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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납치자가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증(反證)자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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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납치자가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증(反證)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3. 24. 01:29

납치자가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反證자료
 『韓國分裂(2005년 8월 발간)』  

西岡 力(니시오카 쓰도무)  

남쪽의 메스컴이 납치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서, 북한이 이산가족 손님들을 모셔놓고 꼴사나운 추태를 벌리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시종 묵묵부답 유구무언으로 일관하고 있는 데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운 것인가. 대변인이란 자리가 당파 싸움만을 위해서 둔 자리는 아닐 것이다. 공식입장 한마디는 해야 나라다운 것이 아닐까. 그대로 가만히 입 다물고 있다는 것은 북한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속된 표현이지만 겁먹은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고 있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한국국가정보원은 1999년 3월 9일 북한에 납치되어 억류되어 있는 한국인450명의 리스트를 공개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남치자의 존재를 인정했었다.납치가 아니라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증자료로서 니시오카 쓰도무(西岡力)著『韓國分裂(2005.8.30)』제4장에서 일부 발췌하여 아래에 인용한다. 

                             ≪아래≫

◎북한의 한국인납치, 피해자를 내팽개쳐 온 한국정부와 착수된 구출운동 


한국에는, 정부가 인정한 것만해도 한국전쟁 중에 8만2천9백5십9명, 휴전후에 486명의 국민이 북한에 납치되어,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납치피해자에 관해서 한국정부와 한국국민여론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안았다.  

1994년 7월 31일에 암네스티 인터내셔널이 북한의 정치범 55명의 리스트를발표했는데, 거기에는 한국출신자가 1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1명중에는 자진해서 북한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한 사람은 확실히 납치피해자였다. 78년 4월 13일 노르웨이에서 납치된 高校敎師 高相文씨다. 당시, 한국 메스컴은 이 암네스티를 크게 보도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고씨를 위시한 납치피해자의 송환을 실현시키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고씨를 평양방송에 출연시켜, 납치가 아니라 자진해서 북한으로 왔으며 정치범수용소 등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북한여성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게 했다. 쇼크를 받은 고씨의 부인은 자살해버린다.

익 1995년 한국은 북한에 대하여 쌀 지원을 실시하나, 그 때 납치해결을 요구한 일은 없었다. 즉, 전년의 김영삼의 지시도 여론을 의식한 일과성의 것이었다.(이상의 사실은 당시의「조선일보」의 보도에 의한 것임)

 安明進씨의 한국인납치증언  

「조선일보」는 1997년 12월 1일에「『북한에 납치된 주민 20여명, 더 있다』」는 제목으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그 주요부분을 인용해 두자.

대남공작원으로서 선발되어「김일성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93년 대남침투훈련 중에 휴전선을 통해서 망명한 安某씨(안명진씨 이야기· 西岡補)는 (1997년 11월 西岡補) 30일「내가 교육을 받은 평양시 용성구역『以南化 환경관』의 교관 50여명은 모두 남한출신」이라고 말하면서「그 가운데 한국의 해안에서 납치되었다고 들은 사람이 20여명이 된다」고 밝혔다.나머지는 해외에서 납치된 사람이거나 베트남전쟁에서의 포로로서, 자진해서 북으로 들어간 자는 공개강연 등 신분을 밖으로 내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교관으로서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약)

安씨는「모 교관이 자신의 문제를 암시해서『남한에 가면 해안에서 텐트를치고 자고 있는 사람을 데려오지 말고, 북한으로 오고 싶은 사람만을 데려오라』고 농담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교관은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로, 학생출신이 제일 많고, 낚시꾼, 어부도 있었다」고 밝혔다. 

안씨가 기억하는 교관은「金」선생으로 불리었던 7명과「馬」「趙」「吉」「洪」「閔」선생 등으로,「馬」선생과「洪」선생은 금번 밝혀지게 된 천안농업고교와 천안상업고교 3년 이명우, 洪建杓였다. 

「이남화환경관」의 金銀제품점 담당자인「閔」선생(현재37-38세)은 강원도출신으로 80년대초 軍을 제대한 후에 대학입시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납치되었고,「金」선생으로 불리던 40대 후반의 여성은 전라남도 해안 마을에서 생선가게를 하고 있을 때 납치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군사교관을 하고 있는「趙」선생은 베트남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연행되어온 장교출신으로 韓國軍내에서의 식사법 등을 가르쳐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이남화환경관」에 관해서, 안명진씨는 저서『北韓拉致工作員』(德間書店)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실태를 밝히고 있다.

