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하마스,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 이란서 살해돼' 본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에서 살해됐다고 지난 31일(현지시간) 하마스가 밝혔다.
이란 언론에 따르면 하니예는 공격이 일어난 새벽 2시경 테헤란 소재 참전용사를 위한 건물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올해 62세인 하니예는 하마스를 전반적으로 통솔하는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니예의 죽음에 대해 이스라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남부에서 벌어져 이스라엘 측 1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공격 이후 하마스 궤멸을 다짐한 바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 지구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벌였으며, 하마스 측 보건부에 따르면 이로 인해 최소 3만94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 하마스에 따르면 하니예는 지난 30일 열린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고자 테헤란을 방문했다.
하마스 정치부 일원인 무사 아부 마르주크는 “비겁한 행동”이었다면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또 다른 하마스 고위 관료인 사미 아부 주리는 하마스는 “계속 하마스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 국영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란 외무부는 하니예의 “순교”가 “이란, 팔레스타인, 이 저항력(하마스) 간 깊고도 끊을 수 없는 유대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와 튀르키예, 카타르 외무부도 일제히 이번 공격을 규탄했다.
한편 하니예의 사망 소식은 이스라엘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최고 군사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를 사살했다고 주장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전해졌다.
이스라엘 당국은 지난 주말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고원을 덮친 로켓포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공습을 감행해 슈크르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헤즈볼라는 지난 30일 이스라엘의 베이루트에서 공격으로 슈크르가 숨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진 않았으나, 슈크르가 표적이 된 건물에 있었다고는 밝혔다.
헤즈볼라는 지난 31일 성명을 통해 “이 사건 이후 민방위대가 건물 잔해를 치우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건물이 파괴돼 작업이 더디며, 여전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니예는 1980년대 후반 하마스 운동의 유명한 일원으로, 1989년 이스라엘이 제1차 인티파다를 진압하며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1992년엔 다른 하마스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 무인 지대로 추방됐다.
2006년, 하니예는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최다 의석수를 차지하면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 의해 총리로 임명됐으나, 1주일 간의 유혈 사태로 하마스가 압바스의 ‘파타’당을 축출하면서 1년 뒤 해임됐다.
그러나 하니예는 자신의 해임은 “헌법에 위배”된다면서, 자신이 이끄는 정부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가자 지구를 계속 통치했다.
2017년, 하니예는 하마스 정치부 지도자로 선출됐다.
1년 뒤인 2018년, 미국 국무부가 하니예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가운데, 그는 지난 몇 년간 카타르에서 머물렀다.
하마스 “최고지도자 하니예 정치국 의장 이스라엘에 암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최고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예 하마스 정치국 의장이 오늘(31일)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됐다고 하마스가 밝혔습니다.
하마스는 성명에서 하니예 의장이 이날 이른 시각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이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이후 피살됐다고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도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하니예가 정밀타격 방식을 통해 “제거”됐다고 확인했습니다.
사미 아부 주흐리 하마스 고위 관리는 ‘로이터’ 통신에 “이스라엘 점령자들에 의한 하니예 형제 암살은 하마스의 의지를 꺾으려는 중대한 사태 악화 행위”라면서, 지금까지와 같은 길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안보 담당 관리들과 민간인 보호를 위한 지침 등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이스라엘 군은 지난 4월 10일 하마스 무장대원으로 활동하던 하니예 의장의 아들들인 아미르 하니예와 모하마드 하니예, 하젬 하니예를 제거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니예 의장 암살은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으로 양측 간에 전쟁이 시작된 지 약 10개월 만에 이뤄졌습니다.
VOA 뉴스
이란 매체 "하마스 수장 하니예, 새벽 숙소에 발사체 떨어져 사망"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61)가 암살당했다고 하마스가 31일 밝혔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전날(30일)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신임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테헤란을 방문한 하니예는 31일 새벽 숙소에 머무르던 중 급습을 받고 사망했다. 경호원 한 명도 숨졌다.
