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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 기관별․지역별 고문실태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북한정부 기관별․지역별 고문실태

CIA Bear 허관(許灌) 2009. 1. 10. 14:14

 기관별․지역별 증언자 현황

(단위: 명)

구분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평양

특별시

온성군

회령시

무산군

경성군

청진시

함주군

신의주시

국가안전보위부

(시․군 보위부)

7

4

3

1

 

 

7

1

인민보안성

(군 안전부)

 

 

2

 

 

1

 

 

집결소

(도 집결소)

 

 

 

 

2

 

 

 

노동단련대

(군 노동단련대)

 

 

2

 

 

 

 

 

 

1) 국가안전보위부


   (1) 함경북도 (온성군, 회령시, 무산군, 경성군 보위부)


 


   가. 온성군 보위부


 

 

온성군 보위부의 전반적 상황 (1998~2003)

 

  중국 국경과 접해 있는 온성군은 두만강의 폭이 좁고 수심이 낮아 강이 얼어붙는 동절기를 전후하여 북한주민들의 주요한 탈북루트가 되는 동시에, 중국 등에서 체포된 탈북자들이 북송되는 도문다리(남양)가 위치하고 있다.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은 온성군 내의 남양보위부나 종성보위부 등 여러 구역에 위치한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보위부 시설이 있는 이유는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에서는 온성군 내에 위치한 모든 보위부 시설을 온성군 보위부로 통칭한다.

 

  1998년 온성군 보위부에서 3개월간 조사받은 김혁(ID 5)은 ‘중국 사람들에게 불법으로 길을 인도한 간첩죄’와 같은 중죄를 씌우기 위해 ‘비둘기고문’이나 불갈구리, 부삽 등으로 폭행하는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증언은 북한의 불법적인 법집행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북한당국은 당시 온성군 보위부에서 추가조사를 이유로 안전부로 이송, 조사기간을 8개월 더 임의연장(총 11개월)하는 방식으로 북한 형법상 미성년에 해당하는 16세에서 17세가 될 때까지 붙잡아놓은 후 교화소로 보내는 불법을 자행했다. 증언 가운데 특이사항으로 온성군 안전부를 거쳐 3년 형을 받고 회령시 전거리 제12호 교화소로 보내졌는데, 2000년 특대사(특별사면)가 내려져, 교화소의 1/3 정도인 약 2,500명이 감면 및 석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시기적으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미친 긍정적 영향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당시 조치는 ‘조선로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한 일시적 조치였다고 일축했다.

 

  정확한 변화 시기나 개선여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본 보고서를 위해 면담한 2000년 이후 온성군 보위부 체험자 6명에게서는 ‘비둘기고문’ 같은 심각한 고문행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지역들에서의 증언과 온성군 보위부에서 2002년 각각 10일과 1개월간 조사를 받은 신혁철(ID 10)과 강성화(ID 17)의 경우를 종합해보면, 2000년경부터 모든 지역에서 탈북동기, 중국 내 생활과 이동경로, 한국인이나 종교인으로부터의 도움 및 한국행 시도여부 등 유형화된 사항들을 중심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잠을 재우지 않고 야간에 조사하거나 일상화된 폭행을 통해 자백을 받는 방식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여성에게는 입소 즉시 숨겨둔 돈을 갈취하기 위해 옷을 모두 벗기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뽐뿌질을 100회 정도 시키고, 심지어 자궁에 손을 집어넣어 검사하는 비인간적 처우가 일상화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탈북동기에 대한 조사와는 무관한 불법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조사관들이 개인적 금전갈취를 위해 중국에서 돈을 얼마나 벌었고, (중국에) 돈이 남아있으면 다시 가져올 수 있는지를 묻기도 하였다고 한다.

 

  2003년은 중국에서 사스(SAS)가 유행하여 강제 송환되는 탈북자가 많아 대체로 단기간 조사를 실시하였다. 김정숙(ID 13)에 따르면 한 번에 850명이 북송되기도 할 정도였고, 잡혀온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오래 조사할 수 없었는지 10일 만에 조사가 끝났다고 한다. 다만, 사스라는 일시적 요인이 작용한 것인지, 실제 조사기간의 단축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2002년 이후 보위원들이나 간수들이 다른 수감자들이 보는 곳에서는 직접 구타하지 않고, 죄수들끼리 강제로 싸우게 하거나 대신 구타를 하도록 명령하는 불법이 자행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박영희(ID 19)는 자신은 많이 맞지 않았지만, 임산부가 중국인 씨를 배어왔다고 구둣발로 배를 걷어차여 강제유산당하는 것을 목격했고, 박영희와 원철(ID 15)은 보위원이 죄수들끼리 강제로 싸움을 붙이거나 한 죄수가 다른 죄수를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정숙은 감찰과장과의 개인적 친분 덕분에 자신은 고문 받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나무 몽둥이나 쇳대로 두들겨 맞고, 구둣발로 차이는 것을 목격하였고, 더한 고문을 받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았으나 소리로만 들릴 뿐, 직접 볼 수는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2003년 당시 13세의 미성년자였던 원철에 따르면,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9일 동안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책상 다리를 하고 두 손을 앞에 놓은 채로 꼼짝 못하고 앉아있게 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맞았다고 한다. 또한 허약(영양실조)으로 정신이 없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답하지 못하자 조사관이 주먹으로 얼굴 정면을 세 번 가격하여 기절하기도 했으며, 함께 잡혀간 자신의 어머니는 훨씬 많이 맞았다고 증언하였다. 온성군 보위부에서는 북한이 가입한 아동권리협약(CRC)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혁 (1998.9~12. 3개월)1)


  나는 1998년부터 초부터 아는 형과 함께 중국 연길로 넘어가 주로 과수원일이나 농사를 도와주며 먹을 것과 돈을 조금씩 가져왔다. 하지만 공안들이 자주 검사를 나오기 때문에 한 달 이상은 머무를 수 없어서 넘나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98년 9월 아는 사람의 밀고로 국가안전보위부 130호 요원들과 함경북도 온성군 종성보위부 소장이 나를 잡으러 왔다. 도망칠 틈도 없이 포위되어 온성군 종성보위부로 끌려갔다. 2×1.5㎡ 정도의 작은 방에 갇혔는데, 먹을 것은 하루에 장마당 국수 한 그릇이나 찐빵 2개 정도였다. 그곳에서 12월까지 조사받았다. 나를 취급한 사람들은 보위지도원 이 씨와 보위부 소장이었다. 보위부 예심기간 중에는 면회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회적 배경이 든든한 사람은 예심기간 중에도 가능한 듯했다. 보통 사람은 조사가 끝나고 형이 확정되고 나서야 면회가 가능했다.


  자백을 받기 위한 가장 심한 고문은 ‘비둘기고문’이라는 것이었다. 양팔을 뒤로 꺾어 실내에 있는 스팀관에 수쇄(수갑)로 묶어 놓으면 앉기도 힘들고 서기도 힘든 상황이 되는데, 이렇게 묶어 놓고 구둣발로 차고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몽둥이)로 마구 내려쳤다. 나는 각목에 맞아 머리가 찢어졌다. 굵고 긴 몽둥이로는 머리, 다리, 몸 어디든 사정없이 때렸다. 두 손을 살창(창살) 위에 올려놓게 하고 권총을 청소하는 쇠 소재대로 내려치기도 했고, 양손 엄지손가락을 포승줄로 묶은 다음 팔위를 밟고 올라서기도 했다. 부삽, 불갈구리 등 눈앞에 보이는 흉기는 무엇이든지 사용했다. 날아오는 부삽을 막다가 왼쪽 손목이 3cm 정도 찢어졌고, 두 손 엄지손가락에 동그란 흉터가 남아있었는데 오래되어 지금은 지워졌다.


  맞아서 손등이 멍들고, 비둘기고문으로 팔목이 멍들고, 부삽에 맞아 온몸이 퍼렇게 멍들어 몸을 움직이는 것도 고통이었지만 무엇보다 밤이 되어도 잠자리에 눕기가 힘들었다. 땅에 닿는 부위가 다 멍들어 고통이 심해서 꼬박 앉아서 자야 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일이 3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배가 고파서 국경을 넘어 다닌 것뿐이었는데, 결국 ‘중국 사람들에게 불법으로 길을 인도한 죄’가 씌워졌다.


  오랫동안 맞아서 부축을 받아야 겨우 일어설 수 있는 정도였고, 치료 같은 것은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냥 죽든 살든 내버려둘 뿐이었고, 끈질기게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다행이었다.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의료검진을 받는다고 해도 의사가 잘못된 고문 때문에 받은 피해라고 발설할 수도 없고,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 항의할 수도 없다. 어차피 일반주민들은 대부분 한 번씩은 보위부나 안전부에 잡혀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각자 속으로만 알고 있고, 다시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보위부에서는 무서운 고문을 하면 그 고통을 못 이겨 죄를 시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문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사람도 거짓자백을 하게 되고, 죄도 없이 형벌을 받는 것이다.


  조사 중에 맞아서 사람이 죽을 경우에도 그 이유에 대한 검사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으며 해당 보위부나 분주소 안전부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죄책감)으로 자살 한 것이라고 둘러대거나 그런 식으로 문서를 꾸며버린다. 결국 죽은 사람만 잘못이고, 억울하게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으면 가족들에게 시체를 돌려주기는 한다. 하지만 고문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해도 한국처럼 가족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부검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부검은 보위부나 안전부에서 제기하지 않으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죽음에 대해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씻지 못하고 죽은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할 처분이라고 말하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죄인의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영향을 미친다.


  억울하게 죄를 쓰고 고문을 받았다고 해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다. 군(郡)당에서 입은 피해를 상급기관인 시(市)당에 가서 호소하면 오히려 더 무서운 보복을 받는다. 그것이 두려워서 살아서 나오기만 하면 그저 다행일 뿐이다. 보위부나 분주소에서 내보낼 때 “내가 너를 좀 더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리는데, 이 말은 “네가 죄가 없어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불충분해서 당분간 풀려나는 것이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다시 잡혀올 수도 있다”는 협박으로 받아들여져 겁이 나서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다. 돈이 많거나 힘 있는 사람을 뒤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차피 보위부는 윗 놈이 아랫놈들의 꿀을 받아먹고 아랫놈들은 윗놈에게 도움을 받고 사는 한통속이기 때문에 종국에는 제기한 사람만 죽음으로까지 가는 무서운 후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는 3개월 동안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온성군 종성구 분주소로 보내져 다시 3개월을 있다가 1999년 3월 24일 온성군 군(郡)안전부 감옥(구류장)으로 옮겨져 8개월 동안 갇혀있어야 했다. 보위부 조사과정에서 이미 몸이 더욱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화장실에 갈 때도 네 발로 기어서 가야 했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벽을 잡지 않으면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390g밖에 안 되는 강냉이 껍데기 밥을 먹어야 했고 국까지도 맹물에 염장 무우 몇 조각을 동동 띄워 놓고 주는 것 고작이었다. 감옥에서는 누구나 세 달이면 허약자가 되었고, 4개월째부터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정신적 싸움을 해야 했다. 90%가 허약자였고 나는 허약에 걸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났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만 17세가 된 것이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으니 꼼짝없이 형기를 살아야했다. 북한에서는 17세 이전까지는 미성년이기 때문에,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붙잡아 놓은 것이었다.


  1999년 11월, 3년 형을 받고 함경북도 회령시 전거리 제12호 교화소로 보내졌다. 허약(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어 병반에서 지냈는데, 나를 금방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뒀다. 간신히 죽지 않고 살았다. 3년을 꼬박 교화소에 있을 생각을 하니 절망적이었지만, 2000년 7월 2일 생각하지도 못했던 특대사(특별사면)을 받아 7월 6일에 풀려났다. 그때 대사령을 받은 교화생들은 약 2,500명 정도였는데, 교화소의 1/3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대사령을 받은 뒤, 다시 사회에 나와도 갈 곳이 없는 나는 또다시 몸을 회복 할 사이도 없이 2000년 8월 11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많은 고생 끝에 도움을 받아 2001년 9월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김  란 (가명, 2000.6.30~7.11 | 11일)2)


  1998년 12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장에서 만난 여자 3명과 함께 중국으로 넘겨주는 대가로 200위안을 주고 두만강을 건너 탈북에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움을 얻어 1999년 1월부터 연길 식당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1년이 지나도 월급을 주지 않기에 월급을 달라고 계속 요구했더니, 나를 공안에 신고했다. 2000년 6월 11일 갑자기 식당에 닥친 공안에 잡혀 연길 파출소에서 일주일 동안 조사받고 도문 변방구류장으로 보내졌다. 도문 변방구류장에서는 앞, 뒤, 옆모습을 모두 사진으로 촬영하고, 조사를 다시 했다. 북한으로 송환되던 날에는 도망가지 못하게 남자는 손과 발 모두 묶거나 수갑을 채우고, 여자는 두 명을 한 조로 엄지손가락을 같이 잡아맨 다음 6월 30일 우리를 온성보위부로 넘겼다.


  보위부에 도착하니 먼저 짐을 검사하고, 옷을 다 벗기고 손을 위로 올리게 하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하는 뽐뿌질을 시켰다. 항문이나 자궁에 숨겨두었던 돈, 반지 등을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오는 것이 없고, 의심이 가면 우리를 눕힌 다음 여자안전원이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자궁 속을 뒤진다. 벗긴 옷은 솔기 하나하나 브래지어까지 모두 뒤집어 본다.


  온성보위부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야 했고, 언제 탈북했고, 북에서 고향이 어딘가, 탈북은 왜 했는가, 한국사람 만났는지, 교회는 갔었는지에 대해 조사했다. 몽둥이로 아무 곳이나 때렸다. 나는 머리를 맞아 기절한 적이 있는데,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그 이후 머리가 아프고, 귀에서 소리가 나며, 지금도 오른손이 떨린다.


  변을 볼 때는 손을 들어 허락을 받아야 화장실을 갈 수 있다. 변을 볼 때도 손을 올리고 있어야 하고, 다 보고 나면 큰 소리로 다 보았다고 말해야 한다. 닦을 휴지가 없어 옷을 찢어 닦기도 한다. 변을 다 보았다고 말하면 감시원들이 들어와 그 변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없는지 헤쳐 본다. 여자들의 경우 생리 때는 헝겊 조각이 없어 그냥 옷에 흘러 묻어도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정말 끔찍했다. 이와 벼룩들이 득실거리고, 주는 식사량도 너무 적어 영양실조에 걸리다 보니 여자들은 생리가 저절로 끊어졌다.


  어느 날 공개처형한다며 온성 보위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처형장면을 보게 했다. 개천 자갈밭에서 여섯 명(여자 2명 남자 4명)을 총살했는데 죄명은 구리 장사, 인신매매 등이었다. 모두가 30~40대였고, 60대의 남자도 1명 있었다. 끌고 나오는데 이미 반죽음 상태였고 혼자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기둥에 머리, 가슴 배 세 부분을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안전원들이 나와 묶인 사람들의 머리 가슴, 배를 향해 3방씩 총을 쐈다. 나는 7살 때부터 청진 수성천에서 공개처형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은 마땅히 죽는구나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공개처형을 보면서는 몸서리가 쳐지고, 구역질이 났다. 그 날 얼마나 토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린다. 공개처형이 끝난 다음 안전원들이 “너희들도 다시 도강하면 저것처럼 죽이겠다”고 말했다.


