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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여간첩- 만주족 여인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 본문
국제 여간첩- 만주족 여인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
CIA Bear 허관(許灌) 2009. 5. 16. 17:48
被處決後的川島芳子
청나라를 복흥(復興)하기 위하여 일본과 손을 잡고 대(對) 한족(漢族) 스파이 활동을 자행하여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다음해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일본에서 "제국첩보의 꽃(동양의 잔 다르크)"이라고도 불려지기도 했지만, 중국에서는 "동방의 마타하리" "동방마녀" "난세의 요녀"라고 불리우는 천도방자(川島芳子, 일본식으로 가와시마 요시코, 중국식으로 金璧輝 , 만주어로 촨다오팡즈)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 하였습니다
그녀는 1906년에 태어나는데, 성은 아이신줴뤄(愛新覺羅)이고 이름은 센위(顯玗)였으며, 자는 동진(東珍)입니다. 나중에 중국 이름은 김벽휘(金璧輝)였으며, 청나라의 제10대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의 14째 딸이었습니다. 청나라의 황족들은 친왕-군왕-패륵-패자-공(진국공,보국공)의 다섯등급이 있는데, 친왕은 그중 최고등급이었습니다.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
그리고 친왕중에서도 건국초에 공을 세운 8명의 친왕/군왕은 철모자왕이라고 하여 세습되었는데, 숙친왕은 청태종의 첫째아들 하오거(豪格)를 시작으로 청말까지 이어지는 철모자왕입니다. 황실내에서도 지위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가의 공주로 태어난 그녀가 5살이 되던 해에 청왕조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청나라의 최고왕족으로서 숙친왕은 일본 낭인 가와시마 마나니와(천도랑속,川島浪速)에게 일본군부가 병사를 파견하여 남방 혁명당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고, 만주와 몽고를 독립시킬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형세가 여의치 않아 숙친왕의 이런 기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민국초기에 숙친왕은 청황실 회복의 꿈을 안고 아들들을 만주, 몽고, 일본으로 보내어 와신상담(와신상담) 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합니다. 또한 아끼는 딸인 센위를 일본인 친구 천도랑속(川島浪速)에게 양녀로 주어, 일본에서 훈련을 시키도록 부탁합니다.
1912년 6살에 불과한 아이신줴뤄.센위는 양부인 천도랑속(川島浪速)을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일본 군국주의의 혹독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여러해 후 그녀는 완전히 일본화되어 마쓰모토고등여자학교에서 수학합니다. 천도랑속(川島浪速)의 집에서 정치, 군사, 정보와 자료수집등의 여러 방면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그녀는 가와시마 요시코(천도방자, 川島芳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川島芳子與其兄在天津的留影
일본식 교육을 받은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는 20살 때인 1927년 뤼순에서 중국에 돌아와 일본이 지지하고 있는 만몽독립군(몽고족) 장군 포찰포(布扎布)의 아들 감주이찰포(甘珠尔扎布)와 결혼했지만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감주이찰포(甘珠尔扎布)가 담이 작고 큰일을 해낼 인물이 아님을 발견하고 1930년 10월 감주이찰포(甘珠尔扎布)와 결별하고 상해로 갑니다.상해에 온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상해주재 일본총령사의 조리인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와 동거에 들어갔고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는 일본육군 주(駐)상해특무기관장이였으므로 김벽휘는 이때로부터 정보활동에 참여하게 되며 비밀활동과 스파이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扎(편지 찰, 뺄 찰) *尔(너 이)
身著日本軍服的川島芳子,照片上是她本人的簽名。
그녀는 이후 만주로 와서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 9.18사변, 만주독립등의 사건과 상해의 1.28사건, 완용이송등의 사안에 관련됩니다.
1928년 동북지방 군벌인 장작림(張作霖)이 황고둔에서 폭사하는데, 일본 관동군의 작품이었습니다.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이 사건에서 큰 공로를 세우는데, 바로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의 시종부관 정모를 유인하여 그에게서 장작림이 서태후의 기차를 타고 요녕으로 돌아오는 구체적인 노선과 일정을 알아내고, 이를 관동군 총사령부에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 사건은 그녀는 첩보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게 되며, 일본군 특무기관에서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그녀는 일본군 특무기관의 책임자인 전중융길(田中隆吉)의 직집 지휘를 받았습니다.
9.18사변 후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봉천으로 가서 관동군 고급참모장 판원(板垣)의 휘하에 들어갑니다. 하루빨리 대동아공영권의 계획을 시행하기 위하여 일본군은 천도방자를 보내어 천진에 있는 완용(婉容, 부의의 부인 청나라 마지막 황후)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관(棺)을 이용하여 완용(婉容, 부의의 부인 청나라 마지막 황후)을 천진에서 빼내어 관동군의 수중으로 보내오게 했습니다. 만주국 건립후에 일본관동군이 논공행상을 할 때 그녀에게 육군소장의 계급을 부여하는데, 일본군에서 계급이 가장 높은 여자였습니다.
盛裝的川島芳子
이외에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군벌과 청나라 만주 귀족들로부터 군자금을 끌어모아 병사를 모집하여 열하에서 정국군기병당(定國軍騎兵團)을 조직하고, 이름을 김벽휘(金璧輝)로 바꾸면서, 스스로 안국군(安國軍)의 총사령관이 되어 일본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만주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상해에서 일을 벌이기로 하는데, 이 임무도 천도방자에게 부여합니다.
