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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2.12 의 진실이 첨으로 언론매체에 나왔습니다. 많이 가서 응원해줍시다. 본문
[편집자주] 다음 글은 브레이크뉴스 서울경기판에 게재된 우익군사평론가 지만원씨의 글입니다. 본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리며, 브레이크뉴스는 독자여러분의 건전한 토론장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본 글을 편집합니다. 독자여러분의 폭넓은 토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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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세우기에서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하 전두환)이 이끌었던 신군부 세력을 정치군인으로 몰아세우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하 정승화)은 이에 대항하는 참신한 군인인 것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지난 1979년 당시의 정치군인은 정승화였다. 당시의 전두환이야말로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외롭고 의롭고 위험한 싸움을 한 정의로운 군인이었다는 것이 이 사건을 공부하고 난 이후의 내 생각이다.
지난 1979년 11월 초, 정승화는 노재현과 합의해 과도정부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수반에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추대하기로 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장군이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국무위원들을 제치고 정권의 임기를 정하고, 수반을 누구로 하는가를 지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있다. 1979년 11월15일 정승화는 공화당 사무총장 길전식, 정책위장 장경순에 전화를 걸어 공화당이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정승화의 자서전 <12·12 정승화는 말한다>의 105쪽에는 이런 글이 있다. "당시 공화당 강경파들이 김종필을 후보로 적극 옹립하고 있었고, 당일 총회에서 가결될 것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나는 길전식과 장경순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정계 중진이 최규하 권한대행을 밀기로 합의했는데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면 정국만 혼란해진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종해 달라'고 했다. 그 결과 공화당 의원총회는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기로 가결했고, 김종필은 이를 수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입후보를 포기했다."
사실상 정치는 정승화가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미 정승화의 것이 돼 가고 있었다. 정치계에도 관계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정승화의 기세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벌들의 할거 전야
이 사건을 되짚어 봤을 때 정승화가 정치군인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1979년 12월12일 오후 5시. 세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 집무실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청하다가 최규하가 노재현 국방장관을 부르기로 하면서 지연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정승화 연행조는 이미 약속해 놓은 대로 총장공관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으며, 30경비단에 전두환이 초청해 놓은 8명의 장군은 장태완으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으면서 대통령실에 간 합수부장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 초청 받은 사람들이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실에서 나와 30경비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윤성민 참모차장이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30경비단을 무력 공격하겠다는 협박성 전화가 걸려와서 장군들이 합수부장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합수부장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백운택, 박희도 등 5명의 장군들은 '수경사령관은 협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이 반발하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 후 대통령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전두환과 함께 대통령실로 갔다.
이들은 국방장관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전권으로 재가해 줄 것을 정중하게 건의했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신군부가 대통령을 협박하러 갔다고 비난한다. 오후 10시10분. 노재현이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했고, 곧 오겠다고 했지만 그 후 노재현은 계속 잠적했다가 그 다음날 새벽 4시경에야 헌병에 의해 국방부 계단 밑에서 발견됐다.
역전의 드라마
당시 합수부의 젊은 장교들은 정승화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챙겼다. 시간이 가면서 김재규의 자세가 바뀌었다. 합수부에선 "자신이 집권하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말하다가 정승화가 관할하는 법정에선 "유신체제에 비수를 꽂기 위해 시해했다"고 말했다.
이를 재야가 부추기고 있었다. 구명운동도 활발해졌다.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김재규가 3김 불가론을 펴자 1주일 후에 정승화가 똑같이 3김 비토론을 주장했다. 쿠데타라도 불사해 정치개입을 하겠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치개입을 서슴지 않았다. 임시 대통령을 최규하로 할 것과 임기를 2년으로 할 것도 최규하나 국무위원들과 아무런 논의 없이 정승화가 결정했다. 김종필 후보선출을 무산시켰다. 공개적으로 김재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했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 보고 합수부 젊은 장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승화를 연행하지 않고서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외에서 끈질기게 확산되는 의혹의 여론도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재야세력, 김재규, 정승화가 정국을 주도해 불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그 누구도 이런 정승화에 제동을 걸 사람이 없었다. 이학봉 대령은 몇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연행 조사를 전두환에게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미루어 왔다. 그러나 합수본부장은 실로 어려운 결심을 했다. "연행해 조사하자."