  2000년 7월 11일 온성 보위부에서 함경북도 노동단련대로 옮겨졌다. 원래 무산에서 살았지만 잘못하면 가족들에게 해가 될까봐 살던 곳이 회령이라고 말해서 9월 30일 회령시 집결소로 보내졌다. 그리고 회령에 살고 있던 사촌 언니의 도움을 받아 3일 후 나갈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언니의 보호를 받다가 병원에 간다고 언니에게 말하고 500위안을 받아 그 길로 무산을 통해 다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화룡, 연길, 장춘 등으로 옮겨다니며 지내다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가는 내용의 KBS 아침마당 방송을 보고,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통일부 하나원 전화번호 알려주었다. 다시 하나원으로 전화를 했더니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 휴대폰 번호와 사무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2004년 6월 시민연합에 도움을 요청해 북경을 거쳐 같은 해 9월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신혁철 (가명, 2002.6.11~21. 10일)3)


  1998년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 있을 때는 짱수(실내공사)를 하였는데, 탈북자라는 약점을 이용해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2002년 6월 3일 중국 연길에서 혼자 체포되어 9일까지 중국 왕청간수소에 수감되었다. 중국공안은 때리지는 않고, 중국내 거주지, 하던 일, 탈북이유와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조사한 뒤 도문변방구류소로 넘겼다.


  도문변방구류소로 보내진 다음날인 6월 11일에 바로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갔다. 보위부에서도 탈북과정과 이유, 중국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디에 살았었는지를 조사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하기도 했고,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몽둥이)로도 두들겨 맞으며 10일 동안 조사를 받기도 했다. 내가 있던 방은 5~7평 정도였고, 최고로 많을 때는 64명이 한 방에 수감된 적이 있다. 보위부에는 총 400~500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는데, 식사는 하루 두 번 옥수수가루를 갈아서 죽으로 주었다. 수저로 5번 정도 떠먹을 양이었다. 그러다가 온성군 안전부로 이송되었고, 3일후 온성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강성화 (가명, 2002.11.8~12.8 1개월)4)


  1998년에 처음 탈북해서 연길에서 지내다가 2002년 10월 20일 조선족과 다툼을 벌이던 중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까운 분주소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탈북자인 것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연길감옥에 수감되어 11월 5일까지 있다가 도문변방구류소로 이송된 뒤 3일 후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재이송되었다.


  온성군 보위부에서는 1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 옷을 모두 벗겨놓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뽐뿌질을 50번씩 시켰다. 몸속에 숨긴 돈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하는 것인데, 돈이 나오면 무조건 뺏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여자 보위원들이 몸을 몽땅 한번 수색하고 다시 돌려 세워서 뽐뿌질을 50번씩 더 시킨다. 그래도 돈이 안나오면 심지어 자궁에 손을 집어넣어서 검사하기도 한다. 나는 항문에 중국돈 600위안을 말아서 넣었는데 다행히 빠져나오지 않아서 걸리지 않았다.


  5~7평 정도의 방에 50명 정도씩 수감시키는데, 사람이 많이 차면 복도에서 한 줄로 앉아서 대기하고 서로 겹쳐 앉아서 자야했다. 하루에 세 끼는 먹을 수 있었지만 강냉이가루로 만든 국수를 몇 가닥 넣고 국처럼 만든 것이어서 후루룩 마시고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간지 3일이 지나서 개별적으로 불러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언제 넘어갔는지, 어떻게 지냈고, 남조선 사람과 만났는지, 교회에 간적이 있는지를 주로 물었고, 중국에서 돈을 얼마나 벌었고, 돈이 남아있으면 다시 가져올 수 있는지를 묻기도 했다. 나는 살창(창살) 밖으로 내밀게 한 손을 내려친 쇳대로 맞은 정도였지만, 보위원들이 다른 사람들을 때릴 때는 군대격술(북한식 태권도)을 하는 식으로 두들겨 패고, 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나보다 먼저 잡혀온 사람들 중에서 동남아에서 남조선으로 가다가 잡혀와 한국행 시도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6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완전통제구역(관리소)으로 보내졌다고 들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2002년 12월 8일 경성군 보위부로 보내져 2003년 2월 22일까지 2개월이 넘게 더 고생했다.



  박영희 (가명, 2003.4.30~5.20 3주)5)


  2003년 3월 23일 중국에서 물건을 좀 구해다가 북한에서 팔아보려고 도강을 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도문변방구류소로 잡혀갔다. 당시 중국에는 한참 사스(SAS)가 유행해 탈북자들의 북송이 많은 시기였다. 그곳에서는 중국에 왜 왔고, 어떻게 왔는지 등을 조사받고 구둣발로 차이기도 했다. 식사는 보장되었지만 속옷만 입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4월 30일에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송환되었다. 조사내용은 주로 도강한 시기와 이유, 그리고 중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크게 맞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중국인 씨를 배어왔다고 구둣발로 임산부의 배를 차서 강제로 유산시키는 것도 보았고, 보위원이 죄수들끼리 강제로 싸움을 붙이거나 한 죄수가 다른 죄수를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온성군 보위부는 온성군 안전부 바로 옆에 있는데, 1호, 2호, 3호 세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비좁은 방은 사람이 꽉 차게 앉아 누울 수도 없었고, 앉아서 잠을 자야 했다. 발 하나 옮길 틈도 없는 곳에서 20일 동안 있었다. 식사는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지만, 강냉이에 돌가루와 각종 가루를 섞어 만든 강냉이 죽이었고, 한 끼에 100cc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것을 그나마 음식이라고 먹다보니, 체내에 수분이 다 증발되어 여자의 경우 금방 젖가슴이 사라지고 얼굴과 엉덩이 부분의 살이 사라져 뼈만 남을 정도였다.


  무산군 보위부에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무산군 보위원이 오면 뇌물을 써서 빨리 풀려날 생각이었는데, 무산군에서 사람이 오는 것이 늦어져 2003년 5월 20일에 청진시 도집결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청진에 있는 친척이 도집결소장을 만나 뇌물을 바쳐 병든 환자들에 섞여 함께 빠져나와 22일 만인 7월 12일 무산군 안전부로 보내졌다.



  김정숙 (가명, 2003.5.3~5.13 10일)6)


  2003년 4월 중국 연길에서 잡혀서 연길감옥과 도문변방구류소를 거쳐 2003년 5월 3일 온성군 보위부로 강제 송환됐다. 한창 사스(SAS)로 탈북자들이 많이 잡혀나갈 때였는데, 한 번에 850명이나 북송되기도 했다. 잡혀온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오랫동안 조사할 수 없었는지 10일 만에 조사가 끝났다. 방은 4개였는데, 여자 1개, 남자 3개였고, 7평 정도씩 되는 방에 보통 30명 정도 수용되었다. 식사는 100g 정도씩 강냉이 국수죽으로 세 끼를 먹을 수 있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보위부에서의 조사는 언제 도강했고, 돈은 어디서 났으며, 중국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폭행이나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나는 군에서 장령 출신이었는데, 온성군 안전부 감찰과장이 군 복무 당시 내 병사로 근무했었기 때문에 친분이 있다 보니 뒤를 봐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맞는 것은 많이 봤다.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몽둥이)나 그보다 얇은 쇳대로 아무 곳이나 마구 두들겨 패고, 구둣발로 차는 일이 많았다. 더한 고문을 받는 사람도 많았을테지만 소리로만 들릴 뿐, 직접 볼 수는 없었다.


  2003년 5월 13일에 온성군 노동단련대로, 6월 8일에는 청진시 도집결소로 옮겨졌고, 7월 15일에 어랑군 안전부 감찰소 구류장으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이동하는 중에 탈출했다.



  원  철 (가명, 2003.11.20~11.29 10일)7)


  1998년에 먼저 탈북한 엄마를 따라 왕청에서 지내다가 2000년 춘량진 양광촌으로 이사했다. 조선족의 도움을 받아 한족학교에서 5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2003년 11월 14일 공부하는 중 공안이 와서 엄마와 함께 왕청 감옥에 잡혀갔다. 그곳에서 3일 있다가 도문변방구류장으로 보내져서 누구와 같이 탈북 했는지, 언제 왔는지, 도와준 사람 누구인지,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해 조사받았다. 그래서 탈북할 때 물이 깊어 다른 남자가 도와줘서 넘어왔는데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내가 열 세 살 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더 이상 조사하지는 않았다. 식사는 한 끼에 선 밥을 반 주먹 정도와 소금국을 주었는데,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이미 허약에 걸려 있었다.

  다시 3일 후인 2003년 11월 20일쯤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갔다. 남자, 여자를 나누어 조사하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따로 조사받았다. 엄마가 나중에 이야기해주었는데, 24세 정도의 여자가 조사를 했다고 한다. 여자들은 옷을 벗긴 후 손을 위로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뽐뿌질을 반복적으로 시킨다고 했다. 남자는 팬티만 입게 하고 나머지 옷은 모두 벗게 했다. 벗긴 옷은 솔기 솔기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팬티 속을 뒤집어 숨겨놓은 돈이 있는지 찾아내려고 했다.


  감방으로 들어가서는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책상 다리를 하고 두 손을 앞에 놓은 채로 꼼짝도 못하고 앉아있게 했다. 한 사람씩 불러내 조사했는데, 잡혀간 지 이틀 후 간수가 엄마와 나를 불러서 조사했다. 나는 이미 허약에 걸려 정신이 없어서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답을 못했다. 그랬더니 간수가 주먹으로 얼굴 정면을 세 번 때려서 엎어져 기절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때린 사람이 ‘이거 죽었는가?’ 하면서 ‘앞으로 엎드리라’고 했다. 엎드려 있었더니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괜찮아졌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많이 맞았다. 다시 방으로 돌려보내고, 며칠 후부터는 엄마만 조사했다. 잡혀온 사람끼리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어리다고 해서 특별히 다르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어른들과 똑같이 책상다리를 한 채로 꼼짝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간수가 안보고 있을 때 책상다리를 펴거나, 누웠다가 들키면 간수가 앞쪽으로 불러내어 손을 살창(창살) 밖으로 내밀게 한 후 몽둥이나 손전등으로 때려서 손톱이 새까맣게 멍든 사람도 있었다. 식사는 국수죽을 밑바닥이 보이는 정도로 줬는데, 후루룩 마시면 그만이었다.


  변소가고 싶을 때는 일어서서 “선생님 3호 3번 소변볼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간수가 “응”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소변을 볼 수 있지만, 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면 변을 볼 수 없었다. 내가 갇혀있던 작은 방은 열 명 이상이 앉아있어서 상당히 좁았다. 소변을 보는 곳은 방 안에 있었고, 대변은 밖으로 나가 여자들이 있는 방에서 봐야했다. 그때도 “선생님 대변 다 봤습니다”하면 간수가 “응” 또는 “알았다”고 대답해야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누워 잘 때는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똑바로 눕지 못하고 모로 누워 잤다. 바닥은 나무 바닥인데 덮을 담요도, 깔고 잘 요도 없이 입은 채로 그냥 웅크리고 자야했다. 발이 얼어서 나중에 진물이 나오기도 했다. 목욕도 못해 이가 너무 많아 앉아서 내내 이를 잡아야 했다.


  2003년 11월 29일 엄마와 함께 동포구 안전부로 옮겨졌다. 안전부에서는 보위부와 다르게 동복만 벗기고 손으로 옴 몸을 만지며 조사하는 정도였다. 나는 나이가 어려서 안전부에서 하루만 자고 고모네 집으로 보내졌고, 엄마는 노동단련대로 보내져 3개월 동안 고생했다. 엄마는 노동단련대에서 허약에 걸려 2004년 3월 병보로 나왔다. 엄마는 보위부에서부터 이미 허약에 걸려 노동단련대에 들어오자마자 죽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몸을 추스린 후 2004년 5월에 다시 탈북해서 고생하다가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나. 회령시 보위부

 

회령보위부의 전반적 상황 (1999~2004)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보위부 중에서도 회령이 가장 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회령시 보위부는 북한주민들에게 두려운 곳이다. 일반탈북자들이 수감되는 집체감방 외에 정치범이나 간첩죄 혐의자들을 고문하기 위한 지하감방 시설도 운영하고 있는데, 경험자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한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9개월간 지하감방에서 조사받은 김광수(ID 12)는 지상감옥은 주로 일반탈북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정치범이나 간첩죄 혐의자들은 지하감방에 넣는데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었다고 한다. 가둬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라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장시간 구타를 당해 뒤통수가 깨지고, 치아가 모두 부러졌으며, 체포 당시 75kg였던 체중이 38kg으로 급감할 정도로 끔찍한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일상적 구타 외에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악명 높은 ‘비둘기고문’이었다고 한다. 공중에 매달려 오랫동안 묶여 있었기 때문에 마치 가슴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과 전신근육이 마비되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지하감방에서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도 위에서는 들리지도 않아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끝없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결국 보위부에서 씌운 간첩죄라는 누명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간첩죄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보위부 검사장이 최종확인을 나왔기에, 너무 맞다보니 없는 죄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가 조사관에게 다시 구타당했다고 한다. 중앙재판소에서 내려온 검사의 역할은 죄를 확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지만 검사가 보위부로 내려오면 보위부 조사관들이 검사들에게 허위조사를 한 적이 없으니 잘 봐달라고 부탁을 미리 해두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2002년 5개월 이상 지상감옥에서 조사받은 이광일(ID 9)에 따르면 회령시 보위부는 피의자들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동정심을 갖지 못하도록 간교(간수)들을 회령 출신이 아닌 황해도 등 타지 출신들로 채우기 때문에 인정사정없이 다룬다고 한다. 중국에서 조사문건이 넘겨져 조사관들이 한국행 시도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심하게 고문했고, 다른 죄수들을 시켜 구타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원성과 미움을 받아 죄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감방 전체에 500~700회의 뽐뿌질을 시키는 등 단체벌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문과정에서 사망하면 심장마비나 병으로 문건을 작성하기 때문에 고문이 묵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일의 증언에서 몇 가지 특이사항은 김정일이 2002년 5월 29일 소위 ‘5.29방침’이라는 것을 내려 ‘시범케이스’로 총살당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한편 2002년 11월 단순 도강자와 한국문제(한국행시도)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처벌하여 단순 도강자들은 적당히 봐주라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하여 자신도 기대하지도 못했던 병보석으로 일시적 귀가 조치되어 그 사이에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2004년도 경험자인 이영(ID 18)과 리민옥(ID 16)은 회령시 보위부에서의 물 부족과 열악한 위생상태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증언하였다. 특히 이영은 회령시 보위부에서 7개월 이상 조사받는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장기간 임의연장된 구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리민옥은 보위부 조사 이후 인민보안성으로 보내졌는데, 한국영화인 ‘쉬리’와 ‘장군의 아들’을 보았는지에 대한 조사를 받기도 함으로써 북한 내부에 한국영화 테이프가 많이 유통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김광수 (가명, 1999.7~2000.4 9개월)1)


  처음 체포된 것이 1999년 7월 회령에서였다. 술을 마시고 집에서 잠깐 자고 있었는데 보위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알아볼게 있으니 잠시 같이 가자고 했다. 도망갔어야 했는데 큰 죄 지은 게 없으니 따라갔다가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바로 지하감방에 보내져 1주일간 감금되었다. 1주일 후부터 조사가 시작됐는데 보위부원 2명이 들어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관이 회령시 옥산공장 보위부장 지용수였는데, 9개월 동안이나 모질게 고문했다. 나에 대해서는 회령시 보위부가 아닌 상급기관인 함경도 보위부에서 나와서 취급했다.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으로 있던 윤창주와 최상수라는 사람이 기억난다. 이들은 김정일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충성심을 발휘하려고 일을 벌인다. 최상수는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를 잡아서 납치해 북한으로 송환한 인물이기도 했다.


