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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당과 대남정책 그리고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본문

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탈북민 자료

민혁당과 대남정책 그리고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CIA bear 허관(許灌) 2009. 7. 19. 10:21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창당이 남북 역사에 많은 것을 던져 주었습니다 민혁당은 통련당(통일혁명당) 창당 이래 두번째로 김일성 김정일 중심의 정당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주체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등장한 정당이며 통련당이 김일성 권력장악을 지원했다면 민혁당은 김정일 권력장악을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통련당 검거와 해체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평양방문 성사로 남북대화를 가능하게 했고 민혁당 검거와 해체가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통련당은 김일성 중심의 정당을 창당하고 김일성 유일사상노선 북한노동당을 추종했다면  민혁당은 김정일 중심의 북한 노동당을 인정하고 전통과 계승 입장에서 주체사상 창시자이며 김일성 후계자 김정일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는데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정부는 1990년 1월 남한지역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편하여 김정일 중심으로 세력개편을 추진했으며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1992년 4월  북한국가 원수,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돼 북한 인민군과 북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무를 맡았으며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무를 맡았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로 당선되었다.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서기 직무를 맡았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재차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받았다-북한관련 중국자료)

 

남과 북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도 중국식 모델 공산정부에서 사회정부로 수평적 권력교체(주석,총리등 5년 중임제)나 러시아식 모델 공산정부에서 자유민주정부로 수직적 권력교체(대통령 임기 4년 중임제)가 돼야 하며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화 민주화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럽연합처럼 미국정부 지원으로 한중일 중심으로 국가연합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과거처럼 남한 일부세력이 김일성,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모델로 김정일 아들 김정운 권력승계 작업을 지원, 추진하는 세력이 있다면 북한정부는 오판으로 핵무기 보유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남침모델로 김정일 아들 김정운이가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봅니다 남한 자유화 민주화 세력이 북한 김정일 독재정부와 투쟁하는  북한 자유화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탈북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세력이 돼야 남북통일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남과 북 통일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가 돼야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정부등이 남북통일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화 민주화정부를 지지하고 전쟁통일모델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제거하는데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핵보유 불인정, 세습 권력승계 반대, 전쟁통일반대와 평화통일 지지"

 

 

 

 

 

 