이는 김재규 심복들이 이끄는 수도권 정예부대들과의 전투행위까지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래서 보안과 속도가 생명이었다. 빨리 연행하고 언론에 대서특필하면 기정사실화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전광석화 같은 체포과정
연행일은 12월12일에 하기로 정했다. 12월8일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차기 대통령(최규하)을 선출하는 날이고, 12월12일은 육군진급심사 예정일이었기 때문에 방해가 되지 않는 12월12일 밤을 연행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12월6일, 전두환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를 김재규 관련사건의 관련범'으로 연행 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문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군 주요 지휘관에 대한 수사에 대해선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관례에 따라 이학봉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12월8일 전두환에 보고했다.
▲대통령 보고시점에서 정확히 30분 만에 연행조를 총장공관에 보낸다 ▲연행조는 우정율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종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한다 ▲총장공관에는 1개 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 경계를 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 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과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던 33헌병대 병력 60여 명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연행시에 군의 반발을 예상해 전두환은 수도권 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12월12일 오후 6시30분에 30경비단으로 초청,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기로 했다. 차규헌 수도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특전사3공수여단장, 박희도 측전사1공수여단장, 장기오 특전사5공수여단장들이었다.
12월12일 오전 9시30분경, 합수부장 부관 황진아 소령이 대통령 비서실과 협의하에 보고일시를 12월12일 오후 6시30분으로 정했다. 전두환은 이학봉 한 사람만 대동하고 대통령 공관으로 가서 정승화의 혐의점을 보고하고 연행을 재가해 주기를 건의했다.
최 대통령은 노재현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 이는 선례가 없는 일로 전두환은 매우 당황했다. 전두환은 '관례'를 설명했지만 최규하는 끄떡도 하지 않고 노재현을 기다렸다. 전두환은 이를 최 대통령의 원칙주의 차원으로 여겼고, 부결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재현으로 인한 재가 지연
당시는 한치 앞이 안 보였고, 대세가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가 좌우되는 긴장과 불확실성의 시기였다. 최 대통령은 김재규와 정승화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사후 처신에 대해선 자신도 떳떳한 입장이 아니었다.
이런 처지라 아마도 혼자서 서명하는 것보다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건의 형식으로 서명하는 게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보신주의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부결하려면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부결의 뜻을 전했지, 구태여 국방장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곧바로 재가할 것을 예상하고 보고가 끝날 시점으로 예상되는 오후 7시를 연행시각으로 약속해 놓았었다. 대통령 재가가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 리 없는 연행팀은 예정된 오후 7시에 총장을 연행했다.
오후 7시40분, 허삼수는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에게 연행완료를 알렸고, 허화평은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이학봉에게 알렸고,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최 대통령은 알았다며 계속 노재현 국방장관을 데려 오라 했다. 그러나 노재현의 행방이 모연했다. 그래서 밤 9시, 전두환이 노재현을 찾아보기 위해 대통령 공관을 나왔다.
오후 7시20분경, 총장의 연행 과정에서 총격사태가 벌어졌다. 이웃 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은 이 총소리에 놀라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이웃 단국대학으로 피신했다.
7년5개월24일간 제5공화국 대통령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던 노재현은 오후 8시40경, 국방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이경률 합참 작전국장을 단국대에 오도록 하여 그의 차량 편으로 오후 9시30분경에 육본에 도착했다. 국방차관 김용휴가 장관에게 보고를 했다.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고, 이는 대통령에 보고됐다."
이 말을 들은 노재현은 다시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했다. 오후 10시10분, 최 대통령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즉시 오라고 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연합사 상황실에 있었다.
노재현의 소재를 어렵게 알아낸 김용휴 차관이 여러 차례 간청하며 대통령실에 가라고 했다. 12월13일 새벽 1시30분에야 국방부로 왔다. 김용휴 차관이 대통령 호출에 응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때 국방부로 출동한 공수1특전사 병력과 국방부를 경비하던 수경사 병력 간에 총격전이 있었다.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 장관은 다시 국방부 1층 계단 밑에 숨었다. 노재현의 출두가 지연되자 12월13일 새벽 2시30분에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 서리가 국방부로 와서 직접 노재현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12월13일 새벽 3시50분, 그는 수색조에 의해 발견되어 장관실로 돌아왔다. 새벽 4시경, 신현확 부총리와 이희성 서리의 권유에 의해 비로소 대통령 공관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합수보에 들러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 재가문서에 서명했다.
12월13일 새벽 4시30분. 노재현은 대통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후 재가문서에 서명해 줄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곧바로 거기에 서명을 했다. 배석한 신현확 총리 역시 정승화 연행 재가 문서에 '동의' 서명을 했다.
