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실
李善實
1916 ~ ?
북한의 비밀 대남사업 전문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후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 출신들로 운영된 금강정치학원을 수료했다. 1979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에 임명되었고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당선된 이래 10기까지 계속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즈음해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에 임명된 이래 대남 비밀공작부문의 주요 책임자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같은 해 9월 이른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지하당 조직 책임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녀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 조직원들의 검거와 와해, 제거된 후 2000년 8월 사망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이선실(李善實) 대남 공작원 주요 경력
-제주출신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중앙당 금강학교 출신---정치공작원 학교 박헌영 이승엽등의 빨치산 정치학원 강동정치학원과 비슷한 성격 -79년 당 통일전선부 부부장(통일혁명당 전위대) 최고인민회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집행 행정기관으로 통일전선부를 두고 있다 -80년 1월 당 정치국 후보 위원 -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제7.8.9.10대 -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한민전은 1990년 1월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등장한 단체이다 -94년 7월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2000년 8월 사망 민혁당(한민전 서울지부) 지도부 자수와 검거 그리고 잠수함 격침
*이선실 주요 동정 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 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참석
*한민전 추적과 이선실등 대남 공작원 생포과정 1990년 말 한민전 새세대가 미국정부 요원에게 발견되어 한민전 추적 과정에 이선실과 대남 공작원 그리고 한민전 지도부, 잠수함 일방타진 되었음... 추적 열쇠고리<한민전 90년 최초 1월호 새세대 지하신문 자료 발견> 반제동맹(강철서신: 김영환씨 편지 글)--->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여명--아리랑--백두산등)
***한국민족민주전선이란*** 김일성주의자 모임 또는 주체사상파 모임 ㄱ.조직--평양대표부(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통일전선부)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 해외대표부(각국 주체사상연구소--쿠바나 일본. 유럽등지 주체사상연구소 회원) ㄴ.대남 공작원 연락선---잠수함이나 반잠수함
남파간첩 이선실 資料
차례 1. 거물남파간첩 이선실의 실체 □ 이선실의 신원을 밝히게 된 경위 □ 이선실의 신원 □ 신순녀로 국내입국 합법신분 구축
2. 국내 활동상황 □ 김옥기와 동거, 비판적 언동 □ 정치인 관련내용 □ 김옥기에게 선물제공, 환심유도 □ 문익환 집안과 친교 □ 신원미상 키큰 할머니를 김옥기에게 소개 □ 진보정당 모임 관여 □ 황인오·손병선 포섭, 간첩교육 □ 『영웅』칭호 수여
3. 이선실 국내 활동자금 증식 상황
4. 북한에 복귀 후 상황
1. 거물 남파간첩 이선실의 실체 〈이선실의 신원을 밝히게 된 경위〉 □ 안기부에서는 1992년 8월 말경부터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중부지역당 총책인 황인오(36세)로부터 -지난 1990년 10월17일 남파간첩 이선화, 권중현, 김돈식과 함께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으로 월북한 일이 있었다. -그때 해주를 거쳐 평양 순안비행장에 가니까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인 사회문화부 부장 리창선 등 고위인사들이 직접 영접하여 극진한 환영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선화는 환영식장에서 보니 리창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선화는 키가 약 155cm정도 되고 머리는 반백이며 금테안경을 끼곤 했다. 라는 내용의 진술을 확인하였다.
□ 한편 안기부에서는 공개할 수 없는 각종 첩보 및 정보자료를 통해 황인오가 진술한 『이선화』는 지난 1980년 이후 북한언론 등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지난 9월9일 북한정권 수립 44돌 행사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권력서열 22위로 발표된 이선실』과 동일인임을 밝혀내고 이선실이 1980년 이후 행적이 전혀 없다가 1990년 10월 복한으로 복귀 후 1991년 1월에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점으로 보아 황인오와 함께 입북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간첩으로 암약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 그래서 1992년 9월18일경부터 이선실의 남파 기간중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전담 수사팀이 12명 4개조로 편성되었다.
□ 먼저 전담 수사팀은 이선실의 남파 기간중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 황인오를 직접 신문했다. 그때 황인오로부터 -이선화를 그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그러나 1990년 9월경 남파간첩 권중현(50대)을 대방전철역 부근에서 만나 함께 장승백이로 걸어간 일이 있는데 그때 권중현이 대방동의 한 주택가를 손으로 가르키며 ·우리가 할머니(이선화 지칭)와 함께 살고있는 집이 이 근처에 있는 2층집이다. ·2층에 방 3개를 전세로 얻어 살고 있는데 그중 방 1개를 가난한 모녀에게 주어 같이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대문에는 「방범순찰함」이 부착되어 있어 수시 경찰관들이 대문 앞에 오기 때문에 우리를 잡으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라고 한 일이 있다. 는 내용의 진술을 받아냈다.
□ 9월20일 오전 10시경부터 수사팀은 직접 황인오를 데리고 대방전철역 부근에서부터 노량진의 장승백이로쪽으로 도보로 걸으면서 권중현이 가르켰던 주택가를 찾으려고 했으나 그 일대 주택가의 골목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을뿐 아니라 황인오 자신도 2년 전의 일이고 그 지역이 잘 모르는 지역이어서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 대방동 일대를 10여 시간 이상 집중적으로 찾아보았으나 결국 문제의 주택가를 찾지 못했다.
□ 다음날인 9월21일에도 수사팀은 다시 4개조로 나누어 대방동, 노량진 2동 일대를 통·반장 등을 중심으로 가가호호 방문하여 본격적인 탐문내사를 했으나 위 주택가는 주민들의 전·출입이 빈번할뿐 아니라 주민들이 옆집 사람을 잘 몰라 이선실 등의 남파간첩이 은거했던 아지트를 찾는데는 또 실패했다.
□ 그래서 수사팀은 황인오가 허위진술을 하고 있지 않나 해서 그를 다시 재신문하였더니 황인오는 대방동 주택가가 틀림없다고 하면서 -권중현이 어느날 『내가 살고 있는 집 부근에 개업한 목욕탕에서 준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방사우나』라고 인쇄된 볼펜 1자루를 준 일이 있다. 는 내용의 추가진술을 얻어내고 9월23일 경 수사팀을 2개조로 편성, 한 팀은 동사무소, 구청 등에 가서 대방동, 노량진 일대 목욕탕중 상호가 『대방사우나』로 되어있는 곳을 찾는 한편 다른 한 팀은 직접 현지에 나가 『대방사우나』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그날 오후 1시쯤 직접 현지에 나가있는 팀이 문제의 『대방사우나』를 찾아냈다. 그래서 수사팀은 직접 목욕탕 주인 김모씨를 접촉하여 개업기념으로 볼펜을 만든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개업기념 볼펜을 제작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 권중현이 『대방사우나』를 이용했으면 그들이 은거했던 곳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대방사우나』 일대 주택가를 찾아 다시 탐문에 들어갔다. 그날 오후 3시쯤 목욕탕 뒷편 주택가에 살고있던 주민 ○○○로부터 -대방동 13-61번지 2층 양옥집에 2년 전에 『신』씨라는 일본 할머니란 사람이 살았다. -그 집에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모녀가 지금도 살고 있다. -『신』씨 할머니는 키도 작달만 하고 머리는 반백이며 금테안경을 끼고 있다. 는 내용의 제보를 하여 즉시 대방동 13-61번지를 찾아 가보니 황인오의 진술에서처럼 그 집은 2층 양옥집이었고 대문 앞에 『방범 순찰함』이 부착되어 있었다. 수사팀은 이 집이 틀림없이 이선실이 은거했던 집이라고 확신하였다. 한편, 그때 동시에 장기표 담당 수사팀으로부터 -동인의 수첩에 신순녀 명의의 전호번호(T. 813-7063) 가 있는데 그 전화번호가 노량진 전화국 관할이니 참고하라. 는 연락을 받았다. 그 즉시 수사팀은 위 전화번호를 가지고 노량진 전화국의 협조를 받아 1990년 8월경 가입자 및 설치장소를 확인해보니 대방동 13-61로 나왔다.
□ 수사팀은 장기표 수첩에 적혀있던 전화 설치장소와 황인오 진술 나왔던 방범순찰함이 부착되어 있는 집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 그래서 문제의 13-61소재 집주인의 허락을 받은 후 2층으로 올라가서 당시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김점숙 모녀를 만났다. 그때 김점숙 모녀는 -같이 살았던 할머니 이름이 『신순녀』이다. -그 할머니는 우리에게 『나는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에는 지금도 이복동생들이 살고 있고, 고향은 전라도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할머니는 1990년 8월말쯤 건강이 안좋아 강원도기도원에 간다면서 이사를 갔으나 지금까지 한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 할머니는 키가 매우 작고 머리는 반백이다. 라는 등의 황인오가 진술한 이선화의 용모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 그러나 수사팀은 이선실이 이선화라는 이름을 쓸 줄로 추정했었는데 『신순녀』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대방동사무소에 가서 확인해보니 김점숙 모녀의 진술대로 그 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신순녀』였고 엄연히 주민등록도 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선실과 신순녀는 동인이명인지 아니면 전혀 서로 다른 별개의 인물인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이선실과 신순녀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 과연 신순녀가 누구인가에 수사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 대방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신순녀가 1980년 4월 주민등록 발급시 및 1983년 12월 주민등록 갱신시 주민등록부상에 부착해 놓은 흑백사진과 칼라사진 1매를 입수하였다.
□ 그날 밤 입수된 신순녀 사진을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있던 황인오 및 동인의 모 전재순, 동인의 제 황인욱, 동인의 처 송혜숙 등에게 제시하자 -1990년 10월 황인오가 월북할 때 같이 간 이선화가 틀림없다. 고 하였다.
□ 수사팀은 결국 이선실과 신순녀는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9월24일경부터 신순녀의 신원추적에 나섰다. 먼저 이선실이 은거했던 대방동 13-61번지에 가서 김점숙 모녀를 재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이선실이 사용하다 남기고 간 악어핸드백, 카메라, 스토로보, 책자 등 총 19종 38점을 넘겨받았고 이선실이 그 집에서 사용하던 장롱, 씽크대, 냉장고, 문갑 등도 넘겨받았다. 특히 입수된 책 중에는 문익환의 처 박용길이 저술한 문익환의 옥중 서한집인 『꿈이오는 새벽녘』이 있었는데 그 책에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89년 새해에 신순녀님께 문익환 드림』이라는 문익환의 친필 서명이 있었다.
□ 그후 실제인물인 신순녀라는 사람에 대해 신원을 추적한 결과 -신순녀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상계리 305번지 출신으로 아버지 신길서라는 분과 함께 7살 때인 1924년경 일본 고오베에 가서 살다가 정○○씨와 결혼하여 정길자(54)를 낳은 후 1960년 4월28일 제19차로 북송된 사람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연고자가 국내 및 일본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됨에 따라 전주거주 언니 신양근(82)씨를 찾아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하였더니 『진짜동생 신순녀』라는 것이었다.
□ 그래서 신양근씨에게 『어떻게 친동생인지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신순녀가 7살 때 일본으로 가서부터 서로 헤어져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생이 부모 나이와 이름을 알고 있고 -어렸을 때 언니 등에 엎혀 살았다. -언젠가 한번 언니한테 호되게 매를 맞은 적이 있다. 라고 어렸을 때 둘만이 아는 기억이 말해주어 동생이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수사결과, 이선실은 남파시 북송된 신순녀의 신원 및 어릴 때 환경을 자세히 파악, 요해하여 진짜 신순녀가 어릴 때 헤어진 점을 이용, 자신이 신순녀로 위장 활동하였음)
□ 그러나 수사팀은 북송자인 신순녀가 어떻게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살수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분명히 이선실과 신순녀는 다른 사람이고 이선실이 신순녀로 위장했을 것이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수사팀은 주일 한국대사관 직원에게 서울에서 입수한 신순녀의 사진을 보내면서 긴급히 신순녀의 일본행적을 추적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9월 하순경 일본에 파견되어 있는 직원이 일본 고오베에 거주하는 진짜 북송교포 신순녀의 이복동생 신성복(57)을 만나 본부에서 보내온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진짜 누나 신순녀가 맞느냐고 확인한 결과 신성복으로부터 -그 사람은 가짜 신순녀이다. -북한에 있는 누나 신순녀는 나와 함께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잘 안다.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1974년쯤인가 내가 고오베에 살고있을 때 이 사진의 인물이 나를 찾아와 저의 부모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의 누나 신순녀다. ·부산에서 살다가 소화 40년에 밀항 도일하여 대판 입관에 자수하여 신순녀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외국인 등록을 했다. ·입관사람들이 네가 살고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 찾아왔다. 라고 하여 처음에는 별 희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누나는 내가 얼굴을 안다. 얼마 전에 이북에서 사진과 편지도 받아보았으나 금전적으로 별다른 손해도 없고해서 이를 묵인했을 뿐 북송된 신순녀는 절대 아니다. 라는 내용을 확인하고 일본대사관 직원은 그 조사결과와 진짜 신순녀의 사진을 보내왔다. 진짜 신순녀의 사진을 보니 대방동사무소에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하면서 부착해놓은 사진과는 한눈에 전혀 달랐다. 결국 대방동사무소에 부착된 사진은 신순녀로 위장한 이선실 사진이었던 것이다.
□ 그러니까 이선실은 북송된 신순녀의 신원을 자세히 요해한 후 결국 그녀로 행세한 것이다. 그래서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가짜 신순녀로 행세한 이선실의 행적을 추적해 보니 그녀는 국민등록, 외국인등록, 모방단 입국, 영주귀국 및 국내에서의 주민등록 발급 등 일체의 서류를 완전히 신순녀로 위장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 수사팀은 결구 이선실이 북송교포 신순녀로 위장하였다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선실의 출신지, 본명 등 실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단지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라는 사실외에는 그에 대한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수사팀은 계속 이선실이 은거했던 아지트를 찾아다니며 숱한 주변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이선실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얻었으나 그녀의 진짜 이름이 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단서는 얻지 못했다.