이란혁명수비대(IRGC)도 성명에서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암살됐다”며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 매체 알하다스 등은 “하니예는 숙소를 겨냥한 유도탄(미사일)을 맞고 죽었다”고 보도했다. 이란 관영 파르스통신도 그가 “테헤란 북부에 있는 참전용사 거처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공중에서 날아온 발사체(projectile)에 의해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마스는 공격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했다. 이스라엘 측은 아직 입장을 내지 않았다. AP는 “이스라엘은 모사드 정보 기관의 암살 작전에 대해선 공식 입장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은 수년간 이란에서 핵 개발과 관련한 인물들을 상대로 암살 작전을 벌여왔다고 의심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이란 대통령 취임식엔 하마스뿐 아닌 예멘 반군 후티,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등 중동 친(親)이란 무장세력 핵심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하니예는 암살되기 불과 몇 시간 전부터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이란 최고지도자) 등 이란 고위급 간부들과도 만났다”며 “이란 보안 문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1년 가까이 이어지는 가운데 하마스 ‘서열 1위’ 지도자가 살해되면서 중동 정세는 크게 요동칠 전망이다. 후티 반군 지도자 모하메드 알리 알 후티는 “극악한 테러 범죄”라 했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하마스는 “다양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며 사실상 이스라엘을 향한 보복을 예고했다.
앞서 하마스는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최소 1400명이 숨졌다. 이스라엘이 즉각 보복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지금까지 3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 CNN은 “하니예는 가자지구에 억류된 (이스라엘) 인질 문제와 휴전 협정에 대한 주요 협상자였다”며, “그의 암살은 (휴전) 협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이란 매체 “하마스 수장 하니예, 새벽 숙소에 발사체 떨어져 사망” (chosun.com)
하마스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은 누구인가?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테헤란에 가해진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현지시간 31일 하마스가 밝혔다. 하마스는 이번 공격의 책임을 이스라엘에 돌렸으나 이스라엘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앞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지도부를 제거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7일(현지시간) 토요일 이른 아침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이후, 군사 전문가 및 관측통들에 따르면 이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계획하고 조직한 인물들이 누군지에 관한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가자 지구를 장악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최고위층 인사들은 보통 얼굴을 가린 채 미디어에 등장하거나, 이스라엘의 암살 시도를 피해 대부분 도피 생활을 이어간다.
BBC는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들과 더불어 하마스 내 군대 조직인 ‘이즈 알-딘 알 카삼 여단’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을 살펴봤다.
이스마일 하니예
이스마일 하니예는 하마스가 2024년 7월 31일 그가 이란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하마스를 전반적으로 통솔하는 지도자로 널리 여겨졌다.
‘아부 알-압드’라고도 불리는 이스마일 하니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태어났다. 현재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인 그는 과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1989년부터 3년간 하니예를 교도소에 감금한 이후, 다른 하마스 지도부와 함께 ‘마르즈 알-주후르(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로 추방했다. 그렇게 1992년, 그는 꼬박 1년간 이곳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다.
다시 가자 지구로 돌아온 하니예는 1997년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의 사무국장으로 임명되며 입지를 다졌다.
2006년 2월 16일, 하마스는 그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로 지명했고, 그렇게 그달 20일 임명됐다.
그러나 1년 후, 하니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현 대통령인 마흐무드 압바스에 의해 축출됐다. 알-카삼 여단이 가자 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파타’당 대표들을 쫓아낸 이후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하니예는 “헌법에 위배된다”며 자신의 해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편, “나의 정부는 임무를 계속 이어 나갈 것이며,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하니예는 파타 측과 여러 차례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하니예는 2017년 5월 6일 하마스 정치 지도자로 선출됐다. 이후 2018년 미 국무부가 그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가운데, 그는 지난 몇 년간 카타르에서 머물렀다.
모하메드 데이프
별칭인 ‘아부 칼레드’, ‘알-데이프’라고도 불리는 모하메드 디아브 알-마스리는 하마스의 군사 조직인 알 카삼 여단을 이끄는 인물로, 1965년 가자 지구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인에겐 ‘지휘자’로, 이스라엘에선 ‘죽음의 사나이’ 혹은 ‘목숨이 9개인 싸움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데이프는 가자 지구의 이슬람 대학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전공했는데, 재학 시절엔 연기와 연극을 사랑해 예술 단체를 창단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마스 창설 이후 일말의 주저 없이 합류한 그는 1989년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체포돼 재판 없이 16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다. 하마스의 군사 부문에서 일한 혐의였다.
