뿌리도록 하시였다.

정치의 대가이시며 천출명장이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세계사회주의 체계의 붕괴와 민족 최대의 국상, 제국주의 련합 세력의 악랄한 반공화국 압살공세와 혹심한 자연재해 속에서 선군정치로 어버이 수령님의 고귀한 유산인 사회주의 전취물을 영예롭게 수호하시였으며 우리 조국을 일심단결된 불패의 정치사상강국으로, 그 어떤 원쑤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어버이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강성대국 건설의 웅대한 목표를 제시하시고 그 실현을 위한 전인민적인 총진군을 진두에서 이끄시여 온나라에 혁명적 대고조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게 하시고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대혁신, 대비약이 일어나게 하시였다. 민족의 어버이이시며 조국 통일의 구성이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 통일유훈을 실현하실 철석의 의지를 지니시고 온 겨레를 자주와 민족대단결의 길로 이끌어 오시였으며 우리 민족끼리의 숭고한 리념이 실현되는 6.15통일시대를 열어놓으시였다. 사회주의와 정의의 위대한 수호자이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반제자주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세계의 평화와 안정, 인민들 사이의 친선단결을 위하여 정력적인 대외활동을 벌리시여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와 권위를 비상히 높이시고 인류자주위업 수행에 불멸의 공헌을 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장구한 혁명령도의 전기간 인민을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시며 언제나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시였으며 강성국가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하여 불면불휴의 로고와 심혈을 바치시며 초강도의 현지지도 강행군길을 이어가시다가 겹쌓인 정신육체적 과로로 하여 렬차에서 순직하시였다.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전생애는 혁명의 붉은 기를 높이 들고 강철의 의지와 초인간적인 정력으로 전인미답의 험난한 초행길을 헤쳐오신 위대한 혁명가의 가장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오로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절세의 애국자의 한생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그처럼 바라시던 강성국가 건설 위업의 승리와 조국 통일, 주체혁명 위업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서거하시였으나 우리 혁명이 대를 이어 줄기차게 전진해나갈 수 있는 강력한 정치군사적 지반을 다져놓으시고 우리 조국과 민족 만대의 무궁번영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여주시였다.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주체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이시며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탁월한 령도자이신 김정은 동지께서 서 계신다. 김정은 동지의 령도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시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승리에로 이끌어오신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완성해나갈 수 있는 결정적 담보로 된다. 우리에게는 당의 위업을 앞장에서 받들어 나가는 무적필승의 백두산 혁명강군이 있고 당의 두리에 굳게 뭉친 군민대단결이 있으며 가장 우월한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제도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튼튼한 토대가 있다.

우리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 따라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오늘의 난국을 이겨내 주체혁명의 위대한 새 승리를 위하여 더욱 억세게 투쟁해나가야 한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절대불변의 신념과 숭고한 도덕의리심을 지니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를 영원히 높이 우러러 모시며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지켜 주체혁명, 선군혁명의 길에서 한치의 양보도, 한치의 드팀도 없을 것이며 장군님의 불멸의 혁명 업적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천추만대에 빛내여나갈 것이다.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인민들은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고 당과 군대와 인민의 일심단결을 굳건히 수호하며 더욱 철통같이 다져나가야 한다. 우리는 선군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 나라의 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여 우리의 사회주의 제도와 혁명의 전취물을 튼튼히 지키며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 함남의 불길을 온 나라에 세차게 지펴올려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룩하여야 한다.

우리는 조국통일 3대 헌장과 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하여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기어이 실현할 것이다. 우리 당과 인민은 자주, 평화, 친선의 리념에 기초하여 세계 여러 나라 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지배와 예속, 침략과 전쟁이 없는 자주적이며 평화로운 새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할것이다. 우리 혁명의 길은 간고하고 조성된 정세는 준엄하지만 위대한 김정은 동지의 현명한 령도 따라 나아가는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심장은 비록 고동을 멈추었으나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룩한 존함과 자애로운 영상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되여있을 것이며 장군님의 성스러운 혁명실록과 불멸의 혁명 업적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주체 100(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최고지도자가 급사(急死)로 69살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북한은 19일 정오를 기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100,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린다.”

