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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 자치주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연변 조선족 자치주

CIA Bear 허관(許灌) 2007. 3. 6. 18:23

1. 훈 춘 시

           

  훈춘시는 연변의 동부에 자리잡고 동으로는 우수리강을 경계로 러시아의 도시 뽀드고르나야와 마주하고 남으로는 두만강을 사이하여 북한의 두만강시와 마주하고 있다.시 산하에 4개 사업소,3개 진,8개 향,126개 촌이 있고 총면적은 5119평방키로미터이며 인구는 20만명 가까운데 조선족은 45%쯤 된다. 

  <훈춘>이란 말은 훈춘하에서 따왔는데 훈춘이란<꼬리>라는 만주말이라고 하며 전의 되어 성읍,변경,국경지역이란 뜻을 가진다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북한 삼국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훈춘은 또한 동해에 닿아있어 이미 국가급변경개발도시로 되어있다.장령자의 통상구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어 있고 북한과 왕래하는 통상구 두 개가 있어 무역도시로서 구실을 하고있다. 

  훈춘의 자연자원은 매우 풍부하여 길림성에서 제일 큰 탄정니 있으며 금도 곳곳에서 많이 나고 화력발전소가 두곳이나 있는 등 공업도시로 발전하고있다. 최근에는 UN에서 이 삼각지대일대를 특구로 개발한다고 떠들썩하여 한 때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으나 아직 별 성과가 없어 실망이 크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크게 기대된다. 또한 훈춘에는 그 독특한 위치로 하여 관광객을 부르고있다. 동해와 닿은 곳인 방천에는 3국을 굽어볼수 있는 망루가 있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그밖에 시의 하남다리 북쪽편에 자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유명한<<룡호석정자>>가 있다. 

  그리고 훈춘의 서북부에 팔련성이 있는데 이는 발해3대왕 대흠무가 바다로 세력을 넓히려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쌓았다고 하며 그의 사후에는 다시 버려졌다.성은 도읍지의 성답게 아주 튼튼히 쌓았다고 한다.
2.도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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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문시는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있으며 두만강 중류에 위치해있다.시 산하에 3개 사업소,3개 진,2개 향,62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1164평방키로미터이고 인구는 14만명인데 조선족은 60%정도 차지한다. 도문시는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에 붙은 도시이다. 옛날의 이름은 회막동, 현재 도문시의 서남쪽에 있는 하나의 촌락 이름이였다. 하전자(下甸子)혹은 애호전자(艾蒿甸子)라고도 했다. 한 어로는 灰幕洞, 會幕洞, 檜幕洞, 海幕洞, 開幕洞 등 표기가 다양했다. 1933년 일제는 회막동 이름 을 도문이라고 고쳤는데 두만강의 두만의 동음이역이다보니 土們, 豆滿이라고 적기도 했다. 만족 어로는 투먼싸이친(圖們色禽), 싸이친이란 강이라 그 뜻은 <<만수지원(萬水之源)>>이 된다. 백 여년 전에 조개명(趙開銘)이라는 산동사람이 여기에 와서 첫괭이를 박아서부터 강건너 조선시대 함경북도 남양군일대의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5년에 20여호, 1931년에 이르 러 백여호의 인가를 가진 작은 촌락이였다는데 지금은 무려 10만을 헤아리는 인구를 가진 도시로 변모했다. 도문은 남으로 강을 사이두고 조선 남양시와 마주하고 북으로는 연변과 흑룡강성과 잇 대여있어서 군사요충지이고 교통의 인후이다. 현재 연변 각지와 장춘, 심양, 북경, 모단강 등으로 통하는 렬차는 도문이 시발점이고 두만강연안에서 륙로와 철도로 조선과 무역을 하는 제일 큰 해 관이 여기에 있다. 

