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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옥 '북한판 장칭(江靑)' 될까 본문

-미국 언론-/한국 언론

북한 김옥 '북한판 장칭(江靑)' 될까

CIA Bear 허관(許灌) 2008. 9. 15. 14:30

 

건강에 심각한 이상신호가 켜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문고리’를 잡은 네번째 부인 김옥(44)씨의 앞으로 역할에 대해 ’북한판 장칭(江靑)’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의 세번째 부인이던 장칭은 마오가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을 때 마오와 중앙정치국을 오가며 연락원 노릇을 하던 마오의 조카 위엔신(遠新)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한때 중국 정치를 쥐락펴락했었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 위원장의 업무를 그의 매제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대신하고 있지만 김옥도 상당히 역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옥은 김 위원장의 세번째 부인 고영희(2004년 사망)씨 사망을 전후로 김 위원장의 안방을 차지한 이후 단순히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김 위원장의 국정운영을 보좌하면서 사실상 국정 전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김옥은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1980년대 초부터 고영희가 사망할 때까지 김 위원장의 서기실 과장 직함을 갖고 김 위원장의 업무를 특별보좌해온 덕에 일찍부터 정치와 권력의 생리에 눈뜬 것으로 알려졌다.

김옥의 아버지는 김정일 위원장의 각별한 관심 속에 오래전부터 노동당 재정경리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옥은 2000년 10월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의 특명을 받아 국방위 과장 자격으로 동행했고, 2005년 7월 김 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났을 때 참석하기도 했다.

김옥은 특히 2006년 1월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때 국방위 과장 자격으로 수행해 연회에서 북측 관계자의 소개로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과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 위원장의 네 부인중 외교 행사에 동행한 것은 김옥이 유일하다.

김옥의 ’권력 의지’는 장성택 당 행정부장, 김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 고영희 등에 대한 견제와 김 위원장의 삼남 정운의 후계자 내정 추진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장칭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사후 당시 2인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 제1부주석을 견제하고 화궈펑(華國鋒)을 총리 서리에 임명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고영희의 생존 때만 해도 장성택 부장과 김정남, 김옥은 모두 고씨의 강력한 견제를 받는 같은 처지였으나, 고씨 사망 후 돌변한 김옥은 리제강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내세워 장성택 부장의 복귀를 끈질지게 방해했다.

김옥으로선 중국에 나가있는 김정남은 권력에 멀어져 있어 어느 정도 안심되는 상황이지만 장 부장은 김 위원장 다음가는 2인자였던 만큼 ’경계대상 1호’라고 할 수 있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만약 김옥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아마 장성택은 2년여동안 업무정지 처벌을 받지 않고 고영희 사망 후 곧 복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성택 부장이 결국 김 위원장의 재신임을 얻어 복귀한 데 이어 작년 10월 당 행정부장으로 임명돼 사실상 2인자로서 지위를 되찾은 데다 장 부장의 후원을 받는 김정남의 후계자 가능성이 힘을 얻으면서 김옥의 위기감은 커지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1년여 전까지만 해도 후계자 지명을 서두르면 김정일 위원장에게 레임덕이 생길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후계문제 거론에 제동을 걸었던 김옥이 최근 김 위원장의 삼남 정운을 후계자로 선정하기 위한 물밑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를 말해준다.

김옥은 김 위원장의 건강과 나이를 감안해 후계자 선정을 미루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선정해 후견인으로서 후계자까지 좌지우지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고영희와 김옥간 인연이 각별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영희의 생존시 그의 ‘각별한’ 견제를 받았던 김옥은 고영희 사망 후 그의 잔재를 없애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후문이다.

북한에서 유명했던 보천보전자악단이 지고 김 위원장이 국립교향악단 공연을 관람하는 등 클래식 붐이 분 것도 고영희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김옥 입김의 결과라는 것이 대북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무용수 출신인 고영희는 생전에 보천보전자악단의 공연과 의상에 이르기까지 직접 챙기며 북한 최고의 예술단으로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고영희 사망 후,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클래식을 좋아하는 김옥은 김정일 위원장의 후광을 업고 국립교향악단의 급성장을 주도했고, 실제 북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첫 국립교향악단 공연 관람은 고영희 사망 후인 2004년 12월이다.

그 후에도 김 위원장은 “국립교향악단은 나의 악단”이라고 말하며 2005년 1회, 2006년 3회 공연장을 찾았고, 이를 원동력으로 교향악단은 전용극장 확보 등 북한 당국의 막대한 물적 지원을 받았으며, 지난 2월 평양에서 미국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대미외교의 첨병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이 악단의 영국과 미국 순회공연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나, 경비후원 의사를 밝혔던 한 영국은행이 최근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에 따라 난색을 표시함으로써 무기 연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들은 “김옥은 김 위원장의 실질적 부인이었던 고영희의 잔재를 없애고 싶어했다”며 “고영희 사망 후 보천보전자악단의 지위는 일반 예술단으로 추락했을 뿐 아니라 해체설이 나돈 것도 이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도 중국의 장칭을 연상케 한다.

배우로 활동했던 장칭은 노신예술대학에서 연극과 지도원도 역임하면서 문예정풍 운동을 주도하는 등 예술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대북 소식통은 “정운이 김옥에 의해 후계자로 선정된다고 해도 둘 사이가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며 “정운은 어머니 사망 이후 김옥의 노골적인 견제로 매일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했던 시절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른 대북소식통은 “김옥의 권력은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에서 어디까지나 김 위원장의 생존 때까지 가능한 일”이라며 “김 위원장이 없는 김옥의 권력은 끝까지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chsy@yna.co.kr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15/20080915004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