1.통일혁명당 간첩사건
1968년 발표된 통일혁명당의 대규모 대남 간첩단 사건이다
북한 김일성정부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남 통일전선 조직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남 평화공존과 연합전선 구축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그때 남파 간첩 김송무를 남파시켜 1964년 3월 통일혁명당을 결성했으나 1968년 7월 통일혁명당과 청맥 잡지등이 체포되거나 검거됨에 따라 조직의 와해 되었다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이문규(李文奎, 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최영도(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정태묵,윤광수등이 활동한 통일혁명당(약칭: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재남(在南)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 1964년 무렵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억눌린 변혁적 사회운동을 잠재력을 가진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등과 전(前) 남로당 당원을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결행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활동이 드러남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문화인. 종교인. 학생등이 많이 포함되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이관학. 송승환등 5명이 사형이 선고되고 신영복교수등 무기징역 4명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들은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김질락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가 중심이 된 조국해방전선을 두었으며 전라남북도, 부산. 경상북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기관지인 <청맥>을 발간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혁명당(통혁당)의 이념. 조직활동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른데 북한의 지령을 받은 단체로 보기도 하고 독자적인 혁명세력으로서 6.25 한국전쟁 이후 남한 내에서 전위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주체형 김일성주의 정당 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혁신 정치세력의 입지를 좁히고 남한 정치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였다
통일혁명당은 1971년 재건을 기도하였으나 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전위당 문헌 해설(한민전 구국전선 통일여명 편집국 자료)
통일혁명당 선언과 통일혁명당 강령(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 1969년 8월 서울)
http://ndfsk.dyndns.org/kuguk8/ku22/ic_030202.htm
-열린우리당 한명숙의원 남편인 박성준(현 상공회대 교수)씨는 지난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북한 노동당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통혁당) 산하조직인 경제복지회 주동자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통일혁명당 경북지역 조직원 권양섭
http://ugh.or.kr/ja/jangkisu1.html
1972 년 2월 경북지역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권양섭은 22년동안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1997년 3월 18일 사망
-1968년 2월 15일(조총련 자료)
남조선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고(故) 최영도씨를 추도하는 재일조선인의 모임 진행 그리고 남조선통일혁명당의 김종태를 비롯한 사형수(애국자)에 대한 사형을 반대하는 재일일본 조선인 중앙대회
-1969년 7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가칭 통일혁명당(통혁당) 간부 김종태에게 <영웅칭호> 수여
-1969년 11월 25일 통일혁명당 공판을 규탄하는 평양시 집회 개최
(1)통일혁명당사건 주요 인물
ㄱ.김종태(사형)--통일혁명당 위원장(당수) 및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1926년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냉천리(동) 출생
-통일혁명당 주도자였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등은 모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노동당원들이었으며 김종태는 사형집행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ㄱ)김종태의 북한정부 한민전(통일혁명당 후신) 자료
-통일 애국전위 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02_7_11/18.htm
-충신, 전위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45/15.htm
64년 3월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창당준비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조국해방전선> <민족해방전선>과 그 산하에 <60년 대학사회> <새문화연구회> <쳥년문학가협의회> <불교도 청년회> <동창회> <청맥회> <민족주의연구회> <학사주점>등 각종 합법, 비합법 대중단체들을 조직하여..
(ㄴ)검찰변천사(연도별 주요사건)
http://www.sppo.go.kr/intro/his_main0313.htm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서울에 무장공비 31명 침투(1.21사건)
1968년 8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 12월 19일까지 <통일혁명당 사건> 피의자 31명 기소
북한은 이 사건의 수괴인 간첩 김종태등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장특공대 14명을 공작선편으로 침투시켰고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영웅칭호를 부여함
(ㄷ)김종태전기 기관차공장(평양시 서성구역)
김종태는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남조선혁명전략에 따라 남한내에 지하혁명조직인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전신)결성을 기도했던 인물이다
-1999년 4월 27일 북한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은 궐기모임을 열고 김정일 총비서에게 충성다짐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 종업원들은 2001년 12월 6일 일본경찰의 재일본조선인 총연합회 중앙본부 수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평양방송이 12월 7일 보도 했다
-2002년 3월 21일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반미궐기 집회 개최
-평양지하철(역별사진)
http://wesleyc.com/kr/metro/map1.shtml
평양 DK4지하철 차량이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제작되었다고 주장 함
(ㄹ)평양방문기--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http://www.khistory.or.kr/connection/read.asp?num=7&page=1
가묘--1969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한 김종태와 체포과정에 사망한 최영도등..
(ㅁ)통일혁명당과 김종태 미화 신격화 소설책--애국시대(상.중.하)
주인공 김종태(장준호)와 통일혁명당이 남한지역 최초의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묘사
ㄴ.김질락(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민족해방전선 총책
ㄷ.이문규(리문규, 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조국해방전선 총책
ㄹ.최영도(검거과정 사망)---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2)통일혁명당 기관지(청맥)
http://ndfsk.dyndns.org
(3)통일혁명당(1968년 8월 21일-12월 19일)과 관련된 무장간첩 사건
-김종태는 북한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 미화 7만달러,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 간첩이었다 허봉학은 통일혁명당 와해 책임과 베트남식 남한점령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거되었으며 지금까지 정치 사상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ㄱ.1968년 1월 21일--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31명 북한군 제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청와대 기습사건
ㄴ.1968년 10월 30일--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은 통일혁명당 수사와 검거, 체포과정에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쳤다

 

 

                                                     김영환씨 반성문

 