이 같은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사망에서 발표까지 51시간 30분이 걸린 것입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심장과 뇌질환으로 장기간에 걸쳐 치료를 계속 받아왔는데 각지에 시찰이 계속되면서 피로가 쌓였으며 17일, 이동중인 열차 안에서 심근경색을 일으켜 긴급치료를 받았지만 같은 날 오전 8시 반에 서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질병 사망설-심장과 뇌질환으로 장기간 걸쳐 치료 받아왔지만 뇌 쇼크(충격) 심근경색으로 사망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지난 2008년 9월 초였습니다.

그 해 8월 중순 군 부대 시찰을 마지막으로 공개 활동을 하지 않던 김 위원장은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60주년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 확인됐습니다.

김 위원장은 어린시절부터 최대 권력자의 아들로 대접받으며 술과 담배, 식탐 등 절제되지 못한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결과 생긴 당뇨병, 비만, 고혈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뇌졸중을 잃으킨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습니다.

이후 은둔 80일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 위원장은 왼팔과 왼손이 부자연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살이 눈에 띄게 빠지고 머리 숱도 줄었으며, 뇌졸중 후유증인 왼쪽 입꼬리가 처지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건강은 한동안 회복 되는 듯한 조짐도 보였습니다.

김 위원장은 군 부대 시찰과 각종 공연관람, 공장, 기업소, 현지 지도, 해외인사 접견 등 와병설이 제기되기 이전보다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올 11월 8회, 12월 13회의 공개 활동을 소화하며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특히 지난 해 8월에는 중국 동북지역을 방문하는 동안 두 차례나 야간열차를 이용했고, 올해 5월 말 다시 방중했을 때에는 일주일 동안 6천여 km를 기차로 이동하며 건강악화설을 일축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또 올해 8월에는 9년만에 처음으로 러시아를 기차로 방문하는 등 장거리 행군을 강행했습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2008년 9월 발생한 뇌졸중 후유증이 여전한 가운데 과로가 겹쳐 결국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김정일 북한 최고지도자가 7월 21일부터 27일까지 6박7일 간 러시아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러시아 방문 중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회담 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이상설과 사망 가능성이 머리소리함으로 전달돼 왔습니다 그 이후 꾸준히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가능성이 제기돼 왔습니다

12월 16일 새벽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가능성이 제기 됐습니다

머리소리함에 의하면 질병사망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귀소리 뇌세뇌 그룹이 국민들을 지도자의 말과 교시방법으로 귀소리로 뇌를 장악할 때는 그 나라와 조직이 자유사회 귀소리에 점령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집트나 리비아,시리아등 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사회주의 모델 지도자 가족왕조를 건설하려다가 민중봉기(국민항거)가 일어났습니다

북한 방송국이 무너지면 그 권력은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2)강경파 군부 쿠데타

남북정상회담 반대 세력이 핵무기 보유와 반일, 반미투쟁전선 구축 그리고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입장 견지 원칙으로 김정일 독살설

북한 김일성세력은 항일 항미투쟁노선에서 핵실험과 핵무기 보유원칙을 견지하면서 대일 대미 남북협상세력을 제거해왔다는 의미

-핵무기 보유 견지

-항일 항미투쟁 견지(김일성주의 NLPDR 노선)

-북한 평민층 생활경제붕괴 우려

-북한 군부는 세습제 권력승계가 너무 남한과 미국등에게 북한 이권을 넘겨 주었다는 표현

 

(3)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생활 여자문제로 독살설--김옥,김정남, 김정은등 가족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4명의 부인과 많은 내연 여성이 있었고 북한 권력층 기쁨조도 운영돼 왔습니다

69살 김정일 국방위원장 주변에는 자식과 권력층 젊은 사람들이 포진함으로 여자문제로 반감 입장도 표출돼 왔습니다

 

(4)핵무기 포기와 북미 북일수교 그리고 남북경제협력확대, 서방경제지원을 표방하는 김영남등 온건파 입김 강화

온건파 입장을 지지하는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북한군부 온건파 세력에 의한 제거설

 

김영남은 고령으로 명목상 북한 지도자로 추대하여도 북한이 중국모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입장

그 이후 지도자는 김일성 가족이 되어도 경제건설모델 자유화 개방화 북한이 될 수 있다는 의미...

