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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선생 "본관 경주 이씨로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무장항일운동,상해임시정부 법무.재무장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역임" 본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선생 "본관 경주 이씨로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무장항일운동,상해임시정부 법무.재무장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역임"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29. 13:35
1869. 12. 3 서울~1953. 4. 17 부산. 독립운동가·정치가. | ||||||||||||||||||||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가 됐다. 1885년(고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886년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1887년 형조좌랑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이후 1892~96년 홍문관교리, 승정원부승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지냈다. 1896년 장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관직을 사임했고, 1904년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표를 올려 부임하지 않았다. 1905년 외부(外部) 교섭국장(交涉局長)으로 다시 등용,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한성재판소 소장,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 1909년 법률기초위원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의 가족 50여 명을 이끌고 남만주에 들어가 사재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조국해방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1912년 학교를 퉁화 현[通化縣]으로 이전·확충했고, 1913년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하자 베이징[北京]으로 가 위안 스카이[袁世凱] 총통을 만나 한인들의 보호를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베이징[北京]에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4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법무총장·재무총장 등을 지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고, 1942년 재무부장으로 다시 피선됐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민족진영을 이끌었다. 1947년 정국이 혼란과 대립을 되풀이하고 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자 이에 회의를 느껴 일체의 공직과 절연하고 신흥대학(新興大學)을 설립해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해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1년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장을 지냈다. 1952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4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동으로 옮겨졌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저서로 〈감시만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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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 독립 선언 민족대표 39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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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류동렬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
신규식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여준 윤세복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
----이종찬 前국정원장이 이시영 선생의 후손이다---------
[조용헌 살롱] 이시영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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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형제는 모두 6형제였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모두 합심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일제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는 통탄이었다.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가 이시영,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다. 서울 명동을 떠나면서 처분했던 재산총액은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0억원 정도. 이 돈으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여기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모두 중국에서 죽었고, 이시영만 유일하게 광복 이후 귀국할 수 있었다. 이시영은 17세(188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평안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을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만주로 갔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수많은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으며, 임시정부 법무총장, 광복 후에는 부통령을 지냈다. 그 이시영의 52주기 추모식이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다. 한국은 이 집안에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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