                                                       조유식씨 반성문 

2.민족민주혁명당 간첩사건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북한이 1980년대 학원가의 친북투쟁을 주도해온 주사파 핵심세력들을 포섭, 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뒤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는 <민족민주혁명당>을 구축하여 이른바 <남조선혁명운동>을 사주해온 전형적인 지하당 사건으로 북한은 남한내 주사파를 대남적화혁명의 전위대로 삼기 위해 학생운동권에 영향력과 조직적 기반을 갖고 있던 김영환을 포섭, 입북시킨 후 남한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지하혁명지도부를 구축토록 지령하였고 김영환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주사파 지하조직 <반제동맹=반미청년회>의 핵심세력들을 하부망으로 포섭, 노동당에 현지 입당시켜 <관악산>등의 암호명을 부여하고 북한의 공작금으로 전국적인 조직기반을 갖춘 <민족민주혁명당>(약칭:민혁당)을 결성 암약해 왔으며 북한은 총책인 김영환이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민족민주혁명당>을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주체사상이 투철한 <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 하영옥을 접촉한 후 그를 통한 <민족민주혁명당>을 재결속시켜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정보원은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 관련 혐의 및 1997년 10월 검거한 최정남 부부 간첩 사건 연루의혹 관련 김영환을 내사해 오던 중 1998년 12월 18일 남해에서 북한으로 복귀하다가 격침된 반잠수정에서 김영환등의 전화번호가 암호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 증거확보에 주력해 오던 차에 1997년 10월부터 중국에서 체류 중이던 김영환이 정부당국에 입국허용 탄원서를 제출한 후 7월 29일 김영환이 자진 귀국함에 따라 자연스러운 분위기하에 4회에 걸쳐 심사를 실시 <1989년 7월 북한 직파 간첩에 포섭 되어 입북 귀환 후 북한 지령에 따라 지하당을 결성하였다>는 등의 자백을 받아내고 자수자에 준한 선처방침을 검토하고 있던 중 8월 16일 김영환이 돌연 <말>지에 찾아가 <국정원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는 거짓내용의 인터뷰를 하여 관련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잠적하였다가 8월 18일 18시 35분발 대한항공편을 이용 홍콩으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공황에서 긴급체포하고 관련자 조유식.하영옥. 심재춘. 김경환등을 차례로 연행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수사과정에 김영환과 조유식은 자수와 반성문으로 대한민국정부로 귀순하였다

-1997년 김영환씨가 베이징에 있을 때 울산 간첩 최정남이 붙잡혔다
그리고 최정남이는 김영환씨를 팔아 재야인사에 접근했다고 증언.
-1998년 12월 17일 남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 격침
북한의 반잠수정은 북한 공작원 배모씨와 하영옥씨를 밀입북시키려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2사단이 이 배를 발견하고 조명탄을 쏴 확인을 시도하자 아군 고속정이 접근할 수 없는 얕은 수로를 통해 북한으로 도주해 버렸다
북한은 이때 데려가지 못한 공작원을 월북시키고 한달 뒤 여수로 반잠수정을 침투시켰던 것이다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36세), 심재춘(29세)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44세)를 여수 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하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영환씨는 지난 1989년 7월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돼 노동당에 입당한 후 1991년 입북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학 후배인 조유식(말지 기자출신)씨와 함께 반잠수함으로 월북한 후 운동방향등에 논의하고 귀환하여 주사파 운동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뒤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발표함(예: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1990년 한국민족민주전선)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경환씨(말지 기자)는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민민투>위원장 등을 역임한 후 3차에 걸쳐 위장취업하여 노동자 의식화 활동을 하다가 1994년 4월부터 월간 말지 기자로 재직 중인자로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침투하여 서울 강남에서 <삿떼리아>라는 말레이시아식 음식점을 운영하며 암약 중이던 간첩 진운방을 1989년 9월 중순 대학 후배의 소개로 알게 된 후 김영환과 진운방간의 중간 연락책으로 암약하면서 1991년 8월 원주 치악산에서 김영환의 주재로 노동당 현지 입당식을 갖고 <관모봉>이라는 암호명을 부여 받았다
1998년 10월말 진운방이 원진우로 위장하여 재차 침투하자 남파 간첩 원진우를 하영옥과 접선하도록 주선하고 그후 원진우를 여러 차례 접촉하여 그간의 활동내용과 국내정세등을 보고한 혐의이다
-1999년 9월 14일 김영환(서울대 법대 공법과)씨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한과 민혁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혐의등을 받고 있던 박모(35세) 변호사 자수의사 밝힌 뒤 공소보류..
-1999년 9월 17일
8월 범민족대회와 관련하여 방북을 시도한 민족통일 부산연합의장 이성우씨 민혁당 가입죄로 추가 기소
-국가정보원은 민혁당 산하 영남위원회 총책 혐의를 받은 최진수씨와 고등학생 사업담당 혐의의 박정훈씨등 4명의 긴급체포했다