위만제국이 성립된후 일본군은 만주족 여인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가 청나라 황실혈통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장종창의 부대 5000명으로 "안국군"을 편하고 그에게 사령관직무를 줍니다. 이때로부터 천도방자(川岛芳子)라는 일본이름 대신 중국식으로 金壁辉(김벽휘)라고 부르게 됩니다. 김벽휘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제멋대로" 나오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34년 일본으로 체포해갔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 폭발하자 이용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다시 중국에 돌려 보내게 됩니다.
안국군총사령관 시절의 만주족 여인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삼우실업공사(수건만드는 공장)의 노동자들 5명을 매수하여 일본 일련종 승려와 신도를 습격하도록 하고, "지나의용군단"을 이끌고 삼우실업공사의 노동자들에게 보복성 습격을 가하고 공장을 불태웁니다. 그 후에 사람을 보내 일본주중국공사관 중광규(重光葵)의 공관에 불을 지르고, 이를 중국군인의 소행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이러한 1.28사태를 통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만주에서 상해로 돌리는데 성공합니다.
1932년에는 일본침략군이 상해 갑북(閘北)으로 진공하여 중국수비군 채정해가 지휘하는 19로군과 격전을 벌렸습니다. 이때도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는 오송 포대에 들어가 포대의 화력배치를 파악하여 일본군에게 적시에 정보를 보내줍니다. 또한 장개석이 하야할 것이라는 소식을 먼저 알려줌으로써 일본군부가 중국침략정책을 다시 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뛰어난 간첩인 천도방자는 일본군부에 의하여 다시 얻기 힘든 특수인재로 대우받았습니다.
1945년 일본 히로히토천황의 항복선언이후 천도방자의 인생은 말로를 향하게 됩니다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한후 국민당군이 북경(北京,베이징)에서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를 체포하는데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의 배경이 엃키고 설켜 재판이 어려웠습니다. 중국인으로 친다면 매국죄로 사형에 처할수 있었으나 일본인으로 치면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가 집적 살인하거나 죄를 저지른 증거가 없었으므로 일본교민이나 보통헌병처럼 일본에 돌려보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체포 후 북평감옥에 갇히며, 1947년 10월 5일 북경 민국법정의 재판을 통하여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1948년 3월 25일 아침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판결문
1. 피고는 중국과 일본국적을 다 가지고 있지만 숙친왕의 딸로서 의심할바 없는 중국인이다. 때문에 한간죄(漢奸罪)로 처리한다.
2. 피고는 일본정객들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상해"1.18"사변에 남장을 하고 간첩할동을 진행하였으며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3. 피고는 부의와 그 가족을 천진에서 빼돌렸고 위만제국의 성립을 위해 준비공작을 하였다.
4.피고는 관동군과 장기간 래왕하였고 "안국군 사령"까지 담임했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한후 국민당군이 북평(베이징)에서 김벽휘를 체포하는데 김벽휘의 배경이 엃키고 설켜 재판이 어려웠다. 중국인으로 친다면 매국죄로 사형에 처할수 있었으나 일본인으로 치면 김복휘가 집적 살인하거나 죄를 저지른 증거가 없었으므로 일본교민이나 보통헌병처럼 일본에 돌려보내질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被處決後的川島芳子
*馳名的國際女間諜--川島芳子[組圖]
川島芳子,號誠之,又名金璧輝,是馳名的國際女間諜,其父是滿清肅親王,生於1915年。三歲時喪父,經日本人川島浪速收養,故取名川島芳子。川島浪速之妻與日本皇后係屬同宗,因此,芳子亦躋身於貴族,凡日本的軍政各界要人,如東條英機、本莊繁、岡村寧次、多田駿、土肥原賢二等,均與芳子熟識。
“九·一八”事變的次年,即1932年春,川島芳子與其任偽滿新京市長兼警備司令的哥哥金碧東和多田駿司令等計議偽滿軍事。她又與其侄策劃將偽滿皇帝迎還北平,以復帝業。其後常與特務機關長和知鷹二等研討中國問題,主張利用汪精衛。後又任華北人民自衛軍總司令等偽職。日本投降後被捕,關押于北平第一監獄,以漢奸罪向國民政府河北省高等法院起訴,後被處決。
“九·一八”事變的次年,即1932年春,川島芳子與其任偽滿新京市長兼警備司令的哥哥金碧東和多田駿司令等計議偽滿軍事。她又與其侄策劃將偽滿皇帝迎還北平,以復帝業。其後常與特務機關長和知鷹二等研討中國問題,主張利用汪精衛。後又任華北人民自衛軍總司令等偽職。日本投降後被捕,關押于北平第一監獄,以漢奸罪向國民政府河北省高等法院起訴,後被處決。
http://big5.china.com.cn/photo/txt/2008-11/21/content_16802797_3.htm
*만주국[滿洲國, 만주제국]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일본 관동군은 1932년 1월 장쉐량[張學良]의 반만항일의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한 후, 2월 '신국가건설막료회의'를 개최해 만주국 건국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어서 관동군은 구(舊)봉천 군벌계 장성들을 앞세워 청조의 폐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이라는 자리에 앉힌 후, 국제연맹이 중국의 제소를 받고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신징[新京 : 지금의 창춘(長春)]으로 하고,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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