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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납치피해자 가족회, '북한 체포 인물은 협력자' 본문
북한측이 김정일 총비서에 대한 테러를 계획한 인물을 체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해 한국의 납치피해자 가족들로 구성돼 있는 단체 대표는 이번에 체포된 사람은 이 단체의 정보수집에 협력해 왔던 북한의 치안기관 직원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의 치안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는 그제 이례적인 담화를 발표하고, 올해 초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리'라는 인물이 한국 정보기관의 훈련을 받은 뒤 북한으로 돌아와 김정일 총비서에 대한 테러를 계획했다고 주장하고 한국 측을 신랄히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은 어제 '일체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한편 한국의 납치피해자 가족회의 최성룡 대표는 이번에 체포된 사람은 북한 신의주에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직원으로 한국의 납치피해자 가족회의 정보수집을 위해 협력해 왔던 인물이라고 밝혔습니다.
최성룡 대표는 또 '그 사람은 재작년 말이나 작년 초에 체포된 뒤 처형됐다고 들었다'며 북한측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NHK)
-최 대표는 리 씨의 경우 평안북도 신의주 보위부 소속이고 황 씨는 남측 정보기관 요원이 아니라 조선족 중국인이라며 이들은 김 위원장의 동정 파악이나 테러활동을 하려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납북자 어부 아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
최씨의 아버지 최원모(실종 당시 57세)씨는 광복 이전 평북 정주에 살며 켈로부대(대북첩보부대)에서 활동했다. 한국전쟁 중 남쪽으로 피란 와서 미군부대에 근무하며 인천에 살 때 최씨가 태어났다. 최씨 가족은 그후 장항으로 이주했다.
장항에서 최씨 가족은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배 세 척을 가진 선주였던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값비싼 전축을 사주었다. 그는 배 수십 척이 멀리서 한꺼번에 몰려들어도 돛대만 보면 어느 배가 아버지의 배인지 금방 알았다.
15세 소년의 평온한 일상은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가 보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고기잡이 배는 조금이라도 값을 더 받기 위해 목포로 가서 잡은 고기를 팔고 오기도 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며칠 더 늦게 돌아왔다. 그러나 1967년 6월 선원 7명과 함께 풍북호를 타고 나간 아버지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동네사람과 친척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사정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곧 돌아올 거라고만 했다. 몇 달 후 납북됐던 선원들이 온다고 해서 인천으로 아버지를 마중 갔던 어머니는 울면서 돌아왔다. 다른 선원들은 왔지만 아버지와 배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남은 배 두 척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거친 선원들을 상대하는 건 힘에 부쳤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어머니는 생선을 팔아 아들 3형제를 키웠다. 최씨가 속을 썩일 때면 어머니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빨리 다른 데로 시집이나 가버릴 걸"이라고 탄식했다. 그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 목이 메인다. 어머니 김애란씨는 2005년 세상을 떠났다.
"잡혀가서 40년을 못 본 아버지가 물론 그립지요. 그래도 지금 누가 제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가 살아오는 게 좋겠느냐'고 하면 그건 어머니예요. 우리 어머니가 욕도 잘하고 고집도 셌지만 정말 예뻤어요."
최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인천서 사업하는 작은 아버지 일을 돕다가 부인 문용희(48)씨를 만나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1989년엔 수협에 취직도 했다. 최씨는 잘 운다. 특히 가족 이야기를 할 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격정이 치받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에 번번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친척들이 어머니를 과부라고 괄시하니까 제가 친척집에 가서 때려부수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주 고집스러운 인간이 되어갔지요.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그러다 보니 내 성격이 이렇게 된 거 같아요. 남에게 큰 피해는 안 줬어도 방황을 많이 했어요. 공부야 워낙 싫어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동생은 대학을 나왔는데 11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형은 은행에 취직했다가 아버지 문제 때문에 그만뒀어요."
그가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구출하는 데 뛰어든 건 어머니의 뜻이었다. 1992년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가 북한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둘째야, 이건 잘못된 거 아니냐? 네가 가서 아버지 유해라도 찾아와라. 만일 처형당했으면 왜 당했는지 라도 알아와라"고 했다. 일단 가족들과 임진각에 가서 '북한은 납북자를 송환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부터 했다.
그러고 나니 막막했다. 우선 중국 쪽을 수소문했다. 북한에 선이 닿는다는 교회도 알아봤다. 중국을 드나들며 수도 없이 사기를 당했고 좋은 사람도 몇 명 만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돈을 찔러 넣어주며 '아버지 찾기'를 독려했다. 명절 때 쉬게 되면 "그까짓 명절 한 번 안 쇠면 어떠냐?"며, 중국에 한 번 더 갔다 오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납북자와 국군포로들의 소식을 알게 돼 탈출을 돕게 됐다. 2000년엔 아버지 소식도 확인했다.
"우리 아버지와 같이 잡혀 갔었다는 사람을 만나게 돼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지요. 1970년에 처형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결심을 한 거예요. 앞으로 납북자를 10명은 꼭 구해야겠다고요. 그러면서 한 사람씩 구해오게 된 거지요."
그가 귀국시킨 최초의 납북자는 이재근씨였다. 1970년 봉산호를 타고 서해에서 어로작업을 하다가 북에 끌려갔던 이씨는 1998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숨어살다가 최씨의 도움으로 2000년 6월 귀국했다. 그때 이씨가 확인한 납북자 70여명의 명단이 신문에 실리자 그걸 본 가족들이 최씨에게 도와달라고 찾아왔다. 그해 초 출범한 '납북자가족모임'은 규모가 커졌고 최씨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21/20081121009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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