-1999년 10월 7일
민족민주혁명당 연루자가 100명-2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함
서울지검 공안1부(정병욱 부장검사)는 7일 북한 전위혁명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에 지난 1996년 4월 11일 총선 및 1995년 지방선거 출마자 5명을 포함해 20여명이 연루되었다고 발표
검찰, 민혁당의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서울지역 학생운동 사업부 소속, 고등학생사업부의 활동 가담자 20여명을 추가 확보 수사 중이라고 발표함
-한나라당 박진의원 자료
국군기무사령부가 국회 국방위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0년부터 지난2004년 8월까지 검거한 간첩은 2000년 1월 교수출신 간첩 한단석을 비롯해 2002년 5월 반국가단체 민혁당 경기남부 위원장 이석기씨와 2001년 9월 재중(在中) 조선족 간첩 모씨, 2004년 4월 재일(在日) 대남공작부 지도책 모씨등 모두 4명이라고 밝혔다
-Prochosun
http://prochosun.com.ne.kr/aaa/hwanginoh.html
<95년 위원회>를 이끌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최경호씨는 자신이 조직원 변의숙씨를 북한에 보낸 사실등 모두 시인하면서 <북한 노동당이 아닌 남한의 자생적인 운동조직 한민전의 지시를 따라..>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
양심수 홈페이지
http://www.yangsimsu.or.kr/freeboard_jaryosil_read.php?num=2
부산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는 울산지역 <희망의 젊은 연대>를 비롯해 12개 조직단체, <부산노동자회>등 7개 단체, 양산지역 1개 단체등 재야 합법, 반합법 조직에 조직원을 침투 및 외곽..
http://hrights.or.kr/tanwon.html
부산보안수사대는 영남위원회가 처음에는 한민전 영남위원회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조선노동당 영남위원회 또는 반제동맹 영남위원회로 번복
-한총련 제10기 의장이 소지한 한민전 문건과 강령
http://gs.kwpolice.go.kr/news/view.asp?num
(1)한국민족민주전선 등장 과정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1985년 7월 27일 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했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한국(남한)에서는 1990년 1월 1일 전후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ㄱ.반제청년동맹기관지--강철서신(김영환씨의 편지형식 글)
강철서신은 NLPDR이론과 북한 주체철학사전, 정치사전, 역사사전등에 수록된 NLPDR 반미이론을 체계적으로 제작하여 만든 소(小) 선전물이다
대표적 합법단체-----삼민투위와 자민투 등 내부 주사파계열 조직원
ㄴ.반미청년회 기관지---구국의 소리
구국의 소리는 김일성주의 표방과 한국전쟁은 북침에 의한 정의의전쟁으로 묘사 그리고 각종 NLPDR, 김일성 신격화 글 등 수록
대표적 합법단체---전대협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범민련,범청련,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자단체등) 내부 주사파 조직원
ㄷ.한국민족민주전선 기관지---새세대. 여명.아리랑. 백두산등
한민전이 90년 1월 창당하여 기관지를 <새세대>를 내걸고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를 중지하고 NLPDR 김일성노선보다는 주체사상 김정일 노선을 표방함으로 김정일 노동당 비서가 1990년 말경 인민군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민혁당이 창당되었다고 본다
민족민주혁명당이 통일혁명당 모델로 창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1985년 7월 27일 <통일혁명당>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고,일본에서는 통일혁명당이 1986년 8월 8일 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명했고,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경 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명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인가
ㄱ.통일혁명당도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두었다 민혁당이 한민전 조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김영환씨가 반제청년동맹 지하 기관지 강철서신 저작이다
강철서신 인적 자원 토대로 등장한 조직이 반미청년회와 한민전이다
1990년 1월에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민족민주혁명당(한민전)이 창립되었으며 반미전선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구축되었다 민혁당 지도부가 바로 강철서신과 구국의 소리 지하그룹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남한 땅에서 반미투쟁과 김일성주의 투쟁 배후세력이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 강철서신(구국의 소리)이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조직이 남한 재야 반미세력 배후이며 그들의 전위당(민혁당)이 전국적으로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NLPDR 지하당으로 구축되어 왔다
ㄴ.한국민족민주전선이 통일혁명당이라는 사실 입증 자료도 있다
북한정부는 통일혁명당을 1980년대 왔어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편 개명하였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각국 해외에 주체사상 조직이나 친북세력이 결집하여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편. 개명하였다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에 왔어 확대 개편하여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다 한민전 조직원들은 통일혁명당 소설책자 애국시대(1.2.3권)를 학습교재로 활용하여 민족민주혁명당을 통일혁명당으로 재건하려고 했다고 본다
(3)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구국전선(청맥)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통일혁명당이 한국민족민주전선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한민전 사이트 http://ndfsk.dyndns.org 

(4)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202/np202bb050.html

 

 

(5)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민전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6)남한지역의 한국민족민주전선 변천사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반제민족민주전선(2005년 1월) 
 

북한 반잠수함(전남 여수): 김대중정부 때 북한 반잠수함이 남해 해안 침투하다가 격침되었다 북한 반잠수함 검거로 남한지역 민전조직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해체되었고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부위원장 이선실 여간첩이 전두환정부 때부터 결성해 온 남한지역 한민전이 제거되었고 이선실 여간첩도 북한에서 사망했다  북한 대남 강경파 반미구국항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세력이 제거한 덕분으로 그 다음해 남북정상회담이 됐다

노태우정부때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자살투쟁도 한민전 배후 세력 조종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정부때 민전조직원 운반 수단으로 반잠수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해왔다(통일혁명당 해체와 남북회담 추진-이후락 평양방문)


참고 자료:

http://blog.daum.net/007nis/8585366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반잠수함 검거에 공헌한 김영환씨

김영환(1962년 ~ )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로 주체사상에 대하여 알기 쉽게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강철서신'이라고 부르는 글이다.