□ 한편 수사팀은 수사방향을 재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조사한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집요하고 과학적인 신문 끝에 이선실이 -1990년 7월 민중당보에 『제주도 출신 이선화 75세』라는 이름의 축시를 기고한 바 있고 국내 암약시 포섭한 국내 간첩들에게 『나는 4·3 사태때 피해를 입은 가족이며 이름은 이선화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과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국민등록 및 외국인등록을 할 때 제주출신자들을 그 보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 등 주요언동 내용 및 단서를 포착하고 틀림없이 이선실은 제주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 그 무렵부터 내사에 활기를 띠고 제주 현지 수사관들과 합동으로 이선실의 신원추적에 나섰다.
□ 그리하여 제주 수사 합동팀은 약 20여 일에 걸쳐 밤낮으로 밀항자, 실종자, 월북자, 4·3 사건 연루자, 북송자를 중심으로 이선실이 남파하여 활동 기간중 사용하였던 『이선화』라는 이름과 수사팀이 추적한 결과 일명 『이옥녀, 이선녀』 등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하여 방대한 양의 자료를 추적하였다.
□ 먼저 이선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였던 『이선화』를 중심으로 각종 자료를 검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선실과 나이가 비슷한 제주출신 『이선화』라는 이름을 10여 명 발견하였으나 현지 확인결과 우리가 찾는 이선실은 아니었다. 계속하여 같은 방식으로 『이옥녀, 이선녀』의 신원을 추적해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이선실과는 무관한 인물만이 발견되었다.
□ 그래도 제주 수사 합동팀은 이선실이 분명히 제주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다시 한번 앞에서 열거한 이름들을 검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선화와 이름이 앞뒤로 바뀐 월북자 『이화선』이 발견되어 혹시 지금까지 착안하지 못햇지만 이선화가 이화선으로 이름을 뒤바꿔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 그래서 먼저 이화선의 기본 신원을 추적해보니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 552 출신으로 밝혀졌다. 대정읍 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열람하였으나 이화선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아 제적부를 열람해보니 이재춘의 맏이로 등재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때부터 제주팀은 대정읍사무소 호적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이화선의 연고가족 호·제적부를 모두 열람해보니 -이화선은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 552 출신임이 밝혀졌고 -이선실이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외국인등록을 할 때 세대주로 신고한 이창해는 이화선의 6촌동생으로 밝혀졌으며 -이선실이 기 검거한 간첩 황인오(36) 및 손병선(52), 손민영(31) 등과 일본연락거점으로 약정한 『大阪市 生野區 桃谷 3-15-12』에 살고 있는 이행자(37), 송태영(36)이는 이화선의 친동생인 이치효(70)의 딸과 사위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이선실의 실체가 압축되기 시작하였다.
□ 그래서 본부수사팀은 수사인원을 보강하여 제주도 현지로 출장수사를 하게 되었고 제주팀과 합류하여 이화선의 국내 연고선 추적에 총력을 경주한 결과 -제주도에 94세가 되는 생모와 친동생이 제주도 대정읍 하모리에 그리고 시가, 외가 식구들이 서울, 제주시 등지에 많이 살고 있고 일본에도 많은 친척들이 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 따라서 친인척을 중심으로 수사를 병행키로 하고 먼저 이화선의 막내동생인 이창계(53)를 조사했더니 이창계는 -자신은 큰누나 이화선이 출가한 이후에 출생하였고 또한 어머니로부터 누나 이화선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해 이화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고 진술하였다. 이어서 생모 김경량(94)에게 신순녀로 위장한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하며 『이화선』이 맞느냐고 물어보자 그 사진을 한번 쳐다보고는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진술을 거부하였다. 그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김경량이 분명히 자기딸 이화선이 틀림없음에도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수팀은 약 2시간에 걸쳐 설득하였으나 결국 진술을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차선책으로 이화선의 출신지인 가파도에 가서 70세 이상 되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하였다.
□ 먼저 원주민인 이화선의 5촌 외숙모 이정이(67)씨를 만나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하자 -화선이가 많이 늙었구나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깊이 패어 있는 등 어릴 때 이화선의 이목구비와 틀림없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화선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고 하였고, 이화선과 동갑인 원주민 강옥선(76세)을 만나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하지 그 할머니 역시 -키가 작고 얼굴과 입 모양이 어릴 때 이화선의 모습과 똑같다. -지난번 간첩사건 발표 때 TV를 보고 이선실이라는 사람이 이화선과 많이 닮았구나 하고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고 하였고, 이화선의 고향선배인 김창화(80세)는 -이화선은 키가 작았는데 사진을 보니 비슷하다. 고 하였으며,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을 많이 출입하였다는 원주민인 이도해(79세) 역시 이선실의 사진을 보더니 이선실과 이화선이 동일인임을 확인해주는 한편 -이화선이 다녔던 가파국민학교는 과거 김성숙이라는 사람이 세운 신유의숙에서 시작하였다. -김성숙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도 하였으며 해방이후에는 대중당 소속으로 5대 국회의원도 지냈지만 5·16 이후에는 회색분자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화선이 학교에 다닐 때 선생이었던 장종식은 해방 후 북한에 가서 문교부장관을 하였다. ※장종식은 해방이후 월북,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역임 -4·3 사건 때에는 가파국민학교 선생 중에도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한 사람이 있었다. -이화선은 이런 선생들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4·3 사건 때 이화선의 아버지 이재춘이 일본에 다니면서 낳은 이복동생인 이창하도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화선이 가파국민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갔으나 아버지 이재춘은 그때 동경 부근에 있는 삼택도 라는 섬에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모집하여 해산물 채취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화선은 동경에서 가내 수공업체에 다녔다. -이화선이 김태종과 결혼하여 대마도에 살다가 애기가 없어 이화선이 부산으로 와서 젊은 남자와 어울려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는 등의 추가 제보를 하여 주었다.
□ 또한 이화선의 고향친구로 77세된 재일교포 김영순(가명)이라는 사람이 북한을 방문 이화선의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제주도에 체류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수사팀은 김영순을 만났는데 김영순은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 북한을 방문하여 이화선 소식을 듣고 귀국, 제주도에 체류 중 지난 10월6일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단 사건 발표시 TV화면에 나온 북한공작총책 이선실을 보고 이화선임을 직감하고 옆방에 있던 남편에게 다가가 『여보! 여보! 내가 북한에서 고위층에 있다는 고향친구 화선이가 저 사람이다』고 놀라움과 자랑스러움으로 호들갑을 떤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옆에 있는 남편에게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이기까지 하면서 『그런 일이 있었지요』라고 남편에게 재확인하기도 하였다.
□ 우리 수사팀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선실이 이화선과 틀림없다고 판단하였으나 아무리 주위에서 이선실과 이화선이 동일인이라고 하여도 생모 김경량이 자기딸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득력이 없었다.
□ 그래서 우리 수사팀은 재차 김경량을 조사하기 위해 대정읍 하모리에 가서 그녀의 손자인 이태봉(30) 및 아들 이창계를 배석시키고 손자 이태봉을 통역으로 하여 조사를 시작하였다. 김경량은 고령으로 귀가 어두운데다가 심한 제주도 사투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통역이 없으면 말이 통하지 않아 조사가 안되었다. 처음에는 김경령이 계속 진술을 거부하다가 약 30분 가량이 지나자 그는 이선실의 사진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이 사진은 내 딸 이화선이 틀림없다』면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 순간 동석했던 수사팀은 지리한 장마 끝에 햇살을 본 것처럼 짜릿한 환희를 느끼며 그동안 약 2달간의 추적 조사가 막을 내리는 것 같은 순간을 맛보았다. 그래도 본부에서는 이 사실을 재확인을 위해 간부님들이 직접 제주에 직접 내려오셨다. 다시 원주민인 이도해, 강옥선, 김창화 등을 만나 위 사실을 재확인한 간부님들은 이선실이 이화선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 일단 수사팀은 이선실이 제주출신 이화선이라는 실체를 규명하는데 성공했지만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이선실이 국내 연고가족을 중심으로 연고지 공작을 했는지의 여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수사팀은 계속 제주에 머물면서 이선실의 연고자들을 조사했으나 아직 연고지 공작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 이선실이 출생한 가파도는 태평양의 파도가 밀려와 덮치는 곳이라 하여 파도가 다른 곳보다 더 세다는 의미로 더할 『가』, 파도 『파』자를 쓰는 섬이라 한다. 가파도는 그 면적이 2.3km이며 인구는 270세대 약 760여명이 살고 있고 본도와는 약 5.5km 가량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그 곳에는 하루 2회 정기여객선이 운항중이며 그 소요시간은 약 25분 걸린다. 가파도는 70세 이상 고령자가 80여명이 넘는 등 장수마을로 통한다.
□ 이선실이 다녔던 가파국민학교는 1922년 4월 이화선의 전남편 김태종의 망숙부 김성숙이 사설로 설립한 신유의숙으로 시작해 1946년 3월 현재의 가파국민학교로 개명을 했다. 가파국민학교는 지금까지 46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현재 전교생은 약 65명이다. 가파국교가 개명되기 전 신유의숙 시절에는 당시 제주도에 6년제 교육기관이 없어서 본도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중학교에 가기 위해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가파국교의 설립자 김성숙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후 일제식민지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5대 국회의원(대중당)을 역임한 바 있다고 한다.
□ 11월16일 제주공항에서 제주팀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 모슬포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시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 받아 출동한 경찰관에게 신분증을 휴대치 않아 곤욕을 치르던 일 -가파도에서 1주일 가량 있을 때 유일한 민박집이 때마침 발전설비 공사때문에 와있던 인부들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렵게 빈방 하나를 구해 차가운 방에서 라면과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소주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던 일 -수사일정상 가파도에서 본도로 나올 때 폭풍주의보로 인해 계속 정기여객선이 운항을 못해 소형배 한 처을 얻어 모슬포로 나와야만 했고 그 당시 험한 파도를 만나 생사를 걸었던 일 등 제주팀이 겪었던 고생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밝혀진 이선실의 신원〉
□ 李善實(76세)은 1916년 1월(호적상 1917년 2월13일생)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섬)에서 아버지 이재춘(일본 오사카 거주타, 1977년 8월 사망)씨와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는 어머니 金庚良(94세)씨의 6남1년중 맏이로 李花仙이란 이름으로 출생하였다.
□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물도 곱고 머리가 명석하였지만 생활이 어려워 11살 때인 1927년 가파도 辛酉義塾(현 가파국민학교) 4학년을 다니다 중퇴하였다. 재학시 그녀는 장종식(해방 후 월북,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역임) 등 젊은 교사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는다.
□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잠수부일을 할 줄 몰라서 14살 때인 1930년경 어머니와 함께 당시 일본 동경부근 삼택도(섬)에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모집, 잠수부 중개업을 하던 아버지(李在春, 1915년 말경 도일)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가내 수공업체 공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3년만에 혼자 귀국하였고 어머니는 6년 후인 1936년경에 귀국하였다.
□ 21살 때인 1937년(호적상 1939년 12월)에 가파국민학교 동창으로 당시 부산에 살고 있었던 金太鍾(76세)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남편을 따라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이후 어머니 김경량은 자신의 딸인 이화선을 만나보지 못했다 한다.
□ 1940년경 남편과 함께 對馬島로 건너가 그 곳에 살면서 자신은 삯바느질을 하였고, 남편은 잠수부 생활을 하였다.
□ 해방이 된 후 1947년경 남편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영도에 정착해서 생활을 하였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여 당시 4세쯤 된 양녀를 주어다 키우며 살았다. 그 무렵 그녀는 이복동생인 이창하가 4·4 사건시 억울하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 그때 남편 김태종이 다시 對馬島로 밀항하자, 이화선은 부산 영도에 살고 있던 고향 친구 李純烈(75세, 사망)이라는 사람 집에서 살았는데 당시 30대 초반의 여자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교육을 받고 남노당에 가입하여 여맹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당시 북한에서 남파된 남자공작원과 함께 지내며 은신처를 제공해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잡혀서 처형되자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면서 6·25 직전인 1950년 4월 양녀를 친구집에 남겨둔 채 단신 월북하였다.
□ 한편, 원적지 원주민들에 의하면 남편 김태종은 대마도에서 새로운 부인을 얻어 애를 낳고 살다가 부산 영도에 있는 양녀를 데려다 키웠으며 그후 김태종은 이화선을 못잊어 1971년 8월25일 이화선을 만나보기 위해 양녀를 데리고 입북하였다 한다.
□ 그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던 李花仙은 인민군 복장을 하고 서울에 내려와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편 김태종의 형인 시숙 金太能(86세, 사망)씨를 서울에서 만난 사실이 있다고 하였다. ※김태종은 김태종의 이복형(김태종은 1971년 8월25일 제159차로 북송)
□ 6·25가 끝나고 이화선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서 노동당 중앙당 산하에 있는 『금강학원』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받았고 그후 노동당 경공업위원회 과장, 황해도 여맹간부를 거쳐서 평양시 여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해 오다가
□ 1963년경 김일성에게 『조국통일사업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탄원하여 대남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공작원 양성소인 『695 정치대학』이라는 곳에서 전문적인 간첩 교육을 받고
□ 1966년과 1973년에 과거 생활 연고지였던 부산으로 남파되어 암약타가 복귀한 바 있어 이 때 대남공작 성과를 인정받았다 한다.
