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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푸에블로 호 나포 40주년, 미-북 간 상반된 메시지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푸에블로 호 나포 40주년, 미-북 간 상반된 메시지

CIA Bear 허관(許灌) 2008. 1. 24. 18:16

 

오늘 23일은 미국의 해군 정보수집함 ,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나포된 지 꼭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푸에블로 호는 지난 1968년 1월 23일 북한의 원산 앞바다에서 정보 수집 활동 중 북한 해군 함정과 미그 제트 전투기들에 의해  나포됐습니다.

나포 과정에서 푸에블로 호 수병 1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했으며, 살아남은 82명의 승무원들은 생포돼 1년 간 북한에 억류됐었습니다.

미국은 1968년 2월 초부터 판문점에서 북한 측과 비공개 협상을 갖고 푸에블로 호는 원산 해안을 기점으로 12 마일을 벗어나는 공해 상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승무원과 군함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푸에블로 호가 북한의 영해를 침입해 북한군의 동태를 염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북한 영해 침입을 인정하고 재발방지와 사과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어 북한이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영해 침범을 시인한 것은 승무원을 송환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이를 부인했습니다.

북한은 1998년 말 푸에블로 호를 대동강으로 옮겨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를 기리는 기념물’로 전시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은 북한 정부에 푸에블로 호의 반환을 꾸준히 요구해 왔습니다. 지난 해 4월에는 푸에블로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미 의회 상원에 재상정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2년 4월 북한을 방문해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푸에블로 호의 반환을 제안했던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 소사이어티 이사장은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푸에블로 호는 냉전시절 미-북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한국 지부장과 한국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한 그레그 이사장은 푸에블로 호 나포 사건이 발생한 1968년 당시는 북한의 124 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공격을 목표로 서울에 서울에 침투했던 냉전 시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그레그 이사장은 만일 북한이 푸에블로 호를 미국에 돌려준다면 이는 미국과 북한이 적대관계를 접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2002년 제2차 북 핵 위기가 불거지기 수개월 전 ‘신뢰 구축 조치’의 일환으로 푸에블로 호를 미국에 반환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레그 이사장은 만일 북한이 푸에블로 호를 미국에 돌려 준다면 이는 북한이 미국과 화해하고 싶다는 좋은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레그 이사장은 자신이 다음 달에 평양에서 열리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에 초청을 받았다며, 이는 이번 공연은 미국이 북한에 보여주는 화해의 제스처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레그 이사장은 북한도 미국의 이같은 화해의 제스처에 푸에블로 반환 같은 적극적인 응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3일,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과 침략 의도를 계속한다면 미국은 1968년 푸에블로 나포 사건 때보다 더 부끄러운 패배를 맞게 될 것이라며,  미국은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공해상)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의 해군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다
푸에블로호는 승무원 83명(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을 태우고 북한 해안 40Km거리의 동해 공해상(동경 127도 54.3, 북위 39도 25)에서 업무수행 중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 되었다
이 때 북한측의 위협사격으로 미국 군인 1명이 사망하고 수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도발적인 북한의 납치사건에 대해 미국에서는 즉각적인 강경한 보복조치를 취하라는 여론이 비등하였으며 온 세계도 충격적인 큰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정부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행위를 비난하고 푸에블로호 및 그 승무원의 즉각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전쟁도 불사한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 핵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제7함대의 구축함 2척을 출동시켰다

또한 미국은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그 대응책을 강구하는 한편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소집을 요구 북한에 대해 푸에블로호 나포(拿捕)의 부당성을 항의 하였다 그리고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정부에 대해 나포 함정의 송환을 알선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 하였다
그 후 북한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학대, 고문하여 그들이 북한의 영해를 침범하였음을 시인 사과하도록 강요하였다

북한은 이 사건을 마치 미국이 불법적으로 침략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적인 선전을 펼쳐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사건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하고 푸에블로호 함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전자장치는 몰수 하였다
미국은 이 송환을 위해 북한정부에 대해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침범을 시인, 사과하는 요지의 승무원 석방문서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후일 미국의회에서 정치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정부는 2002년도부터 푸에블로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 반미투쟁 견학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반미투쟁 선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1.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시기의 동북아 정세
ㄱ.베트남 공산화 위기
ㄴ.북한정부의 대남공작 빨치산 지원시기---울진 삼척등지 무장간첩 침투
ㄷ.중국 문화대혁명과 항미무장투쟁노선 임표등 4인방 중국공산당 정부 장악
그리고 친미 친서방 출신이며 유연외교론자 자유화 개방화세력 주자파(走資派) 그룹 주은래 등소평등의 투쟁과 도전
ㄹ.소련정부내 소련군 극동사령부 주도로 소련공산당 권력장악 시기
임표. 김일성 그리고 베트남 공산당 그룹 주도

2.소련군 극동사령부 인맥
중국 항미무장투쟁노선이나 북한군 항미무장투쟁노선 배후가 소련군 극동사령부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ㄱ임표
소련군 만주점령--->임표등에게 일본군 무기 인계--->동북3성 사령관으로 임표 취임--->한국전쟁때 조선의용대 지원과 만주국 일본군 무기 북한인민군에 인계-->한국전쟁때 중국인민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 참전
ㄴ.김일성
소련군과 함께 만주국 점령-->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으로 북한지역 입성
ㄷ.항미무장투쟁론자---임표(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제거). 김일성등

3.저강도전략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푸에블로호 납치--->미국 폭격이나 전쟁 시도---->전면전
의도적으로 납치이나 나포등을 자행하여 지역전쟁으로 유도하고 전면전으로 확대하는 민족해방그룹의 전략과 전술이다

ㄱ.항미무장투쟁론자들은 미국과 중국 수교 방해와 친소정책 입장
ㄴ.베트남식 모델로 한국전쟁 시도
ㄷ.흐루시쵸프그룹이나 주은래, 등소평등 미국과 평화공존이나 자본가. 자산계급 옹호주의자 제거 시도 전략과 전술
ㄹ.임표등의 군사반란이나 소련군부쿠데타등이 좋은 예이다



-푸에블로호 주요 사진 자료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를 버리지 않는 한 한미관계 결속이 강화가 돼야 할 시기

북한 공산정부이고 중국은 사회정부 그리고 러시아는 자유민주정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