  내가 끌려간 곳은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이었다. 처음 들어가서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몸을 마구 두들겨 맞았다. 내가 부인을 해서 2시간 동안 맞았는데 뒤통수를 한번 맞아서 뒤통수 부위가 깨졌다. 지금도 머리에는 세 군데에 상처가 있다. 각목으로 때려 여기 저기 피가 터지자 무릎을 굽히고 손을 뒤로 얹고 앉게 한 다음 발뒤꿈치로 허벅지를 내려찍었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치아가 몽땅 부러져서 4년간 이 없이 살아야했다. 북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나중에 중국에 나와서 거의 5년 만에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보위부에서는 계속 맞고 조사받고, 맞고 조사받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잠 안 재우고 하는 가혹행위 중에 ‘비둘기 고문’이라 것이 있는데 손을 뒤로 묶고 쇠창살에 수갑을 채워놓는데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면 어깨 근육이 굳고 가슴뼈가 새가슴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몸 전체가 굳어버린다.


  보위부 지상에도 감옥이 있지만 그곳은 주로 잡혀온 탈북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간첩죄 혐의자나 정치범들은 지하감방에 넣는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었다. 가두어 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라는 식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테니 죽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 점점 감각이 없어져 온 몸이 마비되지만 그래도 똥오줌은 나온다. 하지만 화장실도 안보내주니 똥오줌도 그냥 바지에 질질 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었던 지하감방은 아무리 소리치고 비명을 질러도 위에서는 들리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2명이 지하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조사관들에게 “배가 고프니까 뭐 좀 먹고 나면 사실대로 다 말하겠다”고 했더니 먹을 것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다 먹고 난 다음에는 간첩행위를 부인해버렸더니 더 심하게 맞았다. 내가 체포되었을 때 75kg이었는데 조사를 받으면서 38kg으로 몸무게가 줄었다.


  나는 절대로 간첩질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이 맞다보니 그냥 인정해버렸다. 보위원들은 “너는 보위부에서 절대 살아서 못나간다. 인정하지 않으면 죽어서 나가게 될 것”라고 이야기했다. 또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서 “이렇게 살다가 이제 죽는가보다”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나중에는 내가 약해지니까 죽을까봐 때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를 모두 인정해 버렸다.


  마지막에 보위부 검사장이 와서 조사를 했다. 검사 동지에게 너무 맞다보니 없는 죄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억울하다고 했더니 나를 조사했던 조사관이 달려와서 “너 똑바로 대답 안 해?”하면서 또 다시 마구 때렸다. 중앙재판부에서 내려온 검사의 역할은 죄를 확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보위부로 내려오면 보위부 조사관들이 검사들에게 허위조사를 한 적이 없으니 잘 봐달라고 부탁을 미리 해두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는다.


  식사는 완전 쓰레기를 갖다 주었는데, 보위부원들이 먹다가 남는 퇴식물(잔반)을 줬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어서 제대로 주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열이 심하게 나서 형편없었는데 봐주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이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옷도 한 번 갈아입지 못했다. 내가 7월에 끌려갔는데 한겨울에도 잡혔을 때 입고 있던 여름 남방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지금도 치가 떨린다.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에서 죄를 다 인정한 다음에는 재판이나 다른 어떤 절차도 없었다. 지하감방에서 풀려나 일반감옥으로 올라오니 이불짐 같은 보따리만 하나 있었다. 가만 보니 내가 집에서 덮던 이불이었다. 우리 집에 가서 이불을 갖고 온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히 마지막엔 도보위부에 있었던 친구의 도움을 얻어 죽진 않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00년 4월 요덕수용소로 보내져 또 다시 3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했다.2)



  이광일 (가명, 2002.6.21~11.4 4개월 2주)3)


  중국 용정변방구류장에서 2개월 동안 조사를 받을 때 한족 공안들에게 전기곤봉으로 3번 정도 맞았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때리기도 했지만, 북한처럼 심하게 때리지는 않고, 그냥 몇 대씩만 때렸다. 주로 전기곤봉으로 배나 머리를 맞고, 발로 걷어차이는 정도였다. 중국에서 잡혔을 때부터 “이제 북한으로 송환되면 맞아서 죽든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지든지, 아니면 총탄에 맞아 죽겠지”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에 가서 죽느니 차라리 여기서 단식이라도 해서 중국 땅에서 죽어야지”하는 생각에 1주일 넘게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에 데려가 링거를 맞춰줘서 죽지도 않았다. 두 달간 햇빛을 보지 못해 얼굴도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 6월 21일 북한으로 송환됐다.


  교두(국경다리)를 넘어가니 보위원 2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나와 있었다. 그때는 단순 도강자와 한국문제(한국행 시도)를 섞어서 1주일에 3번 정도 호송했는데, 한 번에 7~10명씩 송환됐다. 회령시 보위부로 송환됐는데, 나는 중국에서 작성한 문건이 그대로 넘어와 바로 한국문제로 분류됐다. 2002년 11월 4일까지 5개월 이상 고생했는데, 내가 있던 곳은 1호 감방과 4호 감방이었다.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가면 일단 무릎을 꿇고 복도에 다 앉힌다. 보위부원이 복도에 앉아 있는 나를 보자마자 한국문제로 중국에서 오래 조사받은 것을 알아챘다. 여자들은 밖으로 데려가 햇빛도 쐬어주기도 했지만, 남자들은 반항도 하고 도망갈 우려도 있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담당 보위부 조사관은 “중국 남영에서 잡혔으니 문제가 있는 새끼니까 저 새끼 감시 제대로 하라”고 간교(간수)들에게 단단히 일러놓고 문건을 갖고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간교는 7명이 있었는데 나이는 보통 23살이었고 간교장은 25살이었다. 간교들은 고향도 회령이 아니었고, 황해북도나 황해남도에서 온 타지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인정사정없었다. 나이도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인데다가 나쁜 것만 배워서 사람 때리는 것을 우습게 알아서 우리를 마치 개를 때리는 것처럼 생각했다.


  감옥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자세로 앉아야 했고, 간교들에게는 간교라고 하지 못하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간교가 군화로 얼굴을 두 번 걷어차 코피가 터졌다. 머리를 푹 숙이고 아파하고 있는데, 머리가 숙여졌다며 머리 뒷골을 구둣발로 다시 밟아 입술이 다 터졌다. 저녁에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왼쪽 눈이 빵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첫날이라 그 정도만 하고 감방에 돌려보냈는데 처음 수감된 곳이 1호 감방이었다.


  감방 안에는 화장실 변기가 있었는데, 악취가 정말 심했지만 그 정도는 북한 감옥 어디나 그럴 것이니 빨리 적응해야겠다는 각오와 함께 중국 감옥은 정말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밤 10시 취침시간 전까지는 머리를 숙이고 꿇어앉아 꼼짝도 못하게 했다. 한명씩 따내서(불러서) 조사하는데,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었다가 걸리면 계호원4)(감시)은 때리고 싶은 대로 때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뽐뿌질 1000번이나 화장실 변기를 손으로 닦으라고 시키기도 했다. 아무튼 계호원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노리개(종)처럼 따라야 했다. 만약 계호원들이 결혼해서 가정이라도 있었다면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조금 봐줬겠지만 나이도 어리고, 철도 없고, 악귀 같은 생활이 몸에 배어 그랬는지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욕이 아니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옷에 핏자국이 자욱했다. 오후에 담당 조사관이 불러 조사실로 갔다. 중국 남영에서 잡힌 것으로 되어 있는 내 기록을 보면서, 처음에는 정중하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 그래서 “남조선에 가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고, 남영에 회사도 많고 일자리가 많다고 들어서 일을 하러 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을 한다며 내게 하는 말이 “너도 보위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안 불면 안 불수록 고통만 심해질 것”이라며, “나도 바쁘고 지금 조사할 사람이 많으니 네가 진술서를 써서 시인하고 서명만 하면 끝이니까 빨리 끝내자”고 했다.


  당시 중국에서 지내면서 신앙(기독교)이 생겨 의지할 곳도 없어 신앙에 의지하고 살았는데 감옥에 들어가니 더 간절해졌다. 점점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개보다 못한 쓰레기들한테 거짓 죄를 시인해서 개처럼 죽으면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기왕 죽을 운명이니까 차라리 버티다가 죽자는 생각에 처음부터 한국행을 부인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 한국문제(한국행 시도)는 아니라고 했다. 조사관도 사람을 많이 다뤄봐서인지 거짓말이라고 믿지 않았다. 북한은 컴퓨터도 보급되지 않고 해서 조사관이 문건을 전부 손으로 작성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면 종이를 찢고 다시 써야 한다. 그럴 때는 조사관들도 직접 재떨이로 머리를 까는데(내려침) 그날은 조사관이 나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사관은 간수장을 맡고 있는 학철이라는 사람을 불렀다. 학철이는 간교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키가 180cm 정도나 됐다. 조사관은 그에게 “이 새끼 제대로 안부니까 교양 좀 주고, 내일 되면 제대로 불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학철이에게 끌려갔다. 학철이는 조사를 하고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1호 감방에는 20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각 방에는 감방장이 있는데, 조금 특권이 있어서 머리도 약간 들 수 있고 앉은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일 수도 있다. 감방장은 간교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다. 학철이가 감방장에게 “이 새끼 교양 제대로 시켜서 내일은 제대로 말하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갔다.


  감방장이 일어나 어떤 죄로 들어왔는지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보면서 “이 개새끼는 뭘 안 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나오냐”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는 뽐뿌질을 500개 시켰는데 300개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날 밤에는 밥도 주지 않았다. 밥이라고 해봤자 썩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 2~3 숟가락 정도였고, 물은 밥을 먹고 난 뒤 조그마한 컵에 담아 두 명이 나누어 마시게 했다. 썩은 죽을 못 먹는 것보다 차라리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물도 주지 않았다. 그날은 감방 변기 모서리에 서서 잠도 못자고 온 밤을 새워야 했다.


  다음날 다시 조사를 받으러 갔는데, 조사관이 종이를 3장 주면서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전날과 같은 내용을 다시 썼더니, 조사관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냐”며 발로 무릎을 걷어차면서 간수장 학철이를 불러 욕하고 제대로 일하라고 소리쳤다. 학철이는 나를 간교들이 쓰는 방으로 데려가 혼자서 때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군화로 배를 걷어찼다. 군화에 한대만 제대로 맞아도 숨이 넘어갈 정도로 아픈데, 10분 동안 쉬지 않고 맞았다. 그리고는 머리채를 잡아 끌고 다시 감방에 집어넣었다. 전날 단단히 혼내라고 시켰던 감방장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죄수를 감방장으로 지목하면서 똑바로 교양시키라고 지시하고는 돌아갔다.


  나 때문에 감방 전체가 단체로 벌을 받았다. 뽐뿌질 700개를 시켰는데 땀보다 눈물이 더 많이 흘렀다. 하도 맞아서 얼굴과 다리, 배 어디든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고, 온 몸이 멍들고 상처자국 투성이었다. 단체 벌을 받고나서, 새 감방장에게 또 맞기 시작했다. 단체로 벌을 받아 같은 감방 사람들이 모두 나를 원수로 여겼다. 저녁밥과 물을 안주는 것은 물론이고, “내일도 제대로 불지 않으면 껍데기를 벗겨놓겠다”고 겁을 줬다. 그 날 저녁에도 많이 맞고 전날 밤 잠도 못자고 피도 많이 흘려서인지 변기가 있는 구석에다 재웠다. 다음날에는 조사관이 찾지 않았고, 그 다음날 다시 조사를 받으러 갔는데 그날도 조사관에게 “지도원 동지, 내 대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입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지만 한국 기도는 아닙니다”라며 버텼다.


  감방 안에서 대기할 때, 계호원(감시)들이 주는 벌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계호원은 2시간에 한 번씩 바뀌고, 저마다 좋아하는 벌의 종류가 다르다. ‘신문보기’라는 벌은 의자 없이 신문 보는 자세로 있어야 하는데, 10분도 못 버틴다. 그러면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손을 철창 안으로 넣어 머리채를 잡아채서 바깥으로 잡아당긴다. 그러면 머리가 철창에 세게 부딪친다.

 

  다음날에도 부르지 않았다. 4일 동안 밥도 주지 않았다. 매도 하도 많이 맞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더 이상 맞을 곳도 없었다. 양쪽 눈은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눈이 붙어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입술도 다 터져 엉망진창이었다. 4일을 그냥 내버려두다가 갑자기 더 이상 힘들이지 말고 빨리 끝내자고 말했다.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검열을 나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두 시인하고 말뚝에 묶여 총탄에 죽는 것이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개처럼 죽는 것보다 기왕에 죽을 운명, 맞아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끝까지 부인했다. 그랬더니 한동안 조사실로 부르지 않았고, 나중에는 며칠에 한 번씩만 불렀다. 조사를 받을 때마다 중국에서의 생활로 시작해서 똑같은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말해야 했기 때문에, 그때 이미 벌써 다 외워 버렸다.


  북한에서는 자기 입으로 시인하면 정말 하지 않은 일도 죄를 지은 것으로 된다. 한국처럼 과학적인 증거로 살인자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아도 누가 살인자라고 신고해서 자신이 살인자라고 인정하면 살인자가 된다. 반대로 내가 지은 죄도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면 죄가 되지 않는다. 악이 있는 사람들 중에 보위부 지하감방에서 1~2년이나 버티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지만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북한에서는 죄를 시인하게 하려고 무조건 때리고 굶기고 고문하지만,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면 보위부에서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아남는 경우는 드물고,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


  고문과정에서 사람이 죽으면 심장마비나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문건을 작성하고 시체를 아무데나 묻어버린다. 고문과정에서 뼈가 부러지면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버려 두지만, 감옥이 더럽고 악취가 심해서, 전염병이 돌 때는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고, 그 과정에서 죽으면 내버려 두고, 살면 다시 데려오는 식이다.


  그렇게 고문당하고, 매도 많이 맞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한 달이 지나면서 점차 장기수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1호 감방에서 4호 감방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4호 감방은 특정 범죄인들만 수감되는 방인데, 처음 그곳으로 보내졌을 때부터 이미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원래부터 4호 감방으로 보내지기로 되어 있던 것인지, 조사가 잘 되지 않아서 4호 감방으로 보낸 것인지, 조사를 받는 기간에는 1호 감방에 먼저 수감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4호 감방은 다른 감방보다는 음식이 조금 좋았는데, 죽에 두부콩도 섞어 주기도 했다. 1, 2, 3호 감방은 썩은 강냉이 죽을 주는데, 4호 감방은 조사가 끝나지 않은 장기수들이라서 죽으면 곤란해서 그랬는지 그나마 영양분이 더 나은 음식을 줬다. 하지만 4호 감방으로 옮겨져서도 계속 매를 맞고 벌을 받았다. 1달쯤 지나면서 담당 조사관도 나를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서 “그냥 썩어지게 거기서 죽어라. 내가 네 껍데기를 말려서 죽일 테니 썩어지기 전에 시인하라”고 협박했다. 문건이 다 있어도 계속 부인해서 매도 많이 맞고 고문도 많이 당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진술서를 만들어 지장을 찍게 하지는 않았다. 당시 김정일이 단순 도강자와 한국문제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처벌하라는 방침을 내렸던 때였기 때문인 것 같다.


