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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전선 대변인]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 25년 담화 그리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국가안보 위해사범(NLPDR) 자료

[조국전선 대변인]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 25년 담화 그리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8. 20:05
 
[조국전선 대변인]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 25년 담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변인은 18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이 미국의 군사적강점과 식민지지배를 반대하여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을 벌린 때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시의 청년학생들은 《미국 나가라!》,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규탄한다!》 등의 구호가 적힌 삐라들을 뿌리고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면서 격렬한 반미투쟁을 벌렸다.

이에 당황망조한 미국은 남조선파쑈도당을 내세워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참가자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이르기까지의 극형과 중형을 선고하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은 쌓이고 쌓인 반미감정과 울분의 폭발로서 남조선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층 군중들의 자주적지향과 의지를 과시한 의롭고 장한 투쟁이였으며 광주학살의 주범인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고 남조선에서 반미자주화투쟁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였다.

이 투쟁을 도화선으로 하여 남조선청년학생들은 그후 광주와 대구의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으며 1985년에는 서울에 있는 《미국문화공보원》을 며칠동안이나 점거하고 완강한 반미투쟁을 벌렸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이 있은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남조선인민들의 자주적지향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미국의 지배와 간섭책동은 날로 강화되고있다.

미국은 남조선에서 물러가기는 고사하고 그 무슨 《미군기지이전》이니, 《미군재배치》니, 《전시작전통제권이양》이니 하는 놀음을 벌리면서 남조선을 더 깊숙이 가로타고 앉으려고 획책하고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틀어쥐고 남조선인민들에게 2중3중의 예속과 지배의 멍에를 메우려 하고있다.

또한 남조선과 그 주변에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련합전시증원연습》을 비롯한 북침전쟁연습들을 더욱 광란적으로 벌리면서 우리 민족에게 핵전쟁의 참화까지 들씌우려 하고있다.

특히 미국은 6.15통일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한나라당》을 비롯한 친미극우보수분자들을 규합하여 친미《정권》을 세우려고 광분하고있다.

이 모든 사실은 미국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발전과 통일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온갖 불행과 고통의 화근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세계 도처에서 반미기운이 날로 높아가고있는 오늘 남조선이 아직도 미국의 지배와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것은 민족적비극이고 수치이다.

광주인민봉기항쟁자들과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참가자들을 비롯한 선렬들의 피의 절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며 반미자주화투쟁의 계기를 열어놓은 그들의 위훈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남조선의 청년학생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은 미국의 군사적강점과 식민지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한 반미항전에 더욱 과감히 일떠서야 하며 미국의 조종밑에 감행되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친미보수세력의 재집권책동을 단호히 반대배격하여야 한다.

주체96(2007)년 3월 18일
평양(끝)
 

 

1.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釜山美文化院放火事件]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의 대학생들이 부산미국문화원에 방화한 사건.

사건 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한 데 이어 공범 3명과 전단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1일 뒤인 4월 2일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의식화 학습을 지도한 김현장이 사건의 배후조종혐의로 체포되는 한편, 당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되어 사건관련 피의자 15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령,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최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서 최고 사형까지 판결이 선고되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문부식과 김현장은 1983년 형확정단계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부의 무자비한 살상행위를 미국측이 방관했다는, 학생운동권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종교인의 구속으로 교회와 국가권력과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종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1982년 4월 15일 사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성명서 발표는 반미적 내용으로 문제가 되어 관계자가 경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투쟁의 성격이 격렬하고 대담하여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재야운동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모험주의적·폭력적 투쟁방식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釜山 美文化院防火事件, 一 番 收 最後陳述(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최후진술)
-----(일 번 수, 김 현 장 진술) 一 番 收, 金 鉉 奬 陳述.......[*진술원본]-----


▷ 먼저 지루한 재판을 주관한 재판부와 그리고 검찰과 변호인께 감사를 드린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보도도 안 되는 기사의 취재를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있는 기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추기경]님과 [주교]님과 몸이 불편하신 데도, 매번 재판을 지켜봐 주신 [지학순]주교님, 천주교회-형제자매께 감사하고 또 누를 끼쳐 죄송함을 금할 수 없다.

- 나와 내 이웃이 있는 현실과 역사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정의가 이룩되는 사회의 실천을 위하여 책을 가지고 공부한 것이 이른바 의식화학습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위한 강의가 아니다. 그것을 [빨갱이]사상의 주입을 위한 것으로 조작한 검찰의 공소장을 보고, 한마디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리시대의 천재(검찰)들에 의해 조작된 공소장을 보고, 정신착란에 가까운 혼란을 일으켰다.