수감 기간 데이프는 자카리아 알-쇼르바기, 살라 셰하데와 함께 이스라엘 군인들을 포획하자는 목표 아래 하마스와는 별도의 단체를 설립한다. 이후 알-카삼 여단이 되는 단체다.
데이프의 출소 후 알-카삼 여단은 본격적으로 군사적인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데이프는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다른 알-카삼 지도자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데이프는 하마스 대원들이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한 터널 건설을 설계한 엔지니어이기도 하며, 이번 작전 당시 미사일을 대거 발사하자는 전략을 추진한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프의 가장 심각한 혐의는 따로 있다. 1996년 초 이스라엘인 약 50명이 사망했던 버스 폭탄 테러 사건으로 유명한 하마스의 폭탄 제조 기술자 야히야 아야쉬의 암살 이후, 일련의 복수 작전을 계획 및 감독했다는 혐의와 1990년 중반 이스라엘 군인 3명을 납치 및 살해한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다.
2000년 이스라엘 당국은 데이프를 체포했으나, ‘제2차 인티파다’로 알려진 팔레스타인인들의 2차 투쟁 시작 당시 가까스로 탈출해 그 후론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데이프의 사진은 총 3장이다. 그중 1장은 매우 오래전의 사진이며, 다른 1장은 복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1장은 그림자만 담겨 있다.
데이프는 지난 2002년 가장 심각한 암살 위협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한쪽 눈을 잃었다. 아울러 이스라엘 측은 그가 한쪽 발과 한쪽 손도 잃었으며, 여러 암살 시도에 시달린 이후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2014년 이스라엘이 50여 일간 가자 지구를 공격할 당시 이스라엘군은 또 한번 데이프를 암살하려 했으나, 데이프의 아내와 두 자녀만 목숨을 잃었다.
데이프는 ‘아부 칼레드’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어릿광대’라는 연극에서 중세 초기의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인 ‘아부 칼레드’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별칭인 ‘데이프’는 아랍어로 ‘손님’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암살을 피하고자 절대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매일 밤 새로운 장소에서 잠을 자기에 생긴 이름이다.
마르완 이사
‘그림자 사나이’라고도 불리는 마르완 이사는 데이프의 오른팔로, 알-카삼 여단의 부사령관이자 하마스의 정치 및 군사 부문에 모두 속해있는 인물이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과거 이사를 붙잡은 적이 있다. ‘제1차 인티파다’로 알려진 기간, 이사는 어린 나이에 하마스에 합류해 활동했다는 혐의로 5년간 이스라엘에 수감돼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사가 살아있는 한 하마스를 상대로 한 “두뇌 전쟁”은 계속된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를 “말이 아닌 행동”의 인간이라며, 너무나도 똑똑해 “플라스틱도 금속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라고 묘사한다.
한때 유명 농구 선수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하마스에 가담한 혐의로 1987년 이스라엘에 체포됐기에 스포츠 관련 경력은 없다.
그 후 1997년 이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에 체포됐으나, 2000년 ‘알-아크사 인티파다’ 사건 발발 이후 풀려났다.
출소한 이사는 알-카삼 여단의 군사 시스템 개발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워낙 핵심 인물이었기에 이사는 이스라엘의 최고 수배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2006년, 이스라엘은 데이프 등 알-카삼 여단의 다른 주요 지도층이 모이는 회의에서 그를 암살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사는 부상만 당했을 뿐 생존했고, 그를 제거하겠다는 이스라엘의 목표는 실패로 끝이 난다.
또한 지난 2014년과 2021년 가자 지구 침공 당시에도 이스라엘 전투기가 동원돼 2차례 그의 자택을 파괴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사의 형제가 숨졌다.
이사의 얼굴은 베일에 감춰져 있었으나, 2011년, 이스라엘 군인 길라드 샬리트와 맞교환된 수감자 단체 사진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아부 알-바라’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사는 2012년 ‘셰일 스톤’부터 올해 ‘알-아크사 홍수 작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전에 분명히 관여했다. 지상전에서 보여준 힘과 정보 및 기술적인 요소, 조직적이고 정확한 계획 수립, 이스라엘 정착촌 및 보안군 본부 습격 등 여러 부분에서 그가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야히아 신와르
하마스 운동의 지도자이자 가자 지구 정치부의 수장인 야히아 이브라힘 알-신와르는 1962년생이다.
