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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북한 군부 교류 활발 본문
11月24日,正在北韓訪問的中國國務委員兼國防部長梁光烈上將(左五)在平壤與北韓人民武力部部長金永春次帥(右六)
한국전쟁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후 중국 인민군 출신 조선 의용대 주도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중국 공산혁명이후 한반도 전쟁등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무장활동 투쟁으로 죽었습니다 중국과 북한 정부 내부 모택동, 김일성사상 공산주의 이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확대를 추진할때 동북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또 다시 중국내전이 될 것입니다 중국정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하나의 중국 통일정부 수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과 북한 군부 고위 인사들의 교류가 최근 들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인 군 총정치국 김정각 제1부국장이 지난 17일 베이징을 방문한 데 이어 22일에는 중국의 량광례 국방부장이 북한을 찾아 두 나라 군대의 혈맹관계를 새삼 강조했습니다.
특히 량 부장의 방북은 국방부장으로선 지난 2006년 4월 차오강촨 부장의 방북 이후 3년7개월 만의 일입니다.
23일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량광례 부장은 22일 북한 인민무력부가 주최한 연회 연설에서 “중국과 조선 두 나라 군대와 인민의 단결된 힘은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고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영춘 북한 인민무력부장도 “역사의 온갖 풍파를 이겨낸 조-중 친선을 변함없이 공고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조선 군대와 인민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연회에 앞서 량 부장과 김 부장이 동지적이고 친선적인 분위기 속에서 담화를 했다고 전했으나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지난 17일 베이징을 방문한 김정각 제1부국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과 쉬차이허우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만났습니다.
쉬차이허우 부주석은 김 부국장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조선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정세 하에서 두 나라와 군대 사이의 친선협조 관계를 좀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지난 3일엔 중국 공군 창설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김광수 공군 부사령관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공군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었습니다.
이처럼 두 나라 군부가 친선 관계의 강화를 새삼 강조하고 나선 데 대해 한국 내 북-중 관계 전문가들은 최근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두 나라 간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관측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특히 임박한 미-북 양자 접촉이 교착상태에 빠진 북 핵 협상에 새로운 계기가 될 지 주목되고 있는 시점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외교안보연구원 김흥규 교수는 북한이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강경한 태도에 대한 대응과 미국을 설득하는 지렛대로 활용하기 위해 중국 군부와의 우의를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북한이 의지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여전히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중국과의 그 우의를 과시하는 게 북한으로서 상당히 중요하고, 또 하나의 목적은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북한에 의지를 관철시키는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중국 군부가 북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동안 중국이 북 핵 문제를 둘러싸고 보여왔던 대북 접근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한국 국방연구원 백승주 박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에 참여한 뒤 북한에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정치, 군사적 신뢰도 회복하는 이 같은 수순은 중국의 전형적인 대북 외교 행태였다고 설명합니다.
“일단은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국가로 중국이 보여주기 위해서 안보리 결의안에 참석하고 나서 그 다음에 또 경제 지원을 약속해서 관계를 좀 회복하고, 또 정치군사적인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또 중국이 전체 동북아의 6자회담 재개하는데 무슨 역할도 하고 이런 중국 외교의 대북관계 과시 정책의 하나로 볼 수 있죠.”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지난 10월 조-중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북한을 방문했던 것도 이런 흐름의 일부라고 백 박사는 덧붙였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이 두 나라 군부의 혈맹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북한 정권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행동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외교안보연구원 김흥규 교수는 중국이 앞으로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 군부의 유력한 차세대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중국이 지금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이 북한 차세대인데 아마 차세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그룹이 군부가 아닐까,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김정각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지금 좀 불러야 될 필요성을 좀 느낀 것 같아요. 그래서 정권의 전환 과정 속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보기 위해서 지금 또 부른 것 같구요.”
김 교수는 이런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북한과 중국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습니다.
中朝 국방부장 회담
조선에 대한 공식친선방문중인 량광렬(梁光烈) 중국국무위원 겸 국방부장이 24일 오후 평양에서 조선인민무력부 김영춘 부장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서 쌍방은 국제 및 지역 정세, 양국 양군관계와 기타 공동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둘러싸고 견해를 나누었습니다.
