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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비밀을 철저검증 다큐멘터리 김정일 본문
독재자의 비밀을 철저검증 다큐멘터리 김정일 제1회 |
惠谷 治(에야 오사무)저널리스트 |
제1부 김정일의 출생의 비밀을 폭로한다 백두산밀영에서의 탄생신화(그 1)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의 새벽녘, 백두밀영에서 태어났습니다. 金正日의 탄생은 우리 일가로서, 다시없는 대경사였습니다. 나와 김정숙은, 총성이 끊이지 않는 전장에서 朝鮮의 남아로서 태어난 金正日의 장래를 뜨거운 마음으로 축복했습니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故金日成 주석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제8권・평양판 301항) 가운데서, 김정일 총비서의 탄생에 대하여, 이상과 같이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 金日成의 80세를 기념한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의 제1권이 출판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1994년에 金日成이 급사한 후에도, 회고록은 계속적으로 발행되어, 현재까지, 출생으로부터 제2차대전종결까지를 회상한 8권이 출판되었다. 金日成의 전기나 조선해방투쟁사는, 북한만이 아니고 日本에도 몇 종류가 출판되어 왔지만, 새로이 출판될 때에 내용이 개찬되어 허구성이 높아져,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방 후, 학자들은 거의 백지와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항일혁명사의 연구에 뛰어들었다. 대부분의 사료는 항일혁명투쟁참가자의 회상에 근거하여 작성되어, 적측의 문서도 상당히 참고로 했지만, 왜곡되기도 하고, 과장, 왜소화된 자료도 있어, 역사의 체계와 정착작업은 적지 않게 난항했다. 〈略〉항일혁명사를 반영한 도서 가운데, 부분적으로는 있으나 日字라든가 장소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이러한 특수한 사정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세기와 더불어』제5권32항) 金日成은 공식전기나 해방투쟁사의 기술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는 연구자나 전문가의 지적에 대하여, 『세기와 더불어』의 가운데서 이상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는 金日成 본인이 처음으로 써나간 자전이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역사연구소의 고스트라이터(대필작가)들의 합동작업이다. 그러나 여하튼, 궁극의 公式 傳記로 부르게 된 것이고, 김일성회고록이 출판된 이후는, 역시 사실관계에 대해서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없어졌다. 제2차대전 중, 金日成이 구 소련극동부에 체재하고 있었던 일은 북한으로서도 공공영한 비밀이었지만, 과거에 발행된 공식 전기에는, 그 사실이 한 줄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金日成은 회고록의 제3권(157항)에서, 「小哈爾巴(소합이파)회의〔1940년8월〕후,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밀영과 소련 하바로프스크 주변의 훈련 기지를 거점으로 하여 소부대활동을 전개했다」고 하는 표현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소련에 체재하고 있었음을, 公式으로 처음 밝혔다. 또, 제4권(127항)에서는「항일혁명이 최종단계로 접어들었던 어느 해 봄, 아무르강이 아주가까이 보이는 하바로프스크 주변의 北밀영의 모래벌판을 나와 함께 산보하고 있던 周保中」, 또는 같은 제4권(134항)에서「후일, 하바로프스크의 北밀영에서 이학만의 생질에 해당하는 이영호를 처음 만났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제5권(340항)의 「우리가 하바로프스크 가까이의 훈련기지에서 對日작전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1944년」이라는 기술이나, 잇따른 제6권(107항)의 「1940년대 전반기, 소련국경지대의 훈련기지에 있을 무렵」이라는 표현에 의하여, 金日成은 소련체재의 년대를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로, 金日成이 회고록의 가운데서, 金正日의 탄생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 나는 주목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모두의 一文이었다. 