 

 

15.암살미수

2004년 4월 22일 북한-중국 국경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으로 150여명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폭발사건은 김 위원장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해 김정일 위원장의 암살기도 사건으로 추측됐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2004년 4월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폭발사건은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였다고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 2009년 2월 26일 '현대그룹, 인내와 관용제안'이라는 제하의 비밀전문에서 2월 13일 현정은 현대아산회장과 조건식 현대아산사장,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사장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1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 항목 가운데 '김정일과 인민군'이라는 항목에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지난 2004년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폭발사건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열차 통과 30분 전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탑승한 열차의 통과시간이 전해짐으로써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은 이사건이 자신에 대한 암살실패사건으로 믿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특이할만큼 늦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또 "김 위원장이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16.평가

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17.비판

김정일은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추천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199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면서 부각된 식량난과 경제난은 그의 집권 사상 최대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은 1992년 이후 식량절약을 위해 '하루 두끼 먹기 운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중국인에 대한 비자 면제도 자신의 뜻대로 폐지하여 중국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연평도 포격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이 있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의혹

(1)비자금 조성 의혹

스위스와 해외 은행에 비자금을 예치해두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지금 제제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북한은 전세계 12개 나라에 위치한 은행 17곳에 모두 37개의 계좌를 갖고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의 1718위원회/대북제재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은행들의 계좌는 대부분 중국과 유럽 국가에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유럽 지역의 은행에 있는 북한 계좌에는 김정일의 비자금도 상당부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약 40-50억 달라의 비자금을 스위스나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등 해외 은행에 분산시켜 숨겨놓고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지난 2000년 기준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스위스 은행에 약 43억 달러 상당의 비자금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히면서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당시 CIA의 발표가 나오자 내외신 언론들은 미 정보 당국이, 스위스에서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해 오다 1990년대 말 미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실질적인 부인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 부부로부터 김정일의 스위스 비밀계좌에 대해 이같은 정보를 얻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2006년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여전히 약 40억 달러상당의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숨겨 놓고 있다는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불법 자금 문제에 정통한 미국의 데이빗 얘셔 전 국무부 자문관은 앞서 가진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김정일이 가진 해외 비밀계좌의 규모와 내역은 김정일 외에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감춰두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2)김정일 피습설

2009년 12월 1일에 김정일이 피습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습설이 해프닝이거나 통일부에선 피습설이 근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19.성격, 취미, 저작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과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정일은 몇 개의 곡도 작곡하였다. 1952년 8월에는 가요 <조국의 품> 을 작사,작곡하였다.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단군릉의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여성 편력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은 전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의 아내였으나 그와 이혼시켜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성혜림은 정식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슬하에 장남 김정남을 두었다.

1966년 혹은 1968년 아버지 김일성이 소개해준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숙과의 관계는 소원하여 딸 김설송김춘송만 있을 뿐 별다른 관계는 없다.

 

 

                                                                                              성혜림과 김정남 모습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영희와의 사이에서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딸 김여정이 있다. 한때 고영희와 김정남 간의 갈등설이 돌았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때 비서 출신인 첩 김옥이 그를 수행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확인된 것은 없다.