량광렬 부장은 중조 양군관계는 양국관계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정세에서 중국측은 조선측과 함께 양군내왕을 더 한층 밀접히 하고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 중조 선린친선협력관계가 깊이있게 발전하도록 추동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량광렬 부장은 또한 조선반도 관련 문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원칙과 입장을 재천명하면서 중국측은 조선측과 함께 지역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할 용의가 있다고 표시했습니다.
김영춘 부장은 조중친선협력관계는 새로운 역사시기에 공고화 되고 발전했다고 표시했습니다. 그는 조선측은 중국측과 함께 조중 양국, 양군의 친선협력관계가 부단히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하도록 공동으로 노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http://korean.cri.cn/1660/2009/11/24/1s153099.htm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 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습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습니다
-남침주도세력: NLPDR( 남북한 공산주의자-조선공산당 주도). 조선의용대(중국 인민군 출신-중국 공산혁명에 가담한 한국인)
*매클린 - 영국태생의 자국의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소련에 정보를 넘김.
6.25때 트루만 정부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중공이 참전하더라도 중국본토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소련에 넘겼고 이에 중공은 안심하고 한국전에 참전 할 수 있었다.
트루만이 유럽에 핵무기를 배치했다고 큰소리 쳤지만 사실은 뻥이고
재래식 무기라는 정보를 스탈린에게 전달 이에 스탈린은 마음놓고 동유럽 지역을 공산화시킴
북한,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59주년 성대하게 기념
북한의 당과 정부, 군의 지도자들은 25일 평양 중조우의탑에서 의식을 가지고 중국인민지원군 한국전쟁 참전 59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습니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인민무력부, 외무성, 조중우호협회 등 부문과 기구들이 우의탑에 화환을 진정했습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양형섭 부위원장, 최창식 보건상 겸 조중우호협회 위원장 등 북한의 관련부문 지도자들과 수백명의 평양시민들이 의식에 참가했습니다.
류효명 조선 주재 중국대사와 대사관 관원들도 기념식에 참가했고 화환을 진정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은 25일 각각 글을 발표해 중국인민지원군 한국전쟁 참전 59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글은 북한 인민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위대한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표시했습니다
10月25日,北韓各界群眾向平壤兄弟山中國人民志願軍烈士墓獻花
圖為溫家寶在毛澤東主席長子毛岸英墓前憑吊(온가보총리 모택동주석 장남 모안영 묘 앞에서 참배)
북한을 공식친선 방문 중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국무원총리인 온가보가 대표단의 성원들과 북한 주재 중국 대사관 직원 등 도합 300여명과 함께 회창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릉원에 가서 화환을 진정했습니다.
회창군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북한의 복지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세기 50년대초 항미원조(한반도 내전개입) 전쟁시기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부가 있던 지역입니다.
전쟁 후 북한정부는 회창에 열사릉원을 건설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을 포함한 지원군 열사 134명을 안치했습니다.
지원군릉은 뭇산의 푸른 빛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온가보 총리는 북한방문단 전체 성원들을 인솔해 지원군 열사릉원에 화환을 진정했으며 숙연히 묵도했습니다.
온가보총리는 또 모안영열사의 묘앞에 꽃다발을 진정했습니다.
