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오사마 빈 라덴은 누구인가? 본문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오사마 빈 라덴은 누구인가?
CIA Bear 허관(許灌) 2006. 9. 8. 22:06미첼 초수도브스키 (by Michel Chossudovsky)
오타와대학 경제학과 교수
(Professor of Economics, University of Ottawa)
지구화 연구센터(Centre for Research on Globalisation (CRG)), 몬트리올
2001년 9월12일 globalresearch.ca에 올려짐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이 발생한 지 단 몇시간만에 부시 행정부는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조직이 주요 용의자"라고 결론냈다. 중앙정보국의 조지 티네트(George Tenet) 국장은 빈 라덴이 "경고를 거의 안하거나 아예 안하면서 연쇄 공격"을 계획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외무장관 콜린 파월(Colin Powell)은 이 공격을 "전쟁 행위"라고 불렀고, 부시 대통령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저녁 텔레비전 연설에서 "이번 일을 저지른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해주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전직 중앙정보국장 제임스 울시(James Woolsey)는 "국가 차원의 후원"을 지목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외국 정부가 공모했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전직 국가안보보좌관 로렌스 이글버거(Lawrence Eagleburger)는 "우리가 이런 공격을 당하면 우리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며 엄청난 보복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공식 발언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서방 언론의 주술문은 중동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징벌 행위(punitive actions)"의 개시를 승인했다. 뉴욕타임스에 쓴 윌리엄 사피어(William Saffire)의 글은 "우리가 공격자들의 기지와 캠프를 합당하게 확정했을 때는 그곳을 분쇄해야 한다. 부차적인 피해의 위험을 최소화하되 인정하면서 말이다. 또 테러를 수용하는 국가들을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흔들어 놓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 글은 오사마 빈 라덴의 역사와 냉전시기 이슬람 "지하드(성전, Jihad)"와 미국 외교정책 형성의 상관관계 및 그 여파에 대해 약술한 것이다.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 공격의 핵심 용의자이며, 아프리카 지역 미국 대사관 폭탄 공격 때문에 연방수사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라고 이름 붙여준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과 아프간 전쟁기간 중에 "역설적으로도 미국 중앙정보국의 후원 아래 소련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도록" 불려 나왔다. [1]
1979년 소련이 친공산 정부인 바브라크 카말(Babrak Kamal)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에 대응해 "중앙정보국 사상 최대 규모의 비밀 공작"이 벌어졌다. [2]
아프간의 성전(지하드)을 소련에 대항하는 전체 무슬림 국가가 참여하는 전세계적 전쟁으로 만들고 싶어한 중앙정보국과 파키스탄의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ISI, 인터 서비시스 인텔리전스)가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가운데 40개 나라에서 3만5천명의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여했다. 수만명은 또 파키스탄의 마드라사(madrasahs, 이슬람교 대학)에 유학을 왔다. 결국 10만명 이상의 외국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아프간 성전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다. [3]
이슬람의 "성전"은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가 후원했으며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한 것이었다.
1985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 결정 명령(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 166호에 서명했다... 이는 점차 늘고 있는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지원을 승인하는 것이었으며 비밀 아프간 전쟁의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 목표란 비밀 공작을 통해 아프간에서 소련군이 패배하게 만들고 소련의 철수를 부추기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비밀 지원은 군수 물자를 크게 늘리는 것에서 시작됐다. 군수 물자 공급은 1987년에 연간 6만5천톤에 달할 때까지 꾸준히 늘어났다... 파키스탄 라왈핀디(Rawalpindi) 근처 간선도로변에 있는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비밀 본부로 향하는 중앙정보국과 국방부의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행렬"도 진행됐다. 거기서 중앙정보국 전문가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원들과 만나 아프간 반군의 작전 수립을 도왔다. [4]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를 이용해서 무자헤딘을 교육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중앙정보국이 후원하는 게릴라 훈련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합쳐졌다.