  북한에서는 ‘시범괘’라고 하여 시범케이스로 처형을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2002년 5월 29일 방침이 내려왔기 때문인지 ‘5.29방침’이라고 불렀다. 아마 그때 쉽게 진술서를 쓰고 시인했으면 총살당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시범괘를 잘 넘겨야 하는데, 수십 명의 조선 여자들을 중국으로 넘겨준 사람이 교화소 몇 년 다녀오고 마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한 명 데려다주고 총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시범괘에 걸리면 죽는다.


  그렇게 버티다가 나중에는 피도 많이 흘려 먹지도 못하고, 더 이상 때릴 곳도 없었다. 못 먹어서 몸도 쪼그라들어 40kg도 안됐고, 머리털도 다 빠졌다. 한 달이 지나면서 1주에 한 번씩 불러 조사했는데 두세 달 지나니 1주일에 한 번도 안 되게 조사하고 내버려두었다. 나중에는 하루 세 끼는 다 챙겨주었지만, 맞아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시신이라도 상하지 않고 보기 좋아야 아버지가 제대로 묻어주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맞아서 죽으면 시신도 집에 보내지 않고 그냥 아무 곳에나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심정은 느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숟가락을 바닥에 갈아 날카롭게 만들어 왼쪽 손목을 그어 동맥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살 팔자인지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간교 서너 명이 잡고 팔을 천으로 감싸 피를 멎게 했다. 물론 병원에 데려가지는 않았다. 그 일로 온몸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도록 엄청나게 맞았다. 기억에서 지우려고 해도 상처와 흉터가 남아있어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때는 영양실조까지 겹치고 너무 허약해서 군화로 한대만 차여도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병보석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2002년 11월 갑자기 도강자들은 적당히 봐주라는 김정일 방침이 떨어져 기대하지도 못했던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처음 북송돼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가서 병보석으로 풀려 날 때까지 옷 한 번 갈아입지 못하고 잡혔을 때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1996~97년 정도에는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하는데, 들은 이야기로는 보위부 감방에서 매일 10구가 넘는 시체가 나왔다고 한다. 2002년에는 도강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그나마 상황이 호전되어 많이 그 정도였던 것 같다.


  하도 썩어지게 되니까 병보석으로 잠깐 회복해서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보위부에서 집에 연락해 아버지가 달려와 달구지에 실어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서 3일정도 쉬면서 의식을 차렸고,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이었지만 밤에 몰래 기어 나와서 아는 형의 집으로 도망쳤다. 내가 몸이 약간이라도 회복되면 보위부에서 금방 또 다시 잡아가기로 되어 있으니 그 형님 집에 좀 숨겨달라고 부탁해서 숨어 지냈다. 20일 정도 지나면서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됐다. 그리고 중국 쪽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서 1500위안을 보내줘 이전부터 알던 경비대원에게 300위안을 뇌물로 주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마중 나오신 전도사님의 차를 타고 이동해 중국에서 10일 정도 보양하다가 중국을 떠나 제3국을 거쳐 2003년 2월 28일에 한국에 입국했다.



  이  영 (가명, 2004.4.9~5.10 1개월)5)


  2004년 3월 17일 연길 역전을 떠나 기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고 내몽골로 가다가 3월 20일 중국과 몽골간 국경선에서 잡혔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수면제 한통을 먹었다. 2일 만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병원이었다. 중국 내몽골 알징(알렌) 변방구류소로 잡혀가 열흘 정도를 보내고 4월 3일 단동 변방구류소로 보내졌다. 단동 변방구류소에서는 조사문건에 지문을 찍게 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3일 후인 4월 6일 다른 일행들과 함께 신의주 보위부로 보내졌다. 다른 사람들은 신의주 보위부에 남아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고, 우리 가족은 3일 후 다시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회령시 보위부에서는 아주 좁은 방에 25명이 있었는데 방에 물이 안 나와 세수도 못하고, 강냉이로 죽을 쒀서 줬다. 총 감방은 1호(남자), 2호(여자), 3호(남자), 4호(여자)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나는 4호, 아들은 3호로 보내졌다. 따로따로 조사받고 말이 서로 맞아야 되었다. 우리 방에서 최고로 오래된 사람이 7개월 있는 사람이었다.


  보위부 중에서 회령이 세다고 하는 이유는 사람을 꼼짝도 못하게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세게 때리고 감방장들이 통제를 심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신의주 보위부보다 감방환경이 더 열악했고, 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도 더 심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양반다리로 앉아 두 손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차렷 자세로 온종일 있어야 했다. 유일한 휴식시간이 밥 먹을 때와 변소 갈 때였다. 1호부터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내가 4호에 있어서 휴식시간이 좀 길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식기에 묻어 있는 것까지 손가락으로 훑어서 먹었다.


  한 방에 한 바께쓰(바가지)씩 물을 주고 하루 동안 쓰라고 하는데, 그걸로 25명이 마시고, 씻고, 변소 물까지 해야 했다. 여자방이니까 경도(생리)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천을 사용했다가 다시 말려서 사용해야했는데, 생리할 때가 가장 물이 부족했다. 7개월 지냈다는 가장 오래된 여자는 한 번도 칫솔질을 못했다고 한다. 오래 있었던 장기수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은 풀 같은 것에 물을 적셔서 대충 씻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몸을 좀 닦고 나면, 다시 힘 있는 사람들이 팬티를 좀 몰래 씻고, 그 다음에 생리한 천을 씻는 식이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남은 물이 까만지 빨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물로 걸레를 빨아서 방을 닦아야했다. 피비린내에 땀내까지 방안에 진동했다. 피를 먹고 사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회령 보위부에서 한 달 동안 조사받고 아들은 미성년자라서 내보내고, 나는 안전부에서 1주일간 추가조사를 받은 뒤 노동단련대로 보내져 5개월 동안 노동단련형을 받았다.



  리민옥 (가명, 2004.4.9~5.10 1개월)6)


  신의주 보위부에서 3일 동안 조사하고 회령시 보위부로 보내졌다. 한 방에 30명씩 있었고, 손바닥만한 수건을 주면서 씻을 때 그것을 사용하라고 했다. 신의주 보위부는 그래도 깨끗한 편이었는데 회령시 보위부는 너무 지저분했다. 세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머리를 감는다든가, 목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몸에는 이가 형편없이 많이 생겼다. 정말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회령시 보위부에서 한 달 동안 조사가 끝난 다음에는 인민보안성으로 보내져 다시 1주일 동안 추가조사를 받았는데, 남조선 영화 ‘쉬리’와 ‘장군의 아들’을 보았는지 묻기도 했다. 인민보안성 단련대로 보내져 2개월 동안 집짓기단련을 받았는데, 지금은 노동단련대라고 하지 않고 노동교양소(회령시 창두 노동교양소)라고 부른다. 노동교양소를 나와 집에 다시 돌아온 때가 2004년 8월 15일이었다.


  한번 중국에 다녀온 사람은 북조선에서 다시 살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먹을 것도,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9월 23일 강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500위안을 주기로 하고 혼자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넘자마자 중국 사람에게 인계되었다. 그 사람이 한족에게 시집가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공안에 넘긴다고 했다. 다시 북으로 송환당하는 것이 무서워 시집가겠다고 했다. 10월 11일 하북성으로 스물 네 살 된 남자에게 팔려가 한 달반 동안 살아야했다. 그곳에는 11명의 북조선여성들이 팔려와 살고 있었는데 10대가 6명이고 20대가 1명, 40대가 4명이었다. 이곳에서 한 언니를 만났고, 11월 20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받아 함께 그곳에서 빠져나와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다. 무산군 보위부


 

무산보위부의 전반적 상황 (1999~2000)

 

  1999년 친척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체포되어 무산군 보위부에서 5개월 동안 예심을 받은 신정애(ID 8)의 경우는 단순도강자에게도 장기간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일본인 귀국자의 자녀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생활고로 인한 단순탈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덕 제15호 관리소로 보내져 1년 동안 수감되었다.

 

  2000년 무산군 보위부에서 예심을 받고 제15호 요덕관리소에서 3년을 보내야했던 김은철(ID 20)은 1999년 12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체포되어 UNHCR의 인터뷰를 받고 난민지위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한 명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은신하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서 다시 무산군 고향집으로 몰래 숨어들어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안전원들에게 붙잡혔다. 권총 총탁으로 머리를 맞아 기절한 채로 맨 땅에 질질 끌려간 곳이 무산군 보위부였다고 한다. 2개월 동안 조사받는 과정에서 종아리 뒤에 굵은 나무를 끼고 꿇어앉은 자세나 공중에 매달린 채로 시도 때도 없이 맞았다고 한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보위원들이 종이에 쓰라고 하는 대로 모두 했다고 쓰고, 4개월 간 보위부 내 구류장에 수감되었다가 요덕수용소로 보내졌다. 자신의 동네에서는 간첩혐의로 보위부에서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김춘애(ID 4)는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 무산군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아 이 기간 동안의 변화에 대해 중요한 증언을 제공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1999년 7월 당시에는 무산군 보위부 내에 구류장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만 조사받고 바로 무산군 안전부로 보내졌지만 2000년에는 보위부에도 남녀 각 1개씩의 방을 갖춘 구류장 시설이 생겨나 일주일 이상의 장기간 조사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앞서 1999년 11월부터 5개월 조사받은 신정애의 사례를 함께 고려하면 무산군 보위부내에 장기조사를 위한 구류장이 갖춰진 시기는 1999년 7월부터 11월 사이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부터 북한 당국이 늘어나는 탈북자들을 조직적으로 단속하고 처벌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앞서 살펴본 온성군 보위부와 마찬가지로 숨긴 돈을 갈취하기 위해 여성 탈북자들의 옷을 모두 벗긴 상태에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도록 하는 뽐뿌질을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확보된 증언들 가운데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인 금전갈취 행위가 가장 빨리 나타난 시기와 지역은 2000년 무산군 보위부와 신의주시 보위부였다.



 

신정애 (1999.11~2000.4 5개월)1)


  1999년 8월 말, 청진에서 일본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중국으로 와달라고 해서 만났다. 언니는 이번 같이 좋은 기회는 다시 없을테니 돌아가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두고 온 가족 걱정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얻은 돈을 조금 환전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무사히 국경을 넘긴 했지만, 결국 체포됐다. 무산군 보위부로 끌려가 5개월 동안 예심을 받아야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다섯 달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똑바로 앉아 있어야 했다. 하루 식사량이 옥수수쌀로 240g이었다. 나는 다섯 달 예심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 년, 일 년 반이나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예심을 받고 나면 몸이 다 허약해져 죽기 직전이 된다.


  북한에서는 요덕이라 하면 영영 다시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예심이 끝나고 내가 요덕으로 보내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제 거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요덕에 있던 일 년 동안 우리 구역 200명 중에 20명이 죽었다. 나도 거기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2001년 4월 29일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에서 나올 때는 구루마(손수레)에 실려 나왔다. 요덕에 일 년 있다가 집에 오니 딸과 사위는 중국으로 탈북했고, 남편도 일찍 사망했다. 이런 사정으로 생활하기가 너무 막막해 2001년 7월 다시 탈북했다. 밤중에 중국에 도착하고 다음날 사위가 마중 나왔는데, 그곳에서 나와 사위 모두 중국 공안에 잡혀 북으로 송환됐다. 청진으로 보내졌지만, 친척들의 노력으로 금방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위는 곧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2001년 10월 세 번째 탈북했을 때도 연길에서 중국공안에 잡혀 온성으로 끌려갔다. 이때는 과거 탈북경력이 발각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갖고 있던 돈을 몽땅 주고 문건을 파기하고 달아날 수 있었다. 2001년 11월 네 번째 탈북에 성공했다. 중국에서 딸을 만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2002년 9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김은철 (2000.1.16~6.30 5개월 2주)2)


  도망친 지 3일 동안 밀산 변방대에서 잡지 못하자 밀산 공안 30여명이 연길까지 잡으러 온 것을 알았다. 연길에 더 머무를 형편이 되지 않고 더 이상 도망갈 곳도 막막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용히 숨어 지내면 모르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화룡시 덕화진을 통해 살얼음을 기어 두만강을 건넜다. 아는 집에 들러 하룻밤 보내고 북한 무산군으로 들어갔다.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아는 사람 집을 찾아갔다. 연길교회에서 도움 받은 500위안으로 쌀을 좀 사다줬더니 숨겨주었다. 부탁해서 아버지께 연락드렸다. 찾아오신 아버지께 쌀을 좀 사드리고 며칠 더 그 집에 숨어 있었다. 2000년 1월 16일, 보름달이 환하게 떴다.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집에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 사이에 중국에서 무산까지 내 소식이 알려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안전원들이 순식간에 덮쳤다. 언제 공문이 넘어왔는지 우리 집에 감시 매복이 붙어 있었던 것이었다. 권총 총탁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내가 쓰러지자 30분 동안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두들겨팼다. 구두끈으로 다리를 묶인 채 맨 땅에 질질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무산군 안전부였다. 나는 보위부 취급 대상자였기 때문에 안전부에서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무산군 보위부로 옮겨졌을 때는 완전히 달랐다. 6개월 동안 굵은 나무 각자가 종아리 뒤쪽에 끼워진 채로 방열판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맞았다. 시도 때도 없이 매일 맞았지만 절대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하면서 열흘 정도는 버텨냈다. 하지만 곧 중국 공안으로부터 내 사진과 문건 등 조사한 모든 자료들이 다 넘어왔다. 내 눈 앞에 모두 보여주는데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중국 가서 기독교 만났나?’ ‘무슨 말했나?’ ‘다 말해라!’ 나는 교회에 갔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러시아로 가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 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팔다리 모두 사방으로 묶여 공중에 매달린 채로 맞다보니 나라는 인간에 대해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를 100장정도 주면서 무조건 채우라고 했다. 맞아가면서 무조건 쓰라고 하니 한 짓, 안한 짓 물어보는 대로,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요구하는 대로 다 했다고 썼다. 2개월 동안 매일 맞으며 취급(조사)받은 뒤에는 구류장에서 4개월 더 앉아서 넘겨지기를 기다렸다. 구류장이라고 해서 편한 곳은 아니었다. 계호원들이 악착같아서 가만 두지 않고 계속 때렸다.


