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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두령) 위한 생명 북한의 최고 지도자들의 경비 방법은? 본문
12만명의 경호원, 비밀 전차중대, 4층의 경비대에 선발된 보디 가드. 북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스스로의 안전보장을 위해 사용 조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 유례없는 것 들이다. 하지만 김 왕조가 그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조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푸트니크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어떻게 경비하고 누가 언제 암살을 기도 할 수 있는지를 정리한다.
1.제국주의자들의 계략
미래의 위대한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은 권력에 붙은 초창기부터 스스로 목숨을 우려하는 필요가 있었다. 1946년 2월에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3 월 1일에는 암살이 기획 되었다. 젊은 지도자의 죽음은 확실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노뷔첸코 소위 의한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영웅 행위로 생명을 구했다.
김일성의 죽음을 바라는 것은 당시 적지 않아 해방 된 한반도에 대한 후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급진파 국수주의자와 적군(赤軍)의 원래 대령인 김일성이 활발하게 설립을 추진한 소비에트 정권의 적대자 등이다. 따라서 바로 김일성의 집은 기마대 순찰로 공적인 행사에서 보안조치가 강화 되었다. 일방적 조치 두 개 습격으로 살아 남았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상의 김일성 씨 소련 병사의 '조선 해방'을 기리는 표창 행사
축하행사 중 미국이 고용한 조선의 통역인이 김일성을 총격을 했지만 경비 대대 군인이 김일성에게 가한 총알이 자신의 신체에서 막은 덕분에 생명이 살아 남았다. 2번째의 기획은 칼에 의한 것이다 습격자는 신속하게 눌려했지만 자백 방지에 독이 든 캡슐을 깨물어 바수어 했다.
1948 년, 경비 대대를 가진 북한 인민군이 창설. 같은 해에 북한이 건국 될 때 소련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 근교에서 소련군 제88 독립 저격여단에서 복무하던 시절부터 통찰력 있는 일부 병사는 경비로 남게 부탁하지만, 1949년까지 모두 철수. 안전 문제는 더 이상 김일성 스스로가 해결해야 했다
소련군 부대는 1948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철수 1948년 9월 9일 김일성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북한)의 수립 선언
2.적대적 요소
김일성은 친위대 대장에게 가장 친하게 신뢰할 수있는 친구만 배치했다. 이후 경비부대 편성의 첫 번째 작은 부대는 1945년 10월 김일성의 한반도 귀환 직후 창설 되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난 한국 전쟁과 소련의 스탈린 비판 후 김일성에게 새로운 적이 내부에서 적이 등장했다. 소련 공산당이나 중국 공산당, 남로당(조선 공산당) 계열 노동당 내부 반김일성세력 당원의 대부분이 김일성의 실각을 노렸다. 김일성은 결국이기는 하지만 신생아 단일 권력 체제를 향한 위협을 느끼고 경비 담당 인원과 기능을 크게 확대하고 조직은 1958년 소련군 제88 독립 저격여단(빨치산) 출신의 충실한 간부에 맡긴다
3.'후계자'작전
북한 간부의 안보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최종 결정된 이후이다. 1977년 김정일에 보안이 맞춰져 이듬해에는 300명으로 구성된 개인 친위대가 형성 되었다.
친위대의 선발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신체적 지구력과 심리적 특성 검사 외에 중앙위원회의 책임자는 후보자와 네 사촌 자매에 이르기까지의 친족 전원의 정치적 충성도를 평가했다. 그 후, 17 세의 병사들은 6개월에 걸쳐 이데올로기 교육, 태권도와 사격, 보안 기술을 배운 후 마침내 김정일의 경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일이 1982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거명 된 때 김정일의 집과 집무실뿐만 아니라 김정일이 다양한 계절에 빠르게 찾는 것을 좋아했다 14호 무슨 별장의 보안도 필요하기 때문에 경비는 1500명으로 증강 되었다.
당 지도부의 보안 개념은 그때 전 평양으로 확대하고 평양에 입역(入域) 다른 경비 부대가 관리하게 되었다. 특수 방어 부대는 미국의 침입이나 폭동이나 쿠데타 때 평양을 경비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4.철(鐵)의 장군
1989년 루마니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당시의 대통령에 김일성의 구면의 사이였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총살형에 처해 1991 년 당시 에티오피아 대통령 멩기 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장군들 배신 당해 망명된다. 그 중 많은 장군은 북한에서 교육을 받았다.
북한은 이에 신속하게 결론 지었다. 사상 통제와 친위대의 여덟 사촌 자매에게까지 이르는 친척과 어린이의 정치적 충성에 대한 요구를 강화됐다. 군사 쿠데타 방지를 목적으로하는 특수 부대의 수가 증가하고 김씨 일가(김일성, 김정일등)의 개인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대원은 총 6 만 ~ 7 만 명에 달했다. 총국(總局)은 한편 통일 호위 부대로 변성 된 평양의 상층부와 지도자의 식사에 사용되는 재료를 재배하는 농업 조합의 경비를 전체 인원 관리하에 두었다.
평양공항 의장병 중대
5.아버지의 유언에 근거
한편 북한 지도부의 경비가 처음 사회의 주목을 받은 것은 김정일이 2001년과 2002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였다.
김정일의 호위는 많지 않고 약 25명이었으나 러시아 측이 취한 보안 대책은 여러면에서 매우 놀랍거나 새로운 형태이었다. 평양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이르기 전 철도 부지를 특별 관리하에 보험을 위한 부스터 기관차가 전투 차량을 선행하고 정차역은 사전에 모든 안전 확인 된 시내에서는 자국의 경비를 데리고 북한 측이 가져온 장갑 메르세데스로 이동했다. 마찬가지로 방문은 2011년에 조직 되었다. 그 때에도 미디어에 대한 사전 공지는 없었다.
2011년 8월 24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가 국방위원회 의장 김정일 씨 (중앙)가 차에서 내려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면회를가는 러시아 부랴 트 공화국 군 주둔 지역 "소스노뷔 공" 에서.
김정일의 여러 경비병의 증언에 따르면, 이 조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2000년대 초반까지 최고 지도자가 참석 행사 개최지는 5,6개의 폭발물이 발견 연속 발견 된 것이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도 사태는 쉽게 되지 않았다. 김정은의 상속 후 호위 사령부 군인 사상 최대 12만 명으로 증가. 한편, 암살은 더욱 정교한 수법으로 기도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 의한 김정은 등 북한 지도부의 암살 작전을 담당하는 특수 부대 창설하는 최신의 계획을 받아 김정은은 전 KGB 직원을 경비에 동원하려고 조차 시도하고 있으며 친위대 수를 3,5 천명에서 1만 5천 명으로 증가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도와던 것 같이 새로운 지도자의 도움이 될지는 시간이다.
국가지도자의 암살은 권력 내부로 등장해왔다
주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빈곤)해지고 민심 이반이 일어날 때 권력내부로 등장해왔다
국민들 중 80%이상 세력이 반정부 성향일때는 암살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다
다수 국민들이 최고지도자 암살도 애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연합군(유엔 안보리)의 국가지도자의 암살은 전쟁을 예방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전쟁보다는 지도자 암살로 평화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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