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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에서 만난 북한 아이들 본문

Guide Ear&Bird's Eye/북한[PRK]

압록강변에서 만난 북한 아이들

CIA Bear 허관(許灌) 2007. 3. 18. 10:54
[필진] 압록강변에서 만난 북한 아이들
필진네트워크
» 지난해 10월 북한 핵실험 직후 중국 단중에서 찍은 신의주의 북한 여학생들. 웃음이 해맑다. ⓒ 필진네트워크 이상수
지난해 10월9일 북한은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뒤 세상이 소란스러워진 건 여기서 새삼 다시 적을 필요 없겠지요. 10월 9일은 바로 이틀 전인 10월 7일 제가 베이징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출근한 첫 날이었습니다. 그 주의 금요일인 13일, 바로 그 유명한 13일의 ‘프라이데이’에, 저는 동료 사진기자 이정용 씨와 함께 베이징을 거쳐 단둥으로 날아갔습니다. 중국까지 대북 유엔 결의안에 찬성하고 나서는 마당에 북-중 국경선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출장이었죠.

그 때 <에이피>와 <로이터> 등 세계의 통신사들은 열심히 압록강 건너 북한 땅에 접근해 북한 동포들의 표정을 찍어 올려댔습니다. 저 또한 정용씨와 함께 열심히 압록강 국경지대를 훑고 다녔습니다. 긴장감이 별로 없는 국경 가운데 하나인 북-중 국경 건너 마주친 북한 주민들은 우리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손을 흔들면 그들도 함께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습니다. 물론 외딴 곳에서 만난 한 농부는 우리가 말을 걸자 외면하고 마을쪽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적대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외국의 통신사들이 올린 사진 속에 찍힌 북한 군인들은 성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돌까지 던지고 있는 겁니다. 저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북한 주민이나 경계중인 인민군을 찍기에 가장 좋은 곳은 단둥 나루터입니다. 여기서 유람선이나 쾌속정을 빌려 타고 신의주쪽으로 접근해서 주민들을 찍는 거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외신 기자들은 쾌속정을 빌려서, 신의주쪽 뭍에 거의 닿을 정도로 접근해서, 인민군의 코 바로 밑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겁니다. 이건 도대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짓입니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나라의 통신사에 고용된 기자들이 북한인의 인권과 초상권에 대해선 철면피처럼 무시하고 있는 거죠. 북한 인민군이 아니라 세계의 그 누구라 해도 그런 식으로 예의 없는 행동을 하면 찍지 말라고 사래질을 치거나 고함을 칠 것입니다. 이라크의 미군은 망원렌즈를 꺼내든 사진기자에 사격을 퍼부어 그를 살해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미군은 나중에 망원렌즈가 ‘무기’인줄 오인했다고 변명했다더군요.

우리는 외신기자들이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북한 주민을 자극해 ‘그들이 원하는 북한의 이미지’를 얻어 단둥으로 돌아오는 걸 보며 화가 치밀었습니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거짓말을 할 수 없다지만, 저는 단둥 출장 때 사진이 얼마나 고약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새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쾌속정 운전사에게 한국 돈 1만원 정도만 더 주면 시키는 대로 신의주 쪽으로 얼마든지 바짝 붙일 수 있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고 운전사가 규정 대로 가는 길만 따라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기 올린 사진은 그 때 찍은 북한 여자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자면 마음 속 깊이 잔잔한 물이 고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니면 기껏해야 중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이 앳된 계집아이들은, 지금은 정박해 어디로도 가지 않는 배의 갑판 위에 올라와 압록강물을 바라보며 놀고 있었습니다. 배 난간 곳곳에 얼룩진 녹자국은 이 배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항해를 멈췄는지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당시엔 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예민한 시기인지라 이런 얘기를 차분히 할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2월13일 6자회담에서 초기 이행조처에 대해 합의한 뒤, 북한과 미국의 행보가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조심스레 걸어도 좋을 듯합니다. 북-미 관계는 워낙 될 듯하다가도 결국 실망을 안겨준 적이 너무 많아 여전히 썩 믿음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냉전지대인 한반도가 언제까지 이렇게 정박해있지는 않겠지요. 그 때가 되면 압록강 물결을 따라 일렁거리기만 하던 그 낡은 북한 배도 물살을 헤치며 항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떠날 수 없는 배의 낡은 갑판 위에서 놀던 아이들도 더 해맑게 웃을 수 있겠지요.

-2007. 3. 12 자정이 가까이 올 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