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중국, 톈안먼(천안문) 사태 20주년 맞아 우파 사상 경계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중국, 톈안먼(천안문) 사태 20주년 맞아 우파 사상 경계

CIA Bear 허관(許灌) 2009. 4. 29. 11:37

 

27日、ニューヨークでの記者会見で、中国民主化に向け奮起を誓う天安門事件の指導者ら。左から王丹、厳家其、右から2人目が王軍濤の各氏ら(천안문 민주화 운동주도인사들의 공산당 일당독재 반대와 자유선거, 다당제 도입 요구)

 

최근 중국공산당 내에서 민주주의나 인권 정치개혁 등 우파적인 사상의 확산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홍콩의 명보가 보도했다. 이는 지난 1989년 발생한 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을 맞아 당 안팎에서 정치적으로 우파 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명보는 최근 중국 공산당의 이론잡지인 '추스(求是)'에서 '왜 마르크스주의를 반드시 의식 영역에서 주도적 지위에 올려놓아야 하며, 사상의 다원화를 해서는 안되는가?'라는 장문의 기고문을 통해 사상 다원화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이 문장은 "엄준한 국제정세 하에서 만일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의식의 주도적 지위에 놓지 않고 사상다원화를 추진할 경우 이는 스스로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며,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중국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도사상으로 국제적인 추세에 맞춰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 글은 잡지 이름인 '추스(求是)'와 발음이 같은 '추스(秋石)'라는 필명으로 작성된 것으로 이는 사실상 이 잡지의 견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올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밝힌 '두가지의 절대불가'와 상통하는 것으로 중국 공산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명보는 분석했다.

우방궈 상무위원장은 전인대 보고에서 '서방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따라하거나 절대로 다당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개혁은 중국 스스로의 노선에 따라 발전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은 지난 1989년 6·4 톈안먼 사태 이후 10년마다 찾아오는 민감한 정치적 시기에 외부에서 정치 개혁에 대한 압력이 강해질수록 중국 지도부는 사회주의 사상을 강조하며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올해는 천안문 사태 20주년이자 달라이 라마 망명 50주년으로 새해 벽두부터 일부 민주파 인사들이 공산당 일당 독재를 반대하는 내용의 '08헌장'을 발표하는 등 우파로부터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좌'로 돌아서면서 우파를 배격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天安門事件20周年で「記念白書」 「反革命暴乱」を全面否定

 【ニューヨーク=山本秀也】中国当局が民主化を求める学生、市民に血の弾圧を加えた1989年6月の天安門事件から20周年を迎え、元北京大学生、王丹氏(40)ら当時の指導者らが27日、ニューヨークで記者会見し、事件を総括した記念白書を公表した。

 事件を「反革命暴乱」として弾圧を正当化する公式見解に対し、王氏らは「民主化を求める平和的な街頭活動に戦闘行動なみの攻撃を加えた例のない暴挙」と反論する統一見解を表明した。

 

                                                          数々の歴史を目撃してきた、天安門広場=2007年11月25日(奈須稔撮影)

 

 公表された「6・4事件(天安門事件)民間白書」は、米国に逃れた当時の活動家らで組織する主な民主化運動団体が、事件の経過を追いつつ、中国当局の公式見解に反論した内容だ。戒厳部隊が戦時にも禁じられた殺傷力の高い銃弾を使ったことを示す、犠牲者の悲惨な写真なども掲載されている。

 「腐敗排除」や「報道の自由」などを掲げた街頭での運動について、白書は「すべての請願は、中国憲法と法令の許容する範囲で行われた」と指摘。要求内容についても、「憲法の否定や、憲法の枠外で新たな政治制度を求めるものではなかった」として、「護憲」の枠内での平和的な請願だったことを強調した。

 その上で白書は、事件を「動乱」「暴乱」とした当局見解について、「まったく根拠がない」と否定。国民の請願を否定する「専制主義に基づく習慣的な思考」こそが、問題の根源だと批判した。

 王丹氏はこの日の会見の冒頭、天安門事件に至る民主化運動を「中華人民共和国の歴史で、政府の手によらない初の政治的デモだった」と総括。事件を風化させないため、弾圧の起きた6月4日に、中国の伝統で喪服を意味する白い服装を着用し、改めて弾圧への抗議を行うよう呼びかけた。

会見に出席したのは、北京市大学生自治連合会(高自連)のリーダーだった王丹、劉剛、理論指導者だった厳家其(元中国社会科学院政治学研究所所長)、運動の軍師格を務めた王軍濤(元北京社会経済科学研究所副所長)の各氏ら約10人。

 学生リーダーの1人だったウイグル族出身のウアルカイシ氏は、現在台湾に在住。また、女子学生としてハンストの先頭に立った柴玲氏は、米国在住ながら民主化活動から離れ、この日も姿をみせなかった

 

