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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駕洛)과 김유신 장군(金庾神 將軍)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가락(駕洛)과 김유신 장군(金庾神 將軍)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14. 13:55

 김해 김씨왕조(金海 金氏王朝, 10대 491년간 지속)

수로왕(首露王, 42-199. 허왕후<許王后>)--->거등왕(居登王,199-259. 모정<慕貞, 신보의 딸>)---->마품왕(麻品王,259-291. 호구<好仇, 조광의 딸>)--->거질미왕(居叱彌王,291-346.부지<附志,아궁아간의 손녀>)--->이시품왕(伊尸品王,346-407. 정신<貞信,극충의 딸>)---->좌지왕(坐知王, 407-421.복수<福壽,도녕의 딸>)--->취희왕(吹希王,421-451.인덕<仁德,진사의 딸>)---->질지왕(질지왕,451-492.방원<邦媛,김상의 딸>)--->겸지왕(鉗知王,492- 521.숙<淑,출충의 딸)---->구형왕(仇衡王,521-532. 계화<桂花, 분질수이질의 딸>)----->세종(世宗-졸지<卒支>), 무도(茂刀-서현<舒玄, 김유신 장군 아버지>), 무득(茂得) ---->유신(庾信, 김유신 장군, 김서현의 아들)

 


※ 가락시대(駕洛, 42~532 , 491년간, 총10대)


駕(임금탄 수레가), 洛(한나라 서울락, 漢都坤陽)

-가락가야가 한나라(낙랑) 유민이라는 설이 있으며 일본 사람들이 낙랑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허왕후는 인도조상으로 중국 남부지역 유민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금(金)나라와 청(淸)나라 건국세력이 김해지역 토착세력이라는 말도 있다 -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수로왕(首露王)

42~199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허황옥과 결혼함

2

거등왕(居登王)

199~259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과 결혼

3

마품왕(麻品王)

259~291

마품(馬品,삼한세력 중 마한 세력), 거등왕의 아들.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鳩)와 결혼

4

거질미왕(居叱彌王)

291~346

금물(今勿), 마품왕의 아들.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부지(附志)와 결혼

5

이시품왕(伊尸品王)

346~407

거질미왕의 아들.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과 결혼

6

좌지왕(坐知王)

407~421

김질(金叱).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도녕(道寧)의 딸 복수(福壽)와 결혼

7

취희왕(吹希王)

421~451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과 결혼

8

질지왕(?知王)

451~492

김질왕.취희왕의 아들.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과 결혼

9

겸지왕(鉗知王)

492~521

고이왕 아들. 김겸왕(金鉗王). 출충(出忠)의 딸 숙(淑)과 결혼

10

구형왕(仇衡王)

521~532

겸지왕과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 사이에서 태어남.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와 결혼

*仇(짝 구) *叱(꾸짖을 질) *尸(주검 시) *吹(불 취, 숨쉴 취) *邦(나라 방) *媛(미녀 원) *爾(너 이, 어조사 이, 가까울 이) *衡(저울대 형) *舒(펼 서)


 

1.금관가야[金官加耶]

6가야의 하나.

기원 전후 시기부터 532년까지 경상남도 김해를 중심으로 존속했다.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삼국유사〉 5가야조에 인용된 〈본조사략 本朝史略〉에 보이고 있으나, 〈삼국지 三國志〉 위지동이전에는 구야국(狗邪國)이라 칭해지고 있으며, 왜인전(倭人傳)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금관국이라고 나온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 의하면 그 시조는 수로왕(首露王)이라 한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교역의 중심지로 좋은 조건을 가졌을 뿐 아니라 넓은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이에 힘힙어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서 면모를 과시하면서 일찍이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4세기에 들면서 한반도의 국제적 세력판도가 크게 변하면서 이웃의 신라와 백제의 쟁탈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후 친신라적 노선을 택하여 간신히 그 면모를 유지해오다가 532년(법흥왕 19)에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신김씨계(新金氏系)를 형성했다. 즉 구해왕의 아들 무력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벼슬이 각간까지 올랐다. 바로 이 무력이 유명한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2.김유신 장군(金庾信 將軍)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
(1)개요

길상사, 김유신 기념비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 전체를 지배하려 했던 당나라를 물리쳤다.

