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족(侗族)은 현재 인구가 2,514,014인(人)에 달하며 주로 귀주, 호남, 광서 3개 성이 서로 접한 옥병(玉屛), 신황(新晃), 통도(通道), 지강(芷江) 및 삼강(三江) 등 현에 분포됐다.
언어와 문자 : 뚱어(漢藏語系 장동어족). 남북 두 개의 방언이 있고, 문자는 없어서 한문을 쓰고 있는데, 1958년에 라틴자모를 이용한 문자를 창제하였다. 뚱족은 원래 민족문자가 없던 때로부터 20세기 50년대에 ‘뚱문’을 만들어냈다. 현재 대부분 뚱족인이 한문을 통용하고 있다.
종 교 : 다신교, 조상숭배
기 타 : 송나라 때 중국으로 이주해와 처음에는 양자강 유역의 계곡에서 살다가 한족의 세력확장으로 남쪽으로 밀려나서 살게 되었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다이족의 일부분이다. 주택도 다이주와 같다. 뚱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데 벼 재배를 위주로 하며 특산이 찰벼이다. 소수인이 임업에 종사하며 양어장 경영자도 꽤 많다.
뚱족 거주지는 줄곧 "시와 노래의 해양'으로 불리우고 있다. 뚱족의 시가는 운률이 아름답고 제재가 다양해 문학과 음악분야에서 매우 진귀한 가치가 있다.
민족원류
; 동족의 총인구는 1990년 현재 2,514,014명으로 귀주성에 140여만 명, 호남성에 75만 명, 광서자치구에 30만 명, 그리고 호북성에 5만여 명이 분포해 있으며 청 광서 원년(淸光緖元年; 1875년) 귀주성 천주(天柱)에서 베트남 선광성(宣光省)으로 피난해 가 7대째 뿌리를 내리고 사는 동족도 있다. 그중 귀주성 치엔동남묘족동족자치주(黔東南苗族 族自治州)에는 106.4만 명이 살고 있어 가장 집중되어 있다. 귀주성의 치엔동남(黔東南)과 호남성은 이미 춘추전국시대(B.C.770ㅡB.C.221)부터 동족의 조상이 자리잡고 살아온 곳이다. 귀주성 동남부 묘령산맥의 주봉인 뢰공산(雷公山; 해발 2,179 m)을 중심으로 광활하게 골 깊은 산과 청수강(淸水江)과 도류강(都柳江)가에 분포해 있어 일부는 수상민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사상 동료(侗僚), 동만(侗蠻), 동정(侗丁), 동인(侗人), 동민(侗民), 동묘(侗苗), 만료(蠻僚), 동가(侗家), 동가묘(侗家苗), 동인(侗人), 계지민(溪之民)등 다양하게 불렸고 자칭 또한 “ Kaml ”, “ gan(干) ” 또는“ geng(更) ”등 여러 가지인데 백월족(百越族)의 낙월(駱越)계통으로 송나라시대에 이미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백월족(百越族)은 굉장히 광범위하게 나눠지는데 월(越), 낙월(駱越), 오월(吴越), 민월(闽越), 동월(東越), 양월(揚越), 산월(山越), 남월(南越), 서월(西越), 월상(越裳), 단국(弹國), 등월(騰越), 디엔월(甸越), 부어국( 國), 야랑(夜郎)등으로 백월(百越)은 양자강이남의 대부분의 소수민족을 이룬다. 진나라이후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왕조가 일어나 남쪽지역을 정벌해 일부는 한족과 융화하지만 일부는 3세기 초인 위, 진 시대에 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생활하게 된다.
동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어, 고대의 루어위에(駱越)가 발전해 내려온 토착민족이라고도 하고, 송대의 걸링( 伶; 또는 佶伶)에서 나누어졌다고도 한다. 《리핑후지(黎平府志)》에 의하면 명 홍무(洪武)때 쟝시성 지안후 타이허현(吉安府太和縣)의 3만여 명의 군민(軍民)이 광시자치구 우저우(梧州), 류저우(柳州)를 거쳐 귀주로 들어 와 주둔하면서 현지의 동족과 결혼하며 동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정호(洞庭湖)의 평원지대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동고(銅鼓), 고루(鼓樓), 간란(干蘭)식 건축 양식, 단발문신(斷髮文身), 코로 음료수를 마시며,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등의 풍속이 고대의 위에인(越人), 료인(僚人)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광악(何光岳)의 《바이위에원류사(百越源流史)》에서는 하대(夏代) 이전에 칭하이성 따통(大通)하류 유역에 거주하던 링인(令人; 또는 令支)이 황허 하류로 내려와 대부분은 화샤족(華夏族)을 이루고, 일부가 남진해 후난, 꾸이저우, 광시 등지에서 동족을 형성했다고 하나 아직 정론은 없다.