      도문에는 북한을 관광토록 해관(세관) 옥상에다 전망대 시설을 해놓았다. 많은 한국인관광객이 모이며 옛날엔 그 곳에 수상시장이 열려 북한사람과 서로 물건을 사고팔고 하였다. 또 도문시에는 홍범도장군이 일본군을 통쾌히 물리쳤던 현장인 봉오동전적지가 있어 우리 민족에게는 특별한 감회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두만강(豆滿江,�만쟝) 길이가 521㎞,유역면적이 1만513㎢로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한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중국의 동북(東北,뚱베이)지방과 구소련의 연해주 사이의 국경을 흐르고 있다.역사적으로 여진족과 관련이 깊은 곳으로‘두만‘이라는 명칭은 여진어에서 유래된다. 북한으로 가는 철도 북한쪽 남양 국경 두만강을 통해 건너다볼수 있는 함경북도 남양시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묘한 감회에 젖게 만든다.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는 두만강 부분에는 다리와 철교가 하나씩 있는 것이 눈에 띈다.이곳의 철교로는 북한과 중국 사이를 연기를 뿜으며 오가는 기관차가 다니고 있으며, 다리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볼수 있다. 양다리 끝에는 세관이 있는데 각각 다리를 지키는 군인들이 서있다. 중국쪽에서는 관광객들이 다리 끝에 있는 작은 탑에 올라갈 수 있는데 입장요(2원)를 받는다.올라가면 두만강을 조금 넓게 바라볼 수 있다.
  • 3.안도현

                       

      안도현은 연변의 서남부에 위치해있다.현 산하에 6개진,7개 향, 222개 촌이 있으며 현의 총면적은 7438평방키로미터이고 인구는 22만명정도 되는데 조선족은  25%쯤 차지한다.

     《안도》란 도문변방을 평안히 한다는 뜻이라고 하며 안도현의 소재지인 명월진은 《밝은달》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안도현은 자원이 풍부하여 커다란 보물창고라 할수있다.백두산맥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있고 삼림자원이 풍부하므로 현내에 백하임업국,안도임업국,안도삼림경영국이 설치되여있다.

    또한 야생동물이 많고 식용야채도 많으며 광산물도 풍부하다.물이 많아 수력발전소도 갖추어져있어 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어있다. 특히 안도현에는 몇백리 뻗은 장백산맥으로 하여 경치가 빼여나서 가는 곳마다 유람지가 펼쳐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백두산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찾고있다. 그러나 이 백두산관광객을 현지에서 모시지 못하고 교통이나 숙박시설 등으로 하여 연길로 대부분 빼았기고있어 안도현으로서는 매우 아쉬울것이다.

     

    4. 돈화시

                           

      돈화시는 연변의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시 산하에 4개 사업소와 10개진,10개 향,391개 촌

    이 있으며 총면적은 11 886평방키로미터이고 인구는 48만명인데 조선족은 5%가 채 안되여 조

    선족이 가장 적게 사는 곳이다. 

      돈화는시는 목재와 삼림야생자원과 광산물자원이 풍부하며 교통과 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여 

    있으며 특히 장백산의 풍부한 토약자원을 이용하여 의약공업이 발달하였는데 국내외에 그 이

    름이 널리 알려져있다고 한다. 육정산풍경구에는 발해국의 무덤들이 있으며 근래에는 정각사

    란 큰 절이 세워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안명호휴가촌이 경치가 뛰여나 관광객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돈화시인민정부경내에 있는 항일명장 《진한장장군기념비》도 한번쯤 찾을 만한 곳

    이다. 장군은 어린 나이에 항일전선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우시고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

    하신 분이다. 
    5.왕청시

                           


    연변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왕청현은 현 산하에 8개 진,10개 향,226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8,994평방키로미터이다. 인구는 28만명 인데 조선족은 30% 조금 넘는다.

     옛날에 왕청현은 변강의 요새라서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보루》라고 하여 만주어로 《왕친》이라고 불렀다.이것이 변하여 왕청이 되었다고 한다.토지가 비옥하고 가야하,수분하가 흘러 농업이 발달하고 또산간지에 있어 야생식물과 동물자원,광산물자원이 풍부하다.