□ 그후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이 李花仙을 다시 장기간 남한에 침투시켜 적화통일을 위한 대남공작을 시키기 위해 1960년 4월28일 제19차로 북송된 교포 申順女(74)라는 사람의 신원을 이화선에게 상세히 요해시킨 후 그의 신분을 위장토록 철저히 교육하고
□ 이렇게 하여 이화선은 신순녀로 완벽하게 위장한 후 1974년초 북한 공작선편으로 일본 해상으로 침투, 오사까지역에 은거하면서 재일교포를 포섭, 만경봉호 등 공작선편으로 입북시키는 등 암약타가 그해 3월 東京 荒川區役所에서 자신의 6촌동생이자 조총련에서 활동하고 있던 李昌海를 세대주로 하여 申順女라는 이름으로 외국인등록(제164742호)을 하고 나서
□ 그 당시 神戶에 살고 있는 진짜 申順女의 이복동생 申性福(57)씨를 찾아가 申順女의 부모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의 누나 申順女다. -부산에서 살다가 소화 40년에 밀항하여 오사까 入管에 자수하였다. -入管사람들이 네가 살고 있는 곳을 가르쳐주어 찾아왔다. 라고 위장하여 그때부터 申性福의 도움을 받아 申順女로 행세해왔다.
□ 한편, 그 당시 신성복씨는 북송된 누나 신순녀가 아닌 처음보는 어떤 부인이 찾아와 자기가 누나 신순녀라고 주장하기에 『별 희한한 사람 다봤다, 당신은 나의 누나가 아니다』라고 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별다른 손해도 없고 해서 이를 묵인하였다고 한다.
□ 그후 이화선은 1974년 11월에 일본에 거주하는 이화선의 먼친척인 李柄夏(92세, 사망)씨 가족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申順女 명의로 국민등록(제35167)을 하고 1977년 2월 東京 荒川區役所에서 申順女 명의의 외국인등록증(제166140호)을 갱신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김정숙 회갑 축시 제작용 천, 금실, 은실 등을 수집, 송부하였다.
□ 그리고 이화선은 일본에서 1978년 5월까지 재일교포를 포섭해서 입북시키기도 하였으며 또 만경봉호가 일본에 입항할 때 직접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북한공작원과 만나 공작토의를 하는 등 이러한 공작 성과를 인정받아 당시 김일성은 李花仙에게 보신용 웅담을 직접 보내주기도 하였다 한다.
□ 계속해서 李花仙은 남한에 침투, 장기적으로 공작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1978년 5월 고오베에 살고 있는 진짜 申順女의 이복동생 신성복에게 『전주에 사는 언니(申良根)를 만나러 가자』고 하여 그와 함께 모국방문을 신청하고 『모방단 일원으로 입국할 예정이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전주거주 신양근에게 발송한 후 1978년 6월4일 단오 모방단원으로 함께 국내 입국하여 전주시 평화동에 살고 있는 申良根씨 집을 찾아갔다.
□ 그때 李花仙은 申良根에게 부모성명과 둘만이 알고 있는 어린시절 추억을 화제로 자매지간 임을 인식시키는데 성공을 하고
□ 그 집에서 체류하면서 3박4일간은 단체로 산업시찰을 하고 개별적으로 전주시내, 김제 금산사, 광주 무등산을 관광하고 申良根의 식구들에게 세이코 손목시계, 카메라 등을 선물하는 등 완전히 한가족으로 행세한 후 6월9일 상경하여 1978년 6월11일 개별 출국 일주일만에 다시 도일하였으며 일본에 도착된 시 전주 신양근에게 안부와 함께 영주 귀국하여 고국 땅에 살고 싶다는 등 내용의 편지를 발송하기도 했다.
□ 1978년 7월 일본 니이가다에 가서 공작선(만경봉호 추정)에 승선, 북한공작원과 공작 토의
□ 1978년 7월25일 고오베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신순녀 명의로 국민등록 갱신(제35343호)
□ 그로부터 6개월 후인 그해 1978년 12월24일 다시 입국을 해서 역시 申良根의 집에 체류하면서 申良根의 가족의 안내로 단체관광객 30여명과 함께 2박3일간의 일정으로 제주도를 관광하였다. 그때 이화선은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에 제주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용두암에 가서는 『바위가 어쩌면 저렇게 용처럼 생겼느냐』 -『제주도는 기후가 따뜻하고 아름답다』, 『좋은 곳을 구경시켜 주어 대단히 고맙다』 라고 하면서 제주도에 처음 온 것처럼 능청을 떨기도 하였다 한다.
□ 그후 이선실은 1979년 1월 말경 일본으로 건너가서 북한의 공작지령에 따라 일본에서 북한으로 일시 복귀하였다가 그해 7월 다시 일본으로 침투하였다.
□ 그리고 1979년 9월29일 3번째로 국내 입국하여 申良根씨의 집에 체류하면서 조국에 뼈를 묻히고 싶다며 영주 귀국 의사를 표시하고 향후 자신의 공작 아지트로 활용하기 위해 신양근의 넷째며느리(李奇順)에게 『일본에서 살던 집을 팔아 1,000만엥을 가져왔다. 영주 귀국하게 되면 살 집이 필요하니 미리 구해달라』고 부탁하여 서울 동작구 대방동 344-5번지 단층 양옥집을 3,675만원에 사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친족관계라는 확신을 주기 위하여 申良根의 차남 白德萬(59세, 사망)의 명의로 동 가옥을 등기하고 그해 10월16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 그리고 1980년 1월19일 니이가다에 가서 공작선(만경봉호 추정)에 승선, 북한공작원 김모와 공작토의를 하는 한편
□ 1980년 2월에는 남한 체류시 기독교 신자로 위장, 활동할 것에 대비해 일본에서 교회에 다니면서 영주 귀국자로 위장키 위한 중고 생활용품, 냉장고, TV, 오토바이, 전기밥통, 재봉틀 등을 구입하였음.
〈신순녀로 국내 입국 합법신분 구축〉
□ 1980년 3월30일 이선실은 영주 귀국키 위해 이불 4점, 구형 TV, 녹음기 2대, 재봉틀 1대, 오토바이 1대, 카셋트라디오 1대, 의류 등 생활도구를 가지고 김포공항으로 입국, 전주에서 상경한 신양근의 장남 백덕산, 4남 백덕조 등 2명의 출영을 받고 그들의 안내로 전주시 평화동 1가 617-2 신양근 가로 가서 일시 거주하면서 그해 4월15일 국내 주민등록을 위해 전주 상호미상 사진관에서 주민등록증 신청용 사진을 촬영하는 등 합법토대 구축을 위한 기본 활동을 계획대로 추진한다.
□ 이선실은 4월22일 당시 전주 평화동사무소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위 백덕산의 주선으로 신양근의 주소지인 전주시 평화동 617-2에 신규 주민등록을 함으로써 완전한 합법신분을 쟁취하고 -그경 백덕산에게는 50cc 일제 오토바이 1대(90년도 폐기)를 선물로 제공하고 당시 공군에 복무중인 백덕산의 아들 백용현(35)에게는 일제 세이코 손목시계 1개를 제공하는 등 신양근 가족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선물공세도 하였다.
□ 1980년 5월15일 이선실은 기 구입해 놓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 344-5(제 2아지트)로 이주, 은거하면서 1981년 11월19일 위 신양근의 3남 백덕만(59, 사망) 명의로 했던 동 가옥을 자신의 명의로 등기 이전하고 본적을 전북 완주군 이서면 상계리 305번지에서 거주지인 대방동으로 전적한 후, 이때부터 서서히 국내 및 재일 신양근 집안과의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신순녀의 가족이 찾아오면 『뭐하러 자꾸 오느냐, 돈이 탐이나서 그러느냐』는 식으로 민망하게 만들어 따돌렸던 것이다.
□ 한편 이선실은 신순녀의 원적지인 전북 완주에서 대방동 344-5로 전적 후 신길동 소재 영동교회에 다니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1982년 1월경 위 영동교회에서 알게되어 친구처럼 지내오던 집사 정옥주(69)를 통해 김옥기(53, 대한교육보험 외무사원)를 소개받고 그를 수양딸로 삼아 자신의 대방동 집 방 1칸에 무상으로 입주시켜 신변안전 조치를 취하는 등 완벽한 내국인으로서 행세를 하는데 주력한다.
※김옥기 구속 송치
1982년 4월경에는 김옥기와 함께 수안보 관광(당일)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국내 정세수집 및 활동에 익숙해지면서 이선실은 자신의 가명인 신순녀 명의로 대방동 아지트에 신규전화(T 813-7063)를 설치하고 국내에서 지실자 및 재일 연고가족들과 통신연락을 취하는 한편 1982년 6월경에는 대방동 제 2아지트에서 재일 신성복의 처 나가이 요꼬(54)의 방문을 받고, 재일가족 동향 및 안부 등을 전해듣는 등 내국인으로서 합법 신분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국내활동을 시작한다.
2. 국내 활동상황
〈김옥기에게 들려준 비판적 언동〉
□ 이선실은 국내 아지트를 마련하고 김옥기(54, 보험회사 영업사원)를 자신의 신분보장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완복한 내국인 행세를 하였다. 이선실은 1982년 8월부터 1990년 10월17일 북한 복귀시까지 김옥기와 동거 등 수시 접촉해오면서 국내생활의 이모저모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 북한의 실정과 비교하였고 그럴 때면 예외없이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잊지 않았다. 예컨데,
□ 1982년 8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이선실은 김옥기에게 -생선을 바닥에 놓고 파니 더러워서 먹겠느냐, 위생상태가 엉망이다. -북에서는 생선은 포장해서 진열장에 잘 보관하여 위생적으로 판다더라. 고 하였고
□ 1983년 10월 발생한 버마 아웅산 사건에 대해서는 -아웅산 테러는 북한에서 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 혼자만 살아남은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무슨 관련이 있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 1982년 2월 중순에는 한보관광(주)에서 수안보 온천 관광권 2매(1인 5,000원)을 구입하여 단체관광객 45명과 함께 수안보에 가서 온천 입욕 및 나이트클럽 등지를 관광(당일 코스) 후 귀가하면서 -일본 온천은 한 사람이 3평 정도 차지할 수 있도록 시설이 설계되어 있어 공간이 넓은데 수안보는 공간이 좁고 사람은 너무 많은데 그게 무슨 온천이냐. -낙후된 나라는 할 수 없다. -다시는 안 가겠다. 는 등 얼굴에 핏발을 세우며 강한 어투로 얘기를 한 적이 있으며
□ 1984년 여름 북한이 수해물자 보내는 것을 보고는 -북한이 훨씬 잘 살고 있으니 저렇게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너무 낙후되어 있어 비가 많이 오면 피해가 크다. 는 등 얘기하면서 은연중 남한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김옥기로부터 동조의 발언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 그후 1985년 6월 이선실은 구로공단 동맹파업에 대해 김옥기에게 -나라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니까 근로자들이 길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냐. -우리나라는 대기업에 자본이 편중되어 있어 문제가 많다. -앞으로 중소기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한국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 1986년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을 보고는 김옥기에게 -경찰들이 저러니 나라가 한심하고 썩었다. -같은 여자로서 가슴이 아프다. -권양이 커서 여성운동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며 권인숙의 대정부 투쟁을 희망하면서
□ 1986년 5월 김옥기와 보라매공원 산책시에는 -잔디도 없는 흙바닥에 나무조차 없는데 이게 무슨 공원이냐.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에 대해서는 -이 나라 경찰들은 모두 썩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 1987년 11월 KAL기 폭파사건에 대해서는 -앞으로 김현희는 영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는 한국에서 죽일 것이다. -김현희와 같은 공작원인 남자(신이찌)는 잘 죽었다. 라고 하며 KAL기 사건이 북한 공작원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암시를 주는 이야기도 하였다.
□ 그리고 1987년 12월 중순 대통령 선거 후 이선실은 김옥기에게 -우리나라는 아직도 군인정치가 끝나지 않았다. -○○○씨가 당선되었으면 좋았을텐데 큰일이다. -○○○씨는 후덕한 인상이지만 정치는 모르는 사람이다. 라고 얘기하면서 ○○○ 지지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 한편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 개막식 장면을 보고는 -지금 남한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카드색션은 이북을 따라갈 수 없다. 라고 말하는 등 매사 남한의 실정을 비판적 시각으로 매도하면서 상대적으로 은연중 북한의 사회실정을 추켜세우는 찬양성 발언을 잊지 않았다.
〈김옥기에게 선물제공, 환심유도〉
□ 1982년 9월경 무더위가 한풀 꺾인 밤 깊은 시간, 거의 자정쯤 되었을 때다. 대방동 아지트의 이선실은 자신의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에 레시버를 끼고 방송을 청취하였다. 당시 김옥기는 잠도 오지 않고 하여 무의식중에 이선실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게 웬일인가! 이선실은 화들짝 놀라며 귀에 꽂은 레시바를 순식간에 발 밑으로 감추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곧이어 이선실은 노기띤 표정으로 김옥기를 쳐다보며 『왜 노크도 없이 남의 방문을 여느냐』며 큰소리로 화를 냈다 한다. 그후 이선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하면서 행동에 은밀성을 가일층 강화하였다 하며 이때부터 김옥기는 이선실이 간첩임을 알기 시작했다고 한다.
□ 한편, 이선실은 1982년 8월부터 1985년 4월초까지 3회에 걸쳐 도일하여 매회 2~3개월씩 일본에 체류하면서 김옥기에게 -주사약이 떨어져서 한 보름간 일본을 다녀오겠다. -동생(신성복 지칭)을 만나러 일본에 간다. -올 때는 전주 언니집에 들렀다 오겠다. 고 하면서 여행용 가방을 들고 출타 후 돌아와서는 꼭 김옥기에게 일제 세이코시계, 18K 금반지 및 보석반지 등 1개씩을 선물로 주었고 그후에도 일제 재봉틀, 찜통, 카메라, 손목시계, 금목걸이 등 다양한 선물을 주어 김옥기에게 환심을 끌며 인자한 할머니 같은 성품을 보일려고 노력하였다 한다.
□ 1987년 7월에는 한때 이선실이 건강이 좋지 않다면서 영등포구 신길동 소재 홍익외과의원에서 위염, 장염, 흉통 등으로 통원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이선실은 김옥기에게 종로 및 경동시장에서 한약재, 등푸른 생선 등을 심부름시켜 복용하면서 고맙다는 표시로 그에게 일제 단파라디오를 주기도 하였다.