저자가 사망 후에 고스트라이터가 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金日成의 이름으로 출판되고 있는 한, 金日成이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계속) ■ 惠谷 治(에야 오사무)저널리스트. 1949년, 東京서 태어나 尾道(히로시마縣)에서 자람. 73년, 早稲田(와세다)대학 法學部 졸업. 81년, 제1회 플레이보이 다큐먼트 파일 상의 우수작품상을 수상. 수상작품은『秘境의 戰士들』. 86년부터 96년까지 방위청방위연구소 비상근 강사 일반과정의「아프리카의 제문제」를 담당. 99년, 제5회 편집자가 선발하는 잡지 저널리즘상의 기획상을 수상. 수상작품은 『金正日의 忠臣』외에 일련의 SAPIO 북한 레포트. 99年부터 靑山학원대학 비상근 강사(국제관계론)로서 교양학부의 「소수민족의 사회와 문화」를 담당. 02년부터 東京 재단「북한연구 프로젝트」멤버, 03년부터는 해상보안청정책 에드바이서를 맡고 있음. 저작은『국경의 세계』(森谷트레블 엔터프라이스), 『아프가니스탄최전선』(芙蓉書房), 『소련제국・7가지의 수수께끼』 (光文社, 갓파 비즈니스), 『金正日・北朝鮮, 권력의 실상』(時事通信社), 『北朝鮮해체新書』(小学館), 『1967年10月8日 체 ・게바라 死의 殘照』(毎日新聞社), 『아프간산악전종군기』(아프가니스탄最前線의 文庫化, 小学館), 카와구치카이지와의 대담『절규 「침묵의 국가」日本』(비지니스社)등 다수. |
독재자의 비밀을 철저검증 다큐멘터리 金正日 第2回 | |||||||||
惠谷 治(에야 오사무)저널리스트 | |||||||||
제1부 金正日의 出生의 비밀을 폭로한다 백두산밀영에서의 탄생신화(그 2) 「金正日同志는, 항일의 피로 젖은 투쟁의 날, 백두산의 밀영에서 탄생하여,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면서 성장, 일찍이 주체의 혁명위업을 최후까지 수행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혁명활동을 개시하여,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의 앞에 불멸의 공적을 쌓아올렸다」 정령에 기술되어 있는 수여 이유 가운데에, 金正日의 生誕地가 中北 국경에 우뚝솟은 白頭山의 밀영(아지트)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표되었다. 그때까지는, 金正日의 출생지는 소련이라는 소문은 귓속말로 소곤거려 왔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不明했다. 그러나, 1982년 이후 금일까지, 북한에는 金正日의 출생지는 백두산기슭으로 되어, 金日成도 회고록에는 진실에 눈을 감고, 날조된 공식견해에 따른 것이었다. 지금에는, 金正日의 후계자문제가 들리게 된 時代이지자만, 金日成의 후계자로 된 장남 탄생의 진상은, 여전히 해명되어 있지 않다.
나는 金正日의 생탄신화를 폭로하여, 그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15년간, 북한, 한국, 중국, 구소련・러시아를 방문하였으며, 또 유럽까지 다릴 뻗어 관계자와 만나, 각지에서 귀중한 증언과 1차 자료를 입수해 왔다. 그리고, 입수한 사료 등을 근거로, 金正日 탄생의 경위에 대하여 최신정보를 더해가면서, 지금까지 그때마다 개서를 해 왔다. 〔『金日成의 진실』(每日新聞社, 1993년), 『金正日・北朝鮮, 권력의 實像』(時事通信社, 1995년),『北朝鮮해체신서』(小學館, 1997년)등을 참조〕. 그러나, 金日成 자신이 金正日의 탄생에 대해서 쓴 『세기와 더불어』제8권이, 1998년에 출판된 이후, 나는 그 기술을 상세히 검토할 시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金日成의 回顧錄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의 중국공산당항일 빨치산의 조직이나 구성원, 또는 만주의 지리 등의 지식이 없으면 곤란한데, 겨우 그 검증을 끝낼 수가 있게 되었다. 金日成의 회고록(최종적인 공식전기)인 『세기와 더불어』의 기술은, 연대를 따라가는 듯 한 체재를 취하여, 기본적으로는 金日成의 회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회상 자체가 날조나 과장인 경우도 많고, 또, 고스트라이터나 편집자들이, 연대나 장소를 특정하지 않고 회상을 삽입하는 형태로, 다른 역사적 진실을 표절하기도 하고, 「수령님」의 언행록에 다른 역사적 사실을 혼입시켜, 진실을 덮어 감추려는 편집노력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세기와 더불어』의 기술을 중심으로 해서, 중국이나 구소련의 사료, 일본식민지시대의 문헌이나 구 만주국관헌의 기밀보고, 金日成의 부하나 漢人隊員 등의 증언 등에 의하여, 사실을 검증하면서 金正日 탄생의 진상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다. 