주제는 이슬람교가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이며 성스런 이슬람이 무신론자인 소련 군대에 의해 침해당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좌파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독립을 다시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5]
파키스탄 정보기관 (Pakistan's Intelligence Apparatus)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는 "중개자"로 이용됐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성전" 비밀 지원은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 중앙정보국은 직접 통로를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비밀 공작이 "성공"하기 위해 워싱턴은 소련 파괴라는 "지하드"의 궁극의 목표가 드러나지 않게 조심했다.
중앙정보국의 밀턴 비어드먼(Milton Beardman)의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아랍인들을 훈련시키지 않았다." 카이로의 알아람 전략연구센터(the Al-aram Center for Strategic Studies)의 아브델 모남 사이달리(Abdel Monam Saidali)에 따르면, 빈 라덴과 "아프간 아랍인들"은 "중앙정보국이 허용한 고도의 세련된 훈련"을 받았다. [6]
비어드먼은 이 점에 대해서 오사마 빈 라덴이 워싱턴을 위해서 하고 있는 임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확인해줬다. (비어드먼이 인용한) 빈 라덴의 말로 표현하면 "나와 내 형제들 누구도 미국의 지원을 보여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7]
민족주의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이슬람 전사들은 그들이 미국을 위해서 소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정보기관의 고위층에서는 접촉이 있었지만, 현장의 이슬람 반군 지도자들은 워싱턴이나 중앙정보국과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의 후원과 대규모의 미국 군사지원으로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는 "정부기관 모든 곳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수평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8] 이 기관은 15만명에 달하는 군인, 정보부원, 관료, 비밀 공작원, 정보제공자들로 구성된 스태프를 갖췄다. [9]
한편 중앙정보국의 공작은 지아 울 하크(Zia Ul Haq) 장군이 이끄는 파키스탄 군사정권 또한 강화시켰다.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의 관계는 지아가 부토를 축출하고 군사정권을 세운 이후 더욱 긴밀해졌다... 아프간 전쟁 기간 내내 파키스탄은 심지어 미국보다도 더 강한 반 소련 성향을 띄었다. 소련군이 1980년 아프간을 침공한 직후 지아는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을 동요시키기 위해 아이에스아이의 우두머리를 파견했다. 중앙정보국은 1984년 10월에 이 계획에 동의했다...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파키스탄과 미국은 뒤에서는 군사활동 확대가 최선이라는 데 합의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협상을 내거는 위장술을 폈다. [10]
황금 초승달 마약 삼각지대 (The Golden Crescent Drug Triangle)
중앙 아시아의 마약 거래 역사는 중앙정보국의 비밀 공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련-아프간 전쟁 이전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아편 생산은 그 지역내 소규모 시장으로 향했다. 헤로인은 생산되지 않았다. [11] 이 점에 대해,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McCoy)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중앙정보국이 아프간에 대한 맹공격을 벌이기 시작한 지 2년 안에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역은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지역이 돼 미국내 수요의 60%를 공급했다. 파키스탄에서 헤로인 중독자는 1979년 사실상 전무했으며... 1985년에 120만명에 달했다. 그 어느 나라보다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12]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다시 이 헤로인 무역을 통제했다.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아프간쪽 국경 지역을 장악했을 때 농민들에게 혁명 세금 차원에서 아편을 재배하도록 명령했다. 국경 넘어 파키스탄쪽에서 아프간 지도자들과 지역 조직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의 보호 아래 수백개의 헤로인 제조 공장을 운영했다. 이 완전 개방된 마약거래 기간동안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마약청은 주요 마약사범 체포에 앞장서지 않았다... 미국 관리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마약 정책은 소련 영향권에 대항한 전쟁에 종속되어 있다"며 아프간 동맹국들의 헤로인 거래 혐의 조사를 거부했다. 1995년 전직 중앙정보국 아프간 담당 책임자 찰스 코건(Charles Cogan)은 중앙정보국이 냉전을 위해 마약 전쟁을 희생했음을 인정했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소련에 가능한 한 최대의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약거래를 조사할 자원도 시간도 정말 없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황은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 있게 마련이다... 마약이라는 부산물이 있었다, 맞다. 그러나 주 목표는 달성됐다. 소련이 아프간을 떠난 것이다.' [13]