□ 그후, 이선실은 1987년 9월 어느 날 저녁을 먹고 한참이 지난 후 주변이 모두 잠들어 조용한 시간이었을 때 갑자기 김옥기를 자신의 방으로 부르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 나이 7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는 『네 여동생을 꼭 찾아서 돌봐주어라』고 하면서 내 속옷에 글씨를 써놓으신 적이 있다. -내가 만약 죽게되면 신문에 『신순녀 사망』이라고 광고를 내주고,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찾아오거든 그에게 인감도장을 주고 이 집을 팔아서, 그 동생에게 90%를 주고, 나머지 10%는 네(김옥기 지칭)가 갖도록 하여라. 라고 하면서 눈가에 깊이 패인 주름을 더욱 찡그리며 사뭇 심각한 어조로 나직히 말하였다. 김옥기는 그동안 수년을 같이 생활했지만 그날 같이 힘없는 표정과 침울한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다. 마치 그것은 유언성 발언과도 같았다.
〈문익환 집안과 친교〉
□ 1986년경 이선실은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씨를 가끔 방문하고 돌아와 김옥기에게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그 집 며느리(박용길)를 존경한다. 라는 말을 자주하면서
□ 문익환이 다니는 『한빛교회』에 다녀온 후에는 -문익환 부인(73, 박용길 지칭)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남편이 교도소에 있어도 남편에게 불만이 없고 시어머니에게도 잘하고 있다. -구김없이 꿋꿋이 잘 생활해 나간다. -한빛교회에 나갈 때마다 만나보는데 인품이 부드럽고 인자하다. -문익환의 어머니는 나이가 97세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있어서 글씨도 잘 쓰는 것을 보니 너무도 부럽게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훌륭한 여성지도자들이 별로 없느냐. -한국여자들은 게을러서 일도 안하고 손톱에 메니큐어만 칠하고 있다. 라고 얘기를 하는 등 문익환 일가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빈번히 하였으며 이후 수유동 소재 문익환의 집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문익환의 모 김신묵 및 처 박용길 등과 친교를 유지하였다.
□ 그리고 1987년 12월경 대방동 391-312 거주시 마침 13대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김옥기에게 --오늘 보라매공원에서 개최된 ○○○씨 유세장에 갔다가 문익환씨의 어머니와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그 노인(문익환 모, 91년 사망)은 진짜 훌륭한 분이다. -앞으로 문익환씨가 다니는 수유리 『한빛교회』에 다녀야겠다. -문익환씨의 부인(박용길)이 일하고 있는 곳(민가협 지칭)에 가서 일을 도와주어야겠다. 라고 얘기를 하면서
□ 며칠 후 이선실은 불쑥 김옥기에게 -문익환씨 어머니(김신묵)에게 용돈을 주었다. -민가협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가서 문익환씨의 부인과 40~50대 여자들을 만나면서 지낸다. -민가협에 매월 회비(액수미상)를 내고 있다. 라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도 민가협 회원인양 자랑을 떠벌리며 김옥기에게도 좋은 단체가 있으면 들어가서 후원하는 것이 좋다라며 조언하기도 하였다 한다.
□ 그후 이선실은 1989년 1월초 도봉구 수유동 소재 문익환집을 신년인사차 방문, 문익환으로부터 『꿈이 오는 새벽녘』 책자 1권(당시 문익환은 동 책자에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89년 새해에 신순녀님께, 문익환 드림』이라고 기재)을 받고 돌아왔으며
□ 1989년 5월 하순에는 대방동 아지트에서 김옥기에게 -문익환의 집 살림살이는 보잘 것 없더라.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동생 문동환이 매달 30만원씩 보태준다더라. -할머니(김신묵)는 아들이 감옥에 있어도 눈물하나 흘리지 않고 꿋꿋하며 높이 우러러 보아야 할 사람이다. -문익환이 하던 일을 할머니와 그의 부인이 다하고 있더라. -한빛교회에 갔다가 문익환의 어머니와 함께 문익환의 집에 들렸더니 『문익환 부인이 이것이 산 것이 아니고 선물로 들어온 것이니 약소하지만 가져가라고 하면서 주기에 받아왔다』 라고 말하면서 대나무 상자에 포장된 약과 1상자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여준 사실이 있다.
□ 1989년 7월 김옥기는 하루종일 보험 영업활동을 한 후 더위에 지쳐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서 쉬고 있을 때 이선실이 다가와 불현 듯 -신촌에 신부 드레스 판매상점 2층에 있는 ○○당 ○○○의 개인 사무실에서 오후 2시에 유명인사 부인들과 만나기로 되어있는데 오늘 문목사 부인이 우리집에 오면 함께 갈 예정이다. 라고 자랑하듯 얘기를 꺼내며 『문목사 부인을 만나면 웬지 편안함이 있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어 좋다』라고 하면서 문익환가 와의 친교유지를 퍽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다.
〈신원미상 키큰 할머니를 김옥기에게 소개〉
□ 1987년 12월경 이선실은 자신의 제 4아지트에 자칭 강원도에서 왔다는 키큰 여동생(67세 가량 노파)과 그의 아들이라 부르는 이동진(28세 가량)이 방문, 이들과 함께 근 1년간을 동거하였는데
□ 1987년 12월 하순 당시 옆방에 기거하던 김옥기가 퇴근하여 귀가하자 처음보는 키큰 할머니와 28세 가량의 남자가 와 있어 이상히 여기던 차에 이선실이 -이 사람(키큰 할머니)은 나의 여동생이고 이 총각(28세 가량)은 내 조카 동진이다. 라고 하면서 이들을 소개하여 김옥기는 그들과 처음으로 인사교환을 하고 그날 밤 8시경 김옥기 방으로 건너온 이선실에게 -전에는 남동생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어떤 여동생이냐 라고 묻자 -나는 이 동생과 핏덩어리채로 헤어졌기 때문에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이 동생이 일본으로 연락을 하여 알아보니 내가 안양에 산다고 하여 다시 안양 부흥(아)B-208호에 갔다가 집주인이 대방동으로 이사갔다고 하여 이곳으로 찾아왔다고 하더라. -갈 데가 마땅치 않아 여기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 라고 이선실은 말하였다. -어떻게 작은 방에서 셋이서 삽니까. -내 방을 쓰도록 하세요. 라고 김옥기가 말하자 이선실은 -아니다. 셋이서 함께 내방을 쓰겠다. 라고 얘기한 사실이 있었다. □ 1988년 1월 초순경 김옥기는 마루에 나와있던 동진어머니(키큰 할머니)에게 -어디서 살았느냐 -할머니(이선실) 친동생인데 하나도 닮지 않은 것 같다. 라고 말을 건네자, 동진어머니라는 여자는 -강원도 공사장에서 인부들 밥을 해주는 함바를 하면서 살았다. -언니(이선실 지칭)는 아버지 닮고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나는 가진 것(재산)이 하나도 없어서 신세지는 것 같아 도저히 올 수가 없어 이제야 왔다. 라고 얘기를 하며 자신의 과거가 파란만장했음을 은연중 암시해 주었다.
□ 며칠 후 김옥기는 동진 모자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창 일하고 배워야할 청년(동진 지칭)이 이렇게 놀아서 되겠느냐. 고 하자 동진은 빙그레 웃으며 -나는 배운 것도 없고 강원도 같은 시골에서는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놀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동진은 1988년 1월4일 당시 제 4아지트 세입자인 이강숙(34)의 소개로 빙그레 우유 노량진 대리점 배달원으로 취직하여1988년 3월22일 퇴직 때까지 약 384만원 가량의 판매실적을 올렸고 그 판매수당으로 약 53만원을 수령하였다. 이동진은 1988년 3월 중순경 위 대리점에서 주민등록등본과 재정보증서를 요구하자 『주소지가 강원도이므로 강원도에 다녀와야 한다. 얼마 전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관절염이라고 해서 앞으로 일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등의 핑계를 댄 후 그만두었다고 한다.
□ 한편, 1988년 2월 초순경 김옥기는 동진 모자와 좁은방에서 동거하는 이선실에게 너무 신세지면서 생활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간직해오던 중 이사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지내기가 불편하고 돌봐줄 동생이 있으니 이사를 가야겠다. -1987년 2월 대방동 집 살 때 내가 보탠 1,200만원을 돌려달라. 그리고 그 집 팔 때 이익금도 생각해 달라. -돈이 없으면 1987년 1월 초에 가입(김옥기 명의)된 1년만기 적금 2,000만원을 찾아서 쓰겠다. 라고 하자, 이선실은 -2층 세든 사람을 내보낼 테니 이곳에서 함께 살자. -동진이 엄마와 상의해 보았더니 보험가입금 2,000만원을 찾아서 주는게 좋겠다고 하니 그 돈을 찾아쓰라. 고 하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다.
※이선실은 1988년 2월8일 김옥기가 경기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 855동 301호로 단신 이주할 때 일본제 재봉틀(상품명:RICCAR) 1대를 선물로 제공했다.
□ 그후 1988년 8월 중순 철산동 주공아파트로 찾아온 동진모자는 김옥기에게 -언니(이선실 지칭)를 이곳으로 이사시켜야겠다. -나는 다시 강원도에 가서 밥장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곧 떠나야 하는데 거기(대방동)에서 살면서 할머니를 좀 돌보지 뭐하러 이리 이사를 왔느냐. 라면서 김옥기를 원망하는 말을 한 후 떠난 사실이 있다 한다.
※이들은 나중에 남파간첩으로 확인됨.
□ 한편 이선실은 자신이 영주 귀국시 소지해온 생활용품을 주변사람들에게 팔기도 하였는데, 예컨데 -1983년 6월경 제 2아지트 세입자 장옥근(45)에게는 일제 카세트 라디오, 헤어 드라이기, 장난감 등을 판매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카세트 라디오를 새 것으로 사준다고 했다고 중고를 주었고 -1988년 11월경에는 제 4아지트 세입자 이강숙에게 헌이불 1채, 물통 1개, 수건 1개 등을 제공 후 일본제 코끼리표 보온밥통 1개를 10만원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강숙은 위 보온밥통이 새 것이 아닌 몇 번 사용한 것이어서 처음에는 5만원만 주었으나 돈을 더 달라는 눈치를 하여 나중에 5만원을 더 주었다고 한다.
□ 그리고 때때로 이선실은 주말이나 휴일 등 한적한 시간을 보낼 때는 김옥기와 서울 시내 고궁 및 남산 등지를 관광하면서 사진촬영도 하고 서울거리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면서 매사 북한의 실정과 비교하며 북한의 우월성을 찬양하였다 한다.
※이때 필름을 김옥기 집에 보관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수사상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진보정당 모임 관여〉
□ 1989년 1월초 이선실은 「진보정달 준비모임」소속 성원 40~50명과 함께 관악산 등반대회 참가한 후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때 자신을 『이선화』라고 소개한다.
□ 1989년 10월 이선실은 동작구 대방동 13-61 제 5아지트를 인사차 방문한 김옥기에게 -일본에서는 공장 노동자들도 시간만 있으면 정치이야기를 하여 모두가 깨어있다. -너도 깨우치려면 젊은 나이에 보험회사에만 다니지 말고 민중당에 가입해서 시국강연을 자주 듣고 활동도 해야 배우는 것도 많고 눈이 트인다. -한겨레신문을 보도록 해라. 는 등 민중당에 입당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 1989년 11월경 마포구 서교동 354-6 신영빌딩 4층에 있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약칭 준비모임)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면서 500만원을 제공하는 한편, 張琪杓, 동인의 처 조무하(42) 및 「민가협」 회원들과 친교를 유지하는 한편
□ 1989년 12월 중순에는 도봉구 쌍문동 삼익 세라믹(아) 112-1006 張琪杓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 1989년 12월 중순경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張琪杓로부터 제 5아지트를 청계 피복노조위원장 김○○(35세 가량)의 은신처로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허락한 후 다음날 제 5아지트 현장확인차 방문한 張琪杓를 약 30분간 만났다. 이때 이선실은 커피 등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세입자인 김점숙 모녀로부터 커피잔과 커피 등을 빌려서 장기표에게 대접한다.
□ 1989년 12월30일 이선실은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張琪杓로부터 동인이 저작한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 제하 책자 1권(첫장에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1989년 12월30일 張琪杓』라고 기재)을 받았으며
□ 1990년 1월초에는 張琪杓 집을 방문, 동인에게 『민주화 운동에 돈도 없을 텐데 생활에 보태쓰라』면서 활동자금 100만원 제공하였다.
□ 한편 1990년 3월 강화도 양도면 돌곶이산 車씨묘 장군석에서 드보크를 발굴하고 공작금품을 수령했으며
□ 1990년 4월에는 자신의 제 5아지트에 남파간첩 권중현(50대), 김돈식(20대 후반)을 입주시켜 약 3개월간 동거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동 가옥 세입자 김점숙 모녀는 직장에 나가는 관계로 권중현과는 한번도 상면치 못했으나 김돈식과는 몇 번 얼굴을 마주쳤지만 서로 인사만 했을 뿐 대화를 나눈 일은 없었다고 한다.
〈손병선 포섭, 간첩교육〉
□ 이선실은 1990년 2월 하순 진보정당 준비모임에서 개최한 관악산 등반대회에 참석하여 손병선(53)을 알게된 후 1990년 4월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손병선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요. 라는 인사를 받고 그에게 -손선생이 모임에 참가하게 되어 반갑다. 앞으로 열심히 잘해달라. -이제 더 이상 우리 진보세력들이 분열하지 말고 국민속에 뿌리를 내리는 정당으로 컸으면 좋겠다. -재야의 요구를 제도권에 반영할 수 있는 당이 필요하다. 라는 등 진보정당의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하자 손병선은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되겠는데 많은 지도 부탁한다. 고 하였다. 이때부터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자신이 혁신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표출한다. 이후 이선실은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손병선을 매주 1~2회 접촉한다.