언어와 어법에 있어서도 쭈앙족(壯族), 부이족(布依族), 따이족(傣族), 리족(黎族)등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살아오는 등 모두 형제의 민족이다.
언어
; 동어는 한 장어계 장동어족 동수어지(漢藏語係壯侗語族侗水語支)에 속한다. 장동어(壯 語)의 어원은 고대월어(古代越語)로 요어(僚語)를 거쳐 현재의 동어로 이어져 왔다. 동족의 언어 사용현황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한어는 거의 못 알아듣고 자기 민족언어만 사용하는 부류인 대부분의 노인층과 부녀자그룹, 둘째는 동어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은 못하는 부류, 셋째는 지식수준이 높은 부류의 현상으로 한어와 동어를 동시에 잘 하는 부류, 넷째는 호남성 서남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 민족어인 동어를 전혀 못하고 한어만 하는 부류 등이다.
a, 남부방언(南部 方言)
(1) 第一 土語; 귀주성 룽쟝 장루화(榕江 章魯話), 진핑 치밍화(錦屛 啓蒙話; 이 곳을 경계로 남북방언이 나누어 짐), 리핑 홍저우화(黎平 洪州話). 호남성(湖南省) 통따오 룽청(通道 城). 광서(廣西)자치구 룽성 핑덩화(龍勝 平等話), 산쟝 두동화(三江 獨侗話? 또는 程陽話)
(2) 第二 土語; 귀주성 리핑 수이커우화(黎平 水口話), 총쟝 관동화(從江 貫洞話), 룽쟝 짜이하오화(榕江 寨蒿話). 광서자치구 산쟝 허리화(三江 和里話).
(3) 第三 土語; 귀주성 쩐위엔 빠오징화(鎭遠 報京話), 광서자치구 룽수이 짜이과이화(融水 寨壞話).
(4) 第四 土語; 광서자치구 룽수이 핀동화(融水 聘洞話).
* 일부 지역은 남북의 거리가 멀어 하나의 토어(土語)가 다른 지역의 토어로 분류해야 할 경우도 있다.
b, 북부방언(北部 方言)
(1) 第一 土語; 귀주성 티엔주 스동화(天柱 石洞話), 산수이 관창화(三穗 款場話), 지엔허 샤오광화(劍河 小廣話)
(2) 第二 土語; 귀주성 티엔주 주시화(天柱 注溪話), 호남성(湖南省) 신황 중짜이화(新晃 中寨話)
(3) 第三 土語; 귀주성 진핑 대동화(錦屛 大同話), 호남성 정쪼우 란니충화(靖州 爛泥衝話)
문자
; 문자가 문화의 교류와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건 당연한 사실일진데, 문자 없이 구전으로 오랜 동안 계승되어 왔기에 애석하게도 단절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1956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말까지 14개 현 19개 지점 1차 조사를 마치고 1957년 9월 귀양에서 동족언어문자 과학토론회 준비회의를 열어 동족문자방안을 결정한 후 1958년 8월18일부터 23일까지 본격적인 토론회를 거쳐서, 북부방언은 각 지역 간의 어휘사이에 20%이상의 차이가 있으나 남부방언은 각 지역 간 방언사이에 불과 7%의 차이가 있고 남부지역이 북부지역보다 인구가 1.6배나 많아 보편성을 최대한 감안한 결과, 동어(侗語)남부방언인 귀주성 룽쟝현(榕江縣) 차강화(車江話)를 표준음으로 라틴문자를 사용해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 룽쟝현(榕江縣) 차강화(車江話)와 북부의 각 방언지역간에 통하지 않는 비율이 22.3% 이고 호남성 신황현(新晃縣)의 동족과는 27.9%의 차이를 나타내는 실정이다. 1981년 이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동어문 교사를 양성해 소위 쌍학(雙學)이라고 해 많은 지역에서 소학교를 필두로 한자와 겸용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문화 예술
a, 관(款)문화
; 동족사회 특유의 산물로 자칭 “ 합관(合款) ”이라고 했는데 후에 “ 동관(侗款) ”으로 부르게 되었다. “ 연합대관(聯合大款) ”,“ 합관 ”,“ 중관(中款) ”,“ 소관(小款) ”의 4등급으로 나뉘어 있는 동관은 봉건적 정치제도와 사회조직형태를 담은 법률적 성격을 띄운 일종의 관습법과 각종 규약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상숭배, 도덕규범, 생산 작업 활동할 때 지켜야 할 제반규칙 등을 명시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동안 발전을 거듭해 내용이 풍부하고 다양해져 정치, 군사, 역사, 문학예술등 각방면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관(款)은 법률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종합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관은 여러 방면에서 괄목할만한 공헌을 했는데 특히 정신문화의 가치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b, 고루(鼓樓)문화