회창에서 온가보총리일행은 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유적지를 참관하고 방문록에 "중국인민지원군의 불멸의 공훈과 위대한 정신은 해와 달과 함께 빛나리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북한정부의 고위관원들이 온가보총리와 동행했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 군인출신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중심의 반일연합전선 군대조직이었다
2005년 3월 저녁 북한주재 러시아대사관 방문과 러시아전쟁 60돌 기념메달 받아
러시아 2차대전 승전 기념메달, 왜 각국 정상 중 김정일만 받았을까? 정답: 김일성을 소련군 참전용사로 규정 아들에 수여
제2차세계대전 승전기념 메달은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제작됐다 러시아와 당시 동맹국 국민 중 생존한 참전용사 및 그 후손이 수여 대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아버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2차대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주석은 한인과 중국인, 만주인(여진족)으로 구성된 극동의 소련군 88특별여단의 제1교도영(대대)장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으나 일본이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정작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88여단 인사들은 광복 후 북한에 25만명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88여단 출신의 중국인 생존자 27명과 몇몇 북한인사들도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로 만들어진 지름 32mm의 이 메달에는 승리라는 단어와 <1941-1945>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10만여 개가 제작됐으며 제작 단가는 20달러(한국 돈 약 2만원)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로당(북조선노동당, 北朝鮮勞動黨)
북로당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밀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의거,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모체로 하고 있다
같은 해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을 중심으로 지식층, 소시민층을 망라하고 있던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였다 합당선언에서 북조선 노동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중적 정당을 세울 필요에 의해서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통신기관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지급등을 내걸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김두봉(부산출신이며 독립동맹주석 출신), 부위원장에 김일성(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 허가이(모스크바대학출신이며 소련공산당 간부 출신)가 선출되었다
북로당은 1948년 8월 정권수립을 위해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권수립(1948년 9월 9일)이후인 194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평양에서 비공개로 열린 남북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1국1당 원칙에 따라 현재의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ㄱ)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A.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B.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C.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D.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E.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D.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E.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ㄴ)연안파---모택동부대(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A.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B.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C.김무정(무정)----함북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D.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을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의용대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남침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었다
(ㄷ)소련파----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사진인물, 김일성. 김책)과 소련공산당 출신(사진 인물, 허가이)
A.소련지역에서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정부에 참여한 인사들
B.분류
소련군 정찰국이나 대일참전부대---김일성. 김책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
기술자---공군이나 해군등 기술진이나 북한정부 행정요원으로 귀순
당과 행정. 외교관료---허가이등
허가이는 소련정치담당 고문으로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로당과 북로당 합당을 총지휘했으며 허가이는 남로당 박헌영 보증인으로 한국전쟁이후 남로당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과 무장봉기 시도를 하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박헌영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ㄹ)조선공산당-----북조선공산당 출신(사진인물,주영하)
주영하등은 김용범이나 현준혁등과 다르게 김일성을 지원했다
미국과 중국 수교 이후 중국을 방문한 닉슨대통령과 모택동 주석--반미노선 포기
*린뱌오사건(林彪事件, 임표사건)
중국 공산당 수립 이래 중국 최대의 정치사건이 린뱌오사건이다
린뱌오(임표)는 문화대혁명때 마오쩌둥사상을 절대화하고 인민해방군을 지휘하여 마오쩌둥을 도왔다
그 공으로 중국 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자대회(1969년)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971년 9월 12일 마오쩌둥이 항조우(杭州)로부터 열차를 타고 상하이(上海)에 가려고 했을때 린뱌오(林彪)가 열차폭파를 기도했다
그러나 린뱌오의 딸 린더우더우(林豆豆)가 이를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고함으로써 마오쩌둥은 비행기로 베이징(북경)에 돌아갔다
그날 오후 린뱌오는 암살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베이다이허(北載河)까지 달아난 후 트라이던트 비행기를 타고 소련에 망명하려 했지만 다음날 아침 몽고 영내에서 추락사 했다
