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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랭크' 배신한 유력 용의자, 77년 만에 드러나 본문
나치를 피해 숨어 쓴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랭크와 그의 가족을 나치에 넘긴 유력한 용의자가 새로운 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유대인 안네는 2년 동안 숨어 지내며 편지를 쓰다가,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돼 그곳에서 1945년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한 후 출판된 '안네의 일기'는 가장 유명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의 수기다.
전직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던 유대인 아르놀드 판덴베르크가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프랭크 가족을 밀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팀은 역사학자와 여러 전문가로 구성됐으며, 미해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현대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해 6년간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해 많은 사람들 간의 연관성을 조사했다. 사람이 직접 했다면 수천 시간이 걸렸을 작업이다.
판덴베르크는 지역 내 나치 '암스테르담 유대인 평의회'의 일원이었다. 평의회는 1943년 해체됐고 구성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하지만 연구팀은 판덴베르크가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았으며 암스테르담에서 정상적인 삶을 누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평의회 구성원들이 나치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빈스 판코크 전 FBI 요원은 미국 CBS방송의 간판 시사보도 프로그램 '60분'에 "판덴베르크가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한 모든 보호 수단을 잃었을 때, 그는 그와 부인의 안전을 위해 가치 있는 정보를 나치에 넘겨야 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같은 유대인이 유력한 배신자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은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랭크가 이 사실을 알았지만 공론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증거를 찾았다.
그들은 이전 조사 자료에서 오토 프랭크에게 아르놀드 판덴베르크가 배신자라고 밝힌 익명의 쪽지를 발견했다.
판코크는 60분에 오토 프랭크가 반유대주의 정서를 우려해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 같다고 추측했다. 판코크는 "그는 만약 이걸 공론화할 경우 상황이 더 악화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은 (판덴베르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치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불안정한 지위에 놓였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일간지 폴크스크란트는 판덴베르크가 1950년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안네 프랭크 하우스 박물관 측은 연구팀의 성과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로널드 레오폴트 안네 프랭크 하우스 박물관장은 "(새로운 조사 결과가) 중요한 정보를 밝혀냈을 뿐 아니라 추후 연구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조사에 직접 관여하진 않았지만, 기록물과 박물관을 연구팀과 공유했다.
'안네 프랭크' 배신한 유력 용의자, 77년 만에 드러나 - BBC News 코리아
연구팀은 유대인 아르놀드 판덴베르크가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프랭크 가족을 밀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www.bbc.com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하다.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1.생애
(1)키티와의 만남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Frank, 혼전 성씨: 홀렌더·Holländer)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르셸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폼라트(Ernst Eduard vom Rath)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홀로코스트)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후에《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Kitt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2.미국으로의 망명실패와 은신처 생활 시작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센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에 있는 펙틴(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오른쪽 그림의 화살표)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 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자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3.은신처 발각과 안네의 죽음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Grüne Polizei)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 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요제프 질버바우어(Karl Josef Silberbauer)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벨젠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2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성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읽어 보기
-1959년에는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 감독이 안네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세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6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원래 명칭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은 그동안 전쟁문서연구원에 보존돼 온 안네의 자필 문서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영구 전시될 것이라고 하였다.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자필 문서들은 안네가 1942년 7월 은거에 들어가기 한 달 전인 같은 해 6월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장, 역시 일기장으로 사용했던 2권의 학교 학습공책, 퇴고한 360매 분량의 원고이다.
안네의 취미는 영화감상이었다. 안네의 일기를 보면 명견 린 틴 틴이 나오는 영화를 생일날 친구들과 같이 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출생:1929년 6월 12일
바이마르 공화국 프랑크푸르트
사망:1945년 3월 12일(15세)
나치 독일 동하노버 대관구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종교:유대교(개혁파 유대교)
가족: 오토 프랑크 (父), 에디트 프랑크 (母),
마르고트 프랑크 (언니)
6월 12일은 안네가 태어난 날이면서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이다. 나치당의 히틀러가 1933년에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과 대량학살(홀로코스트)이 시작됐고 안네의 가족들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안네는 13살 되던 해 생일에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후에 ‘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됐고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점령하게 되고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돼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안네의 아버지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 263번지에 있는 펙틴(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은 뒤 그곳에 가족을 피신시켰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하지만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은 이 은신처를 급습해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 오토만은 네덜란드로 돌아온 뒤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됐다)을 거쳐 출판됐다.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돼 약 3200만 권이 팔렸다.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년)은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성향 헌법으로 침략전쟁 독일 히틀러의 노동자 당 나찌즘 정부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blog.daum.net
제139조【해방법률】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로부터 독일국민의 해방을 위하여 제정된 법규는 이 기본법의 규정에 의해서 침해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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