□ 한편 이선실은 1990년 4월13일 강남구 삼성동 소재 KOEX 4층에서 개최된 「민주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원회」(약칭:민연추, 구 준비모임) 결성대회에 참석, 「민연추」 깃발을 들고 단상으로 등단하기도 하였다. 이날 결성대회에는 유명인사인 ○○○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하였고 이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하였다. □ 1990년 4월 「민연추」 사무실에서 개최된 여성분과위원회 정책토론회 및 「민연추」 제1차 중앙위원회 등에 참석하였으며
□ 1990년 6월19일 민연추에 온라인으로 300만원을 송금, 제공하기도 하였다.
□ 1990년 6월 하순경 이선실은 마포 서교동 소재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재정위원 회의에 참석한 손병선을 만나 그에게 -오늘은 무슨 안건을 토의하였길레 회의가 이렇게 길었느냐. 며 회의안건 내용을 묻자 손병선이 -지금 당 재정문제가 어려워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고 하자 그에게 -당 재정이 많이 부족하냐, 내가 뭐 도와줄게 없느냐. 고 하며 자금제공 의사를 표명하자 손병선이 -당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가 매일 고장이 나서 당장 복사기를 1대 사려고 하는데 가격이 500만원 가량이 되어 걱정이다. 고 하자 그에게 -내게 저축한 돈이 있으니 그 복사가 내가 한 대 사주겠다. 라고 한 후, 며칠 후인 6월 하순경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 『이선화 기증』이라고 표시된 복사기 1대를 기증하였다.
□ 이후 이선실은 마포구 서교동 소재 민중당 창당준비위 사무실에서 개최된 민중당 여성분과위 결성식 및 민중당사 현판식에 참석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면서 1990년 7월9일 민중당 창당준비위에 온라인으로 150만원을 송금하기도 하였다.
□ 이선실은 1990년 7월 중순경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상임집행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손병선 및 ○○○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 손병선에게 -손선생님, 오늘 시간 있으면 우리들에게 손선생님의 농장구경을 좀 시켜 주시오. 라고 제의를 하자 손병선은 이선실에게 -이선생님도 함께 가보시지 않겠느냐. 라고 제의하여 이선실은 ○○○과 함께 손병선 승용차 편으로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 156번지에 있는 손병선이 경영하고 있는 고려농원을 방문하여 약 1시간에 걸쳐 비닐하우스에 재배중인 장미 등을 구경한 후 그날 오후 손병선 승용차 편으로 서초구 양재동 지하철 3호선 양재역까지 와서 그곳에서 전철편으로 귀가하는 등 손병선과 더욱 가깝게 지내며 포섭의 기회만을 노린다.
□ 1990년 7월16일자 민중당 당보 2회에는 『제주도 지역 발기인 이선화(75세)』라는 이름으로 축시를 기고하기도 하였다.
※후에 이것이 이선실의 정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 1990년 7월 하순경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손병선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이 선생님, 점심이라도 함께 할까요. 라는 제의를 받고 -나는 음식을 아무거나 못먹고 가려서 먹으니 신경쓰지 말라. 고 하자 손병선은 -그럼, 차나 한잔 하시지요. 라고 하여, 사무실 인근 지하 다방 『하얀집』에서 손병선과 차를 마시며 대화중 손병선이 -당의 재정문제가 어렵다. 당이 자립해 나가려면 뭔가 수익사업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라고 하며 민중당의 어려운 자금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그에게 -당이 살아나가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재정확보이다. -재정 확보방법에 대해 과거 내 경험을 얘기한다면, 해방 후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나와 당(남노당 지칭)에 가입하여 재정사업을 할 때 여성당원들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여 당 재정을 도왔다. -민중당도 전 지구당을 동원해서 재정사업도 하고 후원금 모금도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라는 등 재정확보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자 손병선은 -현재 당에서는 농산물 직거래 판매로 수입을 올리는 방법과 후원회에서 후원금을 갹출하여 당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재정은 상당히 어려운 실정이다. -한달에 후원금, 당비 등으로 500~600만원 정도가 들어오는데 지출은 약 1,000만원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도저히 당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 라고 하는 등 당 재정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그후 이선실은 승용차 편으로 귀가하면서 그에게 -나는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해녀생활을 하다가 제주 4·3 항쟁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놈들 사이에서 극심한 고생을 하면서 생활했다. -그후 국내에 들어와서는 혼자 살며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아왔다. 라고 하는 등 손병선의 성분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위장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자 손병선은 -나도, 과거 농민운동을 하며 좌익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다 온 아버지 밑에서 무척 고생을 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때는 낮에 구두닦이와 날품팔이, 신문배달을 하며 야간학교에서 독학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해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얻어 나간 후 가정을 버리는 바람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면서 고등학교를 두 군데 옮겨다니면서 공부하여 부산대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만난 현 처와는 대학 2학년 때 결혼하였고 그녀는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나를 뒷바라지했다. -4·19 당시에는 부산대 정치학과 4학년이었는데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민족통일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5·16 후 감옥살이를 했다. -감방에서 나와서 취직도 제대로 안되고 하여 부산에서 꽃농사를 시작했고 그것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1988년에 4·19 동지들과 「○○○○ 연구소」를 만들어 현재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라고 하는 등 서로의 신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국정교과서(주) 앞에 이르러 손병선에게 -집이 이 근처에 있으니까 내려달라. 여기서는 걸어서 갈 수 있다. 라고 하자 손병선은 -몸도 불편하지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 라고 고집했으나 이선실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귀가하는 등 그들의 공자원칙대로 자신의 은거지는 숨겼다. 이날 이선실은 손병선의 성분을 충분히 요해한다. □ 1990년 8월 중순경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손병선을 만나 인근 지하다방 『하얀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면서 그에게 -요즘 혈압이 높고 손발이 떨리고 저리다.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다. 올 겨울은 따뜻한 곳에 가서 쉬어야 될 것 같다. 못 견딜 것 같다. 라는 등 자신의 건강문제를 이야기하자 손병선이 -어디 쉴만한 곳이 있느냐. 라고 묻자 이선실은 그에게 -내가 몸이 불편할 때는 가서 쉬는 곳이 있다. 라고 하고 손병선이 -급히 연락할 일이 있으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우리가 찾아보기라도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자 손병선에게 -내 혼자 알아서 할 일이다. 젊은 사람들한테 피해주기는 싫다. 걱정하지 마라. 라고 한 후, 당시 배포된 민중당의 정강에 포함된 통일문제에 대하여 손병선에게 -지금 당정책위에서 입안된 당의 정강 초안이 나온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에 포함된 통일방안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전민련」식 통일방안인 1민족 1국가 2체제 연방제통일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민중당통일안인 『연합성 연방제』는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고 상호교류를 통해 단계적으로 2개의 정부로 연방정부를 구성하여 통일하자는 것인데 2개의 국가가 존립하고 각각 독립하여 국가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2개의 정부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것은 현재의 분단상태를 고착화하는 것이다. 라는 등 민중당의 통일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자 손병선이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현재의 두 국가 체제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경제, 문화 등 남북교류를 진행해 나가면서 단계적으로 연방제 국가로 나가야 하는 것이 현실적이 아니겠느냐. 라는 대답을 하여 손병선에게 -국가연합은 바로 남한이나 미국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 이름만 연방제라 하지만 국가연합이다. 라고 하며 계속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자 손병선이 -나는 통일정책에 관여한 것이 아니고 젊은 친구들이 만들어 온 것을 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개인적 생각으로(전민련)식 통일방안은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그들의 사상은 수령관이나 주체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라고 하자 손병선에게 -주체사상은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사상이다 -주체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관이다. 6·25후에 북이 초토화 되었는데 김일성 수령님이 다 해결했다. 수령님은 국가의 중심이며 수령님 때문에 북한이 유지된다. -수령님의 사상을 잘 계승하고 있는 사람이 김정일 지도자이기 때문에 북한의 지도자로 옹립하고 있다. -사실 나는 과거에 빨치산 활동에 가담하여 오대산, 지리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빨치산 활동시 옆구리에 총을 맞고 더 이상 빨치산 활동을 할 수 없어 하산하였다. -나는 남북분단의 희생자다. 나의 희망이 남북통일이고 그래서 남북통일운동을 하는데 모든 힘을 보태고 있다. 손선생도 통일사업을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 라고 하자 손병선이 -나는 4·19 당시 「민족통일연구회」의 부산대 총책으로 활동했고 반민주악법 반대 경남학생 공동투쟁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지역 학생시위를 주도했었다. -그래서 통일운동에 대하여는 누구보다도 관심이 높다. 남북통일이 되려면 쌍방이 자기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입장할 것은 인정하고 양보할 것을 양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비참한 역사를 하루빨리 극복하려면 어떻게든 통일을 이룩해내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통일운동에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라는 말을 하여 손병선에게 -손선생, 통일운동을 하려면 옷도 깨끗이 입고 다녀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 잠바 차림으로 다니지 말고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깨끗하게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다니려면 활동비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내가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좀 가지고 왔으니 이 돈으로 양복도 사 입고 활동자금으로 써달라. 고 하면서 흰봉투에 든 수표 1,500만원(500만원권 수표 2매, 100만원 자기앞수표 5매)을 제공하자 손병선은 몇 번 사양하다가 『고맙게 쓰겠다』면서 이를 받은 사실이 있다 한다.
□ 이후 이선실은 손병선을 포섭하기 위해 계속해서 1990년 8월16일 손병선에게 온라인으로 200만원 송금하여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
□ 1990년 8월 중순경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 인근 『하얀집』 다방에서 손병선을 만난 이선실은 그에게 -손선생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한 후 주위를 둘러보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실은 나는 북에서 온 사람이다. 손선생과 북의 국가정책을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고 손선생의 협조를 얻고 싶다. -지금 그 가부에 대하여 대답을 해줄 수 있겠느냐, 아니면 시간을 줄 테니 생각을 좀 해 보겠느냐. 라고 하자 손병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선실에게 -너무 갑작스러운 제의가 되어 당황스러우니 생각을 좀 해보아야겠다. 라고 하여 그에게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겠느냐. 라고 하자 손병선은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 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는 등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자신이 남파된 북한 간첩임을 인식시킨다.
□ 그후 1990년 8월 하순경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 건물 지하 레스토랑 『스크린』에서 손병선을 만나 조용한 구석자리를 골라 앉은 후 그에게 -손선생,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보았느냐. 고 하자 손병선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이선실은 갑자기 양손으로 손병선의 손을 꽉 잡으면서 낮고 힘있는 목소리로 -동지, 도와주세요. -우리 조국통일을 위해 같이 일해 봅시다. 라고 간곡히 요청하자 손병선은 굳은 표정으로 -알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북을 위해 일하겠다든 자신의 결의를 밝히자 이선실은 상기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손병선에게 -이제 손선생을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키도록 하겠다. -동지는 이제부터 영광스런 조선노동당의 충성스러운 당원이다. -손선생의 당원부호는 「비봉 11호」이다. -우리 당의 당원이 된 것을 충심으로 축하한다. -동지가 앞으로 해야할 일은 당을 꾸리는 사업이다. -당은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사업을 진행하여야 하며, 그러자면 현 민중당 내에서 30대의 유망한 당원 2~3명을 확보하여, 비밀 지하당을 조직해야 한다. -과거 김종태가 통혁당을 조직할 때 너무 과욕하여 사업을 방만하게 꾸리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손선생은 핵심당원 2~3명만을 확실하게 조직하여 지하지도부구성사업을 추진토록 하라. -그리고 현 민중당내에서 30대로서 가장 핵심적인 활동능력을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보라. 고 하자 손병선은 -지금 민중당내 30대 중견간부 중에서는 ○○○, ○○○, ○○○ 등이 핵심적 활동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대답하여 그에게 -○○○과 ○○○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똑똑하고 당내에서도 신망이 높아 적합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는 성격이 과격하고 독단적이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과 ○○○에 대해서만 잘 관찰해서 요해한 후 접근, 포섭토록 하라. -그외 당원(조선노동당 지칭)으로 포섭할 사람으로는 30대 초반, 중반으로 하고 나이 많은 사람이나 과거 전과가 있는 사람은 피하도록 하라. -너무 욕심을 부려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 활동하지 말고 반드시 당의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하도록 하라. -국내의 다른 지하망에서 선이 들어와도 응하지 말고 거절하라. 복선연계되면 위험하다. 라고 조직원 포섭 지령을 한 후, 계속하여 -손선생은 어느 정도 자금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이다. 우선 활동자금으로 1,500만원을 가져왔으니 민중당 활동과 당원 포섭활동비를 보태쓰도록 하라. -어떤 망은 허황된 보고만하면서 자금만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금은 일단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자금을 요구하도록 하라. 고 한 후 흰봉투에 활동자금 명목으로 1,500만원(자기앞수표 100만원권 15매)을 넣어 손병선에게 제공하자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포섭해 보도록 노력하겠다. 라고 결의를 표명한다. 그 말을 들은 이선실은 -앞으로 서로 연락할 것에 대비하여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을 할만한 은밀한 장소가 없겠느냐. 라고 하자 손병선이 -내 둘째 딸년(차녀 손민영 지칭)이 신촌에서 혼자 방을 얻어 살고 있는데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낮에는 방이 비어있다. 그 방을 이용하면 어떻겠는가. 라고 제의하여, 그에게 -좋다. 며칠 후 오후 1시에 이곳에서 만나 같이 신촌으로 가기로 하자. 라고 간첩교육을 위한 장소를 약정한 후 손병선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을 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30대 초반의 건장한 체격을 갖춘 남자를 만나서 손병선에게 -내 조카뻘되는 아이인데 인사하시오. 라고 하자 손병선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반갑습니다, 손병선입니다. 라고 하자 그도 웃으면서 경기도(서울) 말투로 -김동식입니다. 라고 간단히 대답하여 서로 인사 후 헤어진 사실이 있었는데 이선실은 이날 손병선을 포섭하기로 결심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남파 간첩 김동식을 밖에다 대기시켜 두었다.