이 사건을 1973년 중국 공산당 제10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통하여 발표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린뱌오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70년 8월 제9기 중앙위원회 제1차 총회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미수에 그쳤다 이어 1971년 3월 반혁명 무장쿠데타계획인 <571 공정기요(工程紀要)>를 입안하였고 1971년 9월 8일 반혁명 무장쿠데타를 일으켜 주석 마오쩌둥을 모살(謀殺)하고 별도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음모가 실패로 끝난 후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몰래 비행기를 타고 소련수정주의 진영으로 도피 당과 나라를 배반하려다가 몽골의 운데르한에서 추락해 죽었다 <571공정기요(工程紀要>는 571(우치이)는 무장봉기를 뜻하는 우치이(武起義)의 발음을 빗댄 말이며 유포되어 있는 기요(紀要)에 의하면 마오쩌둥을 현대의 진시항제라 하여 그를 타도하여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린뱌오사건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공산주의 친소 임표진영과 실용주의 친미 친서방 주은래 진영의 투쟁에서 미국과 중국수교 그룹인 실용주의자 주은래진영의 승리로 내다보고 있다
임표는 후베이성(湖北省) 황강(黃崗)출생으로 1926년 황푸군관학교(黃織軍官學敎)를 졸업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조선의용대 김무정등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다
임표는 1927년 국공분열 후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으며 주덕(朱德)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게릴라활동, 1934-1935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 하였다
1936년 항일군정대학 교장. 1937년 팔로군 115사단장. 1947년 8월 만주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기를 접수하고 동북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으며 동북성사령관으로 만주를 장악하였다 린뱌오는 만주를 장악과 일본군 무기로 중국 전체지역를 점령할 수 있는 군비토대를 마련했고 팔로군 부대로 중국내전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 하였다
린뱌오는 1967년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오쩌둥 강청과 결합 미국과 중국수교세력이며 실용주의자 주은래,등소평 세력을 제압하고 군의 힘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하였고 1969년 중국 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하려다가 주은래 등소평등 세력에게 제거되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등소평주석과 회담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공산주의 활동 포기 그리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 추진
*NLPDR과 전면전론자---김일성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과 전면론이란
김일성은 전쟁(무력)으로 부산과 제주도까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이 전면전론자들의 입장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 만주지역과 사할린 그리고 일본열도 북방섬 일부 점령
-소련군 극동사령부, 한반도 38도선 이북 북한지역 점령(20만 소련군 북한지역 배치)
-중국 공산화 그리고 소련군 극동사령부, 조선의용대 등 중국 공산화 참여
-1950년 전후 조선의용대와 소련군사령부 한인 출신 북한 인민군 창설에 참여
-만주 동북 3성 임표군대 김일성 남침 지원과 만주국 일본 관동군 탱크 지원
-1950년 6월 25일 김구 선생 1주기
그 날 남침 감행 독일 외무성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소련지도부는 1949년에 한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북한이 먼저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아 남침을 감행하면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1950년 1월 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은 김일성주석의 남침 지원 요청을 승인한다고 통보했다 두 지도자는 그해 4월 10일부터 25일 사이에 세 차례 회담을 가졌다
스탈린은 만약 미국이 병력을 개입시킨다면 소련은 북한을 직접 지원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김일성주석은 어쩔 수 없이 2005년 5월 13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 모택동(마오쩌둥)에게 남침계획을 설명했다
모택동(마오쩌둥)은 만약 미국 군대가 개입하면 중국이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러나 소련(소련군 극동사령부)의 지원을 바랐을 뿐 중국이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일본 관동군 무기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1)한반도 공산화 이후 일본 공산화 시도도 가능했는가 논쟁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일본열도 공격을 시도했는가 논쟁--소련은 2차대전때 사할린과 일본 북방섬 일부를 점령했다
(2)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사회당 정부는 북한정부를 지지했는가 논쟁
(3)미국 독자로 한국전쟁 개입을 했다면 북한 김일성부대 승리 할수 있었다는 자료 입장 그리고 유엔과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 남한정부 승리했다는 입장
(4)전면전 자료
ㄱ.낙동강 전선까지 점령한 부대는 만주지역 조선의용대와 소련군 극동사령부 조선인 출신 부대 간부들이었다 이들이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지역에서 빨치산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다(빨치산 부대 지휘관은 대부분이 북한 인민군 출신이었다)
ㄴ.미국등 유엔군의 투입으로 북한출신 인민군이 당황했다
ㄷ.전쟁 이후에도 공중과 해상은 미국이나 영국등 연합군이 장악함으로 육지에서 인민군 승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본 공산화에 대한 위기로 일본 전체 국민들의 항거도 대단했다
ㄹ.급진적 무상몰수 무상분배 공동토지경작방식 토지개혁과 신계급 등장 중농계급 토지를 몰수하거나 공동 분배 방식으로 전환함으로 소자본과 중농등 자산계급(토지 소유자)들의 항거가 심했고 이승만정부 권력기관 면단위 행정기관을 해체하고 인민위원회 권력등장 과정에 인민재판으로 무고한 주민들의 처형이 많아지면서 주민 항거가 일어났다
-북한정부의 약탈경제 전쟁방식(범죄) 전쟁물자를 어음이나 조세등의 명목으로 빼앗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 이 전쟁방식은 미국등 연합군과 정반대 모델이다 미국등은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등을 주민들에게 지원해주었고 전쟁물자를 자국이나 연합국에서 원조로 수행하지만 약탈전쟁 물자조달방식 인민전쟁은 현지 주민들에게는 큰 호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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