그는 ‘마즈드’로 알려진 하마스 보안부를 설립한 인물로, 이곳은 이스라엘 요원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조사하거나 이스라엘 정보국 및 보안국 요원들을 자체적으로 추적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다.
신와르는 과거 3차례 체포된 전력이 있다. 최초로 체포된 건 1982년으로, 이스라엘군은 4달간 그를 행정 구류했다.
그리고 1988년, 신와르는 3번째로 체포돼 4번의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가 수감생활을 하던 도중 이스라엘 군인이었던 길라드 샬리트의 탱크가 하마스의 미사일에 맞아 샬리트가 인질로 붙잡히게 된다.
샬리트 석방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스라엘 당국은 그를 데려오고자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에 수감자 맞교환이 이뤄졌고, 여기엔 ‘파타’와 하마스 출신 여러 수감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2011년, 신와르도 석방된다.
석방된 이후 신와르는 하마스의 유명 지도자이자 하마스 정치부 소속으로 복귀했다.
2015년 9월, 미국은 신와르를 ‘국제 테러리스트’로 분류했다.
이후 2017년 2월 13일, 신와르는 이스마일 하니예의 뒤를 이어 가자 지구의 정치 지도자로 선출됐다.
압둘라 바르구티
바르구티는 1972년 쿠웨이트에서 태어나, 1990년 제2차 걸프전 이후 요르단으로 건너가 살았다.
요르단 시민권자였던 그는 한국의 한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는데, 이에 따라 이후 폭발물 제조법을 습득하게 된다.
바르구티는 팔레스타인 입국 허가를 받으면서 공부를 마치진 못했다.
사실 바르구티 주변 그 누구도 그가 폭발물 제조에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구티는 사촌인 빌랄 알-바르구티를 서안 지구의 어느 외딴 지역으로 데려가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 이후 빌랄은 자신이 본 것을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사령관은 바르구티를 알-카삼 여단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바르구티는 폭발 장치를 제조하고, 감자를 이용해 독극물도 만들었으며, 기폭장치도 만들어냈다. 바르구티는 군수품을 생산하고자 살던 마을의 한 창고를 공장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그러던 2003년, 바르구티는 이스라엘 특수부대에 의해 우연히 체포돼 3개월간 심문받게 된다.
바르구티는 이스라엘인 사망자 수십 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2번째 재판엔 유가족들이 대거 참석하기도 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바르구티는 67번의 종신형에 더불어 징역 5200년형이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긴 형량을 선고받게 된다.
한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으나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그렇게 독방에서 나오게 된다.
바르구티는 수감 생활 중 ‘그림자의 왕자’라는 책을 써내며 동명의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해당 저서에서 바르구티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비롯해 어떻게 이스라엘 군 검문소를 통과해 폭발물을 얻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원격 폭격 작전을 해낼 수 있었는지 등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시행했던 여러 작전의 세부 사항에 대해 기술했다.
칼리드 마슈알
아부 알-왈리드’라고도 불리는 칼리드 마슈알은 1956년 서안 지구 실와드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뒤, 이후 가족들과 쿠웨이트로 건너가 초중등 교육을 마쳤다.
마슈알은 하마스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하마스 설립 이래 계속 정치부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슈알은 1996~2017년 사이 하마스 정치부 지도자직을 맡았으며, 2004년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이 사망한 이후엔 하마스의 총지도자로 임명됐다.
1997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직접적인 지시하에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네타냐후 총리는 모사드 수장에게 암살 작전을 명령했고, 이에 모사드 요원 10명이 위조된 캐나다 여권으로 요르단에 입국했다. 당시 요르단 국적자였던 마슈알은 수도 암만에서 길을 걷다 독극물이 든 주사를 맞게 된다.
그러나 요르단 당국이 암살 시도를 포착해 연관된 모사드 요원 2명을 체포하게 된다. 후세인 당시 요르단 국왕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마슈알에게 주사한 독극물에 대한 해독제를 요청했고, 네타냐후 총리는 처음엔 거부했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네타냐후 총리에게 해독제를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등 마슈알 암살 시도는 국제 정치 이슈로 번져나갔다.
