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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도제국주의 동맹과 반제청년동맹 본문
1.타도제국주의 동맹(ㅌ.ㄷ동맹)--김일성 학생시절 공산주의 운동과 친소련정책 노선 견지
타도제국주의동맹 혹은 ㅌ.ㄷ(초기에는 E·I로 선전되었다)는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직후, 1926년 10월 17일 만주 화전현에서 결성한 것으로 선전되는 독립운동 조직이다. 기타 1929년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타도제국주의동맹이 북조선 내에 선전되기 시작된 것은, 1982년 10월 17일에 김정일이 '조선로동당은 영광스러운 'E·I'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라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한 이후부터이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강령에서 당면과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할것을 내세웠다고 하며, 최종목적으로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할것을 규정하였다고 한다. 《ㅌ.ㄷ》는 동맹원들이 노동계급의 혁명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광범한 군중속에 조직을 빨리 늘여 나가는것을 자기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방침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북조선 사학계에서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반대하였으며 자주성의 원칙에 기초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당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는 소비에트연방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27년 8월에 대중적인 비합법적청년조직인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되었다.
2.반제청년동맹--김일성의 청년 공산주의 활동과 친소련정책 노선 견지
반제청년동맹은 북조선 측의 주장에 의하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계승한 1927년 8월 27일 길림에서 김일성에 의해 조직된 비합법적 청년혁명조직으로, 만주지역의 항일 무장단체가운데 하나였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아래조직들이 수많이 묶어 지고 광범한 청년학생들속에서 반일기운이 높아 지게 되자 보다 많은 청년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묶어 세우기 위하여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개편하여 대중적성격을 띤 반제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반제청년동맹의 조직은 짧은 시일안에 길림시의 문광중학교, 길림제1중학교, 길림제5중학교, 길림사범학교, 길림녀자중학교, 길림법정대학을 비롯한 조선학생들이 있는 곳에 확대되여 갔으며 그 하부조직망은 길림시내는 물론 그 주변의 농촌과 나아가서는 심양, 장춘, 할빈, 돈화, 흥경, 류하, 료원 등의 넓은 지역에 걸친 공산주의 영향하의 한인 부락내에 존재했다. 김일성이 지도한 세력은 최대 1000여명 수준의 빨치산 부대였다.
반제청년동맹지부에는 지부책임자와 조직 및 선전책임자가 있었다. 반제청년동맹은 도시와 농촌에서 학교와 야학을 운영, 인민대중속에서의 강연, 연예공연과 혁명가요보급, 각종출판물의 발행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청년들을 비롯한 광범한 군중을 반일사상과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키며 점차 일제와 반동군벌 및 반동교원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조직동원하였다. 남한의 학계에서는 김일성이 실제로 소비에트연방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고 주장한다.
