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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온가보총리, 회창열사릉원에 화환 진정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중국 온가보총리, 회창열사릉원에 화환 진정

CIA Bear 허관(許灌) 2009. 10. 5. 19:54

 

                                                   圖為溫家寶在毛澤東主席長子毛岸英墓前憑吊(온가보총리 모택동주석 장남 모안영 묘 앞에서 참배)  

북한을 공식친선 방문 중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국무원총리인 온가보가 대표단의 성원들과 북한 주재 중국 대사관 직원 등 도합 300여명과 함께 회창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릉원에 가서 화환을 진정했습니다.

회창군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북한의 복지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세기 50년대초 항미원조(한반도 내전개입) 전쟁시기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부가 있던 지역입니다.

전쟁 후 북한정부는 회창에 열사릉원을 건설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을 포함한 지원군 열사 134명을 안치했습니다.

지원군릉은 뭇산의 푸른 빛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온가보 총리는 북한방문단 전체 성원들을 인솔해 지원군 열사릉원에 화환을 진정했으며 숙연히 묵도했습니다.

온가보총리는 또 모안영열사의 묘앞에 꽃다발을 진정했습니다.

회창에서 온가보총리일행은 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유적지를 참관하고 방문록에 "중국인민지원군의 불멸의 공훈과 위대한 정신은 해와 달과 함께 빛나리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북한정부의 고위관원들이 온가보총리와 동행했습니다.

 

 10月5日,正在北韓訪問的中共中央政治局常委、國務院總理溫家寶前往北韓平安南道檜倉郡,憑吊位於這裡的中國人民志願軍烈士陵園。這裡是北韓規模最大、保存最完整的志願軍烈士陵園,包括毛岸英在內的134名志願軍烈士長眠於此。中新社發 周兆軍 攝

  正在北韓訪問的中共中央政治局常委、國務院總理溫家寶今天上午專程來到檜倉的中國人民志願軍烈士陵園,憑吊中國人民志願軍烈士。

  溫家寶總理身穿黑色西裝,打著黑色領帶,來到了離平壤兩個多小時車程的檜倉。他神情莊嚴肅穆地為中國人民志願軍烈士獻上花圈,並與來此憑吊的華僑華人及使館人員一起低頭默哀。

  他還到包括已故的毛澤東主席的兒子毛岸英在內的134位志願軍烈士的墓前憑吊。溫總理表示,50年過去了,中國人民志願軍烈士浩氣長存、英靈永在,先烈們將永遠活在我們心裏。他們偉大崇高的精神,永垂不朽。他說:“我代表全國人民來看望烈士,人民是不會忘記你們的。”

  1950年北韓戰爭爆發後,中國人民志願軍與北韓軍民並肩浴血奮戰,贏得了戰爭的勝利。1957年,北韓人民為了紀念在抗美援朝戰爭中光榮犧牲的中國人民志願軍烈士,修建了這座陵園。這裡共安葬了134位志願軍烈士,其中就包括犧牲在北韓戰場的毛澤東的兒子毛岸英。這是北韓規模最大、保存最完整的志願軍烈士陵園。

 

*温家宝在朝鲜凭吊中国人民志愿军烈士

 

 2009年10月5日 温家宝在朝鲜凭吊中国人民志愿军烈士 10月5日,温家宝来到毛岸英烈士墓前献上花束。他对着毛岸英的塑像说:“岸英同志,我代表祖国人民来看望你。祖国现在强大了,人民幸福了。你安息吧。” 当日,正在朝鲜进行正式友好访问的中共中央政治局常委、国务院总理温家宝与代表团全体成员、中国驻朝使馆工作人员、在朝中资机构、华侨、留学生代表以及中国青年代表团和艺术团成员等300余人,专程前往桧仓中国人民志愿军烈士陵园凭吊。 新华社记者 黄敬文 摄

 

10月5日,温家宝在一个个烈士墓前,时而驻足,时而深思,他深情地轻触烈士墓,似是向烈士转达祖国人民的思念之情。新华社记者 樊如钧 摄

 

              10月5日,温家宝敬献了写着“中国志愿军烈士永垂不朽”的花圈。新华社记者 黄敬文 摄 

 

 

*모택동의 장남 안영은 어떤 인물인가?