□ 1990년 8월 하순 손병선에게 온라인으로 900만원을 활동자금으로 제공한다.
□ 한편 이선실은 1990년 8월 하순경 입북을 위한 주변정리를 위하여 그동안 제 5아지트에서 함께 살아오던 김점숙 모녀에게 『강원도 기도원으로 간다』고 하면서 사용하던 장롱, 냉장고, 문갑, 싱크대, 서적 34권 등을 준 후 전세보증금 2,500만원과 가방 3~4개만 가지고 이주하면서 당시 일제 면도기(남파간첩 권중현 사용물품), 카메라 스트로브, 전기코드, 핸드백을 놓고 갔고 전출신고주소는 강원도 ○○군 ○○면 ○○리 ○○라고 하였으나 수사팀이 확인결과 미전입으로 1990년 12월 대방동 사무소에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
□ 1990년 9월 초순 이선실은 남파간첩 김동식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손병선을 만나 전에 약속한대로 손병선의 간첩교육을 시키기 위해 손병선의 차 편으로 서대문구 창천동 13-101호 차녀 손민영의 자취방으로 이동하였는데 차안에서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나는 북에서 임무를 띠고 내려왔는데 처음 왔기 때문에 지리도 익숙치 않고 여러 가지로 잘 모르는 것이 많으니 잘 좀 도와달라. 라고 하는 등 자신이 남파간첩 임을 밝히자 손병선은 김동식에게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주민등록증이 문제일텐데 어떻게 했느냐. 라고 하자, 그는 -그런 것은 문제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것은 직접 해결합니다. 라고 하면서 김동식은 주민등록증을 꺼내 건네주자 손병선이 살펴본 후 돌려주면서 김동식에게 -위조를 감쪽같이 했군요. 대단합니다. 라고 하자, 김동식은 -이곳에 있는 동안 손선생님의 신세를 많이 질테니 잘 부탁한다. 라고 하자 손병선은 -힘있는 데까지 도와주겠다. 라고 대답하였다.
□ 그날 오후 1시쯤 손민영의 자취방에 도착한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통신연락 방법은 어려운 것 같지만 찬찬히 잘 들으면 쉽게 배울 수 있다. -나도 이런 것을 혼자서 쉽게 하고 있다. -김군(위 김동식 지칭)이 이 분야의 전문가이니까 잘 배우도록 하시오. 라고 하자 동석한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통신에는 상향과 하향이 있는데 상향은 현지에서 본부(북한지칭)로 보내는 것을 말하고 하향은 본부에서 현지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현지에서 본부로 보낼 때는 무전으로 보내고 본부에서 현지로 보내는 통신은 A-3 방송을 통해서 한다. -무전 연락이 안될 때는 은서편지를 써서 해외 연락처를 이용하여 보고한다. 라는 등 통신연락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한 후 계속하여 이선실이 휴대하고 있던 소형 가방에서 메모리식 무전기 1대, 기본암호표 및 난수표 등을 꺼내 방바닥에 펼쳐놓고 -무전기 조작법에 대해서 ·이 무전기는 메모리기계와 송신기계로 분리되어 있는데 사용할 때는 하나로 결합하여 사용한다. ·송신장소는 정북에서 ○○도 서쪽방향인 개성을 향하여 탁트인 산이 북사면을 선택하여 발신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한다. ·현지에 도착하면 먼저 안테나선과 지선을 설치한 다음, 메모리기계에 숫자 전문을 입력시킨다. ·발신기용 밧데리를 묶은 후 발신시간이 되면 발신기에 크리스탈을 꽂고 안테나를 연결한다. ·발신기와 메모리기를 연결시켜 정해진 발신시간의 ○분 전후에서 ○회에 걸쳐 발신한다. ·발신이 끝나면 즉시 무전기를 해체하고 사용한 밧데리는 땅에 묻는다. -발신 난수조립 방법에 대하여 ·먼저 한글로 작성된 전문을 암호표에서 찾아서 숫자로 바꾼다. ·숫자로 된 전문 앞에 자신의 고유번호 『720』(손병선 출생월일)을 쓴다. ·작성된 숫자전문 밑에 난수를 써놓고 비산술식으로 합하여 보낼 전문을 완성한다. -A-3방송을 이용한 지령수신 방법에 대하여 ·매월 3일과 18일 24:00에 평양방송을 청취하여 수신하되 ·먼저 방송에서 적기가가 나온 후 호출부호(○○○, ○○○, ○○○, ○○○, ○○○ 등 5개 중 한 개)가 나오면 거기서 불러주는 숫자를 받은 적은 다음 ·그 숫자전문을 수신난수로 감하여 성경책과 암호표로 해독하여 지령을 수수한다. ·손선생 호출번호가 아니더라도 받아 적는 연습을 평소에 해두는 것이 좋다. -은서서신 작성 및 연락방법에 대하여 ·은서시약은 무색 폴리에스텔 조각을 아세톤 ○ml에 녹여 액체로 만든 후 그 액체를 ○○% 알콜에 섞어 다시 증류수를 타서 만들면 된다. ·은서작성은 흰색종이에 무색의 시약을 이쑤시개나 잉크가 안묻은 펜에 묻혀 쓰고 말린 다음, 다시 물 묻은 갱지를 그 암서 위에 덮어 씌워 같이 부풀린다. ·부풀린 은서는 책갈피 속에 넣어 말리면 은서로 쓴 표식이 없어지게 되며 그때 그 위에 영문으로 간단한 인사말을 타자로 쳐서 보내면 된다. ·은서를 보낼 때는 절대 국내에서 발송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해외에서 발송해야 하며 수신지 주소는 일본 편의 주소로, 발신지는 『서울에서』라고만 써서 보내면 된다. ·일본 편의주소는 日本國 大阪市 生野區 桃谷 3-15-12 宋泰英 方幸子이다. ·해외여행시 1주일 정도의 여유를 두고 서신을 보내야만 해외에서 연락이 가능하다. 라는 등 통신연락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키고 나서 계속 위 김동식은 손병선에게 -앞으로 접선에 대비하여 손선생의 가명을 하나지어야 하는데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 있느냐. 라고 하자 손병선은 김동식에게 -내 친구중 과거 4·19때 학생운동을 같이하다가 1989년경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이름이 『나○○』이다. 그 이름으로 하면 쉽게 잊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자 김동식은 -그러면 손선생님의 가명은 『나○○』으로 정하고, 상대방은 내이름인 『김동식』으로 하자 라고 하여 상호 비상접전시의 가명을 약정한 후 -손선생, 내가 기념품을 하나 사주려고 하니 함께 근처 금은방에 좀 갑시다. 라고 하자 손병선이 -금방이야 이 근처에도 많이 있으니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기념품은 무슨 기념품이요. 라고 묻자 이선실은 -다 필요한 것이니 일단 금은방에 가서 보고 나중에 내가 설명을 해주겠다. 라고 한 후, 이선실은 손병선, 김동식과 같이 손민영의 자취방을 나와 신촌로타리 부근에서 김동식은 상호미상 책방에 들어가 책을 보면서 대기하고 손병선과 단둘이 신촌로타리 부근 도장집에서 「나○○」, 「김동식」이란 이름으로 목도장 2개를 새기고, 다시 부근 금은방(국민은행 근처)에 들려 같은 모형의 금반지(16K, 1돈) 2개에 「○」자와 「동」자를 각각 새겨 구입한 후 김동식과 다시 합류하여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손병선에게 -이 금반지와 도장은 앞으로 손선생이 우리 조직원을 만날 때 상호 인식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미 통신교육을 하면서 지시하였지만 접선시 상호 약정된 접선방법에 따라 『김동식씨냐, 나 나○○이다』라고 하여 1차 확인하고 -만약에 나○○ 또는 김동식이라는 사람이 또 한사람 더 나타나게 되면 2차로 금반지에 새겨진 글씨 『○』자와 『동』자로 확인하고, -그래도 미심쩍을 경우 이 도장으로 재확인토록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 후 위 『○』자가 새겨진 금반지 1개와 『나○○』 명의 목도장 1개를 제공하였다. □ 1990년 9월 초순 이선실은 김동식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2차 통신교육을 위해 손병선을 만나, 그의 차편으로 손민영 자취방으로 가서 약 3시간에 걸쳐 무전기, 난수표 등 통신문건 일체를 꺼내 놓고 손병선은 김동식의 지도아래 -지령 전문 수신 및 해독방법 -무전기 설치방법 -보고문안 작성 후 난수를 조립 숫자로 환산하는 방법 -보고문안 숫자를 무전기에 입력시키는 방법 -입력시킨 문안을 무전기로 송신하는 방법 등에 대해 재교육을 받고 계속하여, 정치사상 교양으로 -대남혁명의 필요성에 대하여 ·남북대화는 계속하되, 기본적인 대남정책은 혁명을 통한 변혁운동이다. ·공화국의 인민들은 북과 남의 통일에 대비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공화국은 우리식 사회주의 정책을 위해서 전 인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하고 있으며 신체부분중 머리라 할 수 있는 수령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고 있다. ·10년 이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지니 확신을 가지고 지하당 건설사업에 매진하라. -주체사상에 대하여 ·주체사상은 김일성 수령이 창시하신 세계 유일의 사상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 현실에 맞게 창시하신 불멸의 사상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고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상이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며,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운명은 달라질 수 있다. ·김일성 수령이 창시한 주체사상은 우리 인류사회에서 마지막 가지고 나갈 위대한 사상이며, 공화국은 이를 중심으로 조선식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남조선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원전이 많이 나와 있으니 구입해서 읽어보도록 하라. -『통일론』에 대하여 ·통일방식은 고려연방제에 의해 통일이 되어야 하며 흡수통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1민족, 1국가, 2체제의 연방제 통일방안이야말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하나로 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미군은 반드시 철수되어야 하며 남조선내 핵무기도 모두 철수되어야 한다. ·현재 공화국에서는 전 인민이 통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통일을 위해서만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선생도 조국 통일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을 굳게 갖고 노력해 달라. ·남조선 민정당 체제하에서는 반공이념으로 합법적인 노동당건설이 어려우니 민중당은 기본적으로 평민당, 민주당 등 야당을 적극 지원하여 그 지원을 바탕으로 범민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군부정권인 현 집권여당을 무너뜨리고 일단 야당이 집권하게 하고 야당으로부터 확실한 지분을 확보하여 야당집권하에 민주화가 성숙되면 합법적 노동당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안기부 같은 폭압기관이 해체되고 국가보안법이 개폐되면 우리당 건설이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철수는 지속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손선생은 너무 과격한 주장이나 활동을 일체 금하고, 오히려 젊은 학생들에게는 우경화 쪽으로 보이는 것이 좋다. 라는 등의 교육을 한 후 손병선에게 -이제 잘 알겠는가. 라고 질문하자 손병선은 -알겠다. 공화국의 통일정책이 관철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 -무전기 조작은 자신이 없는데 한번 더 할 수 있느냐. 라고 하여 그에게 -그럼 확실히 알기 위해서 현장실습을 한번 해보자. 장소가 어디가 좋겠는가. 라고 하자 손병선은 -내가 화훼업을 하면서 다녀본 바에 의하면 정신문화연구원 뒷편 청계산 쪽이 조용하고 좋을 것 같다. 라고 하여 그러면 이틀 후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만나, 무전실습을 나가기로 하자고 약속 후 헤어졌다. □ 1990년 9월 초순 이선실은 약속대로 무전교육을 위한 현장실습을 위해 김동식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손병선을 만나, 그의 차편으로 실습장소인 청계산으로 가던 중 청계산 고개 입구 우측에 있는 음식점에서 약 50미터 가량 떨어진 간이막사에 앉아 약 2시간에 걸쳐 대화식으로 손병선에게 -공작임무 및 기본방향에 대하여 ·그동안 수차 이야기했지만 손선생이 해야할 일은 민중당 내에 핵심적인 청년 2~3명을 확보, 지하당을 구축하는 것이다. ·민중당은 기본적으로 ○○당이나 ○○당 등 야당을 지원해야하고 그 지원을 바탕으로 야권 모두가 통합되어 집권여당인 군부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 ·집권여당이 무너지면 연대했던 야당으로부터 확실한 지분을 확보하고 계속 국가보안법 철폐 및 공안기관 해체를 주장하여 합법화된 민중당을 건설해야 한다. ·그때 손선생은 민중당이 노동당의 노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핵심인물을 조종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푸락치를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우리나라 통일운동의 가장 귀중한 존재이며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조국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 ·문목사는 통일운동의 1인자로서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인데 그를 구속한 국보법은 철폐되어야 한다. -무인함 운용에 대해 ·장소를 선정할 때는 서로가 인식하기 쉬운 분묘, 건물, 다리 같은 변형되지 않는 곳으로 해야 한다. ·장소가 선정되면 땅을 약 30cm 가량 파고 물건을 묻고 그 위에 돌을 올려 놓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라는 등 공작임무의 기본방향 및 무인함 운용방법에 대해 교육을 시키고 □ 그날 12:00경 무전기실습을 위해 정신문화연구원 뒷편 고개위에 차를 세워 놓고 함께 김동식이 이선실의 빽속에 넣어 가지고 온 무전기 세트를 손병선에게 넘겨준 후 이선실은 차에 대기하고, 김동식과 손병선은 함께 우측으로 약 200m 가량 산 속으로 들어가 김동식이 낚시대를 변형시켜 만든 안테나를 설치하고 무전기와 밧데리를 연결한 후 기히 작성해온 숫자로 된 보고문을 메모리기에 입력한 다음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이번에 실습할 보고문안은 손선생이 입당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라고 하면서 문안을 입력하여 무전기에 수정편을 끼우고 출력보턴을 눌러 2회 발신하는 등 현장 무전실습을 시킨 후 신속하게 이탈하여 차로 돌아오자 차 안에서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이 무전기 세트와 장비를 손선생이 받아서 사용하도록 하시오. 라고 지시하면서 손병선에게 ·무전기 1세트 ·은서용 시약 1병 및 폴리에스텔 조각 1개 ·수신용 단파라디오 1대 ·암호해독용 성경책 ·암호표 난수표 등 문건 1조 ·낚시대형 안테나 1개 ·나침반 1개 등을 주고나서 계속 손병선에게 -권총이 있는데 받겠느냐. 라고 하자 손병선이 -권총이 있으면 부담만 되니 필요없다. 라고 하였으나 이선실은 -그래도 비밀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총이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호신용으로 권총도 하나 갖고 있으시오. 큰 것으로 가지겠소, 작은 것으로 가지겠소. 라고 권유하자 손병선이 -작은 것이 숨기기에 좋겠으니 작은 것으로 달라. 고 하자 이선실은 흰 천으로 둘둘 말아서 손가방 속에 숨겨두었던 -벨기에제 소형 부로우닝 권총 1정 -소음기 1개 -탄창 2개 -실탄 12발 -총기 손질용 기름 등을 준 후 손병선 차 편으로 김동식과 함께 서초구 양재동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하차하여 전철로 귀가하였다.