3.동북항일연합군(중국 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연합군)
김일성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기는 그가 스무 살이던 1932년에 일어났다 그 해는 그의 어머니가 죽고 일본 제국주의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 해에 김성주(김일성)은 남만주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항일 유격대에 가담하였던 이 유격대는 같은 해에 중국인 양징위(양청우, 楊晴宇)가 지휘하는 <東北抗日聯軍>의 산하로 통합했다
김성주는 이때부터 항일운동가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김경천= 金光瑞장군) 이름을 도용하여 김일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金光瑞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 때는 김경천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부대는 몇 해 안에 규모도 커지고 활동영역도 넓어지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초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조직되고 여름부터 팔로군 제도가 실시됨으로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第1路軍) 제6사(第6師)로 된 제6사장(第6師長) 김일성가 되었다
김일성의 대표적인 업적이 1937년 6월 4일 보천보습격사건이다 동북항일연군 제1팔로군 제6사장 김일성부대가 자행한 보천보 습격은 철저히 물자조달을 위한 약탈사건이었다는 것이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김일성은 몇몇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동북항일연군의 뿌리를 뽑아버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회유작전도 병행했다 일제에 투항하면 돈을 주기도 하고 처벌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관동군의 2중작전은 효력을 발휘하여 투항자가 속속 출현했다
1940년 2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사령관 양징위도 마침내 관동군에 쫓기다 살해 되었다
관동군은 그의 배를 갈라 보았다 그의 백 속에는 나무 껍질이나 풀 따위가 남아 있을 뿐 곡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극악무도한 관동군이라도 양징위에 대하여 경의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교의 스님을 모셔다가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도 올리게 하고 묘를 만들어 주었으며 좋은 비석도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만주에서의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원들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나를 극명하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일본군에 끊임없이 쫓겨면서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보급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동북항일연군도 살아남기 위해서 일종에 마적이나 공비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김일성도 쫓겨다녔다
그는 여섯명의 대원을 이끌고 두만강변을 따라 1941년 3월에 극동 러시아로 탈출했다 김일성은 곧 블라디보스그톡 (연해주) 근처의 <오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최용건, 김책, 안길, 김광협, 서철, 최춘국등도 이 지역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 항일무장대오 건립을 위하여(중국 공산당 뉴스,연변일보)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후 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1년 11월 16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순시원을 파견하여 유격대를 창건할 사업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양림을 성위 군위서기로 소환하고 중공대련시위서기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하였다.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동장영의 주최하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당, 단 열성분자 40여명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9.18”사변이 일어난 3일후인 9월 21일, 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인 길흥은 룡정주재 일본총령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은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일본군의 점령지로 되고말았다. 일제의 침략에 직면한동만 각 현의 당조직에서는 즉시 사업중점을 항일구국투쟁에로 옮겨놓고 광범한 대중들을 인솔하여 새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정세에 수응하여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만특위에서는 “명월구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참가자의 한사람인 김일성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회의에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증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중 리광, 량성룡, 오중화, 오중성, 김철 등은 왕청현대표들이고 채수항, 김일환은 화룡현대표들이며 오빈, 리청산 등은 연길현대표들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하는 점은 왕청현대표인 오중화는 1931년 봄에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후 1932년 12월에 석방된 점이다. 그런데 회의는 1931년 12월에 열렸으니 오중화가 이 회의에서 참석할 시간이 없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명월구회의”에서는 군중토대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약한 지대를 선택하여 대중투쟁의 토대우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데 대한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의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병사사업을 강화하고 유격대를 건립할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과 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강화하고 대중을 발동하여 유격대를 창건하며 유격전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각급 당조직을 건립하고 반제동맹, 공회, 농민협회, 부녀회, 소년선봉대, 적위대 등 단체들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제, 년말전으로 채무를 반대하고 가렴잡세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춘황투쟁을 준비할데 관한 문제, 병사사업을 벌리고 병변과 의거를 조직하며 무기를 탈취할데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과업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당, 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다. 