; 지리환경과 교통여건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귀주, 광서, 호남 등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고 방언지역구분과 그 분포를 같이한다. 고루(鼓樓)는 동족 문화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통문화의 핵심이다. 산지에 걸 맞는 생활형태로서 마을마다 고루가 있어 고루와 더불어 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자칭 “ 고루 자녀 ”라고까지 말한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어 고루의 역사를 고증하기란 쉽지 않지만 당(唐)나라시대, 혹은 그 훨씬 이전인 원시시대부터 이미 고루가 동족이 모여 사는 곳에 건축되었다는 주장이다. 동족의 원시사회기간이 오랜 동안 지속되어 원시공동체가 소멸된 후에도 혈연, 지연중심의 모습이 남아 근대사회에까지 지속되어 왔다. 중원(中原)의 고루 건축이 최초로 이루어진 시기는 북조(北朝)시대의 북제(北齊; 561ㅡ578)로 남북조시대이후 중원의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 선진기술이 전해지고 동족이 이러한 기술을 받아 들여 새로운 기술을 창출해 동족의 고루를 건축해 냈다. 고루의 건축은 많은 인력, 물력, 재력을 필요로 하는데 당시와 같은 어려운 여건아래서는 원시공동체 형식의 단결이 없이는 불가능함이 아직까지 개인이 고루를 건축한 예가 없는 걸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원시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하면서 고루를 중심으로 조직이 이루어지고 관리되어 왔고, 마을을 이룰 때에는 먼저 고루를 건축할 정도로 마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족사회에서 오랜 동안 실행해온 “ 채로제(寨老制; 마을 원로들로 구성된 의결제도로 鄕老라고도 함) ”의 장소로 이용되어 관습법인 “ 동관(侗款) ”을 기본으로 씨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곳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거행하는 성대한 제사와 젊은이들의 “ duo ye(哆耶) ”, 즉 문예 오락활동 등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마을마다 가수가 있어 전래되는 모든 민요를 기억하여 노래를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내려오고 있다. 고루의 독특한 건축양식, 즉 고루평(鼓樓坪), 양정(凉亭), 회랑식풍우교(廊式風雨橋), 채문(寨門), 간란식거옥(干栏式居屋)등의 건축물은 조형물의 구조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극치를 이룬다. 층층이 예전의 고탑(古塔)같이 마을 중심에 둥글게 우산형으로 멀리 바라 볼 수 있게 17층의 20여 미터나 되는 고루를 건축하는데 자재는 모두 나무로 20ㅡ30년 이상된 직경 80cm정도의 큰 삼나무(杉木)를 엄격히 선별해 사용하는데 비, 바람 그리고 벌레에 손상된 것도 있으나 수백년 동안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삼나무를 사용하는 이유는 수많은 가지가 한 뿌리에서 곧고 크게 자라 사람도 이와 같이 곧고 바르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민족의 단결을 의미하는 뜻에서 길한 나무로 여기고 숭배하는 마음에서이다. 현존하는 고루 중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지우동고루군(九洞鼓樓群; 都柳江支流四寨河上遊), 치엔치고루군(千七鼓樓群; 四寨河 谷洞河岸), 얼치엔구고루군(二千九鼓樓群; 從江縣 丙妹鎭 里, 平豪溪流), 류동고루군(六洞鼓樓群; 從江縣 貫調區), 룽허고루군(融河鼓樓群; 從江縣 都柳江 南岸)등 대소 5개 고루군이 있고 화교(花橋)는 167개소가 있다. 그중 귀주성 총쟝현(從江縣)의 쩡충(增衝)고루를 소개하면 1672년(청강희11년)가을에 건축된 것으로 300여년 되었는데 탑 형태로 맨 위 부분은 두 개의 표주박모양이고 전체높이는 25m에 면적이 160평방m로, 안에는 네 개의 직경 0.8m짜리 기둥과 높이가 15m에, 기둥간격이 3.6m이다. 1978년과 1982년의 두 차례 수리 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밖에 리핑현(黎平縣)의 지핑화교(地坪花橋), 자오싱고루(肇興鼓樓), 지탕고루(紀堂鼓樓)도 중요문화재이다.
