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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容姫(고용희) 본문
高容姫 コ・ヨンヒ、朝鮮語: 고용희、1952年6月26日 - 2004年8月13日[注 1]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以下北朝鮮)の人物。同国の最高指導者金正日の愛人の一人であった。金正日からは日本風に「あゆみ(아유미)」と呼ばれ、最も寵愛を受けていたとされる。金正哲・金正恩・金与正の実母である。
[고용희(아유미)는 1952년 6월 26일 - 2004년 8월 13일, 북한의 인물. 국가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의 애인(부인) 중 하나였다. 김정일은 일본 이름으로 "아유미"라고 가장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철 · 김정은 · 김여정의 생모이다.]
1.経歴(경력)
大阪生まれの在日朝鮮人二世。平壌芸術大学卒業後、1971年頃、万寿台芸術団に入り、舞踊家として活動。喜び組の接待役の1人となった。そこで金正日に見初められて、彼の「3番目の妻」となった。1973年の万寿台芸術団訪日時には、芸術団の一員として、柳日淑(リュ・イルスク、류일숙)の芸名で訪日している。
[고용희는 오사카 태생의 재일 조선인 2세이며 평양 예술대학 졸업 후 1971년경 만수대 예술단에 들어가 무용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기쁨조의 접대역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래서 김정일이 그녀를 보고 눈에 반하게 되어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1973년 만수대 예술단 방일(訪日)때에는 예술단의 일원으로 유일숙(柳日淑)의 가명으로 방일했다.]
1977年ごろ、金正日と同居を始め、1981年に金正哲、1984年に金正恩、1988年に金與正をもうけた。1998年ごろ乳癌の診断を受け、片方の乳房の切除も検討されたが、乳房切除で自身の金正日の妻としての地位が危うくなると判断。医療陣の引き止めにもかかわらず、切除の代替案として抗がん治療を選択した。これが結局、5年後に再発した。
[1977년경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 1981년 김정철, 1984년에 김정은, 1988년에는 김여정을 출산했다. 1998년경 유방암의 진단을 받아 한쪽 유방 절제(乳房切除)도 검토 되었지만, 유방 절제로 자신이 김정일의 아내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워 질 것으로 판단.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술의 대안으로 항암 치료를 선택했다. 이것이 결국 5년 후 재발했다.
*유방절제(乳房切除): 유방암을 치료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유방을 수술적으로 잘라 내는 일. ]
2004年の夏、フランス・パリのジョルジュ・ポンピドゥー欧州病院(英語版)で乳癌により死去。遺体は、豪華な棺に入れられて特別機で北朝鮮まで搬送された[1]。北朝鮮政府は国交のないフランスでの「国母」の死亡に困惑した。当時の韓国政府が遺体収拾と、平壌へ運ぶ過程を助けたことが報道されている。英姫の訃報に接し、夫である正日は泣き崩れたといわれる。
[2004년 여름 프랑스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유럽병원에서 유방암에 의해 사망하였다
시신은 호화로운 관에 넣어져 특별기로 북한까지 이송됐다
북한 정부는 국교가 없는 프랑스에서 '국모(國母)'의 사망에 당황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시신 수습과 평양에 운반 과정을 도운 것이 보도 되고 있다. 고용희의 부고(訃報, 사망 통지)를 접하고 남편인 김정일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알려지고 있다]
偶像崇拝と中止(우상숭배의 중지)
.
2002年頃から金正日は後継と見なしていた金正恩の生母として「共和国の敬愛なる母」として偶像化を推進。父親が日本の軍隊の武器を製造する工場の幹部と、朝鮮総連を通じて北朝鮮国内に広まることが危惧されたため中断された
[2002년경부터 김정일은 후계자로 간주했던 김정은의 생모(生母)로 ‘공화국의 경애하는 어머니’로 우상화를 추진하였다
고용희의 부친(父親)이 일제시대 일본 군대의 무기를 제조하는 공장의 긴부였다는 사실이 조총련을 통해 북한 국내로 확산될 것으로 우려돼 중단됐다 ]
2.前歴(전력)
すでに2006年に韓国の国家情報院は公式に(高春行説を)否定していたが、英姫は高太文の娘「高春行」であるという説が、これまで検証されることなく日本では通説とされていた。しかし2011年、デイリーNKの高英起(現在はデイリーNKジャパン編集長)が、日本の公式記録や北朝鮮の公式資料を基に、詳細に調査して週刊文春にスクープ記事を発表すると、この記事をきっかけに日本でも「高春行」説は見直され、「高ヨンジャ」説が有力とされるようになった。その後の、高英起やデイリーNKの綿密な取材に基づいた続報によって高英姫=高ヨンジャ同一人物説は、完璧に立証されて現在に至る.