당시, 한국의 실상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교육회관은 용성구역 신미리 10호동(「10호동」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북한의 지명이기 때문에「洞」이 맞을 것으로 생각 된다·西岡 補)이라는 장소에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거대한 하나의 한국사회였다. 이 교육회관은, 다른 이름으로서「환경회관」으로도 불리고 있던(전기 신문기사의「이남화환경관」과 동일한 것).  용성구역의 산 밑 지하에 10킬로 이상이나 터널을 파서, 거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세트(약), 그 곳은 정말 화려한 궁전 같았다.(약) 그 교육회관은 길이 10킬로, 폭 30-40미터, 높이 4미터나 되는 거대한 동굴로서, 안에는 한국의 시가지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던 것이다.(약)

덧붙이자면 한국에 있는 것은 거의 갖추어져 있고, 한국사회 그 자체라 해도 좋았다. 

경찰서로부터 소학교, 중학교는 물론이고 은행, 수퍼, 고급호텔, 나아가 퇴폐적인 환락가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거기서 학생의 한국인화교육에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접해 온 한에서도 80명 이상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은 거의 한국인화교육을 위해 납치되어 온 한국 사람들이었다. 

지하 터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차제에 알게 된 것은, 북한의 공작원이 일본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부터도 사람들을 납치해 와서는, 공작원교육에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육담당자 한 사람과 친해져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하게 되면,「내가 어릴 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라는 말은 잘 나와도,「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 내가 장사를 하고 있었을 때」등과 같은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걸린우리들 학생들이「어른이 되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하고 곧잘 질문했지만, 그 때 그는「북한에는 어릴 때  왔기 때문에......」라고 말하면서 말끝을 흐려버렸다. 

어린 아이가, 자기의 의지로 북한으로 왔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북한공작원이 한국으로 침입하여, 어린이까지도 납치의 대상으로 해 왔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더욱 놀란 것으로, 한국인화교육회관에 설치된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사람은 실제로 한국의 시장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약국에서 약을 팔고 있는 약제사도 한국의 약제사였다. 결코 그 직업을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진짜」였던 것이다. 

이 안명진씨의 증언에 의하여 한국의 해안으로부터 5명의 고교생이 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橫田메구미씨가 납치된 것과 같은 1977년의 8월 12일에 당시 고교2년이었던 이민교씨, 최승민씨의 두 사람이 전라남도 홍도해안에서, 익 1978년 8월 5일에 고교생 김영남씨가 전라북도 군산 선유도 해안에서, 동월 10일 당시 고교 3년생이었던 洪建杓씨, 이명우씨가 전라남도 홍해해안에서 납치하어, 공작원을 한국인화 시키기 위한 교관으로서 일을 시키고 있다. 이 5명은 모두, 橫田메구미씨 등과 마찬가지로 1976년의 김정일의 납치작전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다. 


國情院이 휴전후의  납치피해자 리스트를 공표 

「조선일보」가 안명진씨의 증언을 근거로 한국인고교생납치를 보도한 것은 1997년 12월이다. 즉. 橫田메구미씨 납치가 일본국내에서 크게 보도된1997년 2월부터 10개월이 지나서, 한국의 해안에서 5명의 고교생이 납치된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1997년 이래 일본에서 전개된 납치피해자가족과 지원자들의 구출운동은, 한국의 피해자가족과 한국정부 내의 담당관 등을 자극했다. 橫田메구미씨납치는 한국정보당국이 망명자증언을 일본에 전해주었기 때문에 밝혀지게 된 것이기 때문에, 먼저 한국으로부터 일본이 자극을 받고, 그것이 부메랑처럼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옳은 시각일 것이다. 

한국정부가 납치 관해서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은, 1999년이 되고부터였다. 

동년 1월 31일에 한국국가정보원은 납치 및 자진 북한으로 들어간 한국인 중에 22명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납치피해자의 소식을 처음으로 한국정부기관이 공식으로 밝힌 것이다. 「최근, 북한을 탈출한 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어, 그들은 납치 또는 자기의 뜻에 따라 입국한 후 1년에서 2년 뒤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설명을 붙여서 발표했다. 22명의 명부는 다음과 같다(「조선일보」1999년 1월 31일). 

1. 신원 확인자. 괄호는 북한에 들어간 시기, 당시의 직함, 순서도 발표 그대로다.

