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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나의 일생" 조선족 방채봉여사 "허란설헌 문학상" 수상 본문
"파란만장한 나의 일생" 조선족 방채봉여사 "허란설헌 문학상" 수상
CIA Bear 허관(許灌) 2010. 8. 8. 13:22
방채봉 여사
방채봉 여사가 창작한 회고록 "파란만장한 나의 일생"이 한국에서 권위성을 자랑하는 "허란설헌 문학상" 을 수상했다. 그 시상식이 7월 30일 베이징에서 진행되었다. 베이징의 각계의 대표인사 100여명이 시상식에 함께 했다.
베이징 정신문명 5호 가정의 주인공이며 중국 연변 체신업계의 노동모범이며 저명한 시인 김철 선생의 부인인 방채봉 여사는 국제문화예술협회로부터 "허란설헌 문학상"을 수상해 개인의 영광뿐이 아닌 조선족사회의 영광을 떨치게 되었다.
"허란설헌 문학상"을 수상한 방채봉의 자서전인 "파란만장한 나의 일생"은 그 문학적 성과와 예술성이 남달리 높아서라기보다 본인이 걸어온 비참하고 눈물겨운 일생과,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지고 산 설고 물 설은 간도땅으로 쪽박차고 남부여대로 이민을 와서 갖은 고생 다 겪으며 어렵게 살아온 조선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형상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민문학으로서의 그 가치가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파란만장한 나의 일생"이 "허란설헌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문학상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방채봉 여사의 일생에 대한 긍정과 평가로 볼 수 있다. 방채봉 여사는 인생 초년에 남다른 비참한 운명을 타고난 불쌍한 처녀였고 인생의 중, 후반기부터는 남다른 행운을 지니고 갖은 행복과 생활의 낙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인생의 초년을 한막의 비극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중후반기는 한막의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방채봉 여사가 겪은 인생초년의 불행과 고통은 귀중한 인생체험으로 되었고, 불행한 운명에 감히 도전하는 강의한 정신은 이미 민족의 정신적 유산으로 되어 민족부흥의 진로를 밝혀주게 되었다.
방채봉 여사의 문학상 수상은 또한 김철 선생의 가족이 명실상부한 문학일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김철선생은 중국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고 장남 김훈 씨는 국가 1급 작가, 중국국제방송국의 유명한 편집이며, 방채봉 여사까지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녀 명실공히 "문학가정"으로 되었다.
방채봉 여사에게 문학상 상장과 메달을 전달한 김선 국제문화예술교류협회 상임회장
저명한 시인 김철 선생
*허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호는 난설헌(蘭雪軒)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1)생애 및 작품
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
1577년 선조 10년, 15세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1580년 선조 13년,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했다.
1582년 선조 15년, 20세 때 전 해 1579년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희윤을 잃는다. 곡자를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애닳게 그린 시이다.
1583년 선조 16년,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1588년 선조 21년,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1589년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1589년 선조 22년,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 홍씨와 재혼한다.
1590년 선조 23년, 동생 허균이 친정에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 선조 25년,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1598년 선조 31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
1606년 선조 39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 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간행.
현재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언덕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었다.
(2)주요 작품
ㄱ.그림
앙간비금도, 묵조도 등
허난설헌(許蘭雪軒)이 그린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와 친필 (向見古人. 書, 蘭雪軒)
ㄴ.난설헌시(蘭雪軒詩)
오언고시에는 소년행(少年行), 감우사수(感遇四首), 곡자(哭子), 견흥팔수(遣興八首), 기하곡(寄荷谷) 등 총 15수의 시가 있다.
칠언고시는 총 여덟 편으로 동선요(洞仙謠), 양지붕선화가(梁指鳳仙花歌), 망선요(望仙謠), 상현요(湘絃謠), 사시사사수(四時詞四首) 오언율시는 총 여덟 편으로 출새곡이수(出塞曲二首), 효이의산체 이수(效李義山體二首), 효심아지체 이수(效沈亞之體 二首), 기녀반(寄女伴),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 등이 있다.
칠언율시는 총 13편으로 춘일유회(春日有懷), 차중씨견성암운 이수( 次仲氏見星庵韻 二首), 숙자수궁증여관(宿慈壽宮贈女冠), 몽작(夢作), 차중씨고원망고대운 사수(次仲氏高原望高臺韻 四首), 송궁인입도(送宮人入道), 제심맹조중연풍우도(題沈孟釣中溟風雨圖), 황제유사천단(皇帝有事天壇), 차손내한북리운(次孫內翰北里韻) 등이 있다.
그 외 오언절구 24수와 칠언절수 총 142구가 있다.
ㄷ.작품세계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배려로 글을 배웠다.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공평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표현,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허난설헌의 시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허난설헌의 재능을 극찬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죽었으며, 오빠 허봉이 정치적인 이유로 귀양 갔다가 유배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로 펴내 지금까지 전한다
(3)가족 관계
ㄱ.부모
아버지 허엽(許曄,1517~1580)은 호가 초당(草堂)이며, 서경덕의 문인이며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동인의 영수가 된다. 첫째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두 딸과 큰 아들 성(筬)을 두고, 둘째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봉과 난설헌, 균의 2남 1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ㄴ.형제자매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은 자는 공언(功彦)이며,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으로 불리었다. 1583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허성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같이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 등의 동인은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허성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주장에 찬성을 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후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과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이조판서에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07년 선조의 유교를 받게 되어서 세인들이 고명칠신이라 칭했다. 저서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둘째 오빠 허봉(許篈, 1551~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며, 자는 미숙(美叔)이다. 유희춘의 문인으로 허난설헌의 재능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1575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3년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1584년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을 하였다가 종성에 유배되었고, 1585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객사하였다. 저서로는 《하곡집》등이 있다.
동생 허균(許筠, 1569~1618)은 호가 교산(蛟山)이며, 동복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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