  하루는 아버지가 면회 오셔서 떡을 넣어주셨는데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달라고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계호원들은 못주게 했다. 그래서 잠깐 지켜보지 않을 때 건네주려다 그만 걸려버렸다. 계호원은 벌로 머리를 벽에 계속 박으라고 했다. 소리가 크게 나도록 받으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쿵쿵 소리가 울릴 정도로 머리를 벽에 찧었다. 이마에 피가 터지기 시작하자 모두 지켜보는 곳이라 그랬는지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화장실 변기에 계속 머리를 박으라고 했다. 하도 악이 나고 서러워서 이를 악물고 차라리 이렇게 죽자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머리를 찧었다. 피가 퍽퍽 터져 피범벅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뒤 담당지도원이 내려와 왜 그랬는지 물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뒷일이 겁이 나서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지도원이 계속 물어보자 나중에 결국 이야기했더니 청통편(중국약)을 으깨어 발라주었다.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부터는 더 힘든 벌을 주었다. 죄수들로 가득한 집결소에서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게 하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하는 뽐뿌질을 500번씩 당하고 나면 사람이 그야말로 개가 된다. 제대로 말리지 못해 이가 득실득실하고 먼지가 가득 쌓인 담요를 쓰고 땀을 질질 흘려 범벅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인간다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2000년 6월 30일,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19살 때였다. 요덕이 어딘지도 전혀 몰랐고 영영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겠구나 하는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 길이 없었고, 동네에서는 내가 간첩혐의로 보위부에서 총살당해 가마니에 싸서 버려졌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김춘애 (가명, 2000.7.15~7.21 1주)3)


  2000년 7월 10일 다시 중국 화룡시에서 체포되어 도문 변방구류소에 수감되었다가 7월 15일 무산군 보위부로 보내졌다. 무산군 보위부는 혁명역사 연구소와 가까이 있는데, 1999년에는 위치를 몰랐는데 2000년에는 지리를 대충 알게 되었다. 1999년 7월에 붙잡혔을 때는 무산군 보위부에 구류장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간 그날 바로 조사받고 하루 만에 무산군 안전부로 보내졌지만 2000년에 가보니 무산군 보위부에도 구류장이 생겨있었다. 남자, 여자 1개씩 방을 두고 오랫동안 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1999년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무산군 보위부에서 하루 만에 조사받고 단련대나 수용소로 보내진 마지막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잡혀온 사람들이 ‘돈을 뺏기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고 해서 모아둔 돈을 먹었다. 토하면 또 삼켰다. 중국돈 300위안을 딸이 삼킨 덕분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다 벗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하는 뽐뿌질을 거쳐도 들키지 않았다. 딸은 먹은 돈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위원들이 ‘이년들이 중국에서 얼마나 잘 먹었길래 여기서 안 먹느냐’며 막 때렸다. 그곳에서는 우리처럼 돈 먹는걸 알기 때문에, 변을 볼 때는 여자들도 화장실이 아닌 바깥에서 누게 하고 일일이 검사했다. 딸이 오랫동안 변을 안보니까 이것들이 세 번에 먹을 변비약을 한번에 먹였다. 딸은 너무 아파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참았다. 나는 거기서 줄반장을 해서 끝에 앉았는데, 우연히 계호원(감시)과 이야기 하다가 그의 어머니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들어보니 내가 군대 생활할 때 특무장으로 있던 여자였다. 서로 그걸 알게 되니까 좀 봐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보초의 눈을 피해 감방 안에 설치된 칸막이 간이화장실에서 딸이 변을 보고 휘저어 돈을 하나를 건졌다. 그리고 또 배가 아파서 설사를 했는데 하나는 건지고 하나는 보위원이 다가오기에 그냥 포기하고 떠내려 보냈다. 이렇게 해서 200위안을 건져내고 100위안은 떠내려갔다.


  하지만 한 방에 같이 있던 여자가 우리를 신고했다. 1999년 12월에 잡혀온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중국에서 한국으로부터 온 친척을 만나 3000위안을 받았다는 죄목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바로 못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우리가 돈을 먹고 들어온 것을 고자질했다. 종합지도원에게 끌려가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앞니 3개가 부러졌다. 그래서 100위안을 뇌물로 주고 100위안은 숨겼다. 한국이나 기독교와 관련되었는지 계속 취조당했다. 나는 죽어도 관계가 없다고 버텼다. 그리고 1999년 남동생이 나를 찾으러 중국에 가서 남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다가 잡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는데, 나와 딸이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조사를 더 받았다. 이틀 정도 더 취조를 하더니 다른 사람들은 보위부로 보내는데, 우리는 무산군 안전부로 넘겼다. 무산군 보위부에서는 모두 7일 동안 조사를 받고 안전부 감옥에서 하루를 보내고 7월 22일 무산군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라. 경성군 보위부


 


경성보위부의 전반적 상황 (2002~2003)

 

  온성군 보위부를 거쳐 2002년부터 2003년까지 2개월 이상 경성군 보위부에서 추가조사를 받은 강성화(ID 17)는 경성군 보위부의 피의자에 대한 대우가 온성군 보위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남성 한 명이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고문까지 당해 허약(영양실조)으로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인터뷰 대상자 20명 중 경성군 보위부에서 조사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였다. 따라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다른 체험자를 찾아내어 추가보고서에서 보강조사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그녀의 증언 중 특이한 내용은 2002년 말 “김정일이 탈북해서 돈 벌어온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면 다시 또 중국에 가게 되니 빼앗지 말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말을 김정일이 실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당국 내에서 그런 말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 내 일부 언론에서도 2002년을 전후하여 김정일이 탈북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다는 미확인된 보도가 있기도 하였으나, 실제 이 기간은 물론 이후 2005년까지의 최근 탈북자들의 증언들에서도 여성에게 성적 모멸감을 주는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돈을 빼앗는 행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볼 때 강성화의 의견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김정일이 그러한 지시를 실제로 내렸으나 하급 기관에서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는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성화 (가명, 2002.12.8~2003.2.22 2개월 2주)1)


  고향인 경성군 보위부로 옮겨졌지만 고향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없었다. 온성군 보위부와 거의 같았다. 꿇어앉아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리도 펴지 못하고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온종일 그 자세로 있어야했다.


  남자 죄수 한 명이 사형당할 것을 알아서인지 먹는 것도 안 먹고 맞기도 많이 맞아서 허약으로 죽었다. 나는 허약 2도에 걸려서 함흥 오로단련대에서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집에 남은 가족도 없고, 죽어도 함흥에 가서 죽어야지 하는 마음에 그곳에 보내달라고 의사에게 사정했다.


  오로단련대로 보내지기 전에 재판은 따로 받은 적이 없었다. 단순 도강죄로 3번 걸린 것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형을 받게 되는지도 몰랐다. 단련대로 가기 전에 재판은 따로 받은 적이 없는데, 경성군 보위부에서 보위지도원이 “3년 정도 살아라”고 지나가면서 이야기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함흥 오로단련대는 1년형이라고 귀뜸해 줘서 그제서야 1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3년 2월 23일에 함흥 오로단련대에 도착해서 다음해 2월에 나가야 하는데 2003년 가을에 감면이 내려와 1개월이 줄어 2004년 1월 22일까지 그곳에서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급기관에서 나와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 때 중앙기관에서 2~3명이 새까만 양복을 입고 승용차를 타고 파견을 나와서 한 그릇에 콩알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하고 제대로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 즈음 형이 감면된 것 같다.


  2002년 말 들은 또 다른 이야기는 김정일이 “다른 나라에 가서 남의 옷을 입어도 마음만은 조국통일의 염원을 갖고 있으면 다 좋은 일이다”라고 했다는 것과 “탈북해서 돈 벌어온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면 다시 또 중국에 가게 되니 빼앗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김정일이 실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당국 내에서 그런 말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 


 

(2) 평안북도 (신의주시 보위부)

 

 


 

신의주보위부의 전반적 상황 (1998~2004)

 

  중국과 접해 있어 두만강을 건너는 탈북자가 많은 함경북도 온성군 보위부와 회령시 보위부와 유사하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평양 간 최단경로상에 위치한 관문인 신의주시 보위부도 중국 단동변방구류장으로부터 강제 송환되는 탈북자들이 매우 많은 곳이다.

 

  1998년 신의주시 보위부에서 2개월 동안 조사받은 박은철(ID 2)에 따르면 신의주 보위부는 중국에서 송환되어 온 사람을 매우 가혹하게 다루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세의 미성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의주시 보위부로 끌려가 부동자세로 온종일 꿇어앉아 있도록 하는 벌과 구타를 당했으며, 조사 이후 도집결소로 보내졌다.

 

  1999년 1주일간 조사받은 강원철(ID 1)은 박은철과 동갑인 미성년자였으나 박은철과는 달리 하루 종일 부동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할 뿐 심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사내용은 두 명 모두 주로 집주소와 나이, 탈북시기와 이유 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강원철의 경우, 신의주 보위부에서 1주일 동안 1차 조사를 받은 뒤 신의주 집결소로 보내졌을 때 하루 동안 서류 재검토라는 이유로 2차 조사를 받았고, 청진시 농포집결소로 보내져 3개월 동안 수감된 기간에는 더 자세하게 3차 조사를 받았으며, 무산군 안전부로 보내졌을 때에도 간단하게 4차 조사를 받았다는 점이다.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벌을 받은 편이라고 하지만 네 차례에 걸쳐 이송되는 기관에서마다 반복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최소한 1999년 8월까지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체포당시 상황에 대한 문건을 북한측의 요구나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넘겨주는 정도였고, 북한 내에서도 조사방식이나 기관 간 정보공유체계가 비교적 느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0년으로 들어서면서 중국 감옥에서도 조사가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대련에서 붙잡혀 신의주 보위부로 강제 송환되어 1주일간 조사받은 박선자(ID 7)의 경우에는 이미 중국 감옥에서부터 탈북이유와 함께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계속적인 심한 심문을 1개월 동안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신의주 보위부로 보내졌을 때에는 조사를 목적으로 한 특별히 심한 고문은 받지 않았음에도 1주일 만에 정치적 범죄가 씌워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1999년 8월 이후부터 중국공안이 탈북자들에 대한 조사문건을 북한으로 넘기는 것이 실제로 정례화 되었고, 이러한 협조관계에 필요한 근거로 1998년에서 1999년 사이에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와 중국 공안부 사이에 탈북자 송환시 조사문건 제공에 대한 비밀협정이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 역시 다른 조사기관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옷을 벗긴 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뽐뿌질)를 당하고 돈을 갈취 당했으며 몽둥이질, 주먹질, 발차기 등 극심한 구타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같은 해 20일간 조사받은 지해남(ID 6)은 보위원들이 인정사정없이 구타하는 것은 물론 예쁜 여자는 다른 독방에 가두고 성노리개로 삼기도 했다고 증언하였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심한 고문은 받지 않는 대신, 이와 같은 성적 모욕이나 강간에 준하는 성적 피해를 당하는 것이 심각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3년도 수감자 오순(ID 14)과 2004년도 수감자 리민옥(ID 16) 역시 여성들이 금전갈취를 목적으로 한 뽐뿌질을 당했다고 증언하였다. 오순에 따르면 2개월의 조사기간 동안 이런 검사가 1주일에 한번씩 반복적으로 계속되었다고 하며, 간수의 허락을 얻어야만 쓸 수 있는 감방 안 화장실도 바깥에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즉시 간수가 감방 안으로 들어와 구타했다고 한다.

 

  특이사항으로 중국에서 11명이 함께 체포되었을 때 중국 공안에게 간절하게 애원했더니 조사문건을 북한으로 넘기기는 하되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내용은 고쳐주었다고 한다. 중국공안이 개인적으로 동정심을 베푼 보기 드문 경우이지만, 이를 통해 중국 공안들도 탈북자들이 강제 송환되어 한국행 시도로 판명될 경우 극심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은철 (1998.10~12 2개월)1)


 처음 탈북한 것이 1998년이었다. 햇수로 열일곱, 만으로 열여섯 살 때였다. 처음 중국에 와서 먼저 건너 온 북한사람들과 같이 다녔다. 그러다가 탈북한지 9일 만에 도문에서 중국 공안에게 잡혔다. 중국 변방 구류장에 15일 정도 있다가 교두다리를 건너 북한 남양보위부로 보내졌다. 보위부에서는 나이와 집주소를 물어보았는데, 혹시 집에 피해가 갈까봐 집주소를 거짓으로 말했다. 북한은 통신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알기 어려웠다. 나이가 어려서 학생들만 관리하는 구호소로 보내졌지만, 그곳에서도 중국에 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다. 10평쯤 되는 방에 25명의 아이들이 갇혔다. 그날 밤, 친구들과 쇠창살을 뜯어 탈출했고, 20km가 넘는 길을 맨발로 걸어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혼자 다닐 수가 있었다. 교회의 도움도 받고, 좋은 사람을 만나 일을 도와주면서 지내기도 했지만, 동네 주민의 신고로 도망다니다 몇 번 잡히기도 했다. 연길감옥, 대련감옥 등 중국 감옥에 있을 때는 차라리 행복한 편이었다. 그렇게 잡히다보니 두려움도 없어졌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중국에서 사고나 쳐서 중국 감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자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북한에 가느니, 하루 세끼 밥이라도 주는 중국 감옥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대련 감옥에 갇혔을 때, 기본이 한 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있다 보니 북한 사람들이 몇 명 잡혀들어 왔다. 거기서 한 달을 지내고 중국 단동 변방구류장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는 북한 신의주로 이송되게 되는데, 북한으로 갈 생각을 하니 정말 끔찍했다. 중국공안들이 검사할 때 운 좋게 시계를 뺏기지 않았다. 중국에 잡혔을 때 못을 먹고 병원에 검사하러 간 사이 탈출했다는 한 탈북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도 쇠로 된 시계줄을 분해해서 다른 두 명과 나눠먹었다. 중국공안을 불러 시계줄을 먹었다고 했더니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X레이 사진을 찍어 몸속에 시계줄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괜찮다는 의사의 말에 다시 구류장으로 보내졌다. 계획은 실패했고, 시계줄을 삼켰다는 이유로 밥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더니 북한으로 이송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또 죽음의 고비가 온 것이었다. 신의주는 중국에서 잡힌 사람을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떨면서 신의주로 갔더니 손목 수갑을 채워 신의주 보위부로 데리고 갔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꿇어앉아 있게 했다. 움직이면 더 심한 벌을 받고 매를 맞았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신의주 도집결소로 보내졌다.




  강원철 (1999.8.5~8.12 1주)2)


  1999년 여름 더 이상 중국에 있을 수 없어서 한국으로 가려고 상해 한국 영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영사관에서 안받아준다고 해서 그 길로 교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 보려고 한인교회로 찾아갔다가 주위의 신고가 들어가 공안에게 잡혔다. 그날로 상해에서 단동까지 비행기로 호송되어 단동 변방구류장으로 끌려갔다. 중국공안들은 북한 사람들에게는 족쇄와 수갑을 채우고 밥 먹을 때도 풀어주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을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았다. 중국 조선족들과 같은 방에 있었는데 그들을 대하는 것과 우리를 대하는 것이 너무 달랐다.


