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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해인사 폭격 명령 거부… 팔만대장경 구했죠" 본문
장지량 前 공군참모총장 등 '문화재 지킴이' 일화 책으로
북관대첩비·경복궁 자선당 등 日本서 되찾은 문화재 소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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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한일불교복지협의회 공동대표인 초산 스님이 5일 자리를 함께했다. 이 세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문화재청 주최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눌와 刊)의 출간기념회에 참석해 감사장을 받았다.
장지량 전 총장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경남 사천에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다. 그는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갑작스런 명령을 받았다. "인민군 1개 대대가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으니 그곳을 폭격하라"는 것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곳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아찔했다. 팔만대장경이 몽땅 한 줌 재로 변할 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량 탈취가 목적이니 며칠 지난 뒤 빠져나오면 그때 폭격해도 늦지 않다. 2차대전 때 프랑스의 파리 방위사령관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일도 있었는데….' 장 전 총장은 고민 끝에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계속 끌어 날이 어두워지자 자연스레 출격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며칠 뒤 인민군이 철수해 산 속으로 이동한 뒤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격노한 미군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해 그는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의 해명으로 가까스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천년 고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지켜진 것은 그의 공이었다.
- 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은‘문화재 지킴이’들. 왼쪽부터 초산 스님, 장지 량 전 공군참모총장, 김정동 목원대 교수./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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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 교수는 1993년 일본 도쿄(東京)대에 객원 연구원으로 가 있던 중 오쿠라 호텔 경내를 조사하다 옛 건물터를 발견했다. 그것은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의 흔적이었다. 자선당은 '동궁'이라고 불렸던 왕세자의 거처로, 1915년 다른 경복궁 전각들과 함께 총독부에 의해 헐린 뒤 일본으로 반출돼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의 저택으로 옮겨졌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불탄 뒤 석조 잔해만 남아있던 것을 김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그가 백방으로 뛰어다녀 여론을 모은 끝에 자선당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는 1996년 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함북 길주에 1709년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승을 기록한 비석으로,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가져간 뒤 야스쿠니(靖國) 신사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초산 스님은 일본측과 함께 북관대첩비 반환 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해 2005년 반환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북관대첩비는 2006년에 북한측에 인도됐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의 소실이 곧 역사와 문화를 잃는 것임을 깨닫고 시대를 앞서 '문화재 지킴이'의 역할을 했던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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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8월, 경남 사천 주둔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였던 장지량 중령(훗날 공군참모총장)은, 인민군 1개 대대가 점령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국비행고문단의 명령을 거부해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장지량 전 총장은 2008년 6월 5일 문화재청 주최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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