이후 2012년 12월 7일, 마슈알은 생애 최초로 가자 지구를 방문했다. 11살 어린 시절 떠난 이후 팔레스타인 땅을 밟은 건 처음이었다.
당시 라파 검문소를 통해 들어오는 그를 여러 팔레스타인 파벌 및 지도자들은 열렬히 환영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가 가자 시티에 도착할 때까지 길을 따라 그를 환영했다.
2017년 5월 6일, 하마스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슈라 위원회’는 하니예를 정치 지도자로 임명했다.
마흐무드 자하
마흐무드 자하는 1945년 가자 시티에서 팔레스타인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집트 동북부 이스마일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가자 지구로 건너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이집트 카이로의 아인샴스 대학에서 1971년 일반 의학 학사를, 1976년 일반 외과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졸업 후 자하는 가자 시티와 칸 유니스 등지에서 의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당국은 그의 정치적 지위를 이유로 그를 사직시켰다.
자하는 하마스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인물로, 하마스에서도 정치부문 지도부에 속한다.
자하는 하마스가 창설된 지 6개월 만인 지난 1988년, 이스라엘 당국에 붙잡혀 6개월간 수감됐다. 그는 1992년 이스라엘에 의해 마르즈 알-주후르로 추방돼 1년을 보낸 이들 중 하나다.
2005년 총선에서 하마스가 다수를 차지하면서 자하는 하니예 총리가 주도하는 정부에서 외교 업무를 맡게 됐다. 이후 압바스 대통령이 해당 정부의 해산을 선언하며 팔레스타인은 분열되게 된다.
한편 지난 2003년, 이스라엘은 F-16 전투기로 가자시티 리말 지역 소재 자하의 자택에 무게 0.5톤 규모로 추정되는 폭탄을 투하하며 그를 암살하려 했다. 자하는 가벼운 부상만 입은 채 빠져나왔으나, 그의 장남인 칼레드가 사망했다.
알-카삼 여단 소속이었던 둘째 아들 호삼은 2008년 1월 15일 가자 지구 동부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한 18명 중 한 명이었다.
자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 … 쿠란 연구’, ‘태양 아래 아무 곳도 없다’ 등 학술적이고, 정치적이며, 문학적인 작품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중 ‘태양 아래 아무 곳도 없다’는 네타냐후의 저서 ‘길 위에서’에 대한 대응이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누구인가?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과격 이슬람단체 중 최대 조직이다.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1987년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지구 점거에 대항한 최초의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후 창설했다. 하마스의 헌장은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데 헌신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하마스는 본래 두 가지 목적으로 탄생했다. 하나는 자신들의 군부인 이제딘 알-카심 여단 주도로 이스라엘에 대항한 무장 투쟁을 수행하고,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위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5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 유대인 정착민들을 철수한 이후,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변화 과정에도 관여해왔다. 하마스는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이듬해 마흐무드 압바스 대통령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파타 정권을 축출해 가자지구에서 권력기반을 강화했다.
이후 가자지구 내 무장세력은 이스라엘과 3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함께 하마스를 고립시키고 하마스의 공격을 중단하려는 압박으로 가자지구를 봉쇄했다.
이스라엘, 미국, 유럽연합, 영국은 하마스 전체 또는 하마스 내 군부를 테러 단체로 규정한다.
자살폭탄 테러
1993년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국민을 대표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서로를 인정하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했는데, 하마스는 이 협정에 반대하는 주요 단체다. 하마스는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진 '1차 인티파다' 이후 두각을 나타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대응 작전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요 정부기구)의 탄압에도 불구, 하마스는 자살 공격을 통해 이 평화협정에 대한 거부권을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96년 2월과 3월, 하마스가 감행한 몇 차례의 버스 자살폭탄 테러로 이스라엘인 약 60명이 사망했다. 1995년 12월 하마스 지도자이자 폭탄제조 전문가인 예히야 아야시를 이스라엘군이 암살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폭탄 테러들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을 중단시키고, 오슬로 협정을 강하게 반대하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1996년 집권하는데 일조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오슬로 협정 이후, 특히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벌어진 '2차 인티파다'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탄압하자, 하마스의 영향력도 커졌다.