그 후 정승화는 1980년 3월13일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내란 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3월18일 징역 7년으로 감형, 항소 취하로 3월26일 확정판결을 받았다(1.12.사건수사기록12권8060-8069). 그리고 전두환은 광주사태를 거쳐 1980년 9월1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7년5개월24일간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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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세우기에서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하 전두환)이 이끌었던 신군부 세력을 정치군인으로 몰아세우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하 정승화)은 이에 대항하는 참신한 군인인 것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지난 1979년 당시의 정치군인은 정승화였다. 당시의 전두환이야말로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외롭고 의롭고 위험한 싸움을 한 정의로운 군인이었다는 것이 이 사건을 공부하고 난 이후의 내 생각이다.
지난 1979년 11월 초, 정승화는 노재현과 합의해 과도정부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수반에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추대하기로 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장군이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국무위원들을 제치고 정권의 임기를 정하고, 수반을 누구로 하는가를 지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있다. 1979년 11월15일 정승화는 공화당 사무총장 길전식, 정책위장 장경순에 전화를 걸어 공화당이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정승화의 자서전 <12·12 정승화는 말한다>의 105쪽에는 이런 글이 있다. "당시 공화당 강경파들이 김종필을 후보로 적극 옹립하고 있었고, 당일 총회에서 가결될 것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나는 길전식과 장경순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정계 중진이 최규하 권한대행을 밀기로 합의했는데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면 정국만 혼란해진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종해 달라'고 했다. 그 결과 공화당 의원총회는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기로 가결했고, 김종필은 이를 수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입후보를 포기했다."
사실상 정치는 정승화가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미 정승화의 것이 돼 가고 있었다. 정치계에도 관계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정승화의 기세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벌들의 할거 전야
이 사건을 되짚어 봤을 때 정승화가 정치군인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1979년 12월12일 오후 5시. 세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 집무실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청하다가 최규하가 노재현 국방장관을 부르기로 하면서 지연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정승화 연행조는 이미 약속해 놓은 대로 총장공관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으며, 30경비단에 전두환이 초청해 놓은 8명의 장군은 장태완으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으면서 대통령실에 간 합수부장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 초청 받은 사람들이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실에서 나와 30경비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윤성민 참모차장이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30경비단을 무력 공격하겠다는 협박성 전화가 걸려와서 장군들이 합수부장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합수부장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백운택, 박희도 등 5명의 장군들은 '수경사령관은 협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이 반발하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 후 대통령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전두환과 함께 대통령실로 갔다.
이들은 국방장관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전권으로 재가해 줄 것을 정중하게 건의했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신군부가 대통령을 협박하러 갔다고 비난한다. 오후 10시10분. 노재현이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했고, 곧 오겠다고 했지만 그 후 노재현은 계속 잠적했다가 그 다음날 새벽 4시경에야 헌병에 의해 국방부 계단 밑에서 발견됐다.
역전의 드라마
당시 합수부의 젊은 장교들은 정승화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챙겼다. 시간이 가면서 김재규의 자세가 바뀌었다. 합수부에선 "자신이 집권하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말하다가 정승화가 관할하는 법정에선 "유신체제에 비수를 꽂기 위해 시해했다"고 말했다.
이를 재야가 부추기고 있었다. 구명운동도 활발해졌다.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김재규가 3김 불가론을 펴자 1주일 후에 정승화가 똑같이 3김 비토론을 주장했다. 쿠데타라도 불사해 정치개입을 하겠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치개입을 서슴지 않았다. 임시 대통령을 최규하로 할 것과 임기를 2년으로 할 것도 최규하나 국무위원들과 아무런 논의 없이 정승화가 결정했다. 김종필 후보선출을 무산시켰다. 공개적으로 김재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했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 보고 합수부 젊은 장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승화를 연행하지 않고서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외에서 끈질기게 확산되는 의혹의 여론도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재야세력, 김재규, 정승화가 정국을 주도해 불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그 누구도 이런 정승화에 제동을 걸 사람이 없었다. 이학봉 대령은 몇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연행 조사를 전두환에게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미루어 왔다. 그러나 합수본부장은 실로 어려운 결심을 했다. "연행해 조사하자."
이는 김재규 심복들이 이끄는 수도권 정예부대들과의 전투행위까지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래서 보안과 속도가 생명이었다. 빨리 연행하고 언론에 대서특필하면 기정사실화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전광석화 같은 체포과정
연행일은 12월12일에 하기로 정했다. 12월8일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차기 대통령(최규하)을 선출하는 날이고, 12월12일은 육군진급심사 예정일이었기 때문에 방해가 되지 않는 12월12일 밤을 연행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12월6일, 전두환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를 김재규 관련사건의 관련범'으로 연행 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문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군 주요 지휘관에 대한 수사에 대해선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관례에 따라 이학봉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12월8일 전두환에 보고했다.