국제 사회에 김정일의 가족관계로써 알려진 것은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고영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이다. 대한민국의 일각에서는 그가 변태성욕자이며 수시로 여러 여성들과 비정상적인 향락을 즐긴다는 보고도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04년에는 그의 통치방식과 사생활, 여성 편력 등을 소재로 한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둘째아들 정철과 셋째 정은을 낳은 고영희.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 출신이다(사진)

그 밖에 그의 여인들 간의 권력암투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 2010년 8월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김정은은 고영희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고영희가 아닌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을 ‘내연의 처(concubine)’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라고 보도했다. 타임은 “김 위원장의 축첩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문제”라며 “심지어 남한에 특공대를 보내 유명 영화배우 등 여러 여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잡지는 또 “이 ‘친애하는 지도자’는 혼인을 거듭하며 자녀 5명을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9명의 사생아가 더 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과 김정남 모습

 

                                                                                           김정일과 김정은 모습

 

                                                                                                김정일과 넷재 부인 김옥 모습

 

21.기쁨조

상당수의 여성들을 기쁨조로 두고 있으며 이들에게 안마를 받고 가무를 감상하며 이들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북한에도 북한 상류층 기쁨조(댄스나 무용수, 기생, 접대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상류층 기쁨조는 북한 상류층이나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북한 고급 호텔이나 술집등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22.기타

(1)남북 정상 회담 시 누가 나올까 하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추측 속에서 대한민국김대중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김 대통령과 반갑게 포옹했다.

2002년에는 박근혜의 예방을 직접 받기도 하였고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는 육로로 방북하는 대한민국노무현대통령 역시 자신이 직접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루 더 묵고 가라는 제안을 당시에 하였으나 노무현은 거절하였다.

(2)그의 이름을 딴 꽃으로 김정일화(Kimjongilia)가 있다.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화도 있다.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 생일에 처음 소개되었다. 라틴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일본인 가모 모토데루(加茂元照)가 20년 동안의 품종을 개량한 것이며 김정일에게 처음 선물하였다고 한다

(3)이복동생 김현을 정적으로 내몰아서 2001년에 조용히 총살시켰다

(3)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

국방위원장이란 북한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의 수장이며 명실공히 북한 최고권력자다.

국방위원회는 정규군과 비정규군 등 일체의 군사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군수공업을 비롯한 국방사업 전반을 장악, 지도관리하는 헌법기관이다.

북한 사회주의 헌법(제100조)은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이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국방위원회가 군사에 대한 최고의 지도기관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국방위원회의 권한은 ▲국가의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 지도 ▲국방부문 중앙기관 개폐 ▲중요 군사간부 임명 또는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칭호 수여 ▲전시상태와 동원령 선포 등이다.

국방위원회는 위원장과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로 구성되며 임기는 5년이다. 국방위원장은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헌법 102조)하는 권한이 있으며 최고인민회에 의해 선거 또는 소환(해임)된다.

국방위원회는 지난 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산하기관으로 설치된 후 수회에 걸쳐 조직변동이 있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는 신설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당시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 겸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던 김정일을 선출했고 이어 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김정일 제1부위원장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김 국방위원장의 추대는 91년 군 최고사령관직을 맡아 실질적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가 명실상부하게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하는 최고의 권력자임을 내외에 선포하는 계기가 됐다.

김 위원장은 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 됐다.

*북한 헌법상 국방위원회

제 2 절 국방위원회
제100조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이다.
제101조 국방위원회는 위원장,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국방위원회 임기는 최고인민회의 임기와 같다.
제10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국방사업전반을 지도한다.
제103조 국방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국가의 전반적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한다.
2.국방부문의 중앙기관을 내오거나 없앤다.
3.중요군사간부를 임명 또는 해임한다.
4.군사칭호를 제정하며 장령이상의 군사칭호를 수여한다.
5.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을 선포한다.
제104조 국방위원회는 결정과 명령을 낸다.
제105조 국방위원회는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진다


 

*남한과 비교하였을 때 북한 국가기구의 특징은 무엇인가?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남한은 대통령이 국가의 수반이며 행정의 수반이고 군 통수권자이다
그러나 북한은 총리가 행정의 수반이며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고 있으며 군 통수권은 국방위원장이 맡고 있다
1.북한정부 권력구조
(1)북한정부 국가수반---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2)북한정부 행정수반- 총리
(3)북한정부 실권자(최고 지도자)--노동당 총비서 김정일
(4)군 통수권자--김정일 국방위원장
(5)외교부장(외무상)
(6)인민무력부장(국방부장관)
(7)재정부장(재정상)