냉전의 흔적을 좇아서 (In the Wake of the Cold War)
냉전의 흔적을 좇아보면 중앙 아시아 지역은 단지 광대한 원유 매장량 때문에만 전략적 요충이 아니다. 기업이나 금융기관, 정보기관, 조직 폭력단에게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의미하는 세계 아편의 4분의 3을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황금 초승달 지역의 연간 마약 거래 규모 (1천억에서 2천억 달러 규모)는 국제연합이 5천억 달러로 추정하는 전세계 마약류 거래의 3분의 1에 달한다. [14]
소련 붕괴와 함께 마약 생산이 다시 급격하게 늘었다. 국제연합 추산으로는 구 소련 연방내 무장 반란이 시작된 때인 1998년에서 1999년 사이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생산량은 4600톤으로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 [15] 구 소련의 조직 폭력단과 연합한 강력한 기업 집단들이 헤로인 통로를 전략적으로 장악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광범한 군 정보 네트워크는 냉전이 끝난 뒤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은 여전히 파키스탄 발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했다. 새로운 비밀 공작이 중앙 아시아, 코카서스, 발칸 지역에서 시작됐다. 파키스탄의 군, 정보 기관들은 본질적으로 "소련 해체와 중앙 아시아 지역 6개 무슬림 공화국 건설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16]
한편,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Wahhabi)파 선교사들은 세속 국가 기구를 잠식하면서 러시아 연방은 물론 이들 무슬림 공화국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반미 이념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슬람 근본주의는 구 소련내 워싱턴의 전략적 이해에 크게 기여했다.
1989년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아프간 내전은 약화되지 않았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데오반디스(Deobandis)와 그들의 정당인 자미아트 울 울레마 에 이슬람(Jamiat-ul-Ulema-e-Islam, JUI)의 지지를 받았다. 1993년 제이유아이는 베나지르 부토(Benazzir Bhutto) 총리의 연정에 참여했다. 제이유아이와 군부, 군 정보기관의 끈이 형성됐다. 1995년 카불의 헤즈브 이 이슬라미 헥트마티아르(Hezb-I-Islami Hektmatyar) 정권이 무너지자 탈레반은 강경 이슬람 정부를 출범시키고, "제이유아이 파벌에게 아프간 내부 훈련소의 통제권을 넘겼다..." [17]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의 지지를 얻은 제이유아이는 발칸 지역과 구 소련 지역에서 싸울 자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핵심 임무를 맡았다.
제인 디펜스 위클리(Jane Defense Weekly)는 이에 대해 "탈레반의 인력과 장비의 절반은 정보기관 지배를 받는 파키스탄에서 보낸 것"이라고 확인했다. [18]
사실, 소련의 철수 이후 아프간 내전을 벌인 두쪽 모두 계속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를 통해 비밀 지원을 받은 것 같다. [19]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 중앙정보국의 통제를 받는 파키스탄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후원을 등에 업은 탈레반 이슬람 정권은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주로 봉사한 것이다. 황금 초승달 지역 마약 거래는 (1990년대초에 등장한)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와 코소보 해방군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마지막 몇달 동안 무자헤딘 용병이 마세도니아를 침공한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에 섞여 싸웠다는 증거가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것은 왜 미국이 노골적인 여성 인권 침해, 소녀들의 교육 금지, 정부기관내 여성의 해고, "샤리아 처벌법"의 시행 등을 포함한 탈레반의 폭력적 통치에 눈을 감았는지를 설명해준다. [20]
체첸 전쟁 (The War in Chechnya)
체첸과 관련해서 주요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Shamil Basayev)와 알 카탑(Al Khattab)은 중앙정보국이 지원하는 아프간 및 파키스탄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 미국 의회의 테러리즘과 비재래식 전쟁에 대한 특별팀 팀장인 요세프 보단스키(Yossef Bodansky)에 따르면 체첸 전쟁은 1996년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열린 히즈브알라(HizbAllah) 국제 비밀 정상회담 중에 계획됐다. [21] 이 회담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이란 및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고위 정보기관 관리들이 참석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체첸 사태 개입은 "무기와 전문적 기술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과 이 기관의 급진 이슬람 대리인들은 실제로 전쟁을 지휘했다." [22]
러시아의 주요 송유관은 체첸과 다게스탄(Dagestan)을 지난다. 워싱턴이 형식적으로 이슬람 테러리즘을 비난하긴 했지만, 체첸 전쟁의 간접적인 수혜자는 카스피해 유역의 석유 자원과 송유관 통제권을 놓고 경쟁하는 앵글로섹슨 계열의 석유 메이저들이다.
