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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군축선언 본문
1984년 11월 1일 중앙군사위 좌담회에서 군사위 주석 덩샤오핑(鄧小平)은 폭탄 선언을 한다.
대규모 감군의사를 밝힌 것이다.
덩샤오핑은 그 자리에서 “군을 감축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나는 죄를 짓겠다. 모순을 다음 군사위 주석에게 물려 줄 수 없다”고 비장한 어조로 결의를 밝혔다.
덩샤오핑의 이 결단은 그가 정치 일생 중 내린 여러 결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오늘의 중국이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이 미국과 군비경쟁을 벌이다 거덜이 나고 결국은 체제 붕괴로 이어진 것을 상기하면 인력과 에너지를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이 결단은 공산중국을 구하고 오늘날의 경제대국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덩샤오핑은 미국과의 접근을 강화하여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상쇄시키는 ‘이미제소(以美制蘇)’의 틀을 구축하여 자체 안보 수요를 던 뒤 방대하고 비효율적인 인민해방군 규모와 조직에 메스를 가함으로써 중국의 자원과 역량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덩샤오핑의 군 감축 결단은 소련이 군 확장의 고삐를 잡는데 실기함으로써 체제가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체제의 명운을 가른 선택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이날 좌담회에서 군대의 공작은 국가건설의 대국(大局)에 복종하여야 하며 국가가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 예로 공군은 민항발전을 지원하여야 하고 해군은 항구의 화물처리량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국판 선군정치’는 김정일의 선군정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85년 6월 중국 정부는 정식으로 100만 명의 감군을 선언했다. 이 수자는 당시 중국 군대 인원 수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인원감축과 함께 11개 대군구가 7대 군구로 개편되었다.이전 의 감군과 이번 감군은 내부 구조개혁에도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인원 감축에 그쳤던 이전 방식과도 달랐다.
육군에서 군 1급 부대가 합성집단군(合成集團軍)으로 전환되었고 특수병종(兵種)의 병력이 사상 처음으로 보병의 수를 넘어섰다.
중국의 군축은 국제 군축회의의 합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국 단독으로 행한 것이다. 감군 후 중국은 군 현대화 작업을 가속화하였고 새로운 병종(兵種)을 창설하고 병종 간 협동 작전능력을 강화하는 등, 군의 현대화 정규화를 가속화 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 감축 연혁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이 2003년 9월 1일 2005년까지 20만 명을 추가로 감축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인민해방군은 공산정권 수립 이후 10번째의 병력 개편을 실시하게 되었다.
다음은 신화통신이 보도한 9차례 병력 개편 연혁이다.
1차 개편
1950년 6월 전군참모회의가 마련한 개편방안은 총병력을 400만으로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우선 당해연도에 23만 9,000명을 감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당시 인민해방군의 총병력은 55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감축 계획은 한국전쟁 발발로 중단되었고 오히려 병력 수가 늘어났다. 1951년 말 현재 총병력은 627만 명까지 늘어났으며 이는 중국군 역사상 최대 병력 수였다.
2차 개편
1951년 11월 중앙군사위는 군개편회의를 개최하고 1954년까지 전군 총병력을 300만 명 내외로 줄이기로 결정했다. 1952년 1월 마오쩌둥(毛澤東)은 ‘군사감축계획(軍事整編計劃)’을 승인, 총병력을 300만 명 내외로까지 줄인다는 방침을 확정지었다.
3차 개편
1953년 9월 말 현재 전군 병력은 420만 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이해 12월 전국 군사계통 당 고급간부회의는 전군을 350만 명으로 재편하기로 결정하였다. 1954년 6월 말까지 47만 2,000명을 줄였고 연말까지 기본 계획을 완성시켰다.
4차 개편
1957년 1월 중앙군사위 확대회의는 ‘군병력 수량감축과 질량제고에 관한 결정(關于裁減軍隊數量加强質量的 決定)’을 통과시키고 전군 총병력의 3분의 1을 줄이기로 결정하였다.
구체적으로 3년 내에 130만 명을 감축, 전군을 250만 내외로 한다는 것이었다(1959년 펑더화이(彭德懷)의 실각 등으로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5차 개편
1975년 6월 24일부터 7월 5일까지 개최된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서 3년내에 병력 60만 명을 감축하기로 결정. 1976년에 1975년 병력의 13.6%를 감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4인방의 방해로 이 개편계획은 제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6,7,8차 개편계획
1980년 3월 중앙군사위는 주로 기구개편에 중점을 둔 개편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비전투 인원을 줄이고 예비부대, 부분(部分)부대의 축소, 그리고 일부 부대의 지방 이전이 이루어졌다. 이해 8월 15일 중공 중앙은 중앙군사위의 ‘군대 감축개편에 관한 방안’을 비준하였다.
1985년 5월말에서 6월초 사이에 열린 중앙군사위 회의에서 군병력을 100만 명 감축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같은 감축은 1987년까지 대체적으로 완료되었다.
9차 개편
1997년 9월 장쩌민 총서기가 15차 전당대회(15대) 보고에서 1980년 100만 명을 감축한 기초 위에 3년 내에 50만을 추가로 감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1999년 말에 50만 감축이 이루어졌다. 20여만 명이 퇴역하여 지방공작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역대 군 개편 중 가장 많은 간부급이 감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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