         6.화룡시

      화룡시는 연변의 남부,두만강의 상류에 있으며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함경북도와 양강도와 마주하고 있다.시 산하에 4개 사업소,10개 진,5개 향 159개 촌이 있고 총면적은 5044평방키로미터이며 인구는 24만명인데 조선족이 60%를 차지한다. 

      화룡시는 처음 용정시에 속하였다가 독립되였으며 화룡이란 《두 산이 한 골짜기를 끼고 있다》는 뜻의 만주어라고 한다. 

      화룡시는 백두산의 동쪽기슭이라 높은 산과 험한 봉우리가 있어 임업자원이 풍부하고 석탄,화강석,대리석등 광물자원도 풍부하며 농업도 대단히 발달하여 잎담배,아마,사과배등이 유명하며 특히 평강벌의 쌀은 우수하기로 널리 알려져있고 또 숭선과 로과 두 곳의 통상구가 있어 북한과의 무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북한을 가장 가까이 볼수 있어 인기를 끌며 또 정효공주의 묘와 고구려때 쌓았다는 성자산산성과 발해때 쌓은 ,서고성이 있고 그밖에 원시주민부락터도 있다.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청산리싸움터도 여기에 있어 우리민족이 많이 찾을 곳이다.

      특히 숭선은 그 산천이 너무 아름다와 꼭 한번 찾을만한 곳이다. 그리고 두만강발원지와 선경대,전초 조어대(▩魚坮)도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다. 

      화룡선경대-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화룡시 동쪽에 있는 유적으로, 13세기에 요동반도(遼東半島.료둥빤도)를 지배했던 지방정권인 동하(東夏)가 1215년에 축성(築城)한 것이다.동하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고 칭한 나라인데, 1233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하였다.현존하는 성벽은 둘레가 6㎞정도이고 성내에는 초석이나 건물의 유적이 남아 있다.이곳에서는 최근에 동하의 관인(官印)이 2개 출토되기도 하였다. 
       7.룡정시

                       

                                                    <선구자>의 노래 비석

      룡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룡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하여 첫 마을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룡정의 시초라 할것이다. 

      룡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또한 룡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룡정은 일제의 마수가 제일 먼저 뻗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일제는 <조선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이곳에 군경을 파견하여 <조선통감간도파출소>를 세웠다.이 기구는 나중에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바뀌였다.후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 민족의식도 싹트고 따라서 애국심도 들끓게 되였다. 그러다 끝내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에는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이른바 <3.13만세운동>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깊은 사건이였다.이후로 룡정은 우리 민족의 얼은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 되였다. 

      연길시에서 버스를 타면 약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연길못지 않게 우리 나라 역사와 연관이 있는 룡정시가 있다.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룡정은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입니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전국에서 제일 큰 과수농장이 있으며 잎담배와 사과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룡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이들의 깊은 서로움이 느껴지는듯하다. 

      룡정중학교 

    룡정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가 있다.그 학교에는 여전히 조선족들이 다니고 있고 교사(校舍,쑈써)앞에 윤동주 기녑비도 있다.이학교는 룡정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러보는 곳 중의 하나이다. 


      용두레우물 

    룡정시에 있는 이 샘은 룡정시의 이름이 붙게 된 기원이 되는 곳으로 이 샘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지금은 그 자리에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룽징띠밍치왠즈징�)이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있다.그곳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서전서숙 

    서진서숙은 연변최초의 신식 사립학교요 또한 연변 모든 조선족사립학교의 어머니이다.1906년 8월에 반일 애국지사 이 상설이 룡정에 와서 이동녕,여준,왕창동,이상익 등과 함께 이 신식학교를 세우고 신학문과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이듬해 일제가 룡정에 설치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서전서숙에 갖은 간섭을 하므로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유서깊은 서전서숙의 옛터는 지금의 룡정실험소학교 구내에 있다.큰 고목이 몇그루 서있는 곳에 <서전서숙유지(瑞甸書塾遺址)>라고 힘있게 씌여져 있다.

