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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초대석: 2월에 이어 4월에도 평양방문한 박창득 신부 본문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임기제한/로마교황청

RFA 초대석: 2월에 이어 4월에도 평양방문한 박창득 신부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14. 17:15

 

북한당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는 2004년 현재 약 3천명의 천주교신자가 있습니다. 북한의 대표적 성당은 1988년 3월 평양시 선교구역에 건립된 장충성당이 꼽힙니다. 하지만 상주신부가 없어 신자대표 2명이 돌아가며 매주 일요일 3차례 미사의식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사란 천주교에서 거행하는 최대의 예배의식으로 성제라고도 합니다.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 대교구 소속 한인천주교회의 박창득 신부 - PHOTO courtesy of 미주 가톨릭 (Mee Joo Catholic)

RFA 초대석,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 대교구 소속 한인천주교회의 박창득 신부를 모시고, 최근 미주 천주교측의 북한지원활동과 장충성당 상주문제 논의에 대해 알아봅니다. 박 신부는 지난 1989년 처음으로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 현재까지 모두 3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2년 전에 평양을 방문해 북한측과 장충성당에 상주하면서 사제관에 입주하는 문제를 논의하셨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박창득: 예. 그것은 지금도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북한쪽 정책이 그런 데에 외국선교사가 와서 머물 수 있는 조건이 아직 안 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을 쉽게 생각했었습니다. 왜냐면 장충성당의 사제관이 만들어진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거야 뭐 허락받기가 어렵겠느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사실은 정책적인 면의 변화를 가져와야하기 때문에 쉽게 안 됩니다.

그리고 북한 내에 (외국인 사제의 상주에 관해)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면 한 사람한테 허용하기 시작하면, 다른 종파에서도 전부 요구할 텐데 그걸 다 감수할거냐? 하는 문제가 생기니까 계속 시간이 지연되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 되기는 되겠죠.

올해 들어 두 번 정도 북한을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가면 미사는 드리는가?

박창득: 저는 처음에 국수공장을 시작할 때 “내가 국수공장을 할뿐만 아니라, 평양에 올 때마다 주일날이면 내가 꼭 미사를 집전해야한다, 그 이유는 이 국수공장에 물자를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신자들인데, 내가 평양에 와서 이런 지원사업을 하면서 미사도 못했다 하면 말이 안 된다, 그분들한테 이야기할 거리도 없고 도움도 못 받는다. 그래서 미사는 꼭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어요. 지금도 가면 미사 드리는 것은 당연히 하게 돼있습니다.

몇 명이나 오는가? 미사용 기구는 다 준비돼있나?

박창득: 한 백 명에서 130명 정도 옵니다. 그리고 있을 것은 다 있어요. 남쪽에서 전부 가져다주기도 하고 부치기도 하고 해서 없는 것 없이 다 있습니다. 성가 책도 있고 미사책도 있고, 다 있습니다. 성가대도 한 10여명이 있어요. 반주하는 사람도 있구요. 노래들 썩 아주 잘 부릅니다. 성가를 잘 들 불러요.

조금 전에 국수공장에 대해 언급했는데, 간단히 소개해 달라.

박창득: 예. 1996년도에 설립했습니다. 96년에 김수환 추기경님과 최창두 대주교님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서 제가 국수공장을 설립했었죠. 한 5년 동안 잘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공장을 서울교구에 인계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그 후에는 황해도 쪽에 농사일을 좀 도와주었습니다. 농장 한 개에 농사일도 봐주고, 씨앗이라든지 비료를 보내주는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올해 첫 번 방북은 언제 했나?

박창득: 2월 달에 갔다 왔습니다. 3월 달에 여기 (뉴저지 주)에 오긴 했지만 그땐 서울에도 머물고 해서 2월말에 (미국으로) 돌아왔거든요. 그때 가서 제가 4박 5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럼 북한의 핵문제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2.13 합의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반응은 어땠나?