(각각 샤밀 바사예프와 에미르 카탑이 이끄는) 두개의 핵심 체첸 반군들은 3만5천여명으로 추정되며, 직접 체첸 반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기까지 한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지원을 받았다.
[1994년에]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는 바사예프와 그의 신뢰받는 부관들이 아프가니스탄 코스트(Khost) 지역의 아미르 무아위아(Amir Muawia) 캠프에서 집중적인 이슬람 교화와 게릴라 전쟁 훈련을 받게 해줬다. 이 캠프는 1980년대 초반 미국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가 설치했으며 유명한 아프간 군사지도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가 운영했다. 1994년 7월 이 캠프에서 교육을 마친 바사예프는 파키스탄의 마르카즈 이 다와르(Markaz-i-Dawar) 캠프로 옮겨 고급 게릴라 전술 교육을 받았다. 파키스탄에서 바사야프는 파키스탄 최고위급 군 장성과 정보기관 관계자를 만났다. 국방장관인 아프탑 샤흐반 미라니(Aftab Shahban Mirani) 장군, 내무 장관 나세룰라 바바르(Naserullah Babar) 장군, 아이에스아이의 이슬람 진영 지원 담당 지부장 자베드 아슈라프(Javed Ashraf) 장군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재 모두 은퇴했다) 고위급 관계는 바사예프에게 아주 유용했다. [23]
훈련과 교화를 받은 이후 바사예프는 1995년 첫번째 체첸전쟁에서 러시아 연방 군대에 대한 습격을 이끄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조직은 알바니아 조직 폭력배, 코소보 해방군은 물론이고 모스크바의 조직폭력배와도 광범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97~98년 러시아 연방 보안 서비스(FSB)에 따르면 "체첸 반군 지도자들은 코소보에서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위장을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부동산 업체로 등록한 몇몇 기업을 통해서." [24]
바사예프의 조직은 수많은 부정 행위에도 개입해왔다. 여기엔 마약거래, 불법 도청, 러시아 송유관 파괴, 납치, 매춘, 위조 달러 거래, 핵물질 밀매 등이 포함된다.(마피아가 알바니아의 붕괴된 피라미드 판매조직과 관련된 것을 참고하라) [25] 광범한 마약 자금 세탁과 함께, 다양한 불법 활동으로 얻은 수익금이 용병 모집과 무기 구입을 위해 흘러 들어갔다.
아프간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샤밀 바사예프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 노병인 무자히딘 사령관 "알 카탑(Al Khattab)"과 줄이 닿았다. 알 카탑은 자원해서 아프간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다. 바사예프가 그로즈니로 돌아간 지 채 몇달이 안됐을 때 (1995년 초) 카탑은 무자헤딘 전사들을 훈련시킬 군 부대를 체첸에 구축하기 위해 초청됐다. 영국방송공사에 따르면 카탑이 체첸에 자리잡은 것은, "체첸에 자금을 공급하는 모스크와 갑부 개인들이 재정을 책임지는 전투적 종교단체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제) 이슬람 구제 조직(Islamic Relief Organisation)의 주선을 통해서 였다." [26]
마치는 말 (Concluding Remarks)
냉전 시대 이후 워싱턴은 오사마 빈 라덴을 세계 최고의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연방수사국의 "최우선 수배자 명단"에 올려놓은 동시에 의식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무자헤딘이 발칸 지역과 구 소련에서 미국을 위한 전쟁을 벌이느라고 바쁜 와중에, 미국내 경찰 조직인 연방수사국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비밀 공작을 통해 국제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한 중앙정보국과 별개로 움직이면서 국내에서 테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지독하게 역설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고 지목한 이슬람 지하드가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테러 공격의 혐의를 받고 있는 와중에, 바로 그 조직이 발칸과 구 소련에서 미군과 정보기관의 핵심적인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 공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활짝 드러남으로써, 부시 행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과 함께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군사 모험을 강행하지 못하게 해야할 것이다.