  일주일 후 북한으로 송환됐다. 중국 변방부대에서 사전에 북한 측에 통보하는 것 같았다. 날짜가 정해지면 수갑을 채우고 봉고차에 실어 세관다리를 통해 북한으로 송환했다. 북한 세관 보위부까지 중국차를 타고 가서 북한 보위부에 넘겨졌다. 수갑을 풀어서 중국 측에서 다시 가지고 가고, 우리는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숙이고 벽 쪽에 붙어 있게 했다. 북한에 넘겨져서 보위부에서 처음 받은 조사는 집 주소와 나이, 중국 들어간 날짜와 중국에서 잡힌 장소에 대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때는 중국 측에서 우리에 관한 문건을 북한 쪽에 넘기지 않은 것 같았다. 교회에서 잡힌걸 알면 바로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을텐데 다행히 보위부에서 모르는 것 같아서 모두 거짓말로 둘러댔다. 다음에는 한 여자 군의관이 와서 검사 같은 것을 했다. 피도 뽑았는데, 듣기로는 중국에서 에이즈나 질병 같은 것을 달고 오지 않았나 검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갔다. 지정해준 감방에 들어갔더니 여섯 명 모두 중국에서 잡혀 나온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말도 안하고 모두 한 방향으로 앉아 있기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새벽 5시에 기상해서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앉아서 반성하고 있으라고 보위부에서 시키는 것이었다. 말하거나 움직이다가 들키면 맞았다. 방 안에서 대소변도 다 봐야했기 때문에 냄새 때문에 죽을 뻔했다. 2일 정도 지나서 불러내더니 다시 집 주소와 나이를 재확인했다. 내가 어려서인지 심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집결소로 넘겨질 때까지 한 번도 감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1주일이 지나 보위부에 있던 일명 ‘도강자’들을 신의주 집결소로 보냈다. 2명을 한 조로 수갑을 채워 30분쯤 걸어 집결소로 갔다.


  신의주 집결소에 도착하니 서류를 재검토한다고 다시 집 주소, 나이 등 여러 가지 다른 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혁대와 철로 된 물건들을 모두 압수했다. 그리고 방을 배정해줬는데, 사람이 하도 많아서 20평 남짓한 방에 40~50명이 같이 지내고 있었다. 벼룩과 이가 하도 많아서 모두 너무 고생하고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았는지 신의주 집결소 들어간 바로 그날이 함경북도 안전부에서 함경북도 사람들을 호송하러 온 날이었다. 그래서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농포동에 있는 농포집결소로 바로 호송됐다.


  농포집결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집 주소, 학교, 나이, 부모님 등까지 더 자세하게 조사받고 방을 배정받았다. 그날부터 무산군 안전부에서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수용기간은 딱 정해진 것이 없었다. 나는 3개월 동안 있었는데 함경북도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군 안전부에서 데리러 올 때까지 집결소에 있어야 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열차가 잘 다니지 않아서 최고 8개월까지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농포집결소는 청진에 있다 보니 함경북도 군안전부에서 제일 빨리 데리러왔다. 제일 안 오는 곳은 양강도였던 것 같다. 산골이기도 하고 워낙 차가 안다녀서 못 온다고 했다.


  집결소에는 갓난 애기부터 늙은이들까지 있었는데, 특히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대부분 중국에서 잡혀온 사람들이었고 극히 소수였지만 사회에서 범죄를 저질러 재판받기 전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죄명은 소 잡아먹은 사람, 전기선을 잘라 팔다가 잡힌 사람, 절도 등 다양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형을 받고 교화소로 보내졌다. 한국에서는 정치범수용소라고 불리는 11호, 22호, 오로교화소 등 교화소라고 부르는 곳으로 보내졌는데, 정치범들을 따로 관리한다고 했다.


  집결소에서는 새벽 5시에 기상해서 밖으로 나와서 인원 점검을 했다. 그리고 간단한 체조를 시키고, 농포집결소 마당 한가운데 우물에서 줄을 서서 차례로 세수만 하게 했다. 1분을 초과하면 때렸기 때문에 간단히 얼굴에 물만 묻히고 밥을 먹었다.


  내가 있을 땐 옥수수를 줬는데 보통 한줌 정도였다. 국 같은 건 전혀 주지 않았다. 보름동안 소금을 못 먹기도 했다. 소금이 엄청 귀해서 주지 않았다. 소금을 오랫동안 못 먹어서인지 어느 날 5분 정도 앞이 보이지 않아 영영 장님이 되는 줄 알고 펑펑 운적도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다시 인원점검하고 호실로 들여보내고, 좀 힘이 있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일하러 내보냈다. 나처럼 어린 학생들은 하루 종일 호실에 앉아있어야 했다.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도 못하게 하고, 앉아만 있어야 했다. 점심 12시에 음식을 주긴 했지만 먹고 나면 금방 배고프고 영양가도 없었다.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 꼬박꼬박 챙겨 먹었지만 너무 배고팠다. 저녁 6시에 인원 점검을 했는데, 인원이 확인되면 바로 밥 먹고, 밥 먹고 나면 다시 인원 점검을 했다. 밤 11시에 취침시켰는데 잠자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인원이 많아서 한방에 앉아만 있어도 좁은데 거기서 자라고 하니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우리는 나이도 어리다고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겨 밤새 잠을 못잘 때도 많았다. 일어서서 벽에 기대어 잔적도 있었다. 운이 좋아서 앉아서 잘 수 있는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할 만한 사람들은 강제로 일을 시켜서, 일 끝나고 오면 모두 너무 힘들어했다. 잠도 제대로 자기 어려우니 모두 하루하루 몸이 망가지고 쓰러졌다. 다시는 중국 가지 못하게 고생시키고 사상개조 시키려는 것이었지만 내가 있던 3개월 동안 11명이 죽었다. 맞아 죽은 사람 한 사람 빼고는 모두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었다. 아침에 인원점검을 나가려고 하는데 옆 사람이 일어나지 않아서 흔들어 깨워봤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와서 보더니 죽었다고 했다.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은 사람 옆에서 하룻밤을 잤다는 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더 심한 건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사람 몇 명이 동원되어 어느 야산에 옷을 입힌 채로 그냥 묻었는데, 묘비도 없었고, 아예 땅 팠다는 표시도 나지 않게 땅과 수평으로 만들어 버렸다. 죽은 사람 가족들은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것인지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성년자들에겐 어른들에 비해 약하게 벌을 내렸다. 나는 농포집결소에서 3개월을 보내고 무산군 안전부로 보내져서 다시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미성년자라고 했더니 일명 ‘구호소’라는 청소년들만 다루는 곳으로 보냈다. 지금은 꽃제비들만 있는 곳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는 아이들에게 경비를 서게 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일도 시키긴 했지만 학교에 연락해서 데리러 오면 바로 내보냈다. 학교에 다시 가봤자 매를 맞고 비판서 몇 장 쓰고 벌로 청소 좀 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오셔서 구호소 직원들에게 중국 담배 몇 갑을 뇌물로 주고 나니 바로 내보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행이다.


  여성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잘 대해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남자보다 더 구박하고 괴롭히는 것 같았다. 쉽게 생각해도 남자라면 중국에 가서 일해서 돈 벌어다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갔겠구나 생각하지만, 여자는 중국 가서 한족남자와 살다가 잡혀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안전원들도 점검시간에 “중국남자가 그렇게 좋아?”라며 욕하고, 임신해서 온 한 아줌마에게는 “넌 중국 팔로군 하나 데려 왔구나!” 이러면서 조사할 때 배를 때리고 걷어차 낙태 당하고 그 아줌마도 엄청 몸이 상했다고 했다. 여자라고 특별하게 대하긴 하지만 사실 더 괴롭히는 것이었다.


  박선자 (가명, 2000.4.30~5.7 1주)3)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배급도 끊어지고 더 이상 굶주림을 참기 어려워 1998년 3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처음 탈북할 때에는 중국에서 몇 년 돈을 벌어 다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숨어서 산지 2년이 된 2000년 3월 말, 중국 대련에서 공안에 체포됐다. 중국 감옥에서 무엇 때문에 중국으로 넘어왔는지, 누가 도왔는지 등에 대해 계속적으로 심한 심문을 받으며 1개월을 보낸 뒤, 2000년 4월 말 다른 여섯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단동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됐다.


  북한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가 보니 30~40명의 죄수들 대부분이 중국에서 잡혀온 온 탈북자들이었다. 모든 여성들은 항문과 질 속에 숨겨둔 돈이 있는지 확인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로 옷을 완전히 벗어야 했다. 그리고는 손을 머리 위로 얹고 앉았다 일어났다는 반복하는 뽐뿌질을 시키고, 뛰게도 했다. 몽둥이, 주먹질, 발차기 등 극심한 구타는 기본이었다. 감방 안은 습습하며 이는 물론 곤충, 파리, 벼룩 등 여러 가지 기생충으로 가득했다. 온몸을 뜯겨 참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식사는 아주 적은 양을 줬는데 딱딱한 옥수수에 데친 채소 몇 조각이 전부였기 때문에 끔찍하게 굶주린 상태였다. 1주일의 조사가 끝나고 내게는 정치적 범죄가 지워졌다.


  2000년 5월 7일 신의주 도집결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2개월 동안 60~7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각자 살던 지역으로 보내지기를 기다렸다. 매일 발로 차이고 구타를 당했다. 당시 10명 정도의 임산부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임신한지 3~5개월 정도였다. 나는 임산부들을 도와 병원으로 데려갔다 오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산일이 다 된 여자가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집결소 밖에 있는 병원에서 여자아기를 낳았다. 커튼 사이로 간호사가 아기의 얼굴에 젖은 물수건을 덮는 것을 목격했다. 10분 쯤 지나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아기는 숨이 막혀 죽었다. 다른 임산부에게는 두꺼운 바늘주사를 놓는 것도 보았는데, 산모들이 말하기를 모두 강제 낙태수술을 당했다고 말했다. 집결소 죄수들 모두 감옥에서 낳은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가차 없이 죽임을 당했고, 천 조각에 쌓여 근방의 야산에 묻혔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2개월 동안 집결소 생활을 마치고 2000년 7월초에 풀려났지만 며칠 되지 않아 다시 탈북했다.



  지해남 (2000.12.3~12.23 3주)4)


  1998년 9월초 남한행을 결심하고 북한을 떠났지만, 길림성 룡정시, 길림성 돈화시 등으로 성노리개로 팔려 다녔다. 성노리개로 몇 번씩 팔려 다니며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다가 몇 달 만에 간신히 도망쳤다. 다른 몇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돈을 모아 기름과 구명띠, 망원경, 라침판, 빵을 샀다. 그리고 발동선을 훔쳐 바다를 건너오다가 그만 남한 배인 줄로 착각하고 도움을 요청해 중국 배에 붙잡혔다.


  중국변방대에 15일간 잡혀있으면서 갖고 있던 중국돈 천원을 빼앗겼고, 족쇄가 채워진 채로 지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아직 죄인이라는 판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족쇄를 풀어주지 않으면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랬더니 남자 공안이 내 잠자리 옆에서 밤새 경비를 서며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족쇄를 채워 끌고 다니며 심문했다. 중국 죄인들은 감옥 안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먹고 입고 뒹굴어도 괜찮았지만 우리 2명의 북한 여성은 3일간 밥이 없다며 굶겼고 화장지가 없어 변소도 마음대로 못 가며 짐승처럼 취급 받았다. 우리는 다시 중국 단동구류장에 보내졌다. 단동구류장에는 50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 30명이 북한 사람들이었다. 중국 여자 공안은 돈을 뺏기 위해 옷을 홀딱 벗겨 30번씩 뽐뿌질을 시켰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자궁에 손까지 집어넣는 추악스러운 행동을 했다.


  그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2000년 12월초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 보위부 감옥으로 북송됐다. 보위부 감옥에서는 20일간 동안 우리를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했다. 감옥 안에서는 변을 보고 닦을 종이도 없어 얼굴 씻는 물 한 사발을 손에 묻혀 뒤를 닦아냈다. 예쁜 여자는 독방에 보내져 보위원들의 성노리개가 되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수없이 매질을 당했으며 절반 이상 벌레 섞인 설익은 옥수수 50g을 식사로 제공 받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해야 했다. 중국에서 임신해서 온 여성은 너무 배가 고파서 자기 손가락을 마구 물어뜯어 씹기도 했고, 성병이 걸려온 여성은 너무 고통스러워 하반신을 마구 비벼대어 더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어찌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겠는가?


  다른 여성들은 그냥 중국 땅에서 잡혀 나왔지만 춘실이와 나는 한국으로 도망가다가 잡혀왔기 때문에 더욱 처벌이 엄중했다. 춘실이와 나를 각각 다른 방에 집어넣고 조사했다. 매일 몽둥이찜질과 모진 매질을 당했고, 치질이 재발해서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모기처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통에 신음하며 지냈다. 그렇게 신의주 보위부에서 20일 동안 조사를 받고 도집결소로 보내졌다.



  박선자 (가명, 2001.7.27~8.3 1주)5)


  2개월 동안의 신의주 도집결소 생활을 마치고 2000년 7월초 풀려났지만 북한에서 더 이상 살기가 힘들어 몸이 좀 회복되자마자 2000년 7월 15일 두 번째로 두만강을 건넜다. 하지만 2001년 4월 27일 대련에서 중국공안에 다시 체포되어 2001년 7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신의주시 보위부에 처음 잡혀간 2000년 때와 같이 7일 동안 심문 당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살던 곳인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는데, 회령보위부에서 10일 동안 다시 심문을 당한 뒤 근처 분주소(경찰서)로 보내졌다. 5일이 지나 풀려났는데 항상 감시를 당했다. 왜 그냥 풀어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다시 와서 나를 체포하는 악몽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 달 동안 내가 한 일은 그저 산에서 야생버섯을 채취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2001년 10월 3일, 세 번째 탈북에 성공했고 중국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2002년 3월 14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오  순 (가명, 2003.10.23~12.30 2개월 1주)6)


  1997년 8월 북한에서 식량난이 심해지자 가족을 살리기 위해 먼저 중국으로 넘어간 어머니께서 한 달 후 나와 동생을 데리러 다시 북으로 돌아오셨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가 연길, 왕청, 광주 등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돕기도 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한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을 찾았고, 2003년 9월 4일 곤명으로 이동했다. 곤명에 가보니 한국에 가려고 모인 사람은 13명이었다. 일주일 동안 곤명의 한 여관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한국에 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중국 공안이 들이닥쳐 모두 잡혔다. 그나마 하늘이 도왔는지 어머니와 동생은 잠깐 여관을 비운 사이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라도 무사했다.


  탈북자 11명이 조사받을 때 중국 공안에게 무릎 꿇고 빌면서 제발 한국으로 가려고 했다는 문건만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중국 공안은 간절히 애원하는 우리가 차마 불쌍했는지 조서를 다시 써주었다. 어떤 사람은 일하는 곳에서, 어떤 사람은 여행하다가 붙잡힌 것으로 눈감아준 것이었다.


  중국에서 9월부터 10월까지 한 달 남짓 조사받은 뒤 단동을 거쳐 북송되어 신의주 보위부로 넘겨졌다. 북송되는 차안에서는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보위부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옷을 다 벗겨 알몸으로 만든 뒤 숨긴 돈을 찾기 위해 온 몸을 뒤지고 손을 머리에 올리고 앉았다 일어났다는 수십 번씩 해야 하는 뽐뿌질을 시켰다. 벗어 놓은 옷의 솔기까지 일일이 다 뒤져 숨긴 돈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이런 검사를 일주일에 한번씩 반복했다. 먹지 못해 키가 작고 나이가 어려 보였기 때문에 조사과정에서 16살이라고 속여 미성년자로 분류됐다.


