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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파월의 삶: 베트남전 영웅에서 미 최초 흑인 국무장관까지 본문
18일(미국 현지시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합병증으로 별세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은 미국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 되기에 초라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영예로운 훈장을 받은 육군 장교였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이 경험은 후에 그가 자신의 군사, 정치적 전략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됐다.
파월은 많은 미국 유력 정치인들이 신뢰하는 군사 고문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 품었던 의혹에도 불구하고 국제 여론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도왔다.
그는 1937년 4월 5일 뉴욕시 할렘의 자메이카 이민자 가족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콜린 루서 파월이다.
파월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전통적인 영어 발음으로 "오"라고 짧게 불렀으나, 그는 진주만 폭격 직후 사망한 미국 육군 항공대 조종사 콜린 켈리를 기리는 뜻으로 이름의 발음을 바꿨다.
그는 자신이 전향적인 진로 계획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뉴욕시립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하던 도중 미래의 군사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에 가입했다.
파월은 ROTC 훈련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그것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꽤 잘 해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58년 대학 졸업 후 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조지아주에서 기본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선 흑인이라는 이유로 술집과 식당에서 응대를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는 1962년 당시 존 케네디 행정부가 북베트남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베트남 현지 군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남베트남에 파견한 수천 명의 군사고문 중 하나였다.
파월은 베트남전 도중 펀지 스틱(땅 속에 묻혀 함정으로 사용된 예리한 나무 말뚝)을 밟아 부상을 당했다.
신예 스타
1968년, 파월은 베트남으로 복귀해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인한 화재 현장에서 군인 3명을 구출한 후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1968년 3월 발생한 미라이 학살사건에서 미군의 살해 혐의를 뒷받침하는 한 군인의 서한을 조사하는 팀에 배치됐다. 이 사건은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미군이 아동을 포함해 수백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파월은 "이 설명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 미군과 베트남 국민 사이의 관계는 훌륭하다"고 결론지었으며 이는 미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잔인하게 대했다는 증거가 늘어가는 것에 대립했다.
그 후 파월은 학살에 관한 뉴스를 "세탁"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70년이 돼서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파월은 워싱턴DC 조지타운대학에서 MBA 를 취득한 후 리처드 닉슨 전 행정부에서 미국의 권위 있는 인턴십 프로그램인 백악관 펠로우십을 거쳤다.
파월은 이제 신예 스타로 여겨졌다. 그는 한국에서 잠시 육군 중령으로 근무한 후 미 국방부 장교가 됐다.
파월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잠시 근무한 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01 공수사단을 지휘한 후 미 정부의 자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지미 카터 전 행정부에서 근무한 후 로널드 레이건 차기 대통령이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캐스퍼 와인버거의 선임 군사보좌관이 됐다.
파월 독트린
1987년 파월은 레이건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됐다. 당시는 미국이 중미의 소위 "더러운 전쟁"에 개입하며 니카라과의 우익 준군사조직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시기였다.
1989년 '아버지 부시'인 조지 HW 부시가 취임하자 파월은 미 국방부의 최고 군사 직책인 합참의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52세였던 그는 합참의장이 된 최연소 장교이자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1989년 12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해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을 축출하자 유엔에게 강력하게 비난받는 등 즉각적인 위기를 맞았다.
1990년 파월은 걸프전에 파월 독트린이라는 전략을 시행했다. 파월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모든 외교, 정치 또는 경제적 수단이 실패하기 전까지는 군사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만 그는 일단 군사행동이 개시되면 미국의 사상자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신속히 제압하기 위해 필요한 최대 병력을 배치해야 하며, 대중의 지지도 높아야 한다고 믿었다.
출처: GETTY IMAGES
이러한 신념의 대부분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겪었듯이 장기에 걸친 성과 없는 분쟁에 더 이상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에 근거한다.
애초에 파월은 딕 체니 전 국방장관의 계획을 반대하며 걸프전 참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이 전개한 '사막의 폭풍'과 '사막의 방패' 작전은 성공했고 파월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가 됐다.
파월은 클린턴 전 행정부 초기 몇 달간 합동참모본부 의장직을 유지했지만 그는 이전 정부보다 진보적인 행정부와 일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움직임
그는 동성애자의 군입대 허용 문제를 놓고 클린턴 전 대통령과 대립했고, 보스니아 내전 개입 문제를 둘러싸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주유엔 미국대사와 공개적으로 의견 차이를 보였다.
파월은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요소만이 군사적 대응을 정당화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미군은 세계의 게임판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장난감 병사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1993년 군을 떠나 자서전을 썼고 이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1위를 차지했다. 그 후 파월은 자선 활동에 전념했다.
군 장교의 의무에서 해제된 그는 정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파월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를 함께 받으며 양당의 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그는 1995년 자신이 공화당원이라고 선언했다.
1996년 대선 후보였던 빌 클린턴에 그가 맞설 것이라는 담론이 오갔지만, 파월은 자신이 정치 커리어를 향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2000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파월을 외교관계를 책임지는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9.11 테러 후 파월은 당시 미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등 강경파와 대립했다. 럼스펠드 전 장관은 미국이 다른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테러와의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칙을 고수하며 미국의 이라크전 참전을 반대한 파월은 갑자기 입장을 완전히 바꿔 부시 행정부를 지지하기로 동의했다.
파월이 200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그가 청렴한 인물이라는 평판은 유엔을 설득하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됐다.
2003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실각했고, 이듬해 파월은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자신의 발언이 틀렸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18개월 만에 인정했다. 그가 국무장관직 사임을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수감자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우 등 여러 측면에서 부시 행정부를 비판하며 정치적 문제를 거침없이 논평했다. 2008년 파월은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파월이 미 정계의 양당에서 우방 세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외교 수완을 잘 설명해 준다. 온화한 성품의 파월은 국무부에서 예의있는 인물로 유명했고, 고위직 인사답지 않게 남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매너로 알려져 있었다.
파월의 큰 강점은 연합이 대립보다 낫다는 그의 신념이었다. 그가 일방적인 개입 전략을 주장하는 럼스펠드 전 장관의 입장을 거부했기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전 세계적인 동맹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한다"며 "또한 우리가 전쟁을 할 때, 우리에겐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고 지지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콜린 파월의 삶: 베트남전 영웅에서 미 최초 흑인 국무장관까지 - BBC News 코리아
콜린 파월의 삶: 베트남전 영웅에서 미 최초 흑인 국무장관까지 - BBC News 코리아
콜린 파월은 당파를 아우르며 두루 존경받은 미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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