c, 문학
; 풍부하고 다양한 문학장르가 전해져 온다.
(1) 예(耶); 동족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일종의 종합문학형태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마다 매우 중요시하는 집단적인 가무형식, 즉“ duo ye(哆耶) ”가 되었다. 그 내용이 노동을 찬양하는 것, 인류의 기원을 노래하는 것, 부모를 칭송하는 것, 애정을 표현하는 것 등 다양해졌다.
(2) 레이(壘); 오랜 동안 전해 내려오는 길상(吉祥)의 언어가 되어 제사나 축원할 때에 암송하는 주문같은 것인데 시대상을 반영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한데 다분히 감성적이다.
(3) 누안(暖); 신화, 전설, 우화, 동화 등을 담고 있는데 산문체형식으로, 낭만주의 색채를 띄고서 동족 역사의 희로애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재치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전설로 전하고 순결과 애정을 그리는 내용의 신화나 조상들이 대자연과 싸우며 살아온 이야기를 담기도 한다.
(4) 쥔(君); 원나라이후에 나타나는데 대화문학형식으로 말과 노래가 곁들여 있다.
(5) 운체문학; 민족 역사시, 민요에 나타난다.
(6) 산체문학; 엄격한 운률과 자구를 요구하는데 신화, 전설 등을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했다.
d, 음악과 춤
; 민간악기는 비파(琵琶), 우퇴금(牛腿琴), 동적(侗笛), 호생(芦笙), 목엽(木葉)등 다양하다. 호생만 독주나 합주용으로 사용되고 다른 악기는 노래 부를 때 반주하는데 이용된다. 특히 비파는 동족말로 “ bi ba ”라고 하는데 오랜 전통이 있는 현악기로 대, 중, 소의 세 형태로 지역마다 크기, 모양, 그리고 현의 숫자(3줄∼5줄)가 매우 다양하다. 호생 역시 유행하는 악기인데 각 마을마다 호생악대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악기와 더불어 노래와 춤이 남부와 북부가 독특하게 다른 성격을 갖고 발달해 왔다. 북부지역은 곡이 비교적 자유로우며 음이 높고 탁 트였고, 춤동작이 크다. 반면에 남부지역의 곡은 조용하고 정서적으로 온화한 감을 주며 동작이 크지 않다. 북부지역의 민가(民歌)는 완산가(玩山歌), 주가(酒歌), 반가가(伴嫁歌)등 삶, 역사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남부지역의 민가 역시 예속가(禮俗歌), 서사가(敍事歌)등 생활에 관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산문체 형식의 “ 暖(nuan) ”은 인류기원의 신화를 담은《개벽천지》와《기원(起源)의 노래》등이 있다. 집체 가무의 명칭인 “ 예(耶) ”는 시, 노래, 춤의 삼위일체 형식으로 원시 노동 그 자체에서 진일보해 생활예술로 발전했고, 조상숭배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제사활동을 고무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희(侗戱)는 동족문화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데 자연현상의 영향을 받아 당나라이전의 원시사회시기부터 형성되어 한희(漢戱)와 서로 영향을 끼치며 발전되어 왔다. 특히 동고(銅鼓)를 공명고(孔明鼓) 또는 제갈고(諸葛鼓)라고 불렀는데 융수빙동(融水聘洞)에는 아직 남아 있다.
e, 공예
; 자수(刺 ), 편직(編織), 조각(彫刻), 직염(織染), 은식(銀飾)등 다양하게 발달해 왔는데, 특히 고루(鼓樓), 화교(花橋; 風雨橋), 양정(凉亭)등의 건축공예는 대단히 우수하다.