▲이영훈(92년 4월, 변호사 사무장) ▲천낙호(91년 7월, 조광해운선원) ▲이재강 (89년12월, 三星電子대리점근무) ▲조홍래(92년8월, 운동기구점운영) ▲ 최해창(91년10월, 조광해운선원) ▲이대식(88년9월, 파라과이移民) ▲ 신원식(91년6월, 美國교량설계사) 

▲강광석(92년 12월, 부동산중개업) ▲김성배(83년 5월, 건설회사 중역)▲ 김순성(西獨광부) ▲ 李宰煥(89년 7월, 在美유학생) ▲ 崔宗錫(87년1월, 東進27호 납치선원) ▲ 김원석(90년 2월, 관광회사대표)▲ 양칠성(88년9월, 부동산중개업) ▲김성진(84년 9월, 軍人 이등병)

2. 신원미확인자

 ▲권오문 ▲ 조생구 ▲ 서학식 ▲ 박정신 ▲ 이창수 ▲유재온 ▲김중길

정치범수용소 내의 납치피해자 리스트 발표의 약 1개월 후, 1999년 3월 9일 한국국가정보원은 북한에 납치되어 억류되어 있는 한국인 450명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 북한에 납치된 한국인은 합계 3,756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3,302명이 귀국했지만, 여전히 454명이 억류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한국가족회 등의 조사로 밝혀지게 된 피해자가 있어, 2005년 7월 현재 한국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한국전쟁 휴전후의 납치피해자로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486명으로 되어 있다.  

◎ 한국가족회발족

1999년 4월, 5월 2일에 열린 납치피해자구출을 위한 국민대집회 준비를 추진하고 있던 우리들은「구출회」에 한국으로부터 국제전화가 들어왔다. 한국의 납치피해자가 그 집회에 참가할 수 없는가 하는 타진이었다. 그것은 바라지도 않았던 일로서 정식으로 초빙한다는, 회답을 했다.

그리고 3명의 납치가족이 來日했다. 1987년 유럽 여행 중에 납치된 유학생李宰煥씨의 父 이영욱씨외, 같은 1987년에 황해에서 어업조업 중에 북한에나포되어 그대로 계속 억류되어 있는 동진27호 어로장  최종석씨의 처 김태주씨, 딸 최우영씨의 2가족 3명이었다. 

전술한 정치범 수용소 리스트 안에 이재환씨, 최종석씨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 두 가족은, 이 세상의 지옥이라고 불리고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있는납치피해자의 구출을 관계기관에 진정하여, 메스컴을 통해서 계속 호소했다. 그 연장선상에서의 방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일본과 한국의 납치피해자가족이 만나는 것이다. 최영우씨는 귀국후, 한국에도 납치피해자가족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지원자가전혀 없고 메스컴의 관심도 거의 없는 가운데,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다. 

1999년 12월 한국 서울에서, 제1회 북한인권·난민문제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거기에 나는 일본인납치구출운동을 대표해서 옵서버로서 참가했다. 북한의 인권문제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NGO와 연구자가 모인 그 회의에서도, 한국인납치에 관해서는 전혀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청중으로서 참가한 최우영씨를 내가, 역시 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NGO「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멤버로 끌어들여 지원해줄 것을의뢰했다. 

그리고 동 NGO멤버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익 2000년 2월 28일「납치자 가족회」(이하 한국가족회)가 서울에서 17명의 가족의 참가를 얻어 발족했다.

거기서 가족회는「태양은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필요하다」는 제목의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이하 그 주요부분을 번역 인용한다(『월간Key』제2호로부터 번역) 

『정부는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관해서 침묵한 채 정부차원에서의 대응을 고려하지 않았다.(약) 게다가, 정부의 힘이 강했을 시대에는, 납치피해자 가족은 공안기관에 연행되어「자신의 의지로 북한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으면서 탄압까지 받아왔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그들의 절규를 정부는 진정으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그들은 자국민의 납치사건에 관해서 시종일관해서 정부의 힘으로 강력히 대응하고 있습니다. 朝日수교교섭등 조일관계에서 납치문제가 우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들은 정말 부럽게 느꼈습니다.(약)

우리들도 햇볕정책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꾸며서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늘이 되어 있는 장소에 살고 있는, 분단에 의하여 가장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치유해 줄 그러한 태양의 빛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일본의 운동이 자극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가족회의 설립총회에 보내어진 한국 MBC 텔레비전의 디렉터의 편지에도 일본의 운동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었다. 