주석
- [1] Hugh Davies, International: `Informers' point the finger at bin Laden; Washington on alert for suicide bombers, The Daily Telegraph, London, 24 August 1998.
휴그 데이비스, 국제 뉴스: '정보제공자들은' 빈 라덴을 지목한다. 워싱턴이 자살 폭탄으로 초긴장에 돌입, 데일리 텔레그라프, 런던, 1998년 8월24일 - [2] See Fred Halliday, "The Un-great game: the Country that lost the Cold War, Afghanistan, New Republic, 25 March 1996)
프레드 할리데이, "위대하지 않은 게임: 냉전을 잃어버린 나라, 아프가니스탄, 뉴리퍼블릭, 1996년 3월25일을 보라. - [3] Ahmed Rashid, The Taliban: Exporting Extremism, Foreign Affairs, November-December 1999.
아메드 라쉬드, 탈레반: 극단주의를 수출함, 포린 어페어스, 1999년 11-12월호. - [4] Steve Coll, Washington Post, July 19, 1992.
스티브 콜, 워싱턴포스트, 1992년 7월19일. - [5] Dilip Hiro, Fallout from the Afghan Jihad, Inter Press Services, 21 November 1995.
딜립 히로, 아프간 지하드의 부산물, 인터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11월21일. - [6] Weekend Sunday (NPR); Eric Weiner, Ted Clark; 16 August 1998.
주말 일요일(NPR); 에릭 와이너, 테드 클라크, 1998년 8월16일. - [7] 같은 자료(Ibid)
- [8] Dipankar Banerjee; Possible Connection of ISI With Drug Industry, India Abroad, 2 December 1994.
디판커 바네르제; 아이에스아이와 마약산업의 연계 가능성, 인디아 어브로드, 1994년 12월2일. - [9]같은 책 (Ibid)
- [10] See Diego Cordovez and Selig Harrison, Out of Afghanistan: The Inside Story of the Soviet Withdrawal,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5. See also the review of Cordovez and Harrison in International Press Services, 22 August 1995.
디에고 코르도베즈와 셀리그 해리슨, 아프간에서 나옴: 소련 철수의 내막,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뉴욕, 1995를 보라. 또 코르도베즈와 해리슨이 인터내셔널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8월22일치에 쓴 평론도 보라. - [11] Alfred McCoy, Drug fallout: the CIA's Forty Year Complicity in the Narcotics Trade. The Progressive; 1 August 1997.
알프레드 맥코이, 마약 부산물: 미국 중앙정보국의 마약거래 연루 50년, 더 프로그레시브, 1997년 8월1일. - [12]같은 책 (Ibid)
- [13]같은 책 (Ibid)
- [14] Douglas Keh, Drug Money in a changing World, Technical document no 4, 1998, Vienna UNDCP, p. 4. See also Report of the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for 1999, E/INCB/1999/1 United Nations Publication, Vienna 1999, p 49-51, And Richard Lapper, UN Fears Growth of Heroin Trade, Financial Times, 24 February 2000.
더글러스 케, 변화하는 세상의 마약 자금, 기술 문서 4호, 1998 빈 UNDCP, 4쪽. 국제 마약 통제회의의 1999년 보고서, E/INCB/1999/1, 국제연합 출판부, 빈 1999, 49~51쪽, 리차드 래퍼, 국제연합이 헤로인 무역 증가에 대해 우려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2000년 2월24일도 보라. - [15] Report of the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op cit, p 49-51, see also Richard Lapper, op. cit.