그는 19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면담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김일성을 면담한 후 그는 북조선의 현실을 알게 되어 반북주의자, 북한 민주화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는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라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라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핵심인물이었던 ‘강철’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이 자신의 ‘전향’ 운동사를 여과없이 털어놨다.

김 편집위원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문건과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과 민족해방(NL) 노선을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시켰던 인물. 그러나 그는 19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난 이후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전향했다.

김 위원은 26일 오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NDI·이사장 박관용)이 주최한 초청강연에서 ‘10만 주사파의 대부’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굵직굵직한 인생의 전환점들을 돌아온 강철 김영환. 80년대 운동권에게 그는 신화같은 존재였다. 강철이란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김 위원은 자신이 대학가에 민족해방운동론을 처음 전파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서울대는 불과 2, 3달만에 (민족해방-NL계열이)학생운동을 장악했고 전국에 걸쳐 8~10개월만에 학생운동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를 잡기 위해 활동한 경찰이 400명 정도가 됐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 묘소를 지키는 것은 물론 막내 이모가 세를 내준 집을 새벽에 엄습하기도 했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이 후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코믹한 상황까지 연출됐다는 것.

김 위원은 안기부에 검거된 후 ‘47일간의 고문’을 떠올렸다. “1월 9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인데, 바로 내가 교도소에 들어간 날이다. 교도소에 가게 됐지만, 안기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북한과 연계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공안당국의 역할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지만, 당시의 고문은 오히려 혁명의지를 다지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했다. 고문도 그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그를 꺾은 것은 투옥과 고문이 아니라 ‘북한의 현실’ 그 자체였다고 한다.

김 위원은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지하당인 민혁당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91년 밀입북했다.

김 위원은 “북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은 워낙 많이 알려져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른 측면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며 방북 당시를 떠올렸다.

특히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북한과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감행한 방북이 오히려 북한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진실의 문이 되고 말았던 것. 90년대 중반부터 김 위원은 ‘북한의 수령론은 사기극’이라는 글을 말지에 게재하고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공개 전향했다.

그는 북한이 ‘사이비 종교집단과 마피아 집단을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동료들 중 핵심간부만 추려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북한은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재를 펼치고 있다. 인민을 굶어죽이고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혁명가다. 인민의 적은 우리의 적이다. 인민의 적이 된 북한정권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나는 남은 인생을 북한정권을 타도하는데 바치려고 한다.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한다면 나의 벗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김정일과 함께 나의 적이 될 것이다.”

김 위원은 “그 이후 나는 북한민주화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불렀던 노래와 구호들이 지금도 한국사회 곳곳에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는 사실에는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친북이나 정통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학생운동을 벗어난 사람들”이라며 “당시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이 사회전반에 뿌리깊게 배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사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나는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가로서 이 분야에 총력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한 방청객이 김 위원에게 “대다수 국민들이 친북좌경화가 잘못된 길임을 일찍 알았는데 김영환 씨는 왜 그렇게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느냐”며 비판하자, “그런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과거 운동권의 잔재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해나가야 할 부분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을 동서 양 진영으로 분단했던 이른바 '철의 장막'의 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전이 동서를 실제로 격리시킨 철조망을 처음 철거한 헝가리에서 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 양 진영간에는 철조망 등이 길게 쳐져 있었으나 20년 전인 6월 27일 당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외상이 양국의 국경에 있었던 철조망을 절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동독 국민이 헝가리 등을 경유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그 해 11월에 '베를린의 장벽'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27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있는 의회에서 열린 기념식전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유럽의 정상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일의 쾰러 대통령이 '당시의 헝가리 국민의 용기있는 행동과 동독 국민에 대한 지원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헝가리의 쇼욤 대통령은 '유럽의 분단을 종결지은 경사스런 날'이라고 말해 철조망을 철거한 것이 그후 일련의 동유럽 혁명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