[이미 2006년에 한국의 국가 정보원은 공식적으로 (고춘행 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고용희(고영희)는 고태문의 딸 ‘고춘행(高春行)‘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일본에서는 통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1년 데일리NK 고영기(高英起, 현재는 데일리 NK 편집장)가 일본의 공식기록과 북한의 공식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조사하고 주간 문춘(週刊文春)에 특종 기사를 발표하면서 이 기사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고춘행‘설은 검토이 되었고 ’고영자‘ 설이 유력하게 여겨지게 됐다.
그 이후의 고영기(高英起) 데일리 NK의 면밀한 취재에 근거한 속보에 의해 ‘고영희=고영자’ 동일 인물설은 완벽하게 입증되어 현재에 이른다. ]
英姫の日本での登録名は高姫勲(コ・フィフン、朝: 고희훈、Ko Hŭihun / Go Huihun)で、後に改名した高ヨンジャであるとする現在の説。
デイリーNKによると、彼女は1952年6月26日生まれで、父親は現在の済州市朝天邑(朝鮮語版)出身、済州高氏の高京澤(1913年生誕〜1999年死亡)で、母親は李孟仁。高京澤の父高永玉は朝鮮王朝に仕える下級文官(従仕郎)であり、当時経済水準の低かった済州島において比較的裕福な暮らしができたという[7]。京澤は、1929年に日本に渡り、大阪の廣田裁工所[8]に勤務。廣田裁工所は民間のカッターシャツなどを製造していたが、1938年に陸軍管轄となり軍需被服や天幕を製造していた。京澤の勤務期間や役職は不明だが、上級管理職を務めていたと考えられている[9]。戦後、密航船を運営していたが逮捕され、1962年10月に強制退去となり第99次帰還船で北朝鮮に帰国した[10]。北朝鮮では咸鏡北道にあるミョンガン化学工場の労働者として働いていたという。家族には、金策工業大学に通う長男、商業高校を卒業し販売員となった長女、高等中学校を卒業した次男、咸興薬学大学に通う三女ヨンスクがいる。高ヨンジャは次女で、朝鮮では名前をヨンジャに変え、無料で奨学金まで受けながら音楽舞踊大を卒業し、「功勲俳優」となり、「金日成主席の配慮によって国家授勲の栄誉をにない、表彰までされた」という.
妹のヨンスクは、2001年10月アメリカへ亡命した高英淑と符合する。日帝残滓として子の付いた日本風の女性名「ヨンジャ」から「ヨンヒ」に改名したのではないかとされる。
デイリーNKは、「高英姫」のハングル表記が「고용희」であり、「英(ヨン)」の部分が一般的に使用されている「英(영:ヨン)」ではない可能性が高いと2012年から指摘していたが[14]、同年6月前後に明らかになった彼女の墓標には「고용희」と記されていることが明らかになり、この説も立証された。なお、当時の北朝鮮では漢字を使用していなかったため、漢字名は不明であるが、高英起は「踊る姫」をイメージして「踊姫(용희)」の可能性が高いと主張している。
[고영희의 일본에서의 등록 이름은 고희훈(高姫勲, Ko Hŭihun / Go Huihun)에서 나중에 개명한 고영자라고 하는 설(設)이다.
