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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파나마 전 독재자 노리에가 사망 본문

중앙 아메리카 지역/파나마

파나마 전 독재자 노리에가 사망

CIA bear 허관(許灌) 2017. 6. 1. 17:52

 

지난 1989년 8월 파나마 대통령궁에서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후안 카를로스 노리에가 전 대통령. 뇌종양 수술 후 회복 중이던 지난 29일 사망했다.

파나마의 전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가 83세를 일기로 어제(29일) 사망했습니다.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파나마 대통령은 인터넷 사회연결망 서비스 ‘트위터’에, 노리에가의 죽음은 파나마 역사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노리에가는 1983년부터 89년까지 집권기간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반대파들을 살해한 혐의로 투옥돼 있던 중 올해 초 뇌종양 제거 수술을 위해 풀려나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뒤 병원에서 몇 차례 수술을 받은 뒤 회복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었습니다.

노리에가는 지난 1989년 미국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축출됐으며 마약 혐의로 미국에 수감돼 있었습니다.

그는 또 돈세탁 혐의로 프랑스에서도 투옥됐었고, 지난 2011년 파나마로 추방된 뒤에도 계속 수감돼 있었습니다.

VOA 뉴스

 

*후안 카를로스 노리에가 전 대통령

1.생애

콜롬비아계 파나마 시 빈민가정에서 태어나 파나마의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장학생 자격으로 페루 리마에 있는 코리오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67년 미군 기지 포트 굴리크의 미군미주학교에서 첩보와 도청 훈련을 받았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포트 브래그에서 심리전 훈련을 받았다. 1967년에 파나마 방위군에 임명되었으며, 1968년에 중위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 중위로 콜론에서 복무했고 이즈음 오마르 토리호스  대령과 친분을 맺었다.

대위가 된 노리에가는 아르눌포 아리아스정부 전복 쿠데타와 토리호스의 제거를 위한 쿠데타에서 일익을 담당했고 충성심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했다. 군정보부 부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쿠바의 하바나로부터 미국 화물선 승무원을 구조하는 등 미국 정보기관과 접촉하며 닉슨 행정부에 협력했다. 닉슨 행정부와 노리에가의 관계는 마약밀매를 둘러싸고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총수였던 노리에가는 야당과 정적들에 대한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고 파나마 국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981년 토리호스가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군부와 민간에서는 격심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1983년 노리에가는 국방경비대를 방위군으로 통합시키고 스스로 장성급인 군사령관에 올랐다[1983년 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대 중반 노리에가는 정적인 우고 스파다포라를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물의를 빚었다. 마약밀매금의 세탁과 미국의 첨단기술 및 첩보를 공산권에 팔아넘긴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으며 특히, 파나마 운하조약에 따른 조차지대의 반환에 즈음하여 노리에가와 미국 정부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9년의 반노리에가 군사쿠데타가 무위로 끝난 뒤, 미국 정부는 이른바 '저스트 코즈'(Just Cause) 작전을 개시했고 마침내 1990년 1월 3일 노리에가의 생포에 성공하여 자국 관할하의 재판에 회부했다. 노리에가 자신은 파나마로 돌아가 재판받을 것을 희망했으나, 파나마 정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1992년 7월 미국 법원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2.미국 파나마 침공과 재판

1989년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하였을 때 노리에가는 바티칸 대사관으로 피신했지만 미군은 대사관 주변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큰 소리로 음악을 틀었다. 노리에가는 열흘만에 항복했고 미군에게 생포되어 미국으로 압송되었다. 미국에서 마약 밀매, 공갈, 돈세탁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20년간 복역했다. 2007년 석방될 예정이었으나 프랑스의 범죄인인도 요청으로 미국을 나가지 못했다. 프랑스는 그의 돈세탁 건에 대해 궐석재판을 통하여 이미 유죄판결을 내렸고, 2010년 4월 26일 노리에가는 불법 자금 세탁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이송되었으며, 7월에 열린 재판 결과 돈세탁 혐의로 7년형을 언도받았다. 2011년 10월 23일 프랑스 항소법원의 본국 송환 결정으로 11월 12일 22년 만에 파나마로 송환되었다. 노리에가는 파나마시티 인근 공항에 도착한 뒤 헬기를 타고 파나마시티에서 25 km 떨어진 엘레나세르 교도소로 향했다. 이듬해인 2012년 2월, 고혈압과 뇌졸중 증세를 보여 산토 토마스 병원으로 옮겼다

 

                                                                                           항복 후 노리에가의 상반신 사진

*파나마

1501년 에스파냐인이 도착했을 때 75만 명의 인디언이 파나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탈·질병·살인 등으로 전체 인디언의 1/10이 죽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1514년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일명 페드라리아스)가 발보아를 물리쳤다. 1519년 페드라리아스는 파나마시티를 세우고 태평양 쪽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파나마는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에 물건을 옮기는 수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1748년까지 포르토벨로에서 열렸던 무역박람회에서는 1688년까지 파나마 해안을 약탈했던 영국 해적선이 관심을 끌었다. 1751년 파나마는 콜롬비아 산타페데보고타의 속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과 왕당파군을 격퇴한 후, 파나마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발적으로 콜롬비아 동맹과 결합했다. 1830년대에 콜롬비아에서 이탈하려고 3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파나마는 번영을 누렸다. 많은 탐광자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험한 미국 철도 대신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파나마 노정을 택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건설된 파나마 철도가 1855년 개통되었으며, 곧바로 콜론이라는 도시가 세워졌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경영하는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정부로부터 얻어냈으나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로 인해 1903년 11월 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파나마는 콜롬비아에서 분리된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파나마는 혼란에 빠졌다.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며 반미감정이 퍼져나갔다.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토리호스 에레라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는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으로 파나마가 예전의 미국 운하지대에 대한 사법권을 맡게 되었으나, 운하 자체의 운영권은 1999년까지 미국에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파나마 정부로 이양된 상태이다. 20세기말 경제침체와 심각한 정치변동은 1989년 12월 그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파나마를 침공하여 국방부 총사령관이자 파나마의 실권자인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을 물러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