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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崔圭夏) 前대통령 "1952년 일본대표부 총영사와 국무총리 역임"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최규하(崔圭夏) 前대통령 "1952년 일본대표부 총영사와 국무총리 역임"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1. 14:36

최규하(崔圭夏)

 

출생지-강원 원주
생년월일-1919/07/16

 

[학력]   
1937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졸
1941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학사)
1943년 만주국 다퉁학원(大同學院) 정치·행정학(수료)
 
[경력]   
1945년 경성사범대학(現서울대학교)교수
1946년 미국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 과장
1948년 농림부 양정과 과장 
1951년 농림부 귀속농지관리국 국장서리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
1952년 駐일본대표부 총영사
1957년 駐일본대표부 참사관
1958년 제4차 한일회담 대표
1959년 駐일본대표부 공사
1959년 외무부 차관
1963년 외무부 본부대사
1963년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4년 駐주말레이시아 특명 전권대사
1967년 외무부 장관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대표
1975년 국무총리서리
1976년 국무총리
1979년 대통령 권한대행
1979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1979년 제10대 대통령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
2006년 별세

 

 

1919. 7. 16 강원 원주~2006. 10. 22 서울.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자는 서옥(瑞玉), 호는 현석(玄石). 아버지 양오(養吾)와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효경〉 등을 시작으로 〈소학〉·〈논어〉·〈맹자〉·〈대학〉·〈중용〉·〈통감〉 등을 읽었다고 한다. 1926년 8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한문과 예절을 배우는 가정학습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1932년 4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4학년 때인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세째 딸 홍기(洪基)와 결혼했다. 1937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3월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를 졸업한 후 만주 대동학원(大同學院)에 입학, 1943년 졸업했다.

1945년 8·15해방 후 서울사범대학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인재의 적재적소 보임을 주장하던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게 발탁되어 9월 10일 외무부 통상국장이 됨으로써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1952년 7월 17일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7년 5월 16일 주일대표부 참사관, 1959년 3월 20일 주일 공사 등으로 재임하면서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ECAFE) 제11·12·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등 건국 초기 외교기반구축에 진력했다. 1959년 9월 12일 외무부차관이 되었으나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12일 사임했다. 1962년 외무부장관 고문, 1963년 외무부 대사, 1964년 11월 주말레이시아 특명전권대사 등을 지냈다. 1967~71년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71~75년 대통령외교담당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2차례 평양을 방문했고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하기도 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되었다. 4년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외교관 출신의 총리로서 안보와 경제에 중심을 둔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에 진력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0년 5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고, 그해 8월 16일 대통령에 당선된 지 8개월여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81~88년 제5공화국 헌법 제66조 2항에 의거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93년 민족사 바로 찾기 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번째 사람이었다.

2006년 10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부터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의 역사적 격동기를 이끌었던 그는 당시의 진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역사의 무대를 떠났다. 일등수교훈장(1970), 수교훈장 광화장(1971), 무궁화대훈장(197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80), 벨기에 왕관십자대훈장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