□ 한편 입북 전 손병선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1990년 9월5일 이선실은 김옥기가 근무하는 대한교육보험 동작영업국 남경영업소를 방문, 김옥기를 접촉, 1988년 8월29일 및 1988년 12월12일 가입했던 3년 만기일시납 우대복지 보험금 3,050만원을 중도 해약하고 원금 및 그 이자포함 3,250만원 환급받았다.
□ 그후 이선실은 1990년 9월 중순 서초구 양재동 민중당 서초을 지구당 사무실에 남파간첩 김동식과 함께 방문하여 민중운동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하였다.
□ 1990년 9월 중순 이선실은 레스토랑 『스크린』에서 손병선을 만나, 그에게 -지난번 손선생 입당보고에 대한 축하지령이 나왔다. -오늘은 무인함 장소 선정을 해야겠는데 어디가 좋겠는가. 라고 하자, 손병선이 -헌인능과 우면산 꽃동네 뒷산에 있는 문중묘지가 좋겠다. 라고 하자 손병선에게 -그곳은 손선생의 지구당(민중당 서초을구 지구당) 구역인데다가 꽃재배하는 사람들 중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곤란하다, 보라매 공원이 어떠한가. 라고 하자 손병선이 -보라매공원은 내가 다니기에 불편하다, 수유동 쪽으로 가면 열사들 묘가 드문드문 있고 조용하니 그 부근이 좋겠고 한강변 쪽으로는 절두산 공원이 좋겠다. 라고 하여 그러면 현지에 직접 가서 답사해서 정하기로 한 후 레스토랑 밖에서 대기중이던 김동식과 만나
□ 그날 도봉구 수유동 4·19묘소 입구를 지난 곳에 위치한 북한산 국립공원내 묘소 배치도를 보고 공원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상일 묘소를 선정하고 답사하여 동 묘소 비석축대 동남쪽 모서리 밑을 무인함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동행한 김동식은 소형 카메라로 동 위치를 촬영하였다. □ 다시 그날 김동식을 동행하고 손병선과 함께 마포구 합정동 소재 절두산 성당에 도착, 현장 답사를 하여 성당 뒤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 3인 여인상 중 가운데 여인상 뒷면 받침대 밑을 무인함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역시 김동식이 사진촬영을 하였다. 그곳에서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무인함은 결정되었는데, 접선장소 및 인식신호를 할 수 있는 곳은 어디가 좋겠는가 두군데 정도만 정해보라. 고 하자 손병선이 -여기 절두산 공원 무인함으로 정한 여인상을 한군데 정하고 나머지 하나는 양재동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양재 시민의 숲』공원이 조용하여 좋을 것 같다. 라고 하여, 동 무인함을 정한 여인상을 제 1접선장소로 하여 뒤쪽 받침대 위에 받침대와 비슷한 색깔로 동그라미 표시를 하여 인식표시를 하기로 약정하고
□ 그날 오후 늦게 손병선, 김동식과 함께 서초구 양재동 윤봉길의 기념관이 있는 『양재 시민의 숲』공원에 도착, 동 공원을 둘러보던 중 손병선이 공원입구 진입로에 있는 『여의교』를 가르키며 -저기 여의교 다리가 어떠냐. 라고 하여 여의교를 제2 가두접선 장소로 결정하는 동시 여의교 서남쪽 난간 기둥에 새겨진 『여의교』의 『여』자 위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여 인식신호 장소로 약정하고 김동식으로 하여금 동 소도 사진촬영을 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김동식은 손병선에게 -접선요령은 지정된 정확한 시간에 이 장소로 나와서 손목시계를 왼손에 감아쥐고 시간을 몇 번 보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가명인 『나○○』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김동식』이라고 하는지 확인하여 접선한다. -만약 미심쩍을 때는 지난번에 준 반지와 도장을 꺼내어 서로 확인한 후 접선하라. -약정된 시간에 접선장소에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3분 이상 기다리지 말고 즉시 현장을 이탈하라. 는 등의 접선교육을 다시 시켰다.
□ 1990년 9월 하순 이선실은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손병선을 만나 그에게 -내가 본부에 건강이 안좋다고 연락을 했더니 본부에서 나에게 나이도 많은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속히 돌아오도록 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는 빨리 정리를 하고 본부로 복귀하기로 하였으니 나머지 일은 손선생이 알아서 사업을 잘 추진해 달라. -내가 공화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선생은 나에게 우리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답례로 물건과 입당 결의문을 작성해서 달라. 고 하자 손병선이 -답례품은 무엇을 해야하며 결의문은 또 어떻게 서야 하느냐. 라고 하여 손병선에게 -답례품은 도자기나 꽃병 같은 것으로 2개를 준비해 보라. -결의문은 입당 후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맹세문 형식으로 쓰면 된다. 라고 하자, 손병선이 -나는 평소 글을 잘 안쓰고 지금 당장 민중당 대외협력위원장으로 지구당 만드는 작업이 급한데, 언제 내가 물건을 사러 다니고 편지를 쓰느냐. 라고 하여 손병선에게 -그러면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민중당 활동이나 열심히 하라. 고 한 후, 이선실은 동석한 위 김동식으로 하여금 손병선에게 -잘 보관하였다가 사용토록 하라. 는 주의사항과 함께 지난번 무인포스트로 확정한 곳과 사람을 만날 때 주의사항을 정리한 흰색 편지지에 조그만 글씨로 쓴 비상연락 및 접선방법 설명 문건 1매를 주도록 지시한 후 계속 손병선에게 -우리는 곧 북으로 복귀하게 된다. 일주일 후 사당전철역 남쪽 노상에 있는 벤취에서 만나자. 고 한 후 헤어졌다.
□ 1990년 9월 하순 이선실은 김동식과 함께 동작구 사당동 사당사거리 부근 벤치에서 손병선을 만나 그에게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제 곧 본부로 복귀하게 된다. -앞으로 민중당이 창당되면 열심히 활동해서 주요 직책을 맡도록 하라. -민중당내 핵심 청년당원 ○○○과 ○○○에 대해서는 꾸준히 요해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대북관, 혁명관을 파악해보고 확신이 서면 포섭하여 노동당에 입당시켜라. -○○○과 ○○○을 포섭할 때는 결코 서두르지 말고 우선 인간적인 신뢰를 구축한 후 포섭하라. 라고 손병선에게 구체적 활동방안을 지시하자 손병선이 -내가 지금 관여하고 있는 단체는 「재경 ○○○ 동문회」로 처음 결성시부터 관여해 왔다. -또한 1980년도에 나의 주도로 결성한 「서울 ○○협회」는 현재 회원이 2,000~3,000명 가량이 된다. 라고 하여 손병선에게 -앞으로 이들 단체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고, 가능한 한 이들 단체도 민중당 지지세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 -현재 민중당은 PD계열이 강한데 손선생이 이들을 점차 NL계열 성향으로 바뀌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핵심 청년들을 잘 꾸려 당을 주도해 나가면 가능할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긴 안목으로 10년을 내다보고 활동하라. -자금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급한 사안이 발생하면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라. -우리 활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비밀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이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니 조그만 실수도 해서는 안된다. 는 등 지령사항 및 향후 활동시 주의사항을 지시하자 손병선은 『열심히 해나가겠다』고 응답하자 동석한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그간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고맙다,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 한다. -앞으로 몸 건강하게 충실한 임무수행을 부탁한다.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조직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보고를 해 달라. -공화국에 돌아가면 손선생의 적극적인 활동사항을 자세히 보고하겠다. 라는 말을 하자 손병선이 김동식에게 -할머니 건강도 좋지 않으니 잘 모시고 가도록 해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하자 이선실이 손병선에게 -조국이 통일되면 제일 먼저 내가 내려오겠다. 라고 하자, 김동식도 -나는 이곳에 처음 왔는데 기회가 되면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는 등 약 1시간 30분 동안 대화를 하고 나자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공화국으로 돌아가서 손선생의 입당 답계로 줄 선물을 내가 준비했다. -그리고 입당 결의문을 써왔으니 결의문에 서명해 달라. 고 하면서 손병선에게 「입당결의서」를 건네주었다. 그 입당결의서는 『저는 조선노동당 당원으로서 조국과 당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지도를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입당결의서를 받아 읽어본 손병선은 그 결의서 밑에 날자와 이름을 쓰고 서명한 후 이를 다시 이선실에게 건네주었다. 이선실은 손병선으로부터 입당결의서를 받고 나서 그에게 -이 돈은 그간 내가 살던 집 전세금 뺀 것하고 그동안 쓰다가 남은 것을 모두 모은 것이다. 2,000만원 정도 되는데 가져가서 지구당 사업하는데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손선생 사진이 있으면 한 장 달라. 공화국에 가서 보고하는데 필요할 것 같다. 라고 한 후 흰 봉투에 2,000만원(자기앞수표 500만원권 1매, 100만원권 15매)을 넣어 손병선에게 제공하고 나자 손병선은 민중당 창당시 신고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촬영해 두었던 명함판 사진 1매를 건네주었다.
□ 1990년 10월경 이선실은 민중당 당무회의에 참석, 민중당 당직자로부터 『2,000만원을 특별 헌금하셨다』는 소개와 함께 참석한 당무위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 그후 1990년 10월17일 이선실은 입북한 후 A-3 지령 방송을 통해 손병선에게 북한에 무사히 도착하였음을 알려왔고 1990년 11월10일 민중당 창당대회시에는 『창당 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황인오 포섭, 입북시킴〉
□ 1990년 6월 중순 이선실은 서울 중구 명동 소재 YWCA 회관에서 개최된 민중당 창당 발기인대회 참석시 사회자로부터 『이선화 여사(이선실 지칭)는 평생을 바쳐 번 돈을 우리 민중당에 헌납하셨다』고 소개의 말을 들었고 동 대회 후 인근에 있는 상호미상 식당에서 장기표의 처 조무하가 민가협 회원들에게 -이 분이 평생을 바쳐서 번 돈을 민중당에 헌납하셨다. 전에 우리 민가협 사무실을 얻을 때 돈을 보태주신 분도 바로 이 분이다. 라고 소개하자 이선실은 -나는 민중당을 지지하는 사람인데 혼자 살면서 삯바느질로 평생 모은 돈을 헌납한 것뿐이다. 라고 한 후 개별 인사시 조무하로부터 -이 분은 서울대 대자보사건으로 구속된 서울대생 황인욱의 모친인데 아들 3형제가 감옥생활을 하고 지금은 출소하여 잘 살고 있다. 는 등 황인오의 모 전재순(60)을 소개받고 이선실은 전재순에게 -아드님들은 뭘하느냐. 고 물어 전재순이 -2남 황인오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3남 황인혁은 성남에서 노총에 다니고 있으며 4남 황인욱은 서울대에 재학중이다. 라고 대답하자 이선실은 -그렇습니까, 다음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데 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인오와 같이 사느냐, 인오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인오 집 전화번호도 알려달라. 고 부탁하였으나 전재순이 황인오의 집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우선 전재순의 연락처만을 알아내는 등 포섭대상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 1990년 7월 초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민중당 창당준비위 사무실에서 개최된 동당 여성분과위 결성시에 참석하여 민가협 회원 10여명과 다과회를 하고 인근 하얀집 지하다방으로 내려와 전재순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조용히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라고 하자 전재순이 -나중에 집으로 전화를 해달라. 고 하였다.
□ 1990년 7월 초순 이선실은 전재순에게 전화로 -나는 혼자 사는 몸으로 인오를 양자로 삼고 싶다. 라는 구실로 황인오의 전화번호를 재차 물어 황인오의 집 전화번호(859-8761)를 알아냈다.
□ 1990년 7월 중순 이선실은 황인오의 처 송혜순(31)에게 전화하여 황인오가 저녁 10시가 넘어 귀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날 밤 10시쯤 관악구 신림4동 511-8호 당시 황인오 집에 재차 전화하여 황인오에게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고 제의하여 그 주일 일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한다.
□ 1990년 7월 하순 13:00경 이선실은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인근에 있는 공중전화로 황인오에게 -신대방역까지 왔는데 집이 어딘지 모르겠다. 라고 연락한 후 수박 1통을 구입하여 마중나온 황인오의 제 황인욱의 안내를 받아 황인오 집을 찾아가 황인오에게 -밖에서 황선생을 기다리는 분이 있으니 잠시 같이 나갔다 오자고 제의하여 황인오의 승낙을 받고 그와 함께 집밖을 나서면서 황인오의 손목을 붙잡고 -사실은 내가 민가협 활동을 하고 있어 황선생 어머님(전재순)도 잘 알고 있고 황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특별히 황선생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신대방 전철역 근처에 와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하자. 라고 하여 지하철 2호선 신대방 전철역 인근 제방독에 있는 벤취로 유인하여 그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파간첩 권중현에게 인계, 간첩으로 포섭토록 하였다.