데일리 NK에 따르면, 그녀는 1952년 6월 26일 태생으로 그녀의 부친(父親)은 현재 제주시 조천읍(済州市 朝天邑) 출신으로 고경택(高京澤(1913년 탄생 ~ 1999년 사망)이고 그녀의 모친(母親)은 이맹인(李孟仁)이다
고경택의 부친 고영옥(高永玉)은 조선왕조를 섬기는 하급문관(종사랑,従仕郎)이었으며 당시 경제수준이 낮았던 제주도에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경택은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성이 비밀로 지정한 오사카(大阪)의 '히로타 군복공장(廣田裁工所)'에서 근무했다
'히로타 군복공장(廣田裁工所)은 민간 커터셔츠 등을 제조하고 있었으나 1938년에 육군 관할이 되었고 군수 피복과 천막을 제조하고 있었다
고경택의 근무 기간이나 직책은 불분명 하지만, 고위 관리를 맡고 있었다고 생각 되고 있다
전쟁 후 밀항선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1962년 10월에 강제 퇴거가 되었고 제99차 귀환선으로 북한으로 귀국했다
북한에서는 함경북도에 있는 명강화학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족으로는 김책공업대학에 다니는 장남,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판매원이 된 장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차남, 함흥약학대학에 다니는 셋째 딸 영숙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름을 고영자로 바꾸고 무료로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음악무용대를 졸업하고 '공훈 배우'가 되었고, ‘김일성 주석의 배려로 국가수훈의 영예를 얻지 못했지만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여동생 영숙은 2001년 10월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高英淑)와 부합(符合, 일치)한다. 일제 잔재로서 아이가 있는 일본풍의 여자 이름 '영자'에서 '영희'로 개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데일리NK는 "고영희(高英姫)"의 한글 표기가 '고용희‘이며, ‘영(英)’ 부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英(영)"이 아닌 가능성이 높으면 2012년부터 지적했지만, 같은 해 6월 전후에 밝혀진 그녀의 묘비에는 '고용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 설도 입증 되었다.
또한 당시 북한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자 이름은 불명이지만, 고영기(高英起)은 "踊る姫(춤추는 공주.용, 희)의 이미지로 "踊姫(용희,무용공주) "의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 있다.]
家族構成[가족구성]
父: 高京澤(コ・ギョンテク)(1913年8月14日生)※強制退去により1962年北朝鮮へ帰国[부친 : 고경택 (1913년 8월 14일 출생), 강제 퇴각 1962년 북한으로 귀국]
母: 李孟仁(1913年8月3日生)※帰国前に梁明女から改名 姉: ?[모친: 이맹인(1913년 8월 3일 출생) ,※ 귀국 전에 양명녀로부터 개명, 언니:?]
兄: 高相勲(コ・サンフン)(1951年2月12日生)※北朝鮮では高ドンフンに改名[형: 고상훈(1951년 2월 12일생) ※ 북한에서는 고동훈으로 개명]
弟: ?
妹: 高恵勲(コ・ヘフン)(日本名:高田恵美 1955年1月17日生)※米国に亡命した高ヨンスク[동생 : 고혜훈 (일본어 이름 : 가오다 미, 1955년 1월 17일 출생) ●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
(2)高春行説[고춘행설]
英姫の本名は高春行(コ・チュネン〈チュンヘン〉、朝: 고춘행、Ko Ch'unhaeng / Go Chunhaeng)で、1950年3月11日に生まれ、本貫は済州高氏とした説で、日本では従来定説だった。しかし、デイリーNKの高英起は、春行の生年月日(1950年3月11日)が、英姫とはまったくちがうことを日本の公式資料から明らかにした。さらに春行が同じ帰国者男性と結婚して二人の子どもがいる記事が、北朝鮮公式メディアに二度にわたって掲載されていることを突き止めた。これによって、春行と英姫は別人であることが明確になった。
春行は、日本の大阪市生野区鶴橋のコリア・タウンで生まれた。家は父と母親、兄と2人の弟、妹の7人家族だった。北鶴橋小学校在学中の1961年11歳の時、5月に家族全員とともに北朝鮮に渡った。父の高太文は北朝鮮国内で柔道の指導者となり、同国の柔道の発展に力を尽くした。毎日新聞編集委員の鈴木琢磨は、『金正日と高英姫』のなかで「高英姫こそ高春行」と主張していたが、英起の新説が発表されると「特集ワイド:北朝鮮後継者・金正恩氏の母の軌跡朝鮮画報に定説覆す情報」(『毎日新聞』夕刊2011年6月23日号記事)のなかで「高ヨンジャこそ高英姫」だと自説を覆している。
[고영희(英姫)의 본명은 고춘행(高春行, Ko Ch'unhaeng / Go Chunhaeng)으로 1950년 3월 11일 출생이다
본관(本貫)은 제주 고씨(済州高氏)라고 한 설로 일본에서는 종전 정설(従来定説)이었다
그러나 데일리 NK의 고영기는 춘행의 생년월일(1950년 3월 11일)이 영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일본의 공식 자료에서 밝혔다.
또한 춘행(春行)이 동일한 귀국자 남성과 결혼하여 2명의 자녀가 있는 기사가 북한 공식 매체에 두 차례에 걸쳐 게재 되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춘행(春行)와 영희(英姫)은 다른 사람임이 명확 해졌다.