2.병정분리주의(兵政分離主義)와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ㄱ.병정통합주의(兵政統合主義)---국가원수가 군(軍) 통수권자이다
군정통합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을 모두 행정부에 소속시켜 군령 또는 군정과 같이 국가행정의 일부로서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서 수행하도록 하는 주의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군정통합주의는 통수권의 독립이 허용되지 않으며 문관에 대한 무관의 지배가 불가능함으로 군국주의의 대두를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
군정통합주의는 미국이나 영국, 한국, 러시아등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국가원수가 군 통수권자이다
-문관에 대한 무관의 지배가 불가능함으로 군국주의나 침략주의 군대가 될 수 없다
ㄴ.병정분리주의(兵政分離主義)----군(軍) 통수권 독립이 허용되는 모델로 국가원수가 군 통수권자가 아닌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과 군령을 분리된 국가제도이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의 역할을 내각과 국방위원회로 분리함으로써 군정은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에 두지만 군령은 정부나 의회보다 우월한 군령권을 국방위원회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군 통수권에 정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수령(최고 지도자)에게만 모든 군 인사권이 주어지고 있다
-군 통수권의 독립이 허용되고 있다
북한정부의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이고 군 통수권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이다
-군정분리주의는 문관에 대한 무관의 지배가 가능함으로 군국주의가 대두 되고 NLPDR혁명단체들이 군을 장악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용병작전(用兵作戰)에서 정치적 이익관계가 개입될 우려가 없고 오로지 수령(지도자)에 대한 충싱한 충성군대만 있었므로 강군(强軍)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사회주의 군 모델이다
-북한은 과거 소련이나 중국식 군대모델로 언제든지 남한을 침략할 수 있는 국가사회주의 체제이다
-병정분리주의 국가는 중국이나 북한, 이란, 리비아 카다피, 시리아등  좌익군사정부 국가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이다
중국은 러시아 모델처럼 군정통합주의로 개혁을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북한 2차 핵실험 현장 사진

 

학위

훈·표창장과 수상

저서와 작품

  • 작품 〈피바다〉·〈꽃 파는 처녀〉·〈한 자위단원의 운명〉
  • 저서 〈영화예술론〉(1973), 《김정일선집》(전14권),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전10권)

 

 

논설

  •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북한 김일성, 김정일사상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으로 반일 반미사상(반제국주의 운동사상)입니다 북한 현대사는 반일과 반미 투쟁 역사로 남북통일도 반미인민전쟁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미국과 전쟁을 추구해오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반미사상을 체계화하여 좌익군정을 실시해온 인물이며 각국에 반미테러단체 설립을 지원하였고 남한에도 반미청년회나 여성회 활동을 지원하거나 후원하여 남한내부 무장단체 한민전(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건설에 주력해왔습니다(남한에도 1984년경 반미청년회가 설립 NLPDR 김일성주의 사상을 보급했으며 90년 1월 김정일주의 주체사상 보급과 함께 한민전 서울대표부로 개명했습니다)

 

 

 

 

 

 

 

문학

  • 노래 불후의 고전적명작〈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조국의 품〉,〈진달래〉
  • 시 〈우리 교실〉, 〈한초만 더 쉴 순 없을까〉

 

김정일은 김일성주의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사상 정립에 노력했으며 미국과 일본등 나라와 적대관계를 유지해습니다 교과서에도  반일이나 반미교육이며 좌익군정(좌익군사정부) 교육입니다

가계

 
 
 
 
 
 
김형직
金亨稷
1894 - 1926
 
 
 
 
 
 
 
 
 
강반석
康盤石
1892 - 1932
 
 
 
 
 
 
 
 
 
 
 
 
 
 
 
 
 
 
 
 
 
 
 
 
 
 
 
 
 
 
 
 
 
 
 
 
 
 
 
 
 
 
 
 
 
 
 
 
 
 
 
 
 
 
 
 
 
 
 
 
 
 
 
 
 
 
 
 
 
 
 
 
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김성애
金聖愛
1928 - ?
 
