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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락 오바마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의 주요 생애 본문

Guide Ear&Bird's Eye/미합중국[美合衆國]

미국 버락 오바마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의 주요 생애

CIA Bear 허관(許灌) 2009. 2. 2. 10:12

미국 민주당은 민주주의 정당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독재주의와 전체주의(국가사회주의)입니다 오바마정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선진국 자유민주정부이어야 합니다 오바마정부가 경계해야 할 세력은 국가사회주의 좌익군정체제입니다 이들은  병정분리주의 국가로 군인이 국민을 지배하는 구소련공산당 모델 좌익군정체체입니다  과거 후세인이나 김일성등도 소련군부쿠데타를 지지했으며 개인사병 군사강국을 꿈 꾸다가 제거되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경계해야 대상은 가족주의를 붕괴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입니다 동성결혼이나 낙태 전면적 지지는 인류 보편적 가족주의를 붕괴시키고 카톨릭이나 각국 종교 이념을 부정하는 자유방임논리입니다  

민주주의는 자유권과 생존권을 균형적 입장에서 존중해야 합니다

러시아 현정부는 공산정부에서 자유민주정부로 수직적 권력교체로 등장한 정부이며 중국 현정부는 공산정부에서 사회정부로 수평적 권력교체로 등장한 정부입니다 아직도 중국정부는 병정분리주의 모델로 군사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가주석이 국가원수이지만 군 통수권자가 아니며 군사워원장이 군 통수권자입니다 좌익군정체제 주요 국가 중동이나 구공산권 국가에서 체제도전으로 사회혼란 원인이 되고 있으며 지역분쟁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주요 생애

(1)성장과정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 주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부모는 하와이 대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케냐 루오족으로 케네디 재단의 지원으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으며, 그에게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남겨주었으나, 버락이 2세 때 이혼하고 케냐로 돌아가 버렸다. 모친 앤 더넘은 하와이 주에서 버락을 홀로 키우던 중, 인도네시아 출신의 하와이 대학교 유학생인 롤로 수토로(인도네시아어: Lolo Soetoro 또는 Sutoro)와 재혼하였다. 고국 인도네시아로 돌아간 새아버지를 따라 버락도 1967년 ~ 1971년 인도네시아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그 후 버락에게는 인도네시아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동생이 생겼으며, 하와이 주에서 백인 외조부모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 후 모친은 새아버지와 다시 이혼하였다. 이와 같이 버락 오바마는 여러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데데가, 가족들의 인종마저 다양한 다문화 가정이지만 이로 인하여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고, 복잡한 가정사에 방황하여 한때 마약에 손을 대는 등 우울한 청년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로스앤젤레스옥시덴탈 대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재학하였고, 뉴욕컬럼비아 대학교로 편입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과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시카고 시의 빈민가에서 인권 운동가로 활동였다. 1988년에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진학,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1991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하버드 대학교 법과대학의 학술지 편집장을 지냈으며 탁월한 학업 성취력을 발휘하여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2)정치활동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오바마는 시카고로 돌아와 시카고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기독교계의 자선 봉사 단체 및 시민 법률 상담 활동을 하면서 지역 기반을 다졌고, 1990년대에 지역 인권 변호사로 그 명성을 드높였다.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시카고 대학교 법과 대학의 인기 전임강사로서 헌법과목을 지도하여 학술적으로도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96년일리노이 주 상원의원(민주, 시카고 남부 제13지역구 대표)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활발한 입법 활동으로 유명세를 드높였다. 그러나 2000년에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예비 선거에서 낙선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2004년 연방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2004년 전당 대회에서 기조 연설을 하며 유명인사가 되었고, 2004년 11월의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일리노이 주 대표)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70%의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다.

미국 중앙 정치무대에서 이라크전에 강력하게 반대한, 유일한 개혁적 아프리카계 정치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2004년 8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전당대회 기조연설과 2004년, 2006년 선거전 등에서 보여준 천재적인 대중연설 능력과 열성 지지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2007년 2월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경선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힐러리 클린턴과의 길고 치열한 경선 끝에 2008년 6월 3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수를 확보하여, 당의 공식 후보로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2008년 8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후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존 매케인 후보에 우세를 보이며 일찌감치 대세론을 세웠다. 그러나 공화당부통령 후보로 비교적 신선한 이미지의 세라 페일린이 지명되면서 한때 매케인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로는 양측의 치열한 선거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2008년 11월 4일 제 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선 주자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두배가 넘는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큰 차이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232년 미합중국 역사상 유색 인종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기록을 세웠다.

 

 

2.미국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의 주요 생애

조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모를 따라 델라웨어 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후,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 법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델라웨어 주 변호사 자격을 얻고 윌밍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곧 1970년 뉴캐슬 군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공직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만29세의 젊은 나이에 민주당 소속으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공화당 후보는 델라웨어 주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현직 상원의원이었는데, 민주당에서 그의 아성을 꺾을 후보는 없었다고 여겨져 경험이 일천한 바이든은 출마에 의의를 두고 나선 것이었다. 상대 공화당 후보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반면, 바이든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으므로 민주당에도조차 그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이든은 11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1%차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바이든은 미국 역사상 다섯번째로 젊은 나이에 상원의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으며, 현대 미국에서는 최연소 상원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였고 그로부터 1달 가량이 지난 후인 12월 18일, 그의 부인과 자녀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부인과 갓난 딸은 사망했고, 어린 두 아들은 중상을 입었다. 이 충격으로 상원의원직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나, 주변의 만류와 도움으로 의원직을 받기로 했다. 그 다음해 초, 국회의사당 대신 아들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상원의원 선서를 하였다. 두 아들은 그 후 회복되었으며, 바이든은 1977년 질 트레이시 제이컵스와 재혼하여 딸 하나를 더 두었다.

1973년부터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다양한 경력을 쌓으며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이후 6년 주기의 상원의원 선거에 계속 당선되어, 2008년 현재 35년 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상원의 대표적인 거물이 되었다. 특히 그는 외교위원회와 법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외교, 국방, 법률 분야의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2007년 회기부터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중이다

바이든은 1988년, 2004년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바 있다. 2008년 경선에서는 그의 풍부한 상원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버락 오바마힐러리 클린턴에 밀려 일찌감치 경선을 포기했다. 바이든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버락 오바마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었는데, 이는 그가 오바마의 일천한 정치 활동 경력과 오바마의 취약 분야인 외교, 국방 분야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11월 4일 대통령 선거 결과, 버락 오바마가 승리하여 바이든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관례에 따라 오바마 대통령보다 먼저 취임선서를 마쳤으며, 2009년 1월 20일(현지시각 정오)에 제47대 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뤄진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하였으며, 그의 상원의원 의석은 델라웨어 주 법에 따라 다른 사람이 승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