  2개월 동안 새벽 6시부터 11시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꼼짝 못하고 앉아있게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사정없이 때리고 욕설을 했다. 감옥 안에 있는 화장실인데도 아무 때나 쓸 수는 없었다. 볼일을 보고 싶을 때는 손을 들고 ‘몇 번(죄수번호) 변소에 가고 싶습니다’고 하면, 간수가 ‘몇 번 가라’하고 명령해주어야만 일을 볼 수 있었다. 화장실은 밖에서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있다. 볼일을 보고 난 후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이 들면 즉시 들어와 때리고,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변을 보고 난 후에 화장지가 없어 옷을 찢어 사용하거나, 물로 씻어야 했다. 그렇게 있다가 2003년 12월 30일 도집결소로 넘겨졌다. 나는 조사과정에서 미성년자로 분류됐기 때문에 일은 하지 않았지만 보위부에서 앉아 있던 식으로 책상다리를 한 채 두 줄로 나란히 앉아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집결소에서 2개월이 지난 2004년 2월이 되자 무산군 안전부에서 데리러 왔다.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집으로 보내져야 하는데 집도 가족도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9.27 꽃제비 수용소로 보내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집과 가족이 없는 사람들을 수용한 곳이었는데, 경비가 허술했기 때문에 하루 만에 탈출해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다. 북한으로 송환당해서 얼마나 혼났는지 다시는 한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중국에서는 신분도 없고, 공부도 못하며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불안해 다시 한국으로의 길을 택했다. 그러던 중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동남아시아 쪽을 거쳐 2004년 10월 30일 태국에 도착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리민옥 (가명, 2004.4.20~4.23 / 3일)7)


  1997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으로 돈 벌러 갔던 어머니가 2003년 9월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왔다. 어머니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노동단련대에 있다가 11월에 풀려났는데,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진 후 2004년 1월 11일 우리도 함께 탈북했다. 한창 조선사람 잡아가는 단속 기간이었기 때문에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셋방에 숨어서 라디오만 듣고 지냈다.


  그러다 한국으로 가려고 2004년 3월 17일 연길에서 기차를 5번 갈아타고 3월 20일 내몽골(알렌호투) 국경선에 도착했다. 일행이 11명이었는데, 중국-몽골 국경 철조망 2개째를 넘어서다가 중국변방대에 붙잡혔다. 2명은 도망치고, 나머지 9명(여성 8명, 남성 1명)이 잡혔다. 잡히는 순간에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정신이 멍할 뿐이었지만, 감옥으로 잡혀가면서 북한으로 끌려가 당할 일을 생각하니 그때서야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붙잡히면 자살하겠다고 가져간 수면제를 모두 삼키기도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60,000위안의 벌금이 떨어졌지만 낼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모두 중국 감옥에 갇혔다.


  10일 후 4월 2일 오전 9시, 두 명이 한 쌍씩 족쇄를 차고 버스에 태워졌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중국공안이 앞뒤로 4명씩 서서 감시하며 말도 못하게 했다. 운전사만 바꿔가며 쉬지 않고 버스가 달려 단동에 도착하니 다음날 4월 3일 오후 4시였다.

  3일 후인 4월 6일 북한으로 송환됐다. 한국으로 가려다 잡혔기 때문에 앞이 암담해 모두가 신의주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울었다. 처음에 들어가니 모두 옷을 벗기고 중국에서 가지고 물건이나 돈을 샅샅이 뒤졌다. 알몸으로 일어났다 앉았다는 반복하는 뽐뿌질을 시켰다. 이렇게 하면 몸에 숨기고 있던 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위부 조사를 받는 동안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꼼짝 못하고 앉아있어야 했다. 마음 고운 사람은 그런대로 좀 봐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사정없이 때렸다. 신의주 보위부에서는 3일만 조사받았지만 바로 회령보위부로 보내져 4월 23일부터 6월 15일까지 2개월 가까이 다시 조사를 받았다.


 

(3) 평양특별시 (보위사령부)


 


평양보위사령부의 전반적 상황 (2000)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인터뷰한 20명의 대상자 가운데 평양시 보위사령부에서 조사받은 유일한 증언자인 이광철(ID 11)은 골동품을 훔친 죄로 2000년 7월 체포되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였는데, 한국 김대중 前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앞둔 시기부터 국가안전보위부나 인민보안성의 일을 보위사령부에서 맡기 시작했다고 한다.

 

  체포 직후 평양시 대성구역 안전부로 끌려가 15일 동안 기본적인 조사를 받았고, 보위사령부 구류장으로 보내져 2개월 이상 추가조사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미성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물구나무를 선 채로 구타당하거나, 손가락 족쇄를 채워놓고 바닥에 엎드리게 한 채로, 또는 조사실 안의 난방관에 수갑으로 채워놓고 각목으로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주로 야간(저녁부터 자정까지) 시간에 몇 사람이 교대로 구타했으며, 주간에 조사할 때는 바닥에 엎드리게 해놓고 이불 같은 천을 덮어 때리는 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도록 하고 때렸다고 한다.

 

  양쪽 팔목이 구타로 인해 10cm 정도씩 찢어진 상처가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선연하게 남아있었으며, 구타로 허리와 등뼈가 많이 상해 6년이 지난 지금도 3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하다는 후유증을 호소하였다.

 

  창문도 없어서 햇볕이 들지 않는 독방에서 조사를 받았고, 하루 종일 음식을 주지 않을 때도 있었으며, 배설도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극심한 고문에 의한 조사를 2개월 동안 받다 보니 모두 자백하고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미성년자였던 덕분에 정치범수용소(관리소 또는 교화소)로 보내지지 않고, 형제산구역에 있는 꽃제비수용소로 보내졌다.



 

이광철 (가명, 2000.7~10 / 3개월)1)


  1997년 8월 무산으로 갔던 큰 누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어 어머니가 작은 누나를 데리고 큰 누나를 찾으러 중국으로 간 뒤, 혼자 평양에 남아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이렇게 있다간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와 대성산 유원지에서 만난 다른 떠돌이 아이들과 꽃제비 생활을 하게 됐다. 텃세가 심해서 많이 맞기도 했는데 2〜3년 쯤 지나면서부터는 나도 자리를 잡아 맞는 것이 덜해졌다.


  그 아이들과 함께 국가 골동(품)이 옮겨진다는 소문을 따라 오랫동안 준비해서 2000년 4월 전시관에서 나와 이동하던 골동(품)을 훔치는데 성공했다. 숨겨뒀다가 3개월쯤 후 중국을 오가는 골동장사꾼에게 팔았다. 그런데 그 골동장사가 잡히는 바람에 안전부에서 우리들도 잡으려고 했고, 우리 얼굴도 그림으로 거리에 나붙었다. 남조선에서 김대중이 평양에 온다고 하는 시기였고, 안전부에서는 우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방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돈이 다 떨어졌고, 오갈 데도 없어서 7월초에 돈을 좀 구해보기 위해 평양으로 다시 올라왔는데, 올라온 다음날로 바로 잡혔다.


  붙잡힐 때 우리 중에 1명은 먹을 것을 사러 장마당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도망을 갔고, 8명이 붙잡혔다. 평양시 보위사령부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잡혔다. 당시에는 김대중이 온다고 해서였는지 안전부나 국가보위부의 일을 보위사령부에서 맡고 있었다. 일단 대성구역 안전부로 끌려가서 15일 동안 조사받았고, 그 다음에는 보위사령부 사람들이 와서 보위사령부 구류장으로 데려갔다. 그 때가 2000년 8월이었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눌렀고, 물구나무를 서게 한 채로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자백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8명이 잡혀 있었으니 서로 말이 다 맞을 때까지 2달 내내 계속 맞았다. 각목을 막으려고 팔을 내밀었다가 왼쪽 팔목이 터져 10cm 정도 찢어졌고, 오른쪽 팔에도 10cm 정도가 찢어졌지만, 치료해주지는 않았다. 상처를 그냥 놔뒀는데 곪다가 아물었다. 맞을 때 구석으로 피하고 발버둥을 치고 하니까,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손가락 족쇄를 채워 머리 위로 두 손을 모아 바닥에 엎드려 눕게 하고 위에서 각목으로 두들겨 팼다. 조사실 방에 온수관이라고 부르는 난방관이 하나 있었는데, 손에 채운 족쇄를 그 관에 수갑처럼 걸어 채워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때리기도 했다. 양쪽 등허리와 등뼈가 많이 상해서 지금은 1〜2시간 정도 앉아 있을 수 있지만, 3시간 정도가 넘으면 온몸에 쥐가 나고 통증이 온다. 거기서 치료는 받지 못했고, 한국에 온 뒤로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만 좀 받았는데 나아지지 않는다.


  감방은 1.5×4㎡ 정도 되는 독방이었고, 철문에 아래위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작은 창만 있었다. 거기로 음식을 넣어줄 때 외에는 반대쪽에 창문도 없어서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있을 때는 조사받는 사람들이 우리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각 방마다 한명씩 독방이었고, 음식은 따로 식당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조사하는 군관들이 장마당에서 파는 5cm 정도 길이의 작은 김밥 같은 것 3개 정도를 넣어주기도 하고, 한 줌 정도 되는 통강냉이죽 반 그릇을 넣어주기도 했다. 가끔 자기들이 집에서 싸온 벤또(도시락) 같은 것을 먹다 남은 찌꺼기들을 넣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주고,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아무 음식도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주고 말고 했다. 방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어서 문을 두드려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보통 3〜4시간 정도 안 열어주다가 미칠 정도가 되면 경비가 문을 열어 화장실에 갈 수 있게 했다.


  조사는 주로 밤에 했다. 다른 보위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저녁때부터 자정까지 조사를 했고, 한명이 계속 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 교대로 들어와서 조사하고 때리고 했다. 낮에 조사할 때는 엎드리게 해놓고 등에 이불 같은 천을 덮어 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게 때렸다. 2개월 정도 맞아가며 조사를 다 받고 나니 자백한 내용에 서명을 하게 했다. 3개월쯤 있다가 평양시 형제산구역 꽃제비수용소로 보내졌다.

 

2) 인민보안성

(1) 함경북도 (무산군 안전부)


 


무산안전부의 전반적 상황 (1997~2003)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은 국가안전보위부에서 1차 조사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인민보안성(전 사회안전부)에서 운영하는 각 지역의 안전부 구류장에서도 일정시기까지 탈북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산군 안전부는 1999년 11월까지 탈북자에 대한 예심 및 조사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무산군 보위부에서의 경험에 대해 증언한 김춘애(ID 4)와 신정애(ID 8)의 증언을 비교해보면 탈북자들이 급증하자 1999년 8월부터 11월 사이에 무산군 보위부 내에도 장기간의 조사를 위한 구류장 시설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산군 보위부에 조사를 위한 구류장 시설이 없었던 1997년에 중국에서 강제 송환되었기 때문에 신혁철(ID 10)은 무산군 안전부에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의 경우 조사과정에서의 가혹한 고문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997년까지 무산군 안전부에서 조사를 위한 고문은 심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조사를 담당하는 안전원이 아닌 감시역할을 담당하는 간수에게 구타당한 적이 있으며, 억울하게 폭행당한 사실을 안전부의 상급기관인 검찰소에 신소(고발)하겠다고 협박했더니 조사를 대충 끝내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2003년 수감된 박영희(ID 19)는 이미 온성군 보위부에서 20일간 조사받으면서 단순탈북자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무산군 안전부에서 추가조사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온성군 보위부 조사를 마치고 청진집결소를 거쳐 무산군 노동단련대로 보내지기 전 무산군 안전부로 임시 수감된 경우였으나, 당 간부였던 가족의 도움으로 뇌물을 써서 비교적 쉽게 풀려났다고 한다. 최근 북한 조사기관에서 단순탈북자들의 경우에 한하여 뇌물수수행위가 일상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혁철 (가명, 1997.5~8 3개월)1)


  북한의 경제상황이 형편이 없어서 생활이 어려워 중국으로 도강하기 시작하다가 1997년 5월에 체포되어 무산군 안전부 구류장에 수감됐다. 안전부 구류장에서 내가 심하게 맞은 기억은 ‘방귀사건’이라고 하는 당시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사건 때문이었다. 안전부에는 총 10개의 감방이 있는데, 나는 10호 감방에 수감됐다. 감방이 원형의 형태라 간수가 한눈에 모든 방을 내다볼 수 있었다.


  하루는 모두 조용히 꼼짝 못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잠시 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간수가 방귀 뀐 놈 나오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안전원 중에 경수와 동찬이라는 간수가 있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자 단체로 벌을 주었다. 저녁식사 시간까지 한참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녁식사 이후에 다시 경수와 동찬이가 돌아와 방귀 뀐 놈을 끝까지 잡아내겠다며 죄수들을 하나씩 불러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일 마지막에 불려갔는데 복도에서 바로 앞에 앉아 있었던 길남이(재소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찬이가 나를 길남이 옆에 데려가더니 같이 무릎을 꿇어앉게 시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둣발로 내 가슴을 걷어차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를 몰라서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리냐’며 대들었다. 홧김에 간수인 동찬이에게 덤벼들었다.


  간수와 죄수 간에 싸움이 나자 다른 간수인 경수가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몽둥이)로 내 허리를 내려쳤고 두들겨 맞아 기절했다. 그때 내가 10분 동안 쓰러져 맞았다고 들었다. 사실을 알고 보니 내 앞에 앉아 있던 길남이가 정말 방귀를 뀌었는데 내가 졸고 있어서 몰랐던 것이었다. 단체로 벌을 받는 중에 길남이가 자기가 동지들을 위해서 나가겠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네가 하지 않았으면 괜히 나서지 말라고 말렸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길남이 짓이었다.


  억울하게 간수에게 맞은 것이 너무 화가 나서 검찰소 부소장을 불러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검찰소는 안전부 상급기관으로서 안전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사회에 나가면 무조건 신소(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부렸더니 안전부 소장이 나에게 와서 미안하다며 좀 참으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괜한 일로 상급기관의 문책을 받지 않을까 겁이 났던 모양인지 다음날로 바로 조사를 대충 끝내고 풀어주었다. 원래 일요일에는 휴일이라 조사를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박영희 (가명, 2003.7.12~7.20 1주)2)


  온성군 보위부에서 20일, 청진집결소에서 22일을 있다가 2003년 7월 12일 무산 안전부 구류장으로 보내졌다. 무산은 아는 사람이 많아서 뇌물을 전하기가 쉬웠다. 당시 당 간부였던 오빠가 힘을 써줘서 바로 단련대로 가지 않고 집에서 5개월 동안 요양을 할 수 있었다. 몸이 좀 회복되고 나니 다시 무산군 단련대에서 잡으러왔다. 2003년 12월 20일에 다시 수감되었지만 다시 뇌물을 써서 가짜 진단서를 발급받아 21일 만인 2004년 1월 10일에 풀려났다.

 

 (2)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


 


함주안전부의 전반적 상황 (1993)

 

  인민보안성(전 사회안전부)은 기본적으로 탈북자를 대상으로 하는 조사 및 처벌보다는 북한 사회내의 사회질서 및 기강유지를 단속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1993년 함주군 안전부에 수감된 지해남(ID 6)의 증언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녀는 북한의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5부(한국의 박정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한 내용)에서 나오는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한국 노래를 부른 죄로 체포되었다. 함주군 안전부와 명천군 안전부, 화성군 안전부 등으로 세 번에 걸쳐 이감되어 예심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과 성추행을 반복적으로 당했다.