 
 
 
 
 
 
 
 
 
제갈○○
諸葛氏
 ? - ?
 
 
 
 
 
 
 
 
 
 
 
 
 
 
 
 
 
 
 
 
 
 
 
 
 
 
 
 
 
 
 
 
 
 
 
 
 
 
 
 
 
 
 
 
 
 
 
 
 
 
 
 
 
 
 
 
 
 
 
 
 
 
 
 
 
 
 
 
 
 
 
 
김정일
金正日
1941/42 - 2011
 
김만일
金萬日
1944 - 1947
 
김경희
金敬姬
1946 -
 
김경숙
金敬淑
1951 -
 
김경진
金經進
1952 -
 
김평일
金平日
1954 -
 
김영일
金英日
1955 - 2000
 
김현
金現
1971 - 2001

 
 
 
 
 
 
김형직
金亨稷
1894 - 1926
 
 
 
 
 
 
 
 
 
강반석
康盤石
1892 - 1932
 
 
 
 
 
 
 
 
 
 
 
 
 
 
 
 
 
 
 
 
 
 
 
 
 
 
 
 
 
 
 
 
 
 
 
 
 
 
 
 
 
 
 
 
 
 
 
 
 
 
 
 
 
 
 
 
 
 
 
 
 
 
 
 
 
 
 
 
 
 
 
 
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김성애
金聖愛
1928 - ?
 
 
 
 
 
 
 
 
 
 
제갈○○
諸葛氏
 ? - ?
 
 
 
 
 
 
 
 
 
 
 
 
 
 
 
 
 
 
 
 
 
 
 
 
 
 
 
 
 
 
 
 
 
 
 
 
 
 
 
 
 
 
 
 
 
 
 
 
 
 
 
 
 
 
 
 
 
 
 
 
 
 
 
 
 
 
 
 
 
 
 
 
김정일
金正日
1941/42 - 2011
 
김만일
金萬日
1944 - 1947
 
김경희
金敬姬
1946 -
 
김경숙
金敬淑
1951 -
 
김경진
金經進
1952 -
 
김평일
金平日
1954 -
 
김영일
金英日
1955 - 2000
 
김현
金現
1971 - 2001


 


 
 
 
 
 
 
 
 
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홍일천
洪一茜
1942 -
 
 
성혜림
成蕙琳
1937 - 2002
 
 
김영숙
金英淑
1947 -
 
 
 
김정일
金正日
1942 - 2011
 
 
 
고영희
高英姬
1953 - 2004
 
김옥
金玉
1964 -
 
 
 
 
 
 
 
 
 
 
 
 
 
 
 
 
 
 
 
 
 
 
 
 
 
 
 
 
 
 
 
 
 
 
 
 
 
 
 
 
 
 
 
 
 
 
 
 
 
 
 
 
 
 
 
 
 
 
 
 
김혜경
金惠敬
1968 -
 
김정남
金正男
1971 -
 
김설송
金雪松
1973 -
 
김춘송
金春松
1975 -
 
김정철
金正哲
1981 -
 
김정은
金正恩
1983 -
 
김여정
金汝貞
1987 -

  • 자녀
    • 장남 김정남(金正男)
    • 차남 김정철(金正哲)
    • 삼남 김정은(金正銀 또는 金正恩) - 또는 김정운 (金正雲)
    • 장녀 김혜경(金惠敬)
    • 차녀 김설송
    • 삼녀 김춘송
    • 사녀 김여정(1987년 9월 26일[7] ~)
  • 손자녀(김정남의 자녀들)
    • 손자 김한솔
    • 손자 김이순
    • 손녀 김솔희
    • 손자 김금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