춘행(春行, 하루유키)는 일본 오사카시(大阪市) 이쿠노구(生野区) 츠루하시(鶴橋)의 코리아 타운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2 명의 남동생, 여동생의 7 명의 가족이었다. 북쪽 츠루하시 초등학교 재학 중인 1961년 11세 때 5월에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 갔다.
그녀의 부친인 고태문(高太文)은 북한 내에서 유도의 지도자가 되어 나라의 유도의 발전에 힘썼다.
마이니치신문 편집위원(毎日新聞編集委員) 스즈키 타쿠마는 "김정일과 고영희"속에서 "고영희이야 말로 고춘행"이라고 주장했지만, 고영 기의 학설이 발표되자 '특집 와이드 : 북한 후계자 김정은의 어머니의 궤적 조선 화보에 정설 뒤집는 정보 "( 「마이니치 신문」석간 2011년 6월 23일자 기사) 속에서 "고영자이야 말로 고영희 "이라고 자설(自説)을 뒤엎고 있다 .]
a.家族構成[가족구성]
父: 高太文(コ・テムン) - 柔道家、プロレスラー[아버지: 고태문 - 유도가, 프로 레슬러]
母: ? 兄: 高勝恩(コ・スンオン) - 北朝鮮国家体育委員会柔道指導員[어머니:? 형 고승은-북한 국가체육위원회 유도지도원]
弟: 高勝方(コ・スンバン) - 平壌演劇映画大学映画技術教員[동생 고승방-평양연극영화대학 영화기술교원]
弟: 高勝海(コ・スンヘ)[동생:고승해]
妹: 高淑煕(コ・スクヒ)[여동생:고숙희]
b.父・大同山[부친 대동산]
春行の父、高太文(コ・テムン、朝: 고태문、Ko T'aemun / Go Taemun)は、1920年1月10日生まれの柔道家(講道館六段とされる)で、後に大阪でプロレスラーとなった。日本通名で高山州弘、リングネームは大同山又道と言った。日本のプロレス草創期、1956年(昭和31年)2月に新団体「東亜プロレスリング協会」を旗揚げしたことでプロレス史に名を残した。
大同山は当初より朝鮮民族であることを自ら誇っていた[注 2]。しかし、日本タイトルを賭けて行われた同年10月15日から10月24日のウエート別統一日本選手権大会において芳しい成績を収められなかった[20]。この試合で戦績を残せたのは力道山率いる日本プロレスだけで、敗退した他団体(東亜プロレス含む)は翌年までに活動停止・消滅してしまう。彼は自団体と命運を共にし、プロレスそのものから廃業した。
[고춘행의 부친인 고태문(高太文, Ko T'aemun / Go Taemun)은 1920년 1월 10일 태생의 유도가(柔道家, 유도 6단)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프로 레슬러 선수가 되었다.
일본 통명(通名)으로 高山州弘(다카야마 주 히로시), 링 네임은 대동산(大同山) 또는 도(道)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프로 레슬링 초창기 1956년(쇼와 31년) 2월에 새로운 단체 "동아 프로레슬링 협회 '를 출범함으로써 프로 레슬링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동산(大同山)은 당초부터 조선 민족임을 스스로 자랑했다
그러나 일본 타이틀을 걸고 진행된 같은 해 10월 15일부터 10월 24일의 비중 다른 통일 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향기로운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이 경기에서 전적을 남길 것은 역도산이 이끄는 일본 프로 레슬링만으로 탈락한 다른 단체(동아 레슬링 포함)은 다음 해까지 활동 정지, 소멸해 버린다. 그는 자기 단체와 운명을 함께하고 프로 레슬링 자체에서 폐업했다.]
3.その他[기타]
英姫を指す花としてクロフネツツジが使われている。金正恩の母親として偶像化を図る際にも使われている。[21]
藤本健二が北朝鮮から脱出する際、便宜を図ったとされる。2012年6月30日放送のJNN系の報道番組『報道特集』で、英姫の肉声が流れた際、藤本が涙ながらに証言している。
[영희를 가리키는 꽃으로 철쭉이 사용되고 있다. 김정은의 어머니로 우상화를 도모 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후지모토 겐지가 북한에서 탈출 할 때 편의를 도모했다고 한다. 2012년 6월 30일 방송 JNN 계열의 보도 프로그램 '보도 특집'에서 영희(英姫)의 육성이 흘러 나왔을 때 후지모토가 눈물로 증언하고 있다]
生誕:1952年6月26日
死没:2004年8月13日(52歳没)
政党:朝鮮労働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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