국제 마약 통제회의의 보고서, 49~51쪽, 리차드 래퍼의 같은 책도 보라. - [16] International Press Services, 22 August 1995.
국제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8월22일 - [17] Ahmed Rashid, The Taliban: Exporting Extremism, Foreign Affairs, November- December, 1999, p. 22.
아메드 라쉬드, 탈레반: 극단주의를 수출함, 포린 어페어스, 1999년 11-12월호, 22쪽. - [18] Quoted in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3 September 1998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 1998년 9월3일에서 인용. - [19] Tim McGirk, Kabul learns to live with its bearded conquerors, The Independent, London, 6 November 1996.
팀 맥거크, 카불이 수염기른 정복자와 공생하는 법을 익히다, 디 인디펜던트, 런던, 1996년 11월6일. - [20] See K. Subrahmanyam, Pakistan is Pursuing Asian Goals, India Abroad, 3 November 1995.
케이 수브라흐마니암, 파키스탄이 아시아 내부 목표를 추구하다, 인디아 어브로드, 1995년 11월3일을 보라. - [21] Levon Sevunts, Who's calling the shots?: Chechen conflict finds Islamic roots in Afghanistan and Pakistan, 23 The Gazette, Montreal, 26 October 1999.
레본 세번츠, 누가 지휘하는가?: 체첸 분쟁은 이슬람의 뿌리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찾는다, 23 더 가제트, 몬트리올, 1999년 10월26일. - [22] 같은 책(Ibid)
- [23] 같은 책 (Ibid)
- [24] See Vitaly Romanov and Viktor Yadukha, Chechen Front Moves To Kosovo Segodnia, Moscow, 23 Feb 2000.
비탈리 로마노프와 빅토르 야두크하, 체첸 전선이 코소보 세고드니아로 이동하다, 모스크바, 2000년 2월23일을 보라. - [25] The European, 13 February 1997, See also Itar-Tass, 4-5 January 2000.
더 유러피언, 1997년 2월13일, 이타르타스 통신, 200년 1월 4~5일도 보라. - [26] BBC, 29 September 1999.
영국방송협회, 1999년 9월29일.
The URL of this article is:
http://globalresearch.ca/articles/CHO109C.html
Copyright Michel Chossudovsky, Montreal, September 2001. All rights reserved. Permission is granted to post this text on non-commercial community internet sites, provided the source and the URL are indicated, the essay remains intact and the copyright note is displayed. To publish this text in printed and/or other forms, including commercial internet sites and excerpts, contact the author at chossudovsky@videotron.ca, fax: 1-514-4256224.
이 글의 인터넷 주소는 http://globalresearch.ca/articles/CHO109C.html
저작권 미첼 초수도브스키, 몬트리올, 2001년 9월. 모든 권리 보유. 이 글을 비상업적인 커뮤니티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하는 것을 허용함. 단 출처와 출처의 인터넷 주소를 밝히고, 이 글에 손을 대지 않으며 저작권 표시를 해야 함. 이 글을 출판하거나 상업적인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 등 다른 형태의 출판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야함.
정확한 것은 한글, 영문 대역본을 보십시오. 영어 원문 보기
번역: 신기섭
미국 본토 테러 참사 일지와 오사마 빈 라덴 그리고 알카에다 주요 자료(최신자료) | |
|
1.미국 본토 테러 참사 일지 |
'Guide Ear&Bird's Eye10 > 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쿠바에서 비동맹 각국 정상회담(비동맹 주요 자료) (0) | 2006.09.17 |
---|---|
국적세탁 `북한 직파간첩 정경학(48세)' 구속기소 "북한 대남공작부 6개 운영과 36호실은 이스라엘 모사드 모델로 조직화" (0) | 2006.09.15 |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떼돈벌이에 희생되는 동남아시아의 어린이들 "갈수록 기승부리는 인신매매(마약과 무기밀매, 인신매매등 떼돈벌이) (0) | 2006.09.07 |
탈북자의 소리: 직파 간첩 (0) | 2006.08.28 |
'직파 간첩' 소속 노동당 35호실은 어떤 곳 (0) | 2006.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