「취재를 위하여 일본에 왔을 때, 나는 일본의 가족의 활발한 활동보다도 그들이 활발하게 정부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행하고, 또 일본정부에서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명을 받은 바입니다. 인간에 관한 일을 수자로 경중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만, 일본의 납치피해자는 10여명에서 60여명까지로 추정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확인된 사람만해도 450명을 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정부는 무엇을 했습니까」이 2000년은, 6월에 남북수뇌회담이 실현된 해입니다만, 그것을 위해 한국가족회는 운동을 활발하게 해 나갈 것이다. 3월 15일에 제2회 가족회 회합을 가졌다. 거기서 나를 포함한 일본인 구출운동관계자 3명이 참가하여, 일본에 있어서의 납치피해자구출운동의 현상에 대해서 보고했다. 

동년 4월 18일에, 서울에서 한일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한국측은 최우영씨등 한국가족회회원이, 일본측은 荒木和博 구출회 사무국장(당시)과 북한에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지방위원의 회 역원의 6의원이 참가했다.그 자리에서, 한국가족회는 남북수뇌회담에 임하는 한국대통령에 대해서「대한민국원수가 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북에 있는 대한민국국민을 데리고 돌아와 주십시요」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韓日 공동성명도 나왔다. 

이어서, 4월 30일, 東京에서 개최된 제2회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국민대집회에 한국가족회로부터 최우영씨와 이연순씨가 참가했다. 최씨는 전년에 이어 계속 참가했는데, 이씨는 남편인 안승운 선교사가 1995년 중국 연변지역을 거점으로 해서 북한 포교활동 중에 납치되었다. 

◎남북수뇌회담에서의 김대중 대통령의 배신

동년 5월 10일에는 통일부가 들어가 있는 정부청사빌딩 앞에서,「남북수뇌회담에서 납치문제를 주요의제로 해서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개최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가족들은 현수막 앞에 피해자의 사진을 들고 서서, 통일부를 향해 호소했다. 5월 26일에는 사상 최초로 통일부장관과 가족과의 면담이 실현되었다. 거기서, 최우영 한국가족회대표는 「우리의 요구사항」을 장관에게 건넸다. 그 제1항은 앞서의 집회의 요구와 같이,납치문제를 수뇌회담의 의제로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월 13일부터 15일, 평양에서 개최된 김대중과 김정일의 남북수뇌회담에서는 납치문제는 의제로 채택되지 않았다. 실은 김대중 대통령은 수뇌회담에 있어서의 한국과 일본의 납치구출운동에 대해서 2가지의 중대한 배신을 한 것이다. 

첫째의 배신은 한국인납치피해자에 대한 것이다. 당초 한국정부는 비전향 공작원의 송환을, 한국인납치피해자와 한국군포로와의 교환조건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이었다. 예를 들면,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3월 24일 통일부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최근 석방된 남파공작원도 북한으로 보낼 용의가 있다. 동시에 북한도 한국군포로, 납치피해자 등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도적 입장에서 남북간에 합의가 있기를 바란다」(청와대 홈페이지)고 훈시했다. 

그러나, 2000년 6월에 나온 남북공동선언 제3항에는「남북은 금년 8월 15일에 즈음하여, 이산가족·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나가기로 했다」고 되어있다. 여기에는 김정일의 강한 희망으로, 비전향 북한 공작원을 송환한다는 약속이 들어간 반면, 한국인납치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두 번째의 배반은 우호국 일본에 대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공동선언 제3항에 따라, 2000년 9월 2일, 63명의 북한 공작원을 북한으로 보냈다. 그 중에는, 1980년 오사카의 중화요리 요리사 原勅晁씨를 납치하고, 原씨 행세를 하면서 공작활동을 전개한 辛光洙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북한의 증오할만한 테러행위에 김대중 정권이 가담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韓日 우호관계에 대한 배신이다.

◎한국가족회의 활동에 높아지는 여론

한국가족회는 2000년 8월 27일, 북한으로의 송환을 앞에 둔 비전향공작원 신·이년, 이경찬 등을 방문하여, 납치피해자의 명부를 건네면서 생사확인을 요청했다. 이에 대하여 비전향 공작원들은「북에는 강제 납치된 사람은없는데도, 어떻게 납치피해자라는 말을 사용하는가」「납치피해자는 없으며,(북한이)좋아서 북으로 가는 것이 아니가」하면서 모른 체 했다고 한다.