 

 

모택동은 첫번째 아내 양개혜(楊開慧)와의 사이에서 장남 모안영(毛岸英)을 얻었다. 1927년 모택동이 장정을 떠났을 때 장사(長沙)에 남겨졌던 양개혜는 1930년 국민당군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고 모안영은 동생들과 함께 상해에서 거지생활을 하기도 했다. 공산당이 모안영을 찾아내어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 푸룬제군사학원과 동방어언학원에서 공부하고 소련군의 탱크중위를 맡아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2차대전 독소전쟁 당시 독일의 베를린까지 진격했던 군인이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연안으로 돌아와 토지개혁 등의 일을 하고 북한에 들어오기 전에는 북경 기계공장에서 당위원회 부서기를 맡았었다. 한국전쟁에 지원해서는 팽덕회의 총사령부에서 러시아어 번역등의 일을 하였다고 한다.

 총사령부는 평안북도 대유동에 있는 금광으로 두개의 큰 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모안영이 북에 들어온 지 2-3주 가량된 1950년 11월 24일 밤 몇대의 무스탕이 주둔지 상공에 날아와 낮게 비행하며 정찰을 하였고 대체로 이런 일이 있으면 다음날 반드시 폭격을 하곤 했다.

 팽덕회는 시간이 날때마다 집무실로 쓰는 목조가옥에서 50000분의 1 작전지도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를 불안히 여긴 부사령관 홍학지(洪學智)는 팽 몰래 지도들을 동굴 방공호로 옮기고 그곳에서의 작전회의를 요청했다. 목조 가옥에는 당직을 서는 고서흔(高瑞欣)과 성보(成普) 그리고 안영이 남게 되었다.

 팽덕회가 방공호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않아 몇대의 미군기가 총사령부 상공을 스쳐 지나갔는데 많은 은백색의 번쩍이는 물건들이 떨어지고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팽의 집무실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성보는 얼굴 반쪽에 화상을 입고 폭발기류에 의해 튕겨져 목숨을 구했으나 모안영과 고서흔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리고 말았다.

 가장 기가 막힌 사람은 팽덕회였을 것이다. 주석님의 장남을 전투부대도 아니고 그래도 가장 안전할만 한 곳에서 일하게 했는데 오자마자 목숨을 잃다니......

 11월 25일 팽덕회는 친필로 주은래(周恩來)총리에게 편지를 썼다.

"저의 뜻인즉슨 북한의 북쪽에 묻고 지원군 사령부나 지원군 사령관 명의로 비석을 세워 그가 자원해서 입대한 과정과 희생된 경위를 설명하면 모택동의 아들된 것으로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그와 함께 희생된 고서흔과 한 곳에 묻으면 이것으로 조선인민들에 대한 교육적 의의도 매우 클 것이며 다른 열사들의 가족들 또한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후 팽덕회가 귀국하여 직접 상황을 설명하자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영은 이제 만 28세로 자기의 책임을 다했다. 혁명전쟁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주의를 위하고 침략자들을 반격하기 위해 중국인민들은 가장 우수한 자녀로 지원군을 편성하여 북한에 출동시켜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고 국가를 보위하다가 많은 우수한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안영의 유해는 북조선에 묻어 우리와 북조선 군민들이 고락을 함께하는 혁명정신을 구현하고 우리 중국과 북조선 양국 국민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군인인 팽의 말은 알아듣기 쉬운데 정치가인 모(毛)의 발언은 상당히 가식적으로 들린다.

모택동은 며느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안영의 시신을 중국으로 송환해 오는 것을 거부하였고 36만에 달하는 전사자들의 유해송환문제도 일거에 해결해 버렸다. 지금까지도 평북 회창에 있는 모안영의 무덤에는 북한 주
민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모안영, 그는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 모택동과 양개혜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1922년생인 그는 어머니 양개혜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고, 문전걸식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20여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것도 잠시 모안영은 군사훈련을 위해 소련으로 건너갔고, 소련의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베를린까지 진격했던 군인이었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이 공산화된 1949년 북경의 한 기계공장에서 일을하며, 유사제라는 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하여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혼한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이때 모안영은 신혼의 단꿈을 접고 재 입대를 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중국군 총 사령관 팽덕회를 따라 북한에 들어온 모안영은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서무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지 한 달여만인 1950년 10월 19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은  네이팜탄을 주무기로 북한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단행하였고,

이 때의 공습으로 유달리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파란만장했던 모안영은 29살 이라는 짧은 생을 마치며 전사하였다.

 

이후 각별히 사랑했던 장남 모안영을 잃은 모택동은 심한 자책감으로 괴로워 했다.

모택동은 자신의 막역한 친구에게 모안영이 한국 전선에서 전사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 내가 그 녀석(아들 모안영)을 파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

그러나 명색이 중국 공산당 주석인 내게 자식이 있었다는 처지를 생각해 보게... ...

만약에 내 아들은 조선전선에 파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만 파병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중국 인민들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중국 국가주석 모택동과 그의 아들 모안영(毛岸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