추수춘황투쟁을 거친 연변인민들은 강대한 일본침략자와 싸우자면 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무장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독립운동시기에는 돈만 있으면 로씨야로부터 얼마든지 무장을 살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로씨야가 이미 사회안정이 실현되여 한창 사회주의건설의 열이 오르고있는 때여서 무기를 아무데서나 구할수 있는 사회환경이 아니였다. 또 중국정부의 공산당반대의 리념차이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하여 무기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리고 연변인민들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빈주먹밖에 없어 군자금을 헌납할 저그마한 힘도 없었다. 때문에 오직 두손으로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은 무기와 야장간같은 “병기공장”에서 만들어진 칼, 날창, 자작폭탄 같은 것이 유격대를 창건하는 최초의 무기가 되었다.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대책을 강구했는데 생사를 불문하고 지혜롭게 적의 무장을 탈취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방치로 군경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어놓고 무기를 빼앗기도 했으며 고춧가루를 놈의 눈에 쳐놓고 총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김충진이라는 젊은 형제가 총을 빼앗은 이야기도 참 지혜롭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선생은 무기탈취를 위해 싸운 심금을 울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1931년 여름 어느날 연집강부근의 밭에서 김을 매던 충진의 형제는 순경 한놈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흔들먹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놈의 총을 빼앗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충진의 형제는 순경놈이 들으라고 우정 호미로 돌을 탕탕 치면서 인기척을 냈다. 강을 건너려고 주춤거리던 순경놈이 아니나다를가 충진의 형제를 불렀다. 충진의 형제는 내키지 않은척 하면서 느릿느릿 순경놈한테로 다가갔다. 그놈은 충진이더러 자기를 업어서 강을 건너라고 호령했다. 강심에 이르니 물이 넓적다리를 넘어섰다. 순경놈은 구두가 젖을가봐 몸을 솟구치며 두다리를 곤두세웠다. 순간 충진이는 순경놈을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후 한손으로는 대가리를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후 한손으로 대가리를 물속에 눌러놓고 다른 한손으로 제꺽 권총을 빼냈다. 그리고는 강에서 나와 산으로 올리달았다. 강에서 나온 순경놈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충진의 형제는 그그 길로 유격대에 찾아가 총을 바치고 유격대원이 되었다. 녀성들도 지략으로 무장을 탈취하였다. 1932년 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적 보안단 졸개들은 늘 왕우구 토성촌에 와 행패를 부리군 하였다. 그날도 보안단 졸개 일곱놈이 마을북쪽의 한 초막에 기여들었다. “삼동서”로 분장한 부녀회 회원들은 더운물을 부어준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그놈들을 “열정”적으로 맞았다. 점심에 술까지 “대접”받고 거나해진 놈들은 저마끔 나자빠져 코를 골았다. 땅거미질 무렵 잠에서 깨여난 놈들은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삼동서”는 다시 주안상을 차려놓으면서 저녁을 먹고가라고 극구 말렸다. “삼동서”의 “뜨거운 열정”에 입이 헤벌쭉해난 일곱놈은 다시금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는 쓰러져 잤다. 이때 짬을 엿보던 저위대원들이 욱 달려들어 놈들의 총을 빼앗은 다음 “연길폭탄”으로 일곱놈을 몽땅 죽여버렸다. “베감투”이야기도 동만인민들속에서 오래동안 류전된 전설적인 이야기의 하나이다. 개산툰지구에서 활동하던 지하공산당원 리동일은 총을 탈취해가지고 유격대로 급히 오라는 상급당조직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동지들과 토의 끝에 선구촌에 자리잡고있는 공안분주소를 들이치려고 작전했다. 1932년 음력 5월 20일, 난데없는 상두를 멘 장례행렬이 선구공안분주소에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베감투를 쓴 청장년속에는 소년들도 섞여있었다. 상제, 복인, 조객들로 이루어진 이 장례행렬은 20여명 잘 되었는데 상주인듯한 중년사나이가 맨앞에 섰다. 사나이는 분주소에 들어서자 두손을 맞잡고 소장에게 인사하였다. 소장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 앉아 점도록 베감투를 눈빗질해보았다. 이놈은 출출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육상에 파묻혀 썰썰이병을 떼고야 돌아서는 놈이라 장례행렬을 그저 순순히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베감투는 소장놈이 지금 엉뚱한 궁리를 하고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하면서 “도살세”를 바치러왔다고 굽석거렸다. 그때에는 관혼상제에 소나 돼지를 잡으려면 공안분주소의 비준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 소를 잡았습지요.” “제길, 소는 무슨 놈의 소란 말이야. 돼지를 잡아도 될걸.” 한창 점심때라 소장놈은 긴 하품을 늘이며 심술배인 소리를 줴치다가 서랍을 들춰 도살세수고지를 끄집어냈다. 느적느적 필을 찾아쥐더니 수고를 떼느라고 머리를 테불상에 파묻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베감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소장놈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댔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궁둥이에 찬 권총을 잡으려 했으나 총갑을 열기도전에 잡힌 몸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밥을 짓던 화식원놈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식칼을 든채로 나타났다. 베감투는 집싸게 몸을 훡 돌리면서 그놈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화식원놈이 나동그라졌다. 항두를 지키고있던 장례군들은 불이 펄나게 향두를 헤친후 관덮개를 열어제치고 그속에 숨겨놓았던 몽둥이며 괭이며를 들고 쏜살같이 분주소로 쳐들어왔다. 