金正日출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金日成을 따라 抗日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金正日의 生母인 김정숙의 행동, 특히 金日成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한 경위를 상세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먼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김정숙의 생애를 개관하고, 金日成과의 사이에 金正日이 생기기가지의 궤적을 상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독재자의 비밀을 철저검증 다큐멘터리 金正日 第3回 惠谷 治(에야 오사무)저널리스트 제1장 抗日빨치산 시절의 金正日의 모친의 활약
『金日成傳』속의 生母・김정숙 백봉(白峯)著『金日成傳』은, 1968년에 간행된 최초의 公式傳記다. 그 가운데에 金正日의 母, 金正淑이 「金貞淑」이라는 漢文名으로, 아무렇지도 않는 듯이 등장한다. 1970년대까지, 북한뉴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朝鮮通信』을 포함하여 日本, 한국의 각종 보도기관은, 金正日을「金正一」,그리고 金正淑을「金貞淑」으로 표기했다. 1980년 10월, 金正日이 조선로동당 제6회대회에서 公式의 場에 처음 데뷔한 이후, 漢字表記는 金正一에서 金正日로 변경되고, 동시에 金貞淑도 金正淑으로 바뀌었다.
正一이「正日」로 改名된 것은, 金日成의 「唯一 후계자」로서의 正統性을 과시하기 위해, 母의 貞淑과 父의 日成의 쌍방의 이름에서 한 字를 취한 이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문에, 正一이「正日」, 貞淑이「正淑」으로 변경된 것이 틀림없다. 母의「正」과 父의「日」의 字로부터 이루어지는「正日」은 바로, 金日成과 金正淑의 正統의 嫡子라는 것이다. 朝鮮에는 父나 祖父로부터 一字를 받는 아프터 네임의 습관이 없다고 하는데, 진보파를 자인하는 공산주의자는 그러한 전통을 무시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日帝時代」의 잔재를 불식하고, 識字율을 향상시킨다는 이유로, 1949年부터 漢字를 전폐했다. 그 때문에, 한글표기만으로는 漢字를 알 수가 없기 되어, 그러한 혼란이 일어나, 金正日의 漢名이 태연스럽게 변경된 것이다. 공산주의국가의 要人의 이름은 혁명가당시의 변명도 많아, 同一 人物의 특정이라든가, 本名이라던가 漢字를 확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실정이다. 이하, 本文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引用文을 제외하고 金正淑의 表記는, 本名인 金貞淑로 통일하겠지만, 金正日은 通名 그대로 하기로 했다. 덧붙이자면, 金日成의 本名은 金成柱다(단, 이 한자표기에도 諸說이 있다. 상세한 것은 졸저『金日成의 진실』을 참조하기 바란다).
첫 공식전기『金日成傳』에는, 金日成과 金貞淑의 만남이라든가, 결혼한 이야기는 없고, 金貞淑이 金日成의 夫人이라는 紹介도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金正日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事實은, 1968년 이전에는 북한에 있어서, 金日成의 후계자를 金正日로 한다는 분위기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의 북한은,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건전한 사회였다.
金貞淑의 생애에 대해서, 지금에는 많은 전기가 발행되게 되었지만, 내가 아는 한은, 日本語로 된 成律子著『하얀 살구꽃처럼』(1989年)이라든가, 山下正子著『炎의 女性』(1990年)이, 비교적 일찍 출판된 半 公式전기이다. 북한에서는 최신판일수록 날조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에, 초기 전기의 내용 쪽이 자료로서는 중요하다. 이 같은 것들의 전기 작가들은 현지취재도 하여, 이 2권의 전기를 중심으로, 북한에서 발행된 『영원의 여성혁명가』(1989年), 『朝鮮의 어머니, 金正淑』(1997年), 『金正淑전』(2002年)등을 참고로 하면서, 우선은 金貞淑의 활동을 중심으로 해서, 滿洲에 있어서의 抗日빨치산 투쟁을 개관해 보기로 하겠다.