5) 생활풍속
; 산촌에서 자급자족으로 보통 3대가 함께 살며 철저히 가부장제의 가족체계가 형성되어, 혈연관계로 고루(鼓樓)중심인 고루사회의 최소단위를 이룬다. 물론 가장은 가정의 일을 처리하는데 가족의 의견을 존중하다.
a, 거주
; 대부분의 마을이 한가지 성(姓)씨로 한마을을 이루며 오(吳), 양(楊), 석(石), 양(梁)성이 가장 오래되었다. 심산유곡의 아름다운 풍광에 쌓여 있는 마을이 많아 물을 건너기 위해 풍우교가 있고 동네 입구에는 높이 1장(丈)정도의 정간식(井干式) 목조건축물인 “ 시엔(現; singl) ”이라고 부르는 채문(寨門)을 3백여호의 마을인 경우 대개 12개를 설치한다. 집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지으며 일부분은 조각루(弔脚樓)형식으로 남북방언지역이 구별된다. 북부는 많은 방을 두고 2층으로 지어 아래층에서 생활하며 2층은 침실과 양식창고로 사용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정면에 당옥이 있고 당옥 내벽에 선칸(神龕)을 설치하고 양쪽 방은 침실 또는 부엌으로 사용한다. 남부 역시 2,3층으로 짓는데 두 기둥을 1간으로 5내지 7간 정도 된다. 1층에는 땔 풀을 쌓아두고 짐승우리로 사용한다. 문을 열면 긴 복도가 있고 가운데에 당옥이 있으며선칸(神龕)을 설치한다. 당옥의 양쪽은 부엌(火堂)으로 사용한다. 화당위에는 앙( ; ngangc)이라고 하는 사방이 4자되는 나무난간을 걸어 놓아 각종 농작물을 말린다.
b, 취락형태구분
(1) 산각하안형(山脚河岸型); 귀주성 총쟝현(從江縣) 高增, 小黃, 占里, 蘇洞, 리핑현(黎平縣) 자오싱(肇興; 3,100여명), 牙雙, 룽쟝현(榕江縣) 保里, 八吉, 광서(廣西)자치구 산쟝현(三江縣) 平巖, 호남성(湖南省) 통따오현(通道縣) 平坦河流域,
(2) 평패전원형(平 田園型); 귀주성 룽쟝현(榕江縣) 車江, 天柱縣 五家橋寨, 광서 산쟝현 롱저채(弄底寨), 룽성(龍勝)현 평등채(平等寨),
(3) 반산애구형(半山隘口型); 귀주성 총쟝현(從江縣) 歸柳上寨, 龍圖, 貫洞, 리핑현(黎平縣) 牙雙향 천짜이이(岑寨), 룽쟝현(榕江縣) 八區 宰大, 美闡(chan), 쩐웬현(鎭遠縣) 報京寨(2,000명), 티엔주현(天柱縣) 雷寨, 漢寨, 社學, 巖寨, 章寨, 幇寨, 蘭田, 碧雅, 광서자치구 산쟝현 歸東, 光里, 村溪, 梅林, 룽성현(龍勝) 평안채(平安寨), 호남성 통따오현(通道縣) 平坦, 播陽,
c, 복장
; 지역환경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노인과 중년남자는 깃이 달린 옷을 입고 여자는 머리를 쟁반같이 올리고 긴 바지를 입는다. 청조 말의 한족복장과 비슷하다.
d, 음식
; 쌀을 주식으로 하지만 찹쌀음식을 좋아해 흰 찹쌀, 붉은 찹쌀, 검은 찹쌀 등 여러 종류의 찹쌀을 재배하고 목판함으로 찹쌀밥을 만들기도 하고 간식용으로도 다양하게 만들어 먹는다. 음료 또한 찹쌀을 주로 사용한다. 명절이나 경사에는 필히 찹쌀밥을 하고 제사에도 마찬가지이다. 기호식품인 유차(油茶)를 만들 때에도 찹쌀을 사용한다. 편미(扁米) 또한 동족 특유의 기호식품인데 가을에 80%정도 익은 찹쌀을 거두어 까부른 후 소량의 물을 넣고 불에 말리면서 주걱으로 계속 골고루 뒤집어 주어 80%정도 말랐을 때 식힌 후 여러 차례 방아에 가볍게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고 남는 것이 편미(扁米)이다. 약한 불에 말리는데 색은 연하고 맛 또한 별미이다.