하마스는 파타 진영 아래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좌절한 팔레스타인인을 위해 진료소와 학교를 세웠다.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은 두 번째 인티파다가 일어난 첫해 하마스의 연쇄 자살공격을 지지했다. 국민들은 하마스의 "순교 작전"을 그들이 상실한 것, 그리고 그들이 국토로 원하는 요르단강 서안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복수로 여겼다.
2004년 3월과 4월,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과 그의 후계자 압둘 아지즈 알-란티시는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가자에서 암살당했다.
그해 11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초대 수반이자 파타당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사망하고, 마흐무드 압바스가 자치정부의 새 지도자가 됐다. 그는 하마스의 로켓포 발사가 역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하마스가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압승했을 때, 파타 진영과 치열한 권력투쟁의 무대가 형성됐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전에 이스라엘과 맺은 협정들에 서명하려는 노력을 저지했고,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적법성을 인정하고 폭력을 중단하려는 움직임에도 저항했다.
1988년 헌장
하마스 헌장은 현재의 이스라엘을 포함해 이전 역사에서 팔레스타인이었던 영토를 이슬람 땅으로 규정하며, 이스라엘과의 항구적 평화는 배제한다.
이 문서는 또한 유대 민족을 여러 번 공격해, 하마스의 운동은 반유대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낳고 있다.
하마스는 2017년 새로운 정책 문서를 만들었는데, 하마스의 입장 일부분을 좀더 부드럽게 서술하고 더 신중한 언어를 사용했다.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부분은 없었지만, 1967년 제 3차 중동전쟁 이전 경계선으로 알려진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동예루살렘에 팔레스타인이 잠정 자치국으로 창건됐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하마스의 투쟁은 유대인을 향한 것이 아닌 "시온주의 침략자들을 점령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가 "세상을 속이려 한다"고 말했다.
제재 조치
그 결과 하마스가 이끄는 새로운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서방 동맹국들에게 강력한 경제 및 외교적 제재를 받았다.
하마스가 2007년 가자에서 파타당에 충성하는 군대를 축출한 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봉쇄를 강화했고 팔레스타인의 로켓포 발사와 이스라엘의 공습이 계속됐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모든 공격에 대해 하마스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 국경간 전투가 격화하기 전 가자지구에서 3차례의 주요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2008년 12월, 이스라엘군은 로켓포 공격을 막기 위해 '캐스트 리드 작전'을 개시했다. 22일간 이어진 분쟁 동안 13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과 13명의 이스라엘인이 숨졌다.
이스라엘은 2012년 11월 카삼 여단의 사령관 아흐메드 자바리가 사망한 공습으로 시작한 '방위의 기둥 작전'도 로켓포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8일간의 전투로 대부분 민간인인 약 17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6명의 이스라엘인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력이 저하한 두 분쟁에서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국민에게 새로운 지지를 얻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하마스는 2007년 유혈사태 당시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압바스에 충성하는 세력으로부터 가자지구 통제권을 빼앗았다.
2014년 6월 중순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전역에서 살해된 이스라엘 청소년 3명을 수색하던 중 수많은 하마스 조직원들을 체포하면서, 가자지구로부터 로켓포 사격이 다시 증가했다.
그해 7월 초, 하마스는 2년 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을 발사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사용하는 로켓과 국경간 터널을 파괴하기 위해 '경계 보호 작전'이라는 공세를 펼쳤다.
50일간의 분쟁 기간 동안 최소 2251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중 1462명은 민간인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군인 67명과 민간인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 카타르, 유엔의 중재로 휴전하고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았던 폭력사태는 2014년부터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봉쇄 압력에도 불구하고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권력을 유지했고 로켓 무기를 계속 개선했다. 파타당과 화해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가자지구의 200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도주의적 상황은 악화했다. 지역 경제는 붕괴했고, 물, 전기, 의약품은 부족하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누구인가? - BBC News 코리아
'Guide Ear&Bird's Eye45 > 팔레스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자전쟁 1년, 확전 위기 수렁 속으로 (0) | 2024.10.06 |
---|---|
런던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휴전 요구하는 시위 열려 (0) | 2024.10.06 |
하마스∙파타 등 팔레스타인 14개 정파, ‘분열 종식’ 베이징 선언 채택 (0) | 2024.07.24 |
유엔 총회 “팔레스타인 회원국 자격 충분” (0) | 2024.05.12 |
일부 국가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0) | 2024.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