박창득: 일반시민들은 그런 새로운 소식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별로 (핵소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반영이 여기처럼 즉각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제 핵소유국이 됐다, 핵보유국이 됐다고 굉장한 선전을 할 것이라는 말들을 듣고 북한에 들어갔는데 핵보유국이 됐다는 것을 선전하는 포스터는 한군데밖에 보질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 하고 분위기가 많이 다르더라구요. 물론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척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평양에 갔다가 지난주에 돌아오지 않았나? 이번 방북결과는 무엇인가?

박창득: 지난번에 들어가서는 대충 라면식당에 대한 이야기가 됐었고, 이번에 가선 북경에서 그쪽 사람들이 나와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내용은 ‘라면식당’을 5월 중순에 다섯 군데를 연다는 것입니다.

북한주민들이 라면을 잘 먹나?

박창득: 먹죠. 북한에서도 지금 라면이 생산되고 있어요. 남쪽에서처럼 그렇게 많이 먹거나 그렇지는 않고, 가격이 있기 때문에 많이 이용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도 노동자들이 영양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잖습니까? 그래서 평양시내에 메기탕집이 있습니다. 그게 북한정부에서 보조를 해서 상당히 싸게 보급이 되고 있더라구요. 그런 종류의 식당을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누구나 다 환영하더군요.

(이 사람들이) “사실 지금까지 북한에 들어와서 사업하겠다는 사람들이 자기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했지, 일반시민을 위해서 한 사람이 별로 없다. 박신부가 그런 제안을 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좋은 생각이다, 적극적으로 그 일이 성취가 되도록 협조를 하겠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2월 달에 나와서 이번 4월 달에 가서 계약을 했습니다. 4월초에 갔다가 얼마 전에 왔습니다.

계약내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박창득: 그쪽에서 식당 5군데를 제공하고, 내가 함께 일하고 있는 카운터파트가 그 회사에서 식당을 열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쪽에서 운영하고 있는 식당을 나한테 그냥 주겠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쪽에서 식당을 운영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별로 식당 역할을 못하고 있거든요. 시민들이 와서 먹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그렇다고 외국사람들이 그 식당에 가서 먹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에요. 외국사람들은 외화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식당들이 대개 열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활약은 다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당들을 ‘라면식당’으로 개조하자는 이야기가 돼서, 북한 쪽에서는 식당과 식당에서 일할 사람들을 제공하고, 저는 물자만 대면 되는 식으로 식당을 운영하자는 합의를 봤습니다. 계약도 하구요.

그래도 일종의 사업인데, 이윤은 남는가?

박창득: 이윤이 안 나오죠. 왜냐면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요금을 받습니다. 한 그릇에 1달러라면, 10전 꼴로 받는 거죠. 사실 따져보니까 라면 한 그릇에 200그람짜리를 주기로 했는데, 200그람이면 보통 작은 라면 두 개입니다. 가격이 (미화로) 한 33전 정도가 들어요. 1달러면 3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 되는 거죠. 3명이 먹는 분량에서 내가 받으려고 하는 게 10전 정도를 받는 겁니다. 그건 이 사업에 결국 보태 쓰게 되는 거구요, 나머지 금액은 이쪽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도와서 하는 거죠.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서울에서도 도와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수 공장할 때 그렇게 일을 했고, 그래서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5개를 하고, 제가 자금여유가 생기면 10개로 늘리고, 또 100개라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있고, 밀고나가서 시골까지도 할 수 있는 것이 제 욕심입니다.

향후 기타 계획은?

박창득: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이 직조기입니다. 수예를 짜는 기계요. 기계를 제가 구할 수 있으면 한 200개를 들여가고 싶어요. 남쪽에서 만들고 있는 기계는 자동용인데 상당히 비싸요. 그래서 중국에서 만들고 잇는 수동용이 한 250불정도 합니다. 이걸 한 200개 들여갔으면 하고 있는데, 자금이 돌아가는 대로 가져가서 북한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죠.

또 한 가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자수입니다. 우리 성당의 성화, 성모님, 예수님 그림, 최후의 만찬 성화라든지 이런 것을 북한주민들이 자수로 뜨고 있습니다. 일거리를 자꾸 주는 것이죠. 이걸 미국 쪽에 가져와서 액자로 만들어서 기부한 사람들한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장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