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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에코 씨의 장남, 김현희 씨와의 면담에 의욕(NHK) 본문
대한항공폭파사건의 실행범인 김현희 전 사형수가 납치피해자이자 교육담당이었던 다구치 야에코 씨의 가족과 면담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힌 데 대해 야에코 씨의 장남은 자신도 그녀를 만나 모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고 싶다며 면담 실현에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1987년에 발생한 대한항공폭파사건의 실행범인 김현희 전 사형수는 앞서 12년 만에 실현된 NHK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납치피해자로 일본어 교육담당이었던 다구치야에코 씨의 가족과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야에코 씨의 장남인 31살의 이이즈카 고이치로 씨는 어젯밤 도쿄에서 가진 강연에서 납치됐을 때 한 살이었기 때문에 거의 기억이 없으며 31년 동안 지금도 어머니를 불러보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구치 야에코와 하라 타다아키의 죽음
일본 경찰은 金賢姬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은혜로 돌변한 피랍 일본 여성을 찾기 위해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다. 몇몇 유력한 실종자의 사진을 가져와 金賢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金賢姬가 『바로 이 여자이다』라고 찍어 준 사람이 다그치었다.
도쿄 가까이에 있는 사이타마縣 출신인 다구치는 金賢姬의 추측대로 음식점에 종사한 적이 있는 여성이었다. 북한 측이 최근 일본 정부 조사단에 밝힌 바에 따르면 다구치는 후쿠오카 미야자키의 아오지마 해안에서 1978년 6월29일에 납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본인이 공화국에 3일 정도 관광을 갔다 오고 싶다고 말하여 특수공작원이 신분을 위장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고 일본 측에 알렸다.
다구치는 1978년 6월부터 1984년 10월까지 초대소(공작원 교육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현실체험을 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설명이다. 金賢姬가 이은혜를 만났다는 장소와 시점이 일치한다.
다구치는 납치될 때가 23세였다. 그녀는 6남매 중 막내딸이었고 납치될 때 도쿄 이케부쿠로 지역 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이혼한 상태였다. 세 살배기 사내아이와 한 살짜리 딸을 두었다.
金正日 정권이 訪北한 고이즈미 수상에게 다구치 야에코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사실상 金賢姬의 존재와 대한항공 폭파를 自認한 셈이다.
북한 정권은 다구치 야에코가 이은혜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이것이 거짓말임은 사태전개의 논리상 누구나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일본 측에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다구치는 1984년 10월에 다른 피랍 일본인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하라 타다아키는 포항 출신 거물간첩 辛光洙가 납치했다. 납치장소도 다구치의 경우와 같은 규슈 미야자키 아오지마 海岸이고 음식점에서 근무한 경력도 같다.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하라 타다아키는 1986년 7월19일에 肝硬變으로 죽었고 다구치는 7월30일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그녀가 남편의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회복단계에 있던 중 황해도 麟山郡의 고갯길에서 타고 있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은 승용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이 죽고 트럭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무덤은 麟山郡에 있었는데, 1995년 7월의 홍수로 上月里 댐이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이 죽었다고 발표한 여덟 명의 피랍 일본인 가운데 여섯 명의 유골이 1995년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런 북한 측의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북한 측은 다구치를 납치한 이유를 신분위장용이라 주장했으나 신분위장이 되려면 연고자나 직계가족이 없어야 하는데 다구치는 6남매 중 막내였고 이혼한 상태에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무덤이 유실되어 유골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북측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과 對南 공작원 출신 탈북자 安明進씨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공작기관이 피랍 일본인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데 그런 식으로 죽도록 방치할 이유가 없다면서 살아 있든지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다구치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곳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인데 충돌사고라니?」라면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金正日이 일본인 납치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는 장봉림 장군은 李韓永 암살 실패로 숙청되었다」
金正日 정권은 일본인 납치를 지휘한 책임자로서 장봉림(사형)과 김성철(15년형)을 처벌했다고 밝혔는데 이 주장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하라 타다아키를 납치해 간 辛光洙는 안기부에 붙들렸을 때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일본인 납치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란 것은 북한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2002년 9월 초 辛光洙는 판문점 북쪽 지역에 나타나 북한 귀환 2주년 행사에서 金正日에 아부하는 발언을 했었다.
장봉림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정보가 있다. 2001년 초 月刊朝鮮 앞으로 北京에서 팩시밀리 다섯 장이 도착했다.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탈북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이 정보를 확인하여 2001년 2월호에 「李韓永(金正日의 처조카) 살해는 김정남(金正日의 장남) 지시를 받은 李昌善(사회문화부장)이 지휘했다」는 題下의 추적 기사를 썼다. 취재과정에서 이 팩시밀리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提報임이 밝혀졌다.
팩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 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군부內의 對南공작 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그 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그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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