           

                                                                    일송정

      8.연길시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민정부청사가 있는 소재지로서 연변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연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정치,경제등 모든면에서 중심도시라 한다.총면적은 1340평방키로미터이고 인구는30만이 좀 넘는가운데 조선족은 40%조금안되고 있다.그 산하에는 9개 사업소,2개의 진,6개의 향,66개의 촌이 있다. 인구는 30만이 조금 넘고 1992년 통계에 의하면 이 가운데 조선족이 59퍼센트로 가장 많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40퍼센트도 채 안될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이 한족이요 그밖에 만족, 몽골족, 회족 등도 조금씩 있어 모두 11개 민족이 살고있다고 한다. 

      연길이란 이곳 산에 안개가 자욱하고 연기가 끼여 처음에는 연집강(延集崗)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그 음이 바뀌어 연길로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길림을 이었다고 하여 연길(延吉)이라 했다고도 한다. 연길은 장백산맥 소구릉지대의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있습니다. 지세는 3면이 높고 서쪽이 트이였으며 해발 평균 높이는 154m이고 제일 높은 산은 시의 남쪽, 룡정과 접한 모아산으로 517m입니다. 부르하통하수가 서에서 동으로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며 연집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부르하통하에 합류됩니다. 이 부르하통하가 시내를 하남과 하북으로 가르고 연집강의 서쪽은 거기 인민공원이 있어 공원로라 부릅니다. 이렇게 강을 기준하여 시내가 세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지지요. 그러나 하북이 제일 중심가로서 가장 번성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강에는 다섯개의 다리가 놓여져 시내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연길시는 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지만 근래에 와서 개발된 역사는 100여년 된다.19세기초에 조선의 이재민과 산동성,하북성의 가난한 백성들이 이곳의 농토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그후 일본인이 이곳을 강점한 후 1934년 간도성의 직할시로 삼고 이곳을 동북지방 자원약탈의 교두보로 삼았다.해방후에는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가 이곳에서 일을 2년간 하다가 1952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후 자치주의 직할시로 되였다. 

      연길은 교육과 언론, 문화의 도시로도 별 손색이 없다.연변대학이 종합대학으로서 전국 100개 중점대학에 뽑혔으며 그밖에 대학에 준하는 전문학교 같은 곳도 10개에 가까이 있고 또 61개소의 중소학교가 있어 교육도시의 면모를 보여준다.그리고 연변방송국과 연변일보 등 언론기관도 상당히 수준이 높으며 예술단체만도 70여개나 있고 연변예술극장이 있으며 연길체육관과 8만명을 수용하는 연길인민체육장도 갖추고 있다. 

      이밖에 연변의 역사적인 유물로는 <연변감옥터>를 꼽아야 할 것이다.이 감옥터는 현재 연변예술극장이 들어선 곳인데 이 감옥은 1924년에 일본이 우리 독립지사들을 가두기 위해 지은 것으로서 많을 때는 1000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었다고 하며 또한 이 감옥에서는 유명한 탈옥투쟁이 벌어졌다고 하므로 역사의 교육장으로 삼을만한 곳이다.

      그러나 연길에서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느껴지는것은 <<사은기념비>>이다. 민주촌 산비탈, 화강암에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라 한자로 씌여진, 높이 1.87m의 이 비석은 말 그대로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여 세운것이다. 1907년, 국자가-현 연길의 옛이름-서쪽교외 와룡동에 반일애국주의자인 오상극, 리연휘, 남성우 등 조선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신식학교인 창동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곧 크게 발전하여 3년뒤에는 중학교과정까지 두고 많은 애국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1920년 경신년 대참변때 학교가 완전히 불타버리고 교사들은 모두 뿔뿔이 혜여지고말았다. 그후 1935년 9월 이 학교의 졸업생인 정세환 등은 이곳 와룡동에 사은의 정을 안고 이 기념비를 세운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공을 쌓은 창동학교는 지금 자취가 없지만 이 비석이나마 남아 옛 창동학교의 그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한다.

    -흑룡강코리언 김광출님 자료 참고-

    http://www.873k.com/HTML/Main.htm

     

    연 변 의  개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