- 검찰은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었다고 말한다. 나는 가난했고, 그 가운데서도 배우고 싶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추운 겨울 어름에 미끄러질까 봐 발에 새끼를 감고 연탄을 배달했다. 그러나 나는 가난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대학 다닐 때에 나를 지도했던 교수는 [자네가 있는 곳에 웃음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고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또 용기를 가졌다. 나는 그런 점에서 사회와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나의 일생에 있어 가장 큰 상처인, 강도죄를 범행했다. 나는 강도사건 후 바로 자수했다. 파출소 순경이 자수한 나의 강도사실 이야기를 듣고, 저녁을 사주면서 같이 울었다. 그 사건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나왔는데, 집행유예 기간동안 내내 머리를 박박 깎고 속죄의 기분으로 살았다. 그것은 나에게 거듭남의 계기였다. 나는 나 자신의 출세와 잘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이 전부인 삶은 값없는 인생이다. 나의 대학졸업 후 좋은 직장이 보장되었지만(2개소), 이웃의 고통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직장을 포기했다.

- 5.17(80.5.17)일 이전까지 나는 나에게 청탁된 원고를 다 써주지 못할 정도로 일감이 많았다. 번역과 원고작성으로 월 40만원의 수입이 있었다. 적어도 이 나라 노동자와 농민 2천5백만 명은 나보다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빨갱이]라면, 같은 논리로서 2천5백만의 노동자와 농민이 모두 [빨갱이]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공소사실이 성립되려면 공산주의의 개념이 바뀌어져야 한다. 2천5백만 노동자와 농민이 공산주의자라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4월 2일 자수한 이래, 치안본부에서 검찰의 수사에 이르기까지 듣고 본 감회는, 어떻게든지 나의 사상을 [빨갱이]로 채색하려는 것이었다. 사상을 묻 길래 민주주의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그들은 [외국에 가 산다면 어디에가 살 텐가]고 물었다. 나는 외국에 가 살 생각이 없지만, 영국과 독일이 민주주의가 잘되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자, 거기는 사회주의구가라고 다그쳤다. 내가 알기로는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 집권한 적이 있거나 집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으나, 민주사회에서 민주라는 말은 빼고, 사회주의자로 나를 둔갑시키고, 이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둔갑되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이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 그곳은 [빨갱이]를 잡는 곳이 아니라 만드는 곳이며, 그들 자신은 그들이 취조하고 있는 사람이 [빨갱이]이어야하는, [빨갱이]로 된 모든 일종의 환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신적 수준은 8∼10살 먹은 어린이들보다 훨씬 뒤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러한 조작에 의해서 지금 나는 [사형을 구형] 받았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다.

- 광주사태에서 군부정권이 양민을 대량 학살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는 온 세계가 다 안다. 외국에 텔레비전은 잔인한 장면이 국민, 특히 어린이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스스로 필름을 잘라 방영을 자제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유언비어라고 하는 검찰의 기소장은 허위조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민족통일의 문제와 분단상황에 대하여 말한다면 나는 현재에 남북분단 상태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와 독재싸움으로 판단하고 있다. 미그기나 탱크가 문제 안 된다. 군사력이 좌우하는 것이라면, 월남의 [티우]정권이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요, [스탈린] 조차 지원한 [장개석]정권이 본토를 빼앗기고 대만으로 쫓기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군인이 정권을 장악, 광주사태를 일으키고, 인권유린과 독재를 자행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승패의 관건은 [자유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느냐]에 있다. 나는 이 나라 국민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으며,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강도였다. 강도라도 외쳐야한다. 그들이 외치지 않으면 길가에 버려진 돌마저 외칠 것이다. 광주사태 초기에 이미 2백-명, 이상이 죽었는데도, 군인 4명과 민간인 1명이 죽었다고 발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내 고향,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사건이 터지고, 또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초가산간을 팔아서라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 살육에서 살아남은 내가 할 일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죄라면 처벌해다오!

- 검찰은 나의 존경하는 [최기식]신부와 대부 [이창복]선생까지 용공주의자로 몰고, 천주교회가 용공활동을 위한 교육장소를 빌려준 것으로 몰아 천주교회가 공간주주의 온상인양 선전하고 있다.