한국가족회는 동년 8월 15일, 이산가족재회 현장인 호텔 입구에서 프랭카드를 들고 어필하기도 하고, 9월2일 비전향 공작원들이 북한으로 송환될 때,「어째서 일방적으로 한국에 잡힌 북한 공작원을 돌려보내고, 북한이 납치한 한국인피해자는 돌아오지 않는가」하며 호소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이같은 활동은, 한국의 텔레비전, 신문에 크게 취급되어, 납치문제에 대한한국여론의 관심을 크게 높였다. 

그 결과, 金大中 대통령도 9월 3일, 텔레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납치문제의 존재를 안정하고, 해결을 위한 노력을 약속했다. 

質問·작일, 한국정부는 남북공동선언에 따라서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보냈습니다. 북측에서도 인도주의와 상호주의에 입각해서 우리들의 납치피해자와 한국군포로를 보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이에 대하여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大中 대통령·북한의 입장에서는, 지금 한국군포로는 없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1953년의 휴전시, 포로교환을 전부 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입장에서, 납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들이 여러 정보와 모든 점을 통해서 판단하여 파악한 바로는, 한국군포로가 약 3내지 4백 명이라고 하며, 또 납치피해자도 그 정도의 수, 그래서 전부 합쳐서 7내지 8백 명이 파악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쪽에서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여야 하며, 여하튼 어떠한 형태라도 서로 남측에 있는 가족에게 생사의 소식을 전하고, 면회도 하고, 그리고 꼭 필요한 사람은 재결합도 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만, 이 문제는 일의 성과 때문에 당분간은 수면 하에서 접촉을 더욱 진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한국군포로와 납치피해자가족이 호텔 앞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고, 정말 그때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했습니다. 금번 우리들은 비전향장기수를 되돌려 보냈습니다만, 그것도 한국군포로와 납치피해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은 인권국가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여기서 잡아두고 여기서 죽게하는 것보다는, 고향으로 가서 가족과도 만나, 거기서 뼈를 묻어도 좋도록 보낸 것은, 전 세계가 한국의 인권국가로서의 면목을 금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김대중 대통령의 담화에서 크게 걱정이 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동정이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구출에 대한 결의가 아니라,「북한의 입장에서는....이라는 주장입니다」라고 하는 김정일의 입장에서의 변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 구출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한국정부의 방침

실은, 한국정부는 납치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부터 제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정책을 남북공동선언작성 직후에 정했다. 2000년 7월 28일 통일부가 공표한『남북공동선언 조항별 해설 및 주요현안문제 관련 질의, 응답자료』에는, 「직접적으로 송환을 요구하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산가족문제의 범주에 넣어서 접근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다(약) 금번의 합의를 계기로, 정부는 한국군포로와 납치피해자문제가, 넓은의미의 이산가족문제의 범주로 조속히 해결되어야 할, 최대한 노력해 나갈계획」(통일부의 홈페이지)이라고 명확하게 쓰여 있다.  억지로 납치되어,한국납치피해자가족 중에서 2명이 이산가족방문단의 일원으로서 뽑혀, 북한을 방문하여 피해자와의 면회를 이루었다. 2000년 11월 30일-12월 2일 제2회 이산가족상호방문에서, 1987년에 납치된 동진27호 승조원 강희근씨와 모친 김삼례씨가 재회했다. 2001년 2월 16일-28일 제3회 이산가족상호방문에서는 69년에 하이제크 된 대한항공기 승무원 성종희씨와 모친 이후덕씨가 재회했다. 이 두건은 양방모두 납치가족이 개별적으로「이산가족방문단」에참가하고 싶다고 신청하여, 한국정부가 일반 신청자와는 별도의 틀에서 선발됨으로서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그 면회는 북한당국의 감독 하에 행하여졌기 때문에, 피해자는 납치가 아니라 자기의 뜻에 의하여 북한에서 살고 있다면서 김정일의 덕택에 행복하다고 말했을 다름이다. 

남북수뇌회담의 결과, 한국에서 체포되어 유죄로 되어 형기를 끝마친 북한공작원은 희망자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납치피해자는 다만 2명이 감시아래서 가족과의 재회를 이루었을 뿐이다. 이것이 상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도주의의 미명아래, 김대중 정권이 일방적으로 김정일에게 양보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출처 : 아시아연방론
글쓴이 : CIA bear 허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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