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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선배' 최용건의 부인은 왜 중국에서 죽었나? 최용건의 잘못된 '유언'으로 빨치산 공적도 매장 본문

Guide Ear&Bird's Eye/북한[PRK]

'김일성 선배' 최용건의 부인은 왜 중국에서 죽었나? 최용건의 잘못된 '유언'으로 빨치산 공적도 매장

CIA Bear 허관(許灌) 2007. 1. 19. 07:30
963년 주덕∙하룡의 환영을 받으며 중국을 방문한 최용건(가운데 손 들고 있는 사람).
김정일이 중국에서 사망한 최용건(1976년 사망) 전 부주석의 미망인 왕옥환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최용건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선배이자 6.25 전쟁 당시 전선사령관이었다.

최용건의 미망인 왕옥환은 왜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사망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왕옥환은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던 최용건을 자기의 침소 밑에 숨겨 구원해주면서 부부가 됐다. 중국인 부잣집 딸이었던 왕옥환은 아버지뻘 되는 최용건을 사랑하여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결혼 후 이들은 북한에서 살았다.

최용건(가명∙최석천)은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고 이 때문에 민족보위상(국방장관)을 거쳐 제1 부주석을 지내는 등 북한 내 당∙정∙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최용건은 1923~1925년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다녔고 26년에는 황포군관학교(교장∙장개석) 교관으로 있으면서 27년 광저우 폭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파견되어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을 거쳐 소련 88특별여단 참모장과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빨치산 경력으로는 김일성의 연장자이자 선배였다.

특히 중국의 주덕, 주은래, 하룡 등과 절친한 사이여서 북-중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때 해결사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용건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한마디 때문에 그는 북한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 북한이 이상하게 변해가자, 최용건은 죽기 직전 부인 왕옥환에게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있지 말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은 대노하여 최용건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묻어버리고 일체 공적을 평가하지 않았다. 76년 최용건이 사망한 후 북한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최용건에 대해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빨치산 선배인 최현이 사망한 후 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최현의 공적을 선전해준 것과는 대비된다.

김일성과 함께 했던 다른 빨치산 출신들은 대부분 죽으면서 “수령님을 부탁하오” 또는 “장군님을 더 잘 모시지 못하고 가서 미안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최용건의 유언과는 상반된다. 최용건처럼 공로와 업적이 생매장 당하지 않으려면 죽을 때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던 것이다.

최용건의 유언으로 왕옥환은 중국으로 이주했지만 최용건은 북한사회에서 매장되었다. 이번에 김정일이 왕옥환의 빈소에 조화를 보낸 것은 다분히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김민세 기자(신의주 출신, 2005년 입국)]

*최용건[崔庸健]

1900 평북 태천~1976.

북한의 군인·정치관료.

최용건
1921년 3월 평안북도 정주 오산중학교 3년을 중퇴했고, 1925년 4월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황보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1927년 중국 광둥[廣東]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폭동에 가담했고, 1936~39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7군단장과 제2로군 참모장 등을 지냈다. 8·15해방 이후 1945년 10월 평안남도 자치준비위원회 중앙위원직을 맡았고, 11월 조만식이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자 이를 와해·장악할 목적으로 김일성의 천거를 받아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겸임했다. 한편 서울의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은 최용건을 제거하기 위해 1946년 3월 그의 집을 습격했다. 1946~55년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1947년 2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겸 예산심의위원 등을 지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제1차 내각의 민족보위상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1950년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 등을 지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방위사령관직을 맡았다. 1953년 2월 조선인민군 차수(次帥)로 승진했고, 1955년 7월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 되었다. 1956년 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4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상무위원·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겸 상임위원회 위원장, 1958년 12월 중앙위생지도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국가부주석에 올랐고,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공직에 있는 동안 북한 정권 및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 중국·이집트·알제리·말리·기니·캄보디아·이라크·시리아·이집트·탄자니아·소련·쿠바 등지를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955년 9월 자유독립훈장, 1958년 9월 국기훈장 제1급, 1960년 6월 노력영웅 칭호, 국기훈장 제1급, 금메달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