e, 전통명절
(1) 동년(侗年); 추수를 마쳐 모든 농사일을 마쳤을 때를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간주해 음력 11월을 신년으로 지내며 각 가정에서는 돼지를 잡는 등 축하한다. 한족과 왕래가 잦은 지역에서는 춘절(정월초하루)로 지낸다. 처음 이곳에 옮겨와 수렵생활을 하며 후에 땅을 개간해 수확을 거둔 조상을 기리며 제사한다. 용강현 72寨일대에서는 음력 10월말과 11월초에 신년경축활동을 하는데 이어서 11월말에는 “ 배년(陪年) ”으로 민족의 단결과 우의를 위해 마을마다 대단히 풍성하게 지낸다. 총쟝현(從江縣) 관동(貫洞)의 양(楊)씨 동족은 “ 양년(楊年) ”이라고 부르면서 음력 11월 초삼일 온 가족이 귀가해 벗들을 청해서 물고기로 잔치를 벌리며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 진핑현(錦屛縣)의 언동(彦洞), 요백(瑤白)과 지엔허현(劍河縣)의 소광(小廣)일대에서는 음력 11월말에서 12월초까지 찹쌀떡을 하고 감주를 담고 돼지를 잡는 등 새해 맞이를 경축하는데 어른에게 세배하고 서로 선물을 나누기도 한다.
(2) 츠상사(吃相思); “ 위객(爲客) ”이라고도 하는데, 즉 손님을 위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마을에서 우의를 나누기 위한 사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월, 2월 또는 가을에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데 젊은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른 마을에 손님이 되어서 가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며 소싸움(鬪牛)을 시키는등 단체사교활동을 벌인다.
(3) 단오절(端午節); 진핑현(錦屛縣) 규엽채(圭葉寨)의 풍속은 특별한데 종자( 子 ㅡ 찹쌀에 대추등을 넣어 댓잎이나 갈잎에 싸서 쪄 먹는 단오절 음식으로 원래는 초나라 굴원(屈原)이 강에 투신해 죽은 것을 애도해 이 음식을 던져 물고기가 굴원의 시신을 해치지 말고 대신 먹도록 한데서 유래한 것)를 가장이 손을 대지 않고 익힌 다음 먼저 조상과 뱀신에게 풍년을 기구하며 제사한 후 먹는다.
(4) 츠신절(吃薪節);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음력 6월 또는 7월 묘(卯)또는 인(寅)일에 우물에서 새로 길어온 물에 찹쌀로 감주를 담고 물고기 요리만을 장만하고 소금을 섞지 않은 곡식과 채소를 준비해 새벽에 조상에게 제사지낸다. 소싸움을 벌리고 창(唱)등의 활동을 하는데 조상을 기리는 뜻이 있다.
(5) 호생절(芦笙節); 생산을 독려하고 수확을 기뻐하는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핑현(黎平縣)과 총쟝현(從江縣)의 경계지역인 사각우(四脚牛)지구, 즉 낙향(洛鄕), 기당(紀堂), 수구(水口), 대단(大 ), 자오싱(肇興), 고방(古邦)등에서는 음력 8월 15일 남녀모두 명절 때 입는 옷으로 정장하고 호생악대를 이루어 즐긴다.
f,결혼
; 교통이 잘 소통되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과 차이가 있는데 일부일처제로 아직 원시사회의 연애, 혼인방식이 남아 있는 편이다. 비교적 자유롭게 교제하며 연애하는데 오랜 기간동안 여럿이 함께 교제하는 단계를 거쳐 둘씩 개별적으로 연애한다. “ 나한(羅漢) ”이라 칭하는 총각과 “ 나면(羅面) ”이라고 칭하는 처녀가 공개적으로 교제를 하고 가족에게 동의를 얻은 후 매일 저녁 어두워 질 무렵 여러 아가씨들이 당옥(堂屋)에 모여 수를 놓고 편직을 하며 총각들을 기다리면, 셋 내지는 다섯이 한 무리를 지어 등불을 밝혀 들고 비파를 키며 노래를 불러 자기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찾아가는데 비파소리를 듣고 창으로 내다보아 마음에 드는 총각이 있을 때에는 창 두개를 열어 들어오라는 표시를 한다. 때로는 문을 열지는 않고 둘이 대가(對歌; 둘이 주고받으며 하는 노래)를 한 후 노래도 마음에 들어야 문을 열어주고 들어오게 해 교제해 보아 의기투합하면 정표를 나누고 약정한다. 부모의 동의를 얻은 후 17, 8세에 비교적 간소하게 음력 9월에서 다음해 정월 안에 결혼식을 거행한다.
