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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선동가인가 빈민 영웅인가 본문

남아메리카 지역/베네수엘라

차베스, 선동가인가 빈민 영웅인가

CIA bear 허관(許灌) 2007. 3. 18. 17:40

▲ 우고 차베스 베네주웰라 대통령
부시 대통령이 남미 5개국 순방에 나선 것과 때를 맞춰 베네주웰라의 차베스 대통령 (53세)이 또 나섰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깃발을 든 부시의 반대편에서 차베스는 남미식 대체 경제와 좌파 사회주의로 맞서고 있다.

브라질에 이어 부시 대통령이 두번째 순방국인 우루과이를 방문했을 때 차베스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아르헨티나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를 기획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거침없는 반미, 반부시 언사는 참을 줄 모르고 터져나왔다.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내가 '정치적으로 사망'이라고 하면, 그는 내가 실제로 죽기를 바란다. 나는 그가 정치적 시체이기를 바라는데, 실제로도 그렇다. 그는 정치적 시체다."

"부시 대통령의 지적 수준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하다. 이 말은 나나 피델 카스트로가 꾸며낸 말이 아니라 미국 연구기관이 조사한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에 대해 '감히' 이처럼 과격한 언사를 쓸 국가 원수가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차베스는 미국에 와서도 버젓이 부시를 '악마'라고 불렀었다. (2006년 유엔 총회장에서의 일인데, 엄격히 말하면 유엔은 미국 영토가 아니다.) 부시를 악마라고 선언한 차베스는 미국 정계와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정작 총회장에서는 박수를 받았다.

부시 대통령이 브라질, 우루과이, 콜롬비아, 파라과이, 멕시코를 순방하는 동안, 차베스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니카라과, 아이티, 자마이카를 순방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부시는 브라질에서 자신의 재임기간 6년동안 85억달러를 지원했다고 자랑했는데, 현지 신문은 "이 금액은 이라크 전비 5일치에 불과하다. 차베스 대통령이 남미에 쏟아 붓는 지원금의 대양에 비하면 물 한 방울"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일견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차베스이지만 브라질 신문이 '바다처럼 넓은 지원금'이라 극찬한 것처럼 그의 과격한 언동 뒤에는 뜻밖의(?)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문맹 퇴치를 위해 국민들에 무료 교육 기회를 주고, 부유층과 기업에 몰려있던 오일 달러를 재분배해 빈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했다.



▲ "사람 바보로 만드는 수퍼맨 영화 대신 촘스키 책이나 좀 읽으시오" 미국민들에게 충고하는 차베스
차베스식 휴머니즘의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지난 2005년 차베스는 미국의 '빈민'들을 위해 도매 시가보다 40 퍼센트 싼값으로 난방용 연료를 제공했다. 뉴욕 시의 다섯개 지구 주민들이 혜택을 보았다. 차베스가 제공한 2천5백만 갤런의 연료는 아파트 7만 채, 주민 20만명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뉴욕의 현지 신문 '뉴욕데일리뉴스'는 석유로 사람의 마음을 매수한다면서 차베스를 '오일 포주'라고 비난했다.

부시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비판하는 그이기에 '적국'인 미국에 '연료 보시'를 한 차베스의 돌출 행동은 더욱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다.

전 남미 대륙을 대상으로 한 지원 사업도 두드러진다. 중동 불안으로 유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면서 차베스는 엄청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는 막대한 자금을 빈국 지원에 쏟아 붓는다. 2005년 8월 20일 쿠바의 라틴아메리카 의대에서 열린 국제 장학생들의 졸업식에 참석한 차베스는 쿠바와 공동으로 제2의 범라틴아메리카 의대를 설립하기로 약속한다.

20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 한국 돈으로 20-30조원이 투입되는 이 의대는 전액 장학금을 받는 의대생 10만여명을 외과의사로 길러내 전 세계 빈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종신제 대통령처럼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차베스도 정치적으로는 여러차례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베네주웰라 육사를 졸업한 뒤 17년간의 군 생활 끝에 중령이 된 차베스는 카를로스 페레스 대통령의 폭정에 저항해 1992년 쿠데타를 시도한다. 그러나 계획 미숙과 군내 지지가 약해 쿠데타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투옥된다.

차베스의 쿠데타 기도가 효력이 있었던지 페레스 대통령은 1년 뒤에 탄핵되고 칼데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차베스는 94년 사면된다. 이때부터 차베스의 정치 역정은 승승장구, 98년 대통령이 되고, 2006년 재선되면서 남미의 지도자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국내 정책이 좌파식 사회주의로 요약된다면 외교 정책은 반미, 반세계화로 압축된다. 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공공연한 반대를 표명하고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과 무역장벽 제거에도 손을 내젓는다. 민영화도 반대한다.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심화시킬 뿐이란 이유에서다.

중동 불안으로 뛰어오른 오일머니와 힘을 바탕으로 그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세 나라 모두 미국의 경쟁국이거나 적대국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사사건건 부시와 부시의 외교정책에 시비를 거는 차베스이지만 양국 관계를 이어주는 석유는 어쩌지 못한다. 베네주웰라는 미국이 원유를 수입하는 나라 가운데 네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 영향력이 크다.

자신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 국명까지 베네주웰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꾼 차베스는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구입을 중단하고, 중국, 브라질 등으로 무기 수입선을 다양화하고 있다.

거친 언사로 유명한 차베스이지만 유엔에 와서는 미국 시민들에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수퍼맨이나 배트만같은 영화나 보지 말고, 촘스키 책이나 좀 읽으시오"라면서 점잖은 충고까지 했다. 이쯤되면 부시와 차베스 중에 누가 한 수 위인지 정말로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이진숙 기자 [leejs@imbc.com]
- 1986년 입사
- 문화부, 사회부, 시사매거진 2580
- 현재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