한창 낮잠을 자던 순경들이 총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웬 영문인지 정신차리지 못하고있었다. 방안에 뛰여든 장례군들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벽에걸려있는 총을 벗겨들었다. 시퍼런 대낮에 장례행차로 가장하여 선구공안분주소를 쳐들어간 사람들은 다름아닌 개산툰학성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이였고 베감투를 눌러쓰고 상주로 변장한 사나이는 학성적위대 대장 리동일이였다. 그날 그들은 선구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보총 8자루, 권총 1자루를 로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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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88특별여단)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 군인출신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중심의 반일연합전선 군대조직이었다
2005년 3월 저녁 북한주재 러시아대사관 방문과 러시아전쟁 60돌 기념메달 받아
러시아 2차대전 승전 기념메달, 왜 각국 정상 중 김정일만 받았을까? 정답: 김일성을 소련군 참전용사로 규정 아들에 수여
제2차세계대전 승전기념 메달은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제작됐다 러시아와 당시 동맹국 국민 중 생존한 참전용사 및 그 후손이 수여 대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아버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2차대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주석은 한인과 중국인, 만주인(여진족)으로 구성된 극동의 소련군 88특별여단의 제1교도영(대대)장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으나 일본이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정작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88여단 인사들은 광복 후 북한에 25만명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88여단 출신의 중국인 생존자 27명과 몇몇 북한인사들도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로 만들어진 지름 32mm의 이 메달에는 승리라는 단어와 <1941-1945>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10만여 개가 제작됐으며 제작 단가는 20달러(한국 돈 약 2만원)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5.소련군과 북로당(북조선노동당, 北朝鮮勞動黨)
북로당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밀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의거,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모체로 하고 있다
같은 해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을 중심으로 지식층, 소시민층을 망라하고 있던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였다 합당선언에서 북조선 노동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중적 정당을 세울 필요에 의해서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통신기관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지급등을 내걸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김두봉(부산출신이며 독립동맹주석 출신), 부위원장에 김일성(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 허가이(모스크바대학출신이며 소련공산당 간부 출신)가 선출되었다
북로당은 1948년 8월 정권수립을 위해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권수립(1948년 9월 9일)이후인 194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평양에서 비공개로 열린 남북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1국1당 원칙에 따라 현재의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1)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ㄱ.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ㄴ.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ㄷ.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ㄹ.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ㅁ.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2)연안파---모택동부대(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ㄱ.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ㄴ.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ㄷ.김무정(무정)----함북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ㄹ.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을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의용대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남침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었다
(3)소련파----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사진인물, 김일성. 김책)과 소련공산당 출신(사진 인물, 허가이)
ㄱ.소련지역에서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정부에 참여한 인사들
ㄴ.분류
소련군 정찰국이나 대일참전부대---김일성. 김책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
기술자---공군이나 해군등 기술진이나 북한정부 행정요원으로 귀순
당과 행정. 외교관료---허가이등
허가이는 소련정치담당 고문으로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로당과 북로당 합당을 총지휘했으며 허가이는 남로당 박헌영 보증인으로 한국전쟁이후 남로당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과 무장봉기 시도를 하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박헌영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4)조선공산당-----북조선공산당 출신(사진인물,주영하)
주영하등은 김용범이나 현준혁등과 다르게 김일성을 지원했다
*김일성과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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