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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1969년 4월 15일 미국 해군의 정찰기 EC-121이 청진 동남쪽 해상에서 북한의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1969년 4월 15일 미국 해군의 정찰기 EC-121이 청진 동남쪽 해상에서 북한의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6. 12. 07:36

1.미국 정찰기가 북한을 날아다니다 격추되는 경우가 있었다던데

 1969년 4월 15일에 미국 해군의 정찰기 EC-121이 청진 동남쪽 해상에서 북한의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적이 있었습니다...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했죠... 그리고 1981년 8월 26일에는 SR71(혹은 RC135라는 설도 있지만 SR71쪽이 유력합니다)가 휴전선 서부전선 상공에서 북한의 SAM2 미사일에 요격당했지만 추락하지는 않았습니다...

 

 

2.미 EC-121정찰기 피격

1·21사태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일련의 도발로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 아래 한·미 연합군은 강력한 대북 경고 차원에서 실전을 방불케 한 대규모 공수(空輸) 공격훈련(포커스 레티나)을 전개했다.

 그러나 미군의 막강한 전력을 과시한 지 한 달도 채 안돼 `하늘의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미 해군 EC-121 정찰기가 1969년 4월15일 오후 2시쯤 청진 남동쪽 152㎞ 상공에서 북한 미그기 2대에 피격돼 추락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워닝 스타(warning star·경고의 별)라는 애칭을 가진 이 정찰기는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이날 오전 7시 정찰임무를 띠고 일본 아스키 해군기지를 이륙한 지 7시간 만에 사고지점에서 연락이 끊겼다.

북한은 이 사건 발생 후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 영공을 침범한 미군 정찰기 1대를 추격,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방부는 이에 맞서 “EC-121기는 북한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이 항공기는 항상 공해 상공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이를 위협하거나 방해할 권리가 없으며 더구나 격추행위는 말도 안된다”고 반격했다.

EC-121 정찰기 피격 사건은 출범한 지 넉 달 밖에 안된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 첫 번째 외교적 시련을 안겨주었다. 닉슨 대통령은 사건 당일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 보좌관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나 국가안보회의를 소집, 대응책을 협의했다. 당시 미 의회 내에서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 정부 또한 1년 전에 나포된 미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0여 명이 귀환한 지 넉 달 만에 터진 `하늘의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안과 사건 처리과정을 예의 주시했다. 나포 사건과 달리 정찰기 피격 사건의 경우 승무원 31명의 생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무엇인가 터질 듯한 긴박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판문점에서 공산 측 요청으로 제290차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군사정전위 회의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자 닉슨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과 주한미군 수호를 위해 정찰비행을 재개하고 무장엄호를 명령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런 조처는 도발에 대한 중간조처이고 미국의 최종태도는 미국의 항의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이어 EC-121기 피격 뒤에 편성한 71기동함대를 증강, 동해의 정찰비행 보호임무를 맡김으로써 강력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주축으로 40척의 함정으로 편성된 71기동함대는 동해에 진입,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닉슨 대통령은 이같은 무력시위 경고조처를 취한 후 북한이 또다시 미군 정찰기를 공격할 경우 아무 경고 없이 철저한 보복조처를 명령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제로 EC-121기 사건 후 닉슨 대통령은 북한을 즉각 응징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했다. 당시 미국의 유력지 뉴욕 타임스는 닉슨 대통령이 북한의 군사목표 두 곳을 선정, 이를 강타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미국 국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보복조처를 설명하는 연설문까지 준비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응징조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신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닉슨과 그의 참모들이 북한을 보복 공습하는 것이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베트남전을 확전으로 이끈 1964년의 통킹 만 사건 이후 월맹에 가해진 보복공습과 동일시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분석했다. 그로부터 석 달쯤 후에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대(對)아시아 외교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예고하는 괌 독트린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미국이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3. 한국전쟁이후 북미군사적 충돌 자료