- 나는 단언한다. 반공의 최후 보루는 교회이다. 교회를 공산주의로 모략 조작하는 사람들은 북쪽에서 쳐 내려오면 비행기나 타고 도망갈 사람들이 분명하다. [최]신부님은 십자가로 [성]교회와 조국을 지킬 것이다. 6.25-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킨 것을 큰소리친 [리승만]독재정권과 그 아부-배들이 아니라, 이 땅의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평소에 지키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북한의 침략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독재권력은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말한다.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군보다도 남한에 교회이다. 교회를 공산주의로 모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바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 내가 읽은 건데 공산주의자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한다. 현정권은 총구와 대포구멍에서 나왔다. 이 정권의 성립자체가 공산주의 말에 가장 충실한 것이다.(*이때 검사가 항의, 재판장 피고인에게 주의케 함)

- 저들은 정의와 복지를 부르짖고, 개국이래 가장 바람직한 정권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 정의, 복지는 [군사파쇼정권]으로 이루어진 일이 일찍이 없었다. 민족을 학살하고, 그 피 위에 선 정권이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 나는 기도와 묵상 속에, 어렸을 때 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한다. [나치스]에 대항하여, 싸우는 [프랑스-레지스탕]-운동에 참가한 대학생이 마침내 [나치스]에 잡혀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이다. 앞에 가는 사람은 묵묵히 묵상하며 간다. 그런데 바로 뒤에 오는 사람은 [나는 아무 일도 안 했다]고, 계속 투덜거리었다. 이때 앞에 가던 사람이 뒤에 딸아 오는 사람을 향하여, 바로 당신이 아무 일도 안 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끌려가는 것이고 또한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오늘 우리들이 받고 있는, 이 재판을 강 건너 불을 보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들으시오!, 오늘 우리를 처단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내일은 당신의 자식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몰아 재판할 것이다. 이 사실을 똑바로 기억하십시오.

- 나는 로마 12장12절 [악에게 굴하지 말고 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길을 [천주]님과 함께 갈 것이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 하리라!....나는 이제 돌아가리라!...자유주시는 내 주님께....]]--.

서기 1982.7.19. [1번 수]: 김 현 장: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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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산미문화원을 불지른(방화) 사람과 협력자에 수형-번호 피고 이름들 ♨

▶[1번 수] 김 현장.
▶[2번 수] 김 부식
▶[3번 수] 김 은숙
▶[4번 수] 유 승렬
▶[5번 수] 박 원식
▶[6번 수] 최 층언
▶[7번 수] 이 미옥
▶[8번 수] 최 인순
▶[9번 수] 김 지희
▶[10번 수] 박 정미
▶[11번 수] 최 기식
▶[12번 수] 문 길환
▶[13번 수] 김 영애
▶[14번 수] 이 진수
▶[15번 수] 김 화석
▶[16번 수] 이 창복

▷ 1982.3.18날인 오후 2시에 [부산 미국문화원]현관에서 [펑]하는 폭음과 함께 미국문화원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 미국정부가 소유한 건물로서 미문화원에서 영어공부를 하던,동아상대 3년 [장덕일]은 즉석사망, 동아미대 4년 [김미숙]과 [허길숙]은 2도 화상을 입었으며, 폭파로 파손된 지하1층, 지상1-2층과 집기를 포함, 1억8천75만5천원에 달하는 피해가 사태였다.

☆ [5.18]광주봉기 이후 광주에서 1980.10월에도 광주주재 미-공보관이 방화된 사실이 있었다. 부산-미문화원방화는 2번째다.

▶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2번 수]에서∼[16번 수]까지, 최후진술들은 여기서는 줄임이다. 다만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가능함을 미리 알림이다.

- 위에 16사람들이 부산미문화원을 불지른(방화)데 대한 사태제판에서 최후진술을 한 가운데서 [김현장]이 최후로 진술한 것만을 발췌한 원본입니다.

 

*한나라당  "문부식·김현장씨 영입 추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두 주역"


한나라당이 지난 83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문부식·김현장씨의 영입을 적극 추진 중인 것으로 29일 알려졌다.
한나라당은 문부식씨에게는 부산 지역구 출마를 설득하고 있으며, 전남 강진 출신인 김현장씨는 전국구 비례대표 의원으로 영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당 고위관계자가 말했다.

이 관계자는 “두 사람은 한나라당이 추구하는 보수주의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는 데 꼭 필요한 인물들”이라며 “문씨는 최근 수년간 70~80년대 운동권 출신 진보주의자들의 허구를 지적해 온 논객이라는 점에서, 김씨는 한나라당이 노력하고 있는 ‘광주·호남과의 화해’를 보여줄 수 있는 상징성을 갖춘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영입 제의에 대해 두 사람은 일단 유보적인 반응이다. 문부식씨는 “개인적으로는 한나라당의 건강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정치인으로의 변신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현장씨는 “아직 공식적으로 당으로부터 어떤 결정도 통보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