 ■天安門事件に関する民主化活動家らによる「記念白書」の主な内容

・1989年の請願活動は愛国民主運動だった

・事件の背景には、1980年代に続いた民主化要求と、汚職など社会矛盾の激化があった

・中国当局は民主化要求を「動乱」と定義し、制圧方針を打ち出した

・約20万人の戒厳部隊が非武装の市民を虐殺した。この制圧は合法性を欠いていた

・請願は憲法、法令に合致した範囲で行われた

・請願要求に共産党支配の否定など、憲法の枠外の条項は含まれていなかった

・学生、市民が凶器を準備した事実はない。動乱、暴乱と呼ぶべき状況はなかった

・外国の反中国勢力に操られたなどの陰謀論も根拠がない

・こうした請願を「暴乱」とする当局の見解は、専制主義にもとづく習慣的な思考にほかならない

・中国政府は被害者への補償や名誉回復を図り、すべての政治犯を釈放すべきだ

 

                                    天安門事件から17年を迎えた北京の天安門広場で行われた毎朝恒例の国旗掲揚式=2006年6月4日(共同)

 

 ■天安門事件 1989年6月、中国政府が軍隊を出動させ、北京の天安門広場で民主化を求めていた学生らを鎮圧した事件。約2カ月前の4月15日に急死した中国共産党の改革派指導者、胡耀邦氏の追悼をきっかけに学生らがデモを繰り返し、党の腐敗を批判する大規模な民主化要求運動を展開した。最高実力者の●(=登におおざと)小平氏らは運動を「動乱」と断じ、6月3日夜から4日未明にかけて軍を動員して天安門広場を制圧した。犠牲者は少なくとも数百人とされる。事件後、学生らに同情的だった趙紫陽総書記が解任され、後任に江沢民氏が就いた。

 

                          中国人民政治協商会議(全国政協)開幕。北京・天安門広場周辺は治安当局により警戒態勢がしかれた=2009年3月3日(AP)

 http://sankei.jp.msn.com/world/america/090428/amr0904281917014-n3.htm

 

*톈안먼 사건 [天安門事件, T'ienan Men Incident, 천안문사건] 

 중국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진압하면서 빚어진 대규모 유혈참사사건(1989. 6. 3~4)

1.개요

이 사건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및 세계질서에 일대 충격을 몰고온 사건이었다

2.사건의 배경

톈안먼(천안문) 사건은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의 무력진압으로 빚어진 사건이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시행 이후 누적되어온 문제점이 폭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노선이 확립된 이래 중국은 서구의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경제적 자유와 개방의 폭을 과감히 넓혀왔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상대적으로 부진을 면하지 못했다. 정치권력의 집중화 현상 아래서 경제개혁정책은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를 수반했다. 지난 10년 동안 개혁개방정책으로 생활은 나아졌지만, 대신 특권층의 부패가 만연하여 인민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어왔다. 더욱이 경제 과열로 인한 인플레와 소득격차에서 오는 불만감 등이 상승효과를 내어 급기야는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로 발전했다.

3.사건의 발단 및 전개

중국의 민주화 시위는 1989년 4월 15일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불이 붙었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 학생들은 그를 찬양하고 보수파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하여, 4월 17일에 베이징·상하이[上海]에서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기폭제로 베이징대학교의 학생 수천 명은 톈안먼(천안문) 광장에 집결하여 후야오방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다. 5월 13일부터 2,000여 명의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5월 18일 시민·학생 100여 만 명이 단식농성 지지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국은 19일 밤에 전격적으로 베이징에 군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 베이징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당내 보수파는 개혁파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개혁파를 대표하는 자오쯔양[趙紫陽] 당총서기와 정치국 상무위원 후치리[胡啓立]가 축출되고 강경파인 리펑[李鵬] 총리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이징의 시위는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상하이는 물론 선양[瀋陽]·창춘[長春]·창사[長沙] 등에서 전국적인 시위가 잇달았고, 결국 6월 4일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군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중국군은 시위대를 무차별 살해함으로써 민주화 시위를 종식시켰다.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사망설까지 나돌던 덩샤오핑이 6월 9일 공석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이날 베이징 일대에 출동한 군지휘관들을 접견하여 '반(反)혁명 폭동'이 진압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중국사태는 강경보수파의 승리로 끝났다 

4.사건 이후 중국 정부의 동향

이후 중국 당국은 세계여론의 빗발치는 비난과 경제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체포와 숙청을 단행했다. 중국공산당은 6월 23일부터 2일간 제13기 4중전회를 열고 자오쯔양 지지세력을 제거하는 권력개편을 단행했다. 정치국원 겸 상하이 시 당서기 장쩌민[江澤民]이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신임 총서기에 선출됨으로써 리펑·장쩌민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통일중국과 한중일 삼국 국가연합구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중국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선진국 자유민주정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산정부나 일당 독재 병정분리주의 군사대국 국가사회주의 국가체제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었으며 중국 민족끼리 분열과 반목으로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저해 될 것입니다

한족(漢族)이외 소수민족이 선진국 모델 자유화 민주화 정부를 구성할때는 한족(漢族)권력이 붕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베이징대 학생들은 '민주살롱(Democracy Salon)'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중국민주의 앞날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리곤 했다. 6.4민주운동의 주역 왕단(王丹)이 이날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