과거 미국의 대북 군사적 활동과 이에 대한 북한측의 대응으로 인해 대규모 충
돌이 우려됐던 예는 다음과 같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 미 해군 장교 6명과 병사 75명, 민간인 2명 등 83명을
태운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푸에블로호가 1968년 1월23일 오후 1시45분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된 사건. 당시 북한은 P-4 초계정 네 척과 미그기 두
대를 동원해 원산 영해를 침범한 이 배를 나포했고 나포 과정에서 미군 병사 한 명
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이를 미국에 대한 전쟁 선포로 간주하고 핵
보복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1962년 '쿠바 미사일사태'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행정
명령'을 발표해 공군 예비역 1만5천명에게 긴급동원령을 내렸다. 또 세 개의 항공모
함 전투선단을 북한 해역으로 파견했으며 미 전투기 3백72대에 출격태세를 지시하기
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고 결국 대북 공격 계획
을 포기했다.
이후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벌인 끝에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Gilbert H.
Woodward)가 '아메리카 합중국 정부를 대신하여' 북한의 요구와 주장을 모두 받아들
인 사과문에 서명했고 승무원 82명과 시신 한 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았다. 1968년
12월 23일의 일이었다.
▲EC-121기 격추사건 = 1969년 4월15일 일본 아츠기(厚木)에 있는 해군 항공기
지를 이륙한 미 해군 전자정찰기 EC-121기가 북한의 청진 동남방 바다 위에서 북한
군이 발사한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사건. 당시 이 정찰기에는 미 해군 장교
와 병사 30명과 미 해병 1명이 타고 있었다.
사건 직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즉각 두 개 항공모함 전투선단을 동해에 출
동시켰고 F-4 전폭기들을 주한미군 기지에 긴급 배치했으며 이미 3월 중순 시작된 '
포커스레티나' 군사훈련을 전시작전에 준해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거듭된 핵공격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생 넉달 만인
같은해 8월17일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미군 OH-23 헬리곱터를 격추, 미군 병사 세 사
람을 포로로 잡는 등 초강경태도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같은해 12월3일 북한
이 요구한 대로 사과문에 서명했다.
▲판문점 도끼사건 = 1976년 6월 첫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실시 후 두달만인 8월
18일 미군측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에 있는 미루나무
를 베려다 이를 제지하려는 북한측 군인들과 다툼이 벌어져 장교 2명이 도께에 맞아
죽은 사건.
사건 직후 미국은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는 작전명 하에 F
-111, F-4 비행대대를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했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앞세운 전
투선단을 동해에 출동시켰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1천8백명이 포함
된 미 지상군 1만2천명에 대한 출동 명령도 내렸다. 주한미군측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포대를 비무장지대를 따라 배치했다.
이틀 뒤인 8월20일부터 핵무기를 실은 B-52 폭격기가 괌도의 앤더슨 공군기지에
서 출격해 한반도 상공에서 전속력으로 북상하는 위협 비행을 감행하는 등 전면전이
벌어질 위기감이 조성됐다.
그러나 북-미 양측은 비공개회담을 열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주한미군 장교
사망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주한미군 헬기 격추 사건 = 북-미 제네바합의 타결 두 달만인 1994년 12월17
일에 주한미군의 헬리콥터가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격추당해 미군 한 명이 죽고 다른
한 사람인 보비 홀 준위가 생포된 사건.
이 사건은 앞의 예와 달리 미국의 군사적 공격 움직임은 없었고 사건 발생 닷새
만에 북-미 양측은 홀 준위 석방에 합의했고 같은해 12월30일 홀 준위와 사망한 군
인의 유해가 미군측에 인계됐다.
이는 제네바합의 이후 조성된 양국간 대화무드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양측
이 합리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방북했던 빌 리처드슨 하원의원
(민주)은 같은해 12월22일 서울을 방문해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도 했다.
리처드슨 의원은 또 올해 북-미 핵 공방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인 지난 1월 한성
렬 유엔주재 북한 차석대사와 만난 뒤 양국간 직접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밖에 미군측이 정찰 활동을 벌이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59년 6월 15일 = P4 정찰기 동해상에서 피습, 조종사 귀환
-1963년 5월 17일 = H23 헬기 비무장지대서 피습, 조종사 2명 귀환
-1965년 4월 28일 = RB 47 정찰기 동해상서 피습, 조종사 귀환
-1969년 8월 17일 = OH 23 헬기 DMZ 남방서 격추됨, 승무원 귀환
-1974년 5월 9일 = OH 58헬기 및 AGIG헬기 임진강 부근서 피격, 승무원 무사
-1977년 7월 4일 = CH 47헬기 북한영공서 피격,사망자 3명, 생존자 1명 2일 뒤
귀환
-1981년 8월 26일 = SR-71정찰기 동해 공해상서 북한 미사일에 피습,
승무원 무사

 

*정찰기[偵察機, reconnaissance plane]

공중에서 각종의 정찰·수색·사격의 관측 등을 주목적으로 항행하는 군용기의 총칭.

정찰기는 공중사진, 레이더, 레이더 사진 등을 이용해 적의 이동상태·집결·활동·병력, 우군 폭격기의 폭격효과, 항행하는 비행기, 함선의 위치나 수량 등과 같은 군사적인 정보는 물론, 산업시설·교통·지형 등 각종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 정찰기가 등장하게 된 시기는 군용기가 실용화될 당시부터인데, 오늘날에는 전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기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찰기의 종류에는 전술정찰기, 전략정찰기, 초계기, 공중 레이더 경계기, 군사용 기상관측기 등이 있다. 전술정찰기는 가장 초기에 등장한 정찰기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찰기는 모두 이 기종에 해당되며, 제1선 전투에 필요한 적정 탐지를 주임무로 한다. 이 정찰기는 전투기의 장비를 변경한 것이 많다. 최근에 개발된 전술정찰기로는 미국의 RF-4C와 러시아 연방의 YAK-26 망그로브 등이 있는데, RF-4C는 F-4C 팬텀기의 성능에 비행경로의 양측 지형을 레이더 화면으로 포착해서 필름에 수록하는 측방감시 레이더와 야간정찰용의 적외선탐지장치 및 파노라마식 카메라를 장치했으며, YAK-26 망그로브도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략정찰기는 대개 전략폭격기의 장비를 변경하여 만들었으며, 적 본토의 깊숙한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표적을 정찰하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최신의 전략정찰기로는 2만4,000m 이상의 고도를, 시속 마하 3 이상의 속도로 비행하면서 1시간에 26만㎢ 면적의 지역을 사진촬영할 수 있는 미국의 SR-71 등이 있다. 초계기는 대잠수함 수색과 공격을 주임무로 하며, 공중 레이더 경계기는 공중에 체공하면서 적기 또는 미사일 등의 내습을 조기에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정찰기는 단순히 사진기에만 의존했던 과거와는 달리, 고도로 정밀한 광학기계 및 전자장치 등을 이용한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찰기의 특징으로는 무장의 장착이 적고, 항속(航續) 시간이 길며, 적기의 공격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 고속비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상 촬영시에 일정 고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안정성이 높다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