 

  ‘날라리 노래’를 부른 정도만으로는 예심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상급기관의 연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기관에서는 과잉 처벌했다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죄명을 붙였고, 결국 3년 형을 받아 개천 제1호 교화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2년 넘게 강제노동을 하며 고생하다가 1995년 9월 수령님의 배려라고 하면서 풀어줬지만 교화소 출신으로 낙인찍혀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어서 1998년부터 탈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노래 한 번 부른 잘못으로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으로 붙여진 죄명들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안전부에서의 고문상황이 이후에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이후의 증언자들을 대상으로 한 추가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지해남 (1993.5.15~30 2주)1)


  경공업 학교를 졸업한 뒤 선전대원이 되어 노동자들을 노래로써 고무시키는 일을 했다. 그러나 1989년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고 크게 낙심했다. 어느 직장에도 취직하지 못하고 피를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92년 12월 25일 동짓날 저녁 함경남도 함주군 친구들이 나를 위로해주기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손금을 봐주는 사람도 한 명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남한노래인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친구들과 함께 유쾌하게 놀았다. 남한노래이기는 했지만 북한 예술영화 중에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영화의 5부에서 카페 여가수가 부르는 것을 보고 배웠다. 남한의 박정희 정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찍은 영화였다.


  5개월쯤이나 지난 뒤인 1993년 5월 15일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 감찰과장이 나를 불렀다. 별 생각 없이 안전부로 따라 들어갔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예심과 감방 철문을 열고 무작정 집어넣었다. 감옥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전신이 피멍이 들어 한 달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에게 씌워진 죄명은 김일성, 김정일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수정주의 날라리 바람을 사회에 유포시키는 활동의 두목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고 억울했지만, 당시 사회질서유지와 관련해 발표된 포고문에는 점을 치는 자, 외국노래를 부르는 자, 국가사회재산의 탐오 낭비, 일하지 않고 먹는 자, 술 마시는 자, 사기꾼 등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일로 체포된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하게 처벌하고, 때에 따라 사형까지 한다고 했다.


  그때 같이 있었던 4명은 8개월 동안 강제노동에 보내졌고, 나는 다른 4명에게 “홍도야 울지 마라” 라는 날라리 노래를 가르쳐준 두목이라는 죄를 쓰고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에서 15일 동안 조사를 받고 1993년 5월 30일 함경북도 명천군 안전부로 다시 호송되었다. 명천군 안전부에서도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성추행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계호원의 나이는 22~24세 정도였다. 너무 억울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시멘트를 네모난 형태로 4개를 잘라먹고 구류장 널마루 밑의 오물들과 쓰레기들, 머리카락 등을 주워 삼키기도 했지만 죽지 못했다. 그때부터 계호원은 감시 강도를 더욱 높이며 꼼짝 못하게 했다.


  함주군 안전부에서 명천군 안전부로 보내진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화성군 안전부로 보내졌다. 세 번씩이나 각 지역 안전부로 보내져서 조사를 받은 것이었다. 원래 나 같은 문제는 예심대상이 아니라고 예심처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관(안전부 소속)들은 일단 잡아온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결함을 붙여서 징역을 보내고야 마는 것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겨우 날라리 노래를 불렀다는 죄로 예심을 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가혹하지 않은 예심이었을 텐데도 그렇게 심했는데, 다른 죄수들은 얼마나 심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3년 형기를 받고 개천교화소로 끌려갔다. 2년 넘게 강제노동으로 고생하던 중에 1995년 9월 수령님의 배려라고 하면서 풀어줬지만 교화소 출신으로 낙인 찍혀 더 이상 북한에서는 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998년부터 탈북하기 시작했다.


3) 기타 (도집결소, 노동단련대)


   (1)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도집결소


 

청진집결소의 전반적 상황 (2000~2002)

 

  북한의 형법 체계에서도 집결소에서 조사를 하거나 금전갈취, 고문 및 폭행을 하는 것은 불법에 해당된다. 하지만 인터뷰 결과 집결소에서도 불법조사와 알몸상태에서의 비인간적 금전갈취, 영아살해, 재소자들에 대한 폭행이 자행되어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0년 7월 청진시 도집결소로 끌려간 김춘애(ID 4)에 따르면, 2000년 김정일의 지시로 도집결소가 일종의 ‘대기실’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경지역의 각 지역 보위부에서 1차 조사를 마친 탈북자들을 집결시켜, 수감자의 출신지역 보위부나 안전부에서 2차 조사를 위해 이송해 갈 때까지 대기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증언자도 집결소가 단순한 임시대기소 정도에 그친다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김춘애의 경우 집결소에서도 알몸상태에서 뽐뿌질을 시켜 금전갈취를 목적으로 하는 검사를 다시 받았다. 일반적으로 탈북자들은 보위부, 안전부, 노동단련대 등을 거쳐 집결소로 보내지기 때문에 중국에서 숨겨온 돈이 그때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검사를 다시 실시하는 이유는 북한내 가족이나 친지의 도움을 받아 뇌물용이나 탈출용으로 수감시설 내부에 은밀하게 돈이 흘러들어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7개월 된 여자 아기를 담요로 덮어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으며, 특이사항으로 외국에서 북한에 선물로 바친 비료라는 것으로 강냉이와 배추영양단지를 키우며 일했는데, 당시에는 그 비료가 한국에서 온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회술하기도 하였다.

 

  2002년 수감된 신혁철(ID 10)은 청진시 도집결소에서 보위부와 안전부에서와 같은 조사를 다시 받았으며, 탈출을 시도하던 한 남성이 잡혀와 거의 죽을만큼 심하게 구타당하기도 했다고 증언하였다.

 

청진시 도집결소에서 확인된 불법적인 조사와 폭행이 신의주 도집결소와 같은 타지역에서도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다음 보고서에서 이에 대한 추가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김춘애 (가명, 2000.7.28~8.29 1개월)1)


  무산군 보위부, 안전부, 노동단련대를 거쳐 2000년 7월 28일 청진 도집결소로 보내졌다. 2000년에는 김정일 지시로 도집결소가 각 지방에서 데리러 오는 대기실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 손가락 족쇄가 채워졌다. 19살 남자와 같이 손가락 족쇄가 채워진 딸은 청진까지 가는 길에 또 핀침으로 족쇄를 풀기도 했지만, 엄마가 있어서 도망가지 않았다.


  집결소에서도 검사를 다시 했다. 옷을 다 벗겨 알몸으로 만든 뒤 숨긴 돈을 찾기 위해 온 몸을 뒤지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수십 번씩 하는 뽐뿌질을 시켰다. 아주 조그마한 방에 10~15명씩 들어갔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서 잠도 못잘 지경이었다. 저녁 5시에 일 끝나고 밥을 먹고 들어가면,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만 전기가 들어왔다. 정전이 되면 빈대라는 빈대는 다 나와서 배꼽짬, 손가락짬, 발가락짬, 귓구멍짬 안 들어가는 데가 없었다. 어쨌든 빈대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40일 동안 박쥐처럼 창문에 매달려 밤을 지냈다. 그러니까 사람 신경이 어땠겠는가?


  청진 도집결소에서는 7개월 된 여자아기를 담요로 덮어 강압적으로 죽이는 것도 보았다. 담요에 싸서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다. 담당주재원들이 있는데 일도 안전원이 직접 시키고, 당시는 도집결소도 검열을 받은 이후라서 그랬는지 구타는 없었다. 하지만 일의 강도는 높았다. 도집결소에서도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안전부 부업장에서 일을 했다. 외국에서 공화국에 선물로 바친 비료라는 것으로 강냉이와 배추영양단지를 키우며 일했는데, 당시에는 그 비료가 한국에서 온 비료였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혁철 (가명, 2002.7.1~7.16 2주)2)


  2002년 6월 11일부터 온성군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은지 10일 만인 6월 21일 온성안전부로 보내졌는데, 3일 만에 다시 온성군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큰비로 부서진 도로를 복구하고 김매는 일을 했는데, 원산 출신인 사람이 배가 고파 호박을 훔쳐 먹다가 담당 주재원에게 걸려서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꺾여 죽기 직전이 될 만큼 많이 맞았다.


  일주일을 온성 노동단련대에서 일하다가 청진시 도집결소로 옮겨진 것이 7월 1일이었다. 집결소에서는 보위부와 안전부에서 받은 조사를 다시 했는데 탈출을 시도했던 한 사람이 잡혀와 죽기 직전까지 심하게 맞기도 했다.


  집결소는 4~5평 정도의 방 1개와 10평 정도의 방 1개, 총 2개의 방에 남자만 150명 정도가 있었다. 그리고는 7월 16일 무산광산 노동단련대로 보내져 10월 27일까지 광산일에 필요한 화물운반 작업을 했다. 무산광산으로 보내지기 전에 1주일 동안 온성 노동단련대로 보내진 것은 급하게 터진 도로복구 작업 때문이었던 것 같다.


   (2) 함경북도 무산군 노동단련대

 


무산노동단련대의 전반적 상황 (1999~2000)

 

  집결소와 마찬가지로 조사시설이 아닌 노동단련대에서도 불법적 조사와 폭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노동단련대는 노동을 통해 죄를 뉘우치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일반적으로 안전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식량공급을 목적으로 한 부업밭이나 임시로 설치된 공사현장에 무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그 위치는 시기에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증언자들마다 다를 수 있다.

 

  1999년 무산군 노동단련대를 경험한 김춘애(ID 4)는 자신의 딸이 담당주재원에게 끌려가 한 시간 동안 구타를 당하며 조사받았다고 증언하였다. 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자신의 딸과 함께 탈출하지는 못했는데, 그로 인해 남아있던 딸이 어머니의 행방과 동반탈출시도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으며 의자로 머리를 맞는 등 심하게 구타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1년 후인 2000년에도 다시 무산군 노동단련대로 끌려갔다. 딸이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딸의 나이를 속이고, 평양에서 무산으로 퇴거를 떼고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안전원들이 딸을 폭행하여 자신의 자백을 받기 위해, 딸을 식당으로 끌고 가 한 시간 동안 장작으로 때려 어깨와 팔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다고 한다. 개성 출신의 한 남성은 타지방 출신이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구타당했다고 한다.

 

  드물게 동정심이 있는 안전원도 있었다고 하며, 전반적으로 안전원들이 예전보다는 심하게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고 한다. 중앙당 검열이 막 끝나서 안전원들이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전원들은 직접 폭행을 하지 않는 대신 죄수들 중에 반장이나 조장을 뽑아 그들에게 대신 다른 죄수들을 죽도록 때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다른 증언자들은 이러한 수감자들 간의 상호구타 강요행위는 특정 시기부터 나타난 편법적인 고문방식이 아니며, 북한내 조사 및 구금시설에서는 1990년대 이전에도 있었던 일상적인 일이라고 설명하였다.

 

 증언내용 중 특이사항으로 무산은 아편으로 유명하며 당시 수감자들은 무산군 독소리에 있는 안전부 부업장내 아편밭에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김춘애 (가명, 1999.8.12~8.14 3일)3)


  인신매매로 중국에 팔려간 딸을 찾으러 갔다가 1999년 8월 붙잡혀 송환됐다. 무산군 보위부와 안전부에서 각각 하루씩 보내고 무산군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노동단련대에 저녁 때 도착했는데 그때부터 굶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딸이 없어졌다. 한 시간 뒤에 딸이 얼굴이 새파래져서 돌아왔기에 물어봤더니 담당주재원이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한 시간 동안 때렸다고 했다. ‘애가 무슨 죄가 있냐’고 막 따졌더니, 자기들이 보기에 우리가 평양사람인 것 같다고 하면서 딸을 붙잡아 평양사람인가 속였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때렸다고 했다.


  어찌나 가혹하고 매정하게 일을 시키는지 너무 힘들었다. 3일밖에 있지 않았던 것은 운 좋게도 친동생과 연락이 닿아 동생이 손을 써줬기 때문이었다. 동생에게 뇌물을 받은 사람이 나에게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오라고 외출을 시켰는데, 그것도 모르고 딸을 미처 데리고 나가지 못했다. 감시하는 사람도 한 사람 따라다녔기 때문에 장마당으로 나가는 길에 부탁해서 동생 집에만 잠깐 들렀더니 ‘일단 한 사람이라도 먼저 살아나가야 한다고 딸은 챙겨줄 테니까 걱정말라며 무조건 뛰라(중국으로 도망가라)’고 다그쳤다.


  다급한 마음에 그렇게 딸을 두고 도망치는 비정한 부모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국경지역에 도착해서 정신을 좀 차릴 즈음 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딸은 탈출한 엄마 대신에 정말 많이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딸을 만나 들어보니 의자로 머리를 맞는 등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했다. 하지만 딸이 워낙 이악하고 일도 잘해서인지 2개월 반 정도만인 1999년 11월에 풀려났다. 하지만 안전부에서는 딸을 풀어놓고 계속 감시하면서 나에게 소식이 전해져 둘이 만나게 되면 나를 잡으려고 덫을 놓은 것이었다.



  김춘애 (가명, 2000.7.22~7.28 1주)4)


  2000년 7월 22일 무산군 노동단련대로 다시 보내졌다. 다시 잡혀 돌아가니 모두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딸이 심하게 고생하지 않도록 딸의 나이를 속였고, 평양에서 무산으로 퇴거를 떼고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안전원들이 말 똑바로 하라고 고함치고 겁을 줬다. 어린 딸을 때리면 내가 똑바로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딸을 식당으로 끌고 가서 한 시간 동안 장작으로 때렸다. 딸의 어깨와 팔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다. 개성 출신의 31세 남자는 골동품을 중국에 팔다가 잡혀왔는데 타지방 사람이라서인지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 맞아도 다음날 나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앓아눕지도 못했다. 그냥 조사받으면서 맞는 것보다 일하면서 매 맞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철창에 앉아있는데 내가 평양사람이라고 간수가 계속 말을 시켰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가 군인생활을 하던 때에 중대 사관장(하전사, 특무장)을 하던 사람의 아들이 간수로 있었다. 그래서 좀 봐주는 것도 있었고 나를 조장을 시켜줬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의자 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로 서있게 하고,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손바닥을 때렸다. 비행기유리자(비행기 조종석 유리로 만든 자)라고 했는데, 그것으로 쇠창살에 손을 내밀게 해서 손가락 마디를 후려쳤다.


  군 행정위원을 했다는 새로 온 간수 한 명은 꽤 좋은 사람이었다. 피똥을 싸는 딸에게 약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나마 안전원들이 예전보다는 심하게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 중앙당 검열이 막 끝나서 안전원들이 서로 조심하는 눈치였다. 안전원들이 가능하면 직접 폭행을 하지 않는 대신 죄수들 중에 반장이나 조장을 뽑아 그들에게 대신 다른 죄수들을 구타하도록 시켰다. 조장은 10명에 한 명씩이고, 반장은 남, 여 각각 1명인데 여자는 부반장으로, 반장은 보통 남자를 시켰다. 그들에게 ‘저 새끼 죽여라’고 명령하면 안전원들 대신 죄수들을 때리는 것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저녁 7시까지 노동하고 밤 10시까지는 대열훈련(제식훈련)을 시켰다. 무산은 아편으로 유명한데 우리는 무산읍 독소리 안전부 부업장에서 배추영양단지와 아편밭에서 일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무산군 노동단련대에서 고생하다가 2000년 7월 28일 청진시 도집결소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