g, 장례
; 장례는 정상적으로 죽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해서 의식을 달리한다. 사람이 죽으면 곡을 하고 종이돈을 태우며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는데 신랑, 신부가 혼례식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했던 머리띠, 의복, 신발 등은 다시 사용하지 않고 모든 물품을 깨끗이 씻어 말려서 잘 보관했다가 죽을 때 본인에게 혼례식 때와 똑같이 입힌다. 죽은 사람의 허리에는 청, 남, 백, 홍, 화 오색실로 나이 수만큼 묶고 손에는 종이돈을 쥐어 주며 관 바닥에도 돈을 깔아 준다. 관을 신당 앞에 모셔두고 손님을 맞고 3내지 5일 후 매장한다. 매장 사흘 후 다시 묘토를 돌아보고 49일제를 지내며 청명절에 찾아가 묘를 돌보는 등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 없다.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람은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밖에서 염을 한 후 봉분도 없이 매장한다.
종교 및 금기사항
; 원시모계사회의 영향으로 전설속의 최고권위의 영웅인 조상여신(女神),“ Sa(薩) "를 중심 한 조상 숭배 신앙이 매우 특별하다. “ Sa(薩) "는 신성의 대명사로 보편화되었고 무소 부재한 존재이다. 예전에는 각 가정마다 신위(神位)를 모셔 놓는 “ Sa tang(薩堂) " 이 있어 식사 전에 먼저 음식을 올려 공경했다. “ tang(堂) "은 대중집회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사신(薩神)이 거주하는 곳을 뜻하기도 하고 큰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오늘날에는 많이 변했으나 청명에는 꼭 성묘했고 원시신앙형태인 점복술이 아직 남아 있다. 불교, 도교와 더불어 만물에 영이 있다고 믿어 뱀을 숭배하는등 토템사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기독교는 1920년대에 미국 선교사 류후췬(劉富群), 딩후이밍(丁惠明)과 중국인 목사 임달영(林達榮)이 광서(廣西)에서 룽쟝현(榕江縣)으로 들어 와 전도해 룽쟝현의 황극부(黃克夫)가 광서오주(梧州)의 선도회(宣道會)성경학원에 가 학습하고 후에 목사가 되었다. 1938년에는 소도평(蘇道平)목사와 부인 소애련(蘇愛蓮)이 광서에서 룽쟝현에 와 평유(平油), 본리(本里), 악리(樂里), 양조(楊調)등 동족(侗族)지역에 예배당을 세워 전도해 100여명이 세례를 받으며 신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고 교회는 빈민들 구제와 치료에 앞장서기도 했다. 리핑현(黎平縣)에는 독일 선교사 요우더카이(尤德凱)가 들어 와서 전도했다. 금기사항들은 정월 초하루에 철그릇을 들지 않고 정초에는 먼 곳에 출입을 삼가하고 봄에 벼락이 떨어진 날에는 산에 올라가거나 밭에 가지 않으며 결혼식후 처가에 가서는 함께 방을 쓰지 않는 등 다분히 미신적인 것으로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중국 서남부 귀주성 조흥지역은 귀주성 동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뚱족들의 주요 집단거주지의 하나입니다. 먼곳에서 바라 보면 층층 다락 밭이 산세를 따라 분포되어 있고 촘촘이 들어선 다락집들이 구름속에서 보일듯 말듯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조흥 마을 밖에서는 민족복 차림을 한 뚱족 처녀, 총각들이 마을에 오는 손님들을 맞이 하기 위하여 일찍 부터 모여 있고 멀리서 노생곡 소리가 들려옵니다. 손님들이 도착하자 총각들은 노생을 불면서 춤을 추고 처녀들은 뚱족의 축배가를 부르면서 자기들이 빚은 미주를 손님들에게 권합니다.