□ 그후 1990년 10월 초순 이선실은 관악구 봉천동 전재순 가를 방문, 황인오, 송혜숙(황인오의 처), 전재순, 황인욱 등과 저녁식사 후 그들에게 -나와 손잡고 일하면 살 길이 생긴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 -그 방법은 우리 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이북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 -인오는 이달 안에 북에 갈 것이니 준비를 하라. 극비사항이다. -북에 가면 김정일 비서는 물론 주요인사들과 만날 것이다. 기간은 4~5일 걸릴 것이니 준비물 등은 차후 다시 알려주겠다. -인욱이는 북에 갈 명단에 들어있지 않으니 평양방송을 듣고 있어라. 고 지시하고
□ 1990년 10월 초순 이선실은 관악구 신림동 황인오 가에서 황인오 부부, 전재순 등에게 -북에 가는 문제는 우리가 다 알아서 주선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다. 4~5일만 다녀오면 된다. -북에 갈 때는 애아빠가 집에 있는 것처럼 하고 절대 비밀을 지켜라. 고 한 후
□ 1990년 10월16일 17:00경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인근 돌곶이산에 있는 쌍묘 부근에서 북한공작원 권중현, 김동식 및 황인오와 만나 복귀를 대기하면서 황인오에게 -나는 해안전투(침투)를 여러 번 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 고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이선실은 여권이 있어 제3국을 통해 얼마든지 입북할 수 있었는데도 76세의 나이로 반 잠수정을 타고 입북한 것은 황인오를 안심시키려고 한 행동으로 보인다.
□ 1990년10월16일 23:40경 이선실은 남파간첩 권중현, 김동식 및 황인오 등과 함께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쌍묘 부근에서 출발, 약 10분간에 걸쳐 접선해안 개펄가로 이동, 북한 해상공작 기지에서 공작선편으로 남파되는 호송 안내조와 접선을 위해 대기타가 同日 24:00경 권중현 등 일행과 함께 남파된 호송안내조와 3회에 걸쳐 타석신호 후 접선, 그들로부터 방수용 고무옷을 지급받아 입고 20여분간 개펄 위를 도보로 이동하여 해상에 정박 대기중이던 반잠수정에 탑승하여 황해도 해주를 통해 복귀하였다.
〈영웅칭호 수여〉
□ 이선실(이화선)은 이와 같은 공로로 남파기간 중 북한으로부터 -1980년 10월 밀 1986년 10월 등 2차에 걸쳐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에 추대되었고 1982년 2월, 1986년 11월, 1990년 4월 등 3차에 걸쳐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또한 1981년 11월 국기훈장 1급, 1982년 4월 김일성 훈장 및 금시계, 1982년 9월 조국해방기념훈장, 1985년 8월 국기훈장 1급 및 조국해방 기념메달, 1986년 12월 노력훈장 등을 수여받았고 -1990년 5월에는 북한의 최고영예인 『영웅』칭호를 받기도 하였음.
3. 이선실 국내활동자금 증식상황
□ 이선실은 1980년 3월30일 영주 귀국 후 1990년 8월말까지 국내에서 암약하면서 -은거 아지트 명목 등으로 5회에 걸쳐 부동산을 매매하여 약 8,625만원 이득을 보았고 -김옥기를 통한 보험적금 등으로 약 1,500만원의 이득을 보는 등 총 약 1억원을 벌은 것으로 밝혀졌음.
□ 부동산 증식 상황(약 8,625만원) -1979년 12월 동작구 대방동 344-5 소재 가옥(제 2아지트)을 백덕만 명의로 3,675만원에 매입하여 1981년 11월 신순녀 명의로 등기 후 1986년 9월 8,000만원에 매각하므로써 차익금 4,325만원을 취득 -1983년 5월경 신길4동 458-17 소재 3층 양옥을 김옥기 명의로 3,800만원(전세:2,300만원, 매입금:1,500만원)에 매입하여 그후 1984년 5월경 5,000만원에 매각, 차익금 1,200만원을 취득 -1983년 4월 신월동 소재 연월시장 상가 점포 1칸(5평 5홉)을 김옥기 명의로 1,350만원에 매입, 현존(싯가 2,000만원으로 김옥기에게 제공한 것이며 현재 매매할 경우 600만원 가량의 차익금을 취득할 수 있음) -1984년 12월 안양 비산동 부흥(아) B동 208호를 백덕만 명의로 1,700만원에 매입 후 김옥기 명의로 명의 이전하였다가 2,000만원에 매도, 차익금 300만원을 취득 -그후 1987년 2월 동작구 대방동 391-312 소재 2층 양옥(제 4아지트)을 김옥기 명의로 5,800만원에 매입한 후 1988년 11월 8,000만원에 매각하므로써 차익금 2,200만원을 취득(매입시 김옥기가 1,200만원 투자, 이익금 포함 2,000만원을 김옥기에게 제공)하는 등 총 8,625만원의 부동산 차익금을 취득하였음.
□ 동산 취득 상황(약 1,500만원) -1982년 6월 이선실은 자기소유 1,000만원을 김옥기 친구들에게 5개월간 사채놀이(2부~3부5리)하여 사채이자 약 170만원을 취득 -1983년 10월 김옥기의 소개로 신순녀 명의로 대한교육보험 남경지부에 1,000만원(1년 만기)짜리 보험예금 가입 후, 1984년 10월 이자 포함 약 1,130만원을 인출하므로써 차익금 130만원 취득 -1984년 11월 역시 신순녀 명의로 보험예금 1,500만원(1년 만기) 가입 후 1985년 11월 1,690만원 인출하므로써 차익금 190만원 취득 -한편 1986년 2월 이선실은 김옥기 명의로 2,000만원(1년 만기)짜리 보험예금 가입하여 1987년 2월 약 2,270만원을 인출하므로써 차익금 274만원을 취득하였고 -1987년 2월 역시 김옥기 명의로 2,000만원(1년 만기)짜리 보험예금 가입하여 1988년 2월 2,270만원을 인출하므로써 차익금 270만원을 취득 -1987년 8월 김옥기 명의로 3년 만기 1,000만원 보험예금 가입 후 1990년 8월 1,200만원을 인출하므로써 차익금 200만원을 취득 -1987년 12월 신순녀 명의로 1,500만원(1년 만기)짜리 보험예금 가입 후 1988년 12월 1,640만원을 인출하므로써 차익금 140만원을 취득 -1988년 12월 김옥기 명의로 2,000만원 보험예금 가입 후 1990년 9월경 중도해약 2,070만원을 인출하므로써 70만원의 차익금 취득하므로써 총 1,500여만원의 동산 차익금을 취득하였음.
4. 북한에 복귀 후 상황
□ 1990년 10월17일 02:00경 이선실 등 일행은 황해도 해주 인근 대남공작 해상기지에 도착, 대기중이던 북한사회문화부 부부장(60세 가량)의 영접을 받고 대기중이던 승용차 편으로 1시간 가량 이동 후 미상지 건물에 도착 잠시 휴식타가 同日 09:00경 사회문화부 부부장(60세 가량), 권중현, 김동식, 지도원 2명, 황인오 등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해주 시내를 통과하여 해주 시내 인근 벌판에서 헬기를 이용 50여분간 이동 후 평양 순안 비행장에 도착, 사회문화부장 리창선의 포옹과 함께 열렬한 영접을 받고 리창선으로부터 『할머니 이게 얼마만이요, 10년이 넘었잖소』 『수령님이 보내주신 보약을 잘 잡수셨소』 라는 말을 듣고 이선실은 『부장님이하 다들 걱정해 주셔서 무사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저 같은게 다 뭐라고 두 번씩이나 배려를 해 주셔서 얼마나 송구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후 이어서 리창선, 황인오, 김동식, 권중현 등 일행과 함께 3~4대의 벤츠승용차에 분승, 만수대의사당내 김일성 동상 앞에서 황인오, 권중현, 김동식과 함께 헌화한 후 김일성 동상 기단을 붙잡고 한참동안 울먹인다. -동상 참배 후 황인오를 평양교외 어느 초대소에 수용시킨 후 12:00경 동 초대소 별채 2층 소재 식당에서 이선실은 리창선, 황인오 등과 함께 백로술, 용성 맥주, 금패 인삼주 등을 놓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합시다』라는 제의와 함께 술을 1잔씩 마신 후 광어회, 비둘기 고기, 소혀, 소심장, 잡채 등의 메뉴로 점심식사를 한 후 -이어서 동 초대소내 영사실에서 리창선, 권중현, 김동식, 황인오, 지도원 2명 등과 함께 『김일성 부자 치적 기록영화』, 『임수경 체북 기록영화』를 1시간 동안 관람하고
□ 1990년 10월18일 07:00경 위 초대소 식당에서 권중현, 김동식, 지도원 2명 및 황인오와 함께 아침식사 후 동일 12:00경 위 초대소 식당에서 사회문화부 부부장, 황인오 권중현, 김동식, 주체사상 연구소 소장 박승덕 등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으며
□ 1990년 10월21일 09:30경 위 초대소 1층 회의실에서 사회문화부 부부장, 권중현, 김동식 및 지도원 1명과 함께 황인오에게 지하당 조직원칙, 조직형태에 관해 지도 교양하고
□ 1990년 10월22일 11:00경 위 초대소 1층 회의실에서 사회문화부 부부장, 권중현, 김동식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황인오의 노동당 입당식을 거행하였으며
□ 1990년 10월23일 12:00경 위 초대소 2층 식당에서 사회문화부장 리창선, 부부장, 권중현, 김동식, 지도원 2명, 성명미상 과장, 황인오 등과 함께 황인오 환송만찬회 개최 등 황인오 수용 초대소에서 함께 체류하였음.
□ 이후 이선실은 1991년 1월 김일성이 재일 조총련 부의장 신상대,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 윤이상 접견시 배석(공식석상 출현사실 평양방송 처음 보도)하는 등 북한 정치국 행사에 참석하여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 이후
□ 1991년 2월에는 북한의 대남 심리전 공작기구인 「한국 민족민주전선」(한민전)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 금년 4월15일 『김일성 80회 생일기념연회』에는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한 바 있고
□ 그리고 금년 9월9일 북한정권수립 44돌 행사에서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권력서열 22위』라고 발표되기도 하였음.
□ 한편 이선실(이화선)과 제주도 고향친구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김영순(가명, 여, 77세)은 1991년 2월 국내 입국시 제주도에 살고 있는 이화선의 모 김경량으로부터 『화선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 네가 일본에 살고 있으니 소식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귀일하여 1992년 4월 마침 자신의 북송된 아들 양성철(가명, 57세)을 만나기 위해 방북하였을 때 -40세 가량의 여자 안내원에게 『나는 고향이 제주도다. 내고향 친구중에서 6·25때 월북한 이화선이라고 있는데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알아볼 수 없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지금 매우 훌륭하게 되어 만나볼 수 없다. 고급차를 타고 호위를 받으며 다니는 영웅이 되었다』 라는 말을 들은 바 있고 -제주출신 북송자 김영자(가명, 76세)를 만나 이화선의 소식을 묻자 ·『화선이는 이곳에 와서 공부를 많이 했다. 아주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며 대단히 높은 사람이 되었다』 ·『그동안 남조선에도 여러 번 갔다왔다는 말을 들었다. 남조선에 가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말라』 ·『그 사람은 누가와도 만나주지 않으며, 전 남편(김태종)이 양녀를 데리고 공화국에 들어와서 몇 번이나 만나려고 하였지만 만나주지 않고 양녀만 받아들였다』 ·『그 양녀는 이화선 덕분에 시집을 잘 갔다더라』 ·『여기서는 이화선을 이선실이라고 부른다』 라는 말을 듣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실이 있다 하며 □ 1992년 8월 위 김영순이 국내 입국하여 이화선의 모 김경량을 만나 『화선이는 북한에서 아주 잘 살고 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살아계시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화선의 소식을 전해준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결어〉
□ 현재까지 수사결과, 북한 권력서열 제 22위이며 당정치국 후보위원인 이선실은 최근 10여년간 서울에 잠복, 장관급 거물간첩 「임」모 등 북한 직파간첩 10여명을 지휘하여 남한 내에 북한 공작지도부를 구축하고 -과거 남로당과 같은 성격의 남한내 「조선 노동당」과 그 산하에 그들이 남한에 실존한 것으로 선전해 왔던 「한국민족민주전선」(이하 「한민전」)을 실체화시킨 「애국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민중당을 제도권 내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정치적 별동대로 만들어 대통령 선거때 반민자당 연합전선을 형성, 야당이 집권하면 정치적 지분으로 미군철수, 국보법 철폐, 안기부 해체 등을 요구, 적화통일 장애요인을 제거하여 정치적 혼란을 조성한 다음 -93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이 각계 각층에 침투시킨 합법·비합법 조직을 총동원하여 연공정부를 수립, 1995년에 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이룩한다는 전략하에 종합적이고 입체적이며 대담한 대남적화 공작을 수행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 끝으로 그동안 이선실의 전모를 1, 2회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금번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을 통해 압수된 간첩장비는 권총 6정, 실탄 220발, 무전기 8대, 난수표 17매, 수류탄 8발, 독약앰플 5개 등 총 125종 1,680여 점이며
□ 이선실은 1986년 9월~1990년 9월간 공작금으로 도합 1억 8천여 만원 가량을 간첩 손병선 및 ○○○, ○○○ 재야단체 관계자들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지원하였다. 이선실은 위 활동자금 대부분을 본명 명의로 수표를 발행하여 대상자들에게 직접 전달하거나 입금시키는 방법 등으로 공작금을 지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