▲대통령 보고시점에서 정확히 30분 만에 연행조를 총장공관에 보낸다 ▲연행조는 우정율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종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한다 ▲총장공관에는 1개 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 경계를 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 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과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던 33헌병대 병력 60여 명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연행시에 군의 반발을 예상해 전두환은 수도권 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12월12일 오후 6시30분에 30경비단으로 초청,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기로 했다. 차규헌 수도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특전사3공수여단장, 박희도 측전사1공수여단장, 장기오 특전사5공수여단장들이었다.
12월12일 오전 9시30분경, 합수부장 부관 황진아 소령이 대통령 비서실과 협의하에 보고일시를 12월12일 오후 6시30분으로 정했다. 전두환은 이학봉 한 사람만 대동하고 대통령 공관으로 가서 정승화의 혐의점을 보고하고 연행을 재가해 주기를 건의했다.
최 대통령은 노재현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 이는 선례가 없는 일로 전두환은 매우 당황했다. 전두환은 '관례'를 설명했지만 최규하는 끄떡도 하지 않고 노재현을 기다렸다. 전두환은 이를 최 대통령의 원칙주의 차원으로 여겼고, 부결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재현으로 인한 재가 지연
당시는 한치 앞이 안 보였고, 대세가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가 좌우되는 긴장과 불확실성의 시기였다. 최 대통령은 김재규와 정승화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사후 처신에 대해선 자신도 떳떳한 입장이 아니었다.
이런 처지라 아마도 혼자서 서명하는 것보다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건의 형식으로 서명하는 게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보신주의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부결하려면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부결의 뜻을 전했지, 구태여 국방장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곧바로 재가할 것을 예상하고 보고가 끝날 시점으로 예상되는 오후 7시를 연행시각으로 약속해 놓았었다. 대통령 재가가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 리 없는 연행팀은 예정된 오후 7시에 총장을 연행했다.
오후 7시40분, 허삼수는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에게 연행완료를 알렸고, 허화평은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이학봉에게 알렸고,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최 대통령은 알았다며 계속 노재현 국방장관을 데려 오라 했다. 그러나 노재현의 행방이 모연했다. 그래서 밤 9시, 전두환이 노재현을 찾아보기 위해 대통령 공관을 나왔다.
오후 7시20분경, 총장의 연행 과정에서 총격사태가 벌어졌다. 이웃 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은 이 총소리에 놀라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이웃 단국대학으로 피신했다.
7년5개월24일간 제5공화국 대통령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던 노재현은 오후 8시40경, 국방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이경률 합참 작전국장을 단국대에 오도록 하여 그의 차량 편으로 오후 9시30분경에 육본에 도착했다. 국방차관 김용휴가 장관에게 보고를 했다.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고, 이는 대통령에 보고됐다."
이 말을 들은 노재현은 다시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했다. 오후 10시10분, 최 대통령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즉시 오라고 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연합사 상황실에 있었다.
노재현의 소재를 어렵게 알아낸 김용휴 차관이 여러 차례 간청하며 대통령실에 가라고 했다. 12월13일 새벽 1시30분에야 국방부로 왔다. 김용휴 차관이 대통령 호출에 응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때 국방부로 출동한 공수1특전사 병력과 국방부를 경비하던 수경사 병력 간에 총격전이 있었다.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 장관은 다시 국방부 1층 계단 밑에 숨었다. 노재현의 출두가 지연되자 12월13일 새벽 2시30분에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 서리가 국방부로 와서 직접 노재현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12월13일 새벽 3시50분, 그는 수색조에 의해 발견되어 장관실로 돌아왔다. 새벽 4시경, 신현확 부총리와 이희성 서리의 권유에 의해 비로소 대통령 공관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합수보에 들러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 재가문서에 서명했다.
12월13일 새벽 4시30분. 노재현은 대통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후 재가문서에 서명해 줄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곧바로 거기에 서명을 했다. 배석한 신현확 총리 역시 정승화 연행 재가 문서에 '동의' 서명을 했다.
그 후 정승화는 1980년 3월13일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내란 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3월18일 징역 7년으로 감형, 항소 취하로 3월26일 확정판결을 받았다(1.12.사건수사기록12권8060-8069). 그리고 전두환은 광주사태를 거쳐 1980년 9월1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7년5개월24일간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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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글쓴이 : 바보 -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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