뚱족의 풍습대로 손님들은 권하는 미주을 마시고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뚱족 마을에 들어가 보면 정연하고 아름다운 다락집들이 강주변에 널려 있고 사이사이로는 뙈기 밭들과 연못이며 채소 밭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뚱족 아주머니들의 방치소리며 집집 마다에서 울리는 쌀고르는 석마소리, 천을 짜는 직포기 소리, 은장구를 가공하는 소리들이 한데 어울려 귀맛좋은 산간의 협주곡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작으마한 촌이 뚱족마을에 4곳이나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소리에 끌려 마을 중간에 있는 광장에 가 볼 수 있습니다. 뚱족 마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일반적으로 1, 2백 세대입니다. 그러나 뚱족들은 모두 작은 광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장 한편에는 높은 고루 즉 북을 치는 건물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넓은 무대가 있습니다.
이곳은 중대한 활동을 할 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하는 곳이며 또한 뚱족 청년남녀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고루는 뚱족의 상징적인 건물의 하나입니다. 그의 외형은 보탑같고 높이는 20m나 됩니다. 건물 주위에는 나무로 바자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긴 나무 걸상을 놓아 사람들이 앉아 휴식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고루의 건축은 못을 쓰지 않은 목조 건물로서 뚱족의 높은 건축 예술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뚱족 마을에는 모두 이런 고루가 있습니다.
뚱족의 제일 중요한 건축물은 고루입니다. 마을 대부분 사람들의 성씨가 륙씨입니다. 처음 이곳에 이주 올 때는 거의 모두가 육씨였습니다. 후에 5개 조씨로 나뉘었습니다. 한개 고루가 한개 성씨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의 종씨는 이 고루 주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루에 들어가 보면 10여 명의 처녀 총각들이 한줄로 서서 유명한 뚱족대가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노래는 지휘자도, 반주도 없이 십여 명이 서로 다른 화성으로 노래 부르는데 아주 잘 조화됩니다. 고음 선창이나 저음 창법이 잘 어울려 높고 폭넓어 낮으면서도 유창합니다.
또 사람들을 경탄케하는 것은 뚱족대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저들의 음악 천성과 음악 소질에 의하여 뚱족대가를 유창하고 아주 듣기 좋게 부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대한 명절이나 귀한 손님들을 접때 할때 고루안에서 뚱족 대가를 부른다고 합니다.
뚱족대가는 고음부와 저음부로 나뉘고 있는데 대자연의 소리를 모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매미 소리와 새소리등을 모방한 것입니다. 때문에 뚱족의 대가는 천락지음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대가의 노래 소리에 끌려 날이 어두어 지는 것도 모릅니다. 고루에서 전해 오는 다성부 대가는 경음악의 대창으로 넘어가는데 사람들의 웃고 떠들썩하는 소리와 어울려 더욱 깊은 감회를 자아냅니다.
고루주위에는 가정마다에서 운영하는 뚱족의 수공예품 상점이 늘어서 있는데 눈부신 은 장식품과 자수품들이 사람들의 눈낄을 끌고 있습니다. 귀걸이, 목걸이, 손목걸이며 발목걸이들이 없는게 없습니다.
수공예품들에는 꽃과 나비 등을 수놓았는데 아주 정밀하고도 생동적입니다. 관광업이 흥성해지면서 뚱족 수공예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사가 갈수록 잘 되면서 가정의 생활이 점점 부유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뚱족이 수공예품을 경영하는 것은 경제적인 소득을 가져 올 뿐만아니라 뚱족의 문화를 선전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뚱족이 수공예품을 경영하는 것은 뚱족의 문화를 선전할 뿐만아니라 관광객들이 조흥 뚱족들이 가지고 있는 공예품을 이해하게 되여 민족특색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뚱족들은 찹쌀 밥을 즐겨 먹는데 손으로 쥐고 먹기를 즐겨합니다. 찹쌀 밥이 찰지므로 신음식을 먹습니다. 신물고기, 신고기, 신채소 등은 아주 맛이 좋습니다.
이런 신음식을 만드는 방법은 아주 세밀합니다. 우선 요리감을 찹쌀과 함께 소금을 쳐서 단지안에 넣고 10일 내지 15일간 봉해둡니다. 어떤 것은 심지어 몇년동안 봉해두어 음식이 자연적으로 발효되도록 하는데 아주 독특한 신맛을 냅니다.
뚱족의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뚱족의 미주를 마시면서 뚱족들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면 마치 환락의 세계에 빠진듯 오랬동안 떠나기를 아쉬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