金貞淑은, 1917년12월24일, 朝鮮北部의 함경북도 회령의 빈농의 딸로 태어났다. 이 年月日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해의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것이 된다. 金貞淑은, 언니인 金貞順(그녀의 이름도 改名되어 正順으로 되어 있는데, 『金正淑전』에는 貴人女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되어 있다), 오빠인 金基俊, 남동생인 金基松의 4 형제의 次女로서, 金貞淑이 5세가 되던해의 봄, 一家는 신천지를 찾아 국경 두만강을 건너, 만주의 間島省 延吉縣 北溝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7년 후, 부친인 金忠善이 病死했기 때문에, 남은 가족은, 그 해 6월, 延吉縣 富岩洞의 아랫마을( 下ノ村)이라는 벽촌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었다. (계속)
독재자의 비밀을 철저검증 다큐멘터리 金正日 第5回 惠谷 治(에야 오사무)저널리스트
제1장 抗日빨지산시절의 金正日 모친의 활약
父・金日成과 母・金貞淑의 만남
1934년3월, 중국공산당만주省위원회의 지시에 의하여, 東滿特委(東만주특별위원회)와 각縣의 항일유격대 간부가 延吉縣의 삼도만(三道湾) 능지영(能芝営)근거지에서 회의를 연 결과, 「中共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第1軍」쪽은, 이미 1933년9월에 창설되었다. 북한의 「正史」에는, 이 中共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이 「朝鮮人民革命軍」으로 변신되게 되어, 그 司令官이 金日成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시점에서의 金日成은, 中共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에 참가한「汪清유격대」를 개편한 제3단(連隊)제5중대의 지도원에 불과했었다.(和田春樹『金日成과 満州抗日戦争』125항). 덧붙이자면, 金日成은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내가 金正淑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小汪淸馬마을에 있을 때이다. 王隅溝北洞으로부터 汪清으로 오게 된 아동단 연예대원들의 명랑한 이야기 속에서, 尹丙道의 이름과 함께 그녀의 이름이 가끔 들렸다. 그런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자기들의 아동지도원에게 커다란 동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에는 한 때, 延吉県 아동局長으로 사업하다가, 汪淸縣 아동局長으로 소환되어 온 李順姬로부터 종종 金正淑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고, 尹丙道도 이따금 그녀를 화제에 올렸다. 어느 동네에 가나 한두 명씩은 꼭꼭 만나게 되는『正淑』이라는 그 평번한 이름은, 그렇게 되어 나의 기억속에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람들의 評으로부터 판단하면, 담차고 이악하면서도 마음씨가 무척 곱고 동정심이 남달리 강한 처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세기와 더불어』제5권321항[한글판은 432항])
金日成은 아직 만나지 않았을 당시의 金貞淑에 대하여, 이상과 같이 썼다.
「내가 김정숙을 처음으로 본 것은 다홍왜(大荒☆)회의를 하던 무렵입니다. 회의 후였던지 도중이었던지 삼도만(三道湾)에 갔습니다. 삼도만은 연길현에 속한 고장입니다. 삼도만 능지영(能芝営)이라는 곳에 당비서처가 있었는데, 김정숙은 그 비서처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능지영에서 소집된 비서처일군들의 회의장소에서 김정숙을 만나보았습니다」(『세기와 더불어・제8권 평양판 163항[한글판 159항])
中共東滿特委가 왕청현에서 얼린 다홍왜회의는, 1935년2월27일부터 3월3일까지 열렸고, 23세였던 金日成이 18세의 金貞淑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일을, 이상과 같이 金日成은 회고록 속에서 증언하고 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35년3월이었다(『朝鮮의 어머니, 金正淑』8항, 『金正淑전』41항). 그러나, 북한의 「正史」와는 달리, 金日成은 실제로는 다홍왜회의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국측 사료에서 증명할 수가 있다.
전기『白살구 꽃처럼』은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활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내려쌓인 눈이 눈부시게 찬란한 날, 金日成 장군은 부하를 대동하고 이 〔삼도만〕근거지를 방문, 〈略〉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견지하랄 때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시었다. 〈略〉이 회의석에서, 온구지구에서 귀임한 正淑이 눈동자를 번득이면서,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처음으로 젊고 늠름한 장군을 알현하게 된 그녀의 감격은, 이루 비할 데가 없었다」(『白살구 꽃처럼』10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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