(2)출신 및 배경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3)백제·고구려 정벌

609년(진평왕 31) 15세 되던 해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신라는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을 깨뜨렸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다.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결을 꾀했다.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大梁州:지금의 경남 합천)를 점령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피해를 주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 군주로 있으면서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買利浦城)을 방어하는 등 수차에 걸친 싸움에서 이겼다. 647년(진덕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을 진압했다. 그해 10월에는 압량주군주로서 무산성·감물성·동잠성을 공격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하여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다. 그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의 즉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회의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릴 만큼 큰 것이었다. 즉위 다음해에 대각간(大角干)이 되었고, 그해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했다. 660년 상대등이 되었다. 그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고전 끝에 물리친 뒤 소정방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661년(문무왕 1) 6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중 식량부족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소정방 군대를 지원하여 군량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꾀하자 인문·천존·죽지 등과 함께 물리치고, 그 공으로 밭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 당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2,000호를 받았다. 666년 아들 대아찬 삼광(三光)이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했다. 그뒤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에 자문 역할을 했다.

 
(5)당의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元述)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石門) 벌판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3.김유신설화[金庾信說話]

삼국통일에 중심역할을 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 대한 설화.

〈삼국사기〉 열전과 〈삼국유사〉·〈파한집〉·〈동경잡기〉·〈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다. 구전설화는 그가 활약했던 경북 경주시 일대와 백제 땅이었던 전라북도 지방에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편에서는 그의 일생을 고대의 신화적 틀인 '영웅의 일생'에 따라 기록했다. 김유신은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비정상적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비범했다. 어려움도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과 신의 도움으로 이겨내고, 당대 최고 지위에까지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었다. 죽은 뒤에도 호국신으로 받들어졌다. 여기에서 그는 큰 어려움없이 성공한 귀족적 영웅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와 구전설화에서는 그가 성공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구전설화에서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그가 성 밖에서 고생하면서 자랐다고 하며, 화랑이 되기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이기고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숨은 사연을 흥미있게 다룬 것이다. 〈삼국유사〉나 구전설화는 〈삼국사기〉보다 고대의 신화적 유산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를 민간의 영웅으로 받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적인 업적과 신이(神異)한 행적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민간과 무속에서 산신이나 서낭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김유신설화〉는 후대의 영웅소설에도 거듭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간실기 角干實記〉 같은 고전소설도 씌어졌다. 현대소설로는 김유신과 천관녀(天官女)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황순원이 쓴 〈차라리 내 목을〉이라는 작품이 있다.

*김유신 장군 자료


가계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 왕족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빛나는 전공

낭비성(娘臂城) 공격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김춘추가 종전에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로 청병하러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에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 신라귀족들의 성향에서 보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미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무렵의 주(州)는 지방행정단위로서보다는 군사작전 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에는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서 군사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의 활약이 뚜렷이 나타난다.

원정과 일화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쳐 50보쯤을 가서야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는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을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倭)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어 평정하였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정치적 비중

그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의 생구관계(甥舅關係)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한 포상이 있었다. 그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의 자문역할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 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음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 900여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의 편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에서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해 10월에 태종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짐의 반영인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쟁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에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은 문무왕의 즉위 뒤에도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반란 진압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인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이치로써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운명을 결정함에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전투들의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당나라 계략에 맞서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은 바 있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는 소정방이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같은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키는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봉상정경평양군 개국공식읍이천호 (奉常正卿平壤郡 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노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자신을 다스린 자세

그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하였다.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놓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한 것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북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논문 "외세개입과 불안정한 삼국통일에 대하여"

삼국 통일이 고구려 입장에서 통일이 아닌 당나라와 신라 연합으로 삼국통일을 했기 때문에 만주땅 상실과 반도통일밖에 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 미군개입으로 무력통일이 좌절된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3.남과 북이 통일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국가연합 구성과 함께 자유민주정부 수립론 제안

북한이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될수록 남과 북 자유민주정부 통일이 가능한 모델이며 그리고 중국이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될수록 동북아국가연합 구성이 가능합니다

남북통일과 동북아국가연합구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남한정부는 선진국 모델 국가제도 개혁으로 나아가야 하며 단임제 대통령 제도를 고수해야 합니다

"북한이나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도 한국정부를 두려워하는 것은 선진국 국가제도와 단임제 대통령제도이다 장기집권이나 부패와 비리 국가지도자는 영원히 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정부수립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 수립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