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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불꽃!!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선생:)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시대의 불꽃!!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선생:)

CIA Bear 허관(許灌) 2006. 11. 12. 18:46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 1 - 김기선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른바 ‘올림픽 철거’가 한창이던 1986년 여름, 성동경찰서 앞에서는 조금 색다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가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철거민들이 즉석에서 벌인 ‘제정구 구출 시위’였다. 당시 제정구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계동 철거민 회장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우리 지도자 제정구 선생이 진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했습니까?”
시위대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습니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는데 왜 우리 제정구 선생을 잡아갔습니까? 혹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들었는데 ‘전두환은 개자식이다’라고 안 했습니다.”
벌건 대낮에 신성한 경찰서 앞에서 대통령 이름을 들먹이며 ‘개자식 선문답’을 하고 있는데도 경찰은 진땀을 쏟을 뿐 마땅히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온갖 세파에 시달려 온 도시빈민 특유의 기지와 능청스러움이 살아 있는 투쟁의 진수였다.


그 시간, 경찰서 안에서도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정구 역시 취조 형사와 벌써 몇 시간째 똑같은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던 것.
“진술서에 ‘대통령은 개자식이다’라고 썼는데 그 말은 뺍시다.”
“안 됩니다. 국민을 개 패듯이 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개자식은 개자식입니다. 그것이 나의 소신이기 때문에 ‘개자식’은 절대 뺄 수 없습니다.”
“아하, 그러지 말고….”
“못 한다니까요. 당신 마음대로 고치려면 고치고, 대신 당신이 고쳤다고 쓰시오.”
지쳐 버린 경찰들은 철거민들을 수송차에 실어 망우리에 떨어뜨려 놓고는, 상부에 제정구의 훈방을 품신하는 글을 올렸다. 성동경찰서 정보과장의 품신서 내용도 재미있다.
‘…연행되어 오는 차 안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진술서의 글자 몇 구절을 바꾸자고 설득해도 안 들으며… 세계적으로 큰 상을 수상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여러 모로 처벌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심만 잃게 될 것이므로 훈방 조치했으면 한다….’
즉결재판에 회부된 제정구의 형량은 구류 5일, 그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직후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안팎 궁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이 ‘개자식’ 문답은 제정구와 철거민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과 신뢰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자식’은 뺍시다


철거민들이 제정구에게 보여준 애정은 대중운동 지도자에게 표하는 일반적인 존경심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뜻과 정서와 생활이 일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동류의식, 우정, 신뢰, 자부심 같은 것들이 뒤섞인 따뜻한 감정이었다. 그들에게 ‘제정구’라는 이름은 3인칭이 아니었다. 복닥거리는 공동화장실 앞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이웃, 밤 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벗, 농성장의 천막을 들추며 흔연한 미소를 짓는 친근한 이름,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것은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올려진 것이었다. 그 세월 속에는 청계천 판자촌에 첫발을 디딘 스물여덟 살의 젊은이가 거쳐야 했던 무수한 싸움과 번민과 불화의 나날이 진하게 배어 있다. 빈민을 대상화시키고 관념 속에 화석화하려는 낭만적인 민중관, 학생운동 시절의 치기와 조급함을 몰아내고 스스로 빈민이 되려는 그의 노력은 가히 전투에 가까웠다.
 



단무지 사이소

제정구가 청계천 판자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 봄이었다. 4수 끝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이 늙은 학생이 병역 의무를 마치자마자 한 일은 ‘가문의 영광’을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1970년, 그는 복학생 서클인 부문회(復文會)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박정희의 임기 마감과 맞물려 심상치 않은 ‘파쇼화’의 조짐이 드러나던 해였다. 각종 시국성토대회의 연사로 나서는 일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새 문리대의 ‘1급 데모꾼’ 반열에 올라섰다. ‘문리대 생기고 나서 제일’이라는 그의 연설은 얼어붙은 교수들의 마음까지 울렁이게 할 정도였다.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의 전 단계로 재야와 운동권 학생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했다. 졸지에 수배자 신세가 된 제정구는 몇 달간 이리저리 떠돌다, 사건이 일단락된 1972년 2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꾸라지처럼 검거망을 벗어난 그를 저들이 곱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박4일간의 ‘지옥’을 체험한 뒤 바깥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학교에서 제적된 그는 갈 데가 없었다. 궁색한 집안 살림에 얹혀 지내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감옥이나 군대에 끌려간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던 그에게 청계천에서 야학 교사 생활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청계천, 그의 눈이 확 뜨였다. 80년대의 구로나 부천, 부평의 공단이 그랬듯, 70년대 청계천 판자촌은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이 한번쯤 거쳐 가는 곳이었다. 청계천은 산 자가 올 수 있는 가장 막다른 골목이었다. 청계천변 판자촌의 참혹한 삶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말로만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자신의 관념적인 운동을 반성해야만 했다. 제정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판자촌과 첫 인연을 맺은 순간의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청계천 둑방 위에서 판자촌을 내려다보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지난날 대학에서 핏대를 올려가며 ‘조국의 이방인이 되기 전에 주인으로 나서자.’던 외침도, 시위대를 진두지휘하며 최루가스를 뚫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던 용감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반성과 각성의 시간이 끝나면 대개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한번 그곳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제정구였다. 판자촌의 참상은 잠시 야학이나 하면서 향후 진로를 모색하리라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가 청계천에 정착한 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이웃에 혼자 살던 엿장수 사내가 결핵 3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그가 아주 위험한 상태라며 당분간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사내는 말했다.
“집에서 쉬면 더 빨리 죽게 될 텐데요, 선생님.”
“네에? 무슨 말씀입니까?”
“집에서 쉬면 당장 굶어야 하는데, 그러면 더 빨리 죽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사내의 처방은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제정구는 사내의 투병을 돕기 위해 그의 엿판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활빈교회에서 운영하는 청년자립단을 지원하기 위해 넝마주이를 했다. 배가 고프면 부잣집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고기나 생선을 즉석에서 구워먹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한다는 마음에 부끄럽기는커녕 그 일이 꽤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시작한 단무지 행상은 달랐다. 새벽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단무지 행상은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단무지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단무지 사이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굶주림과 불면, 자신에 대한 절망 속에서 며칠을 허우적대던 그는 마침내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바로 이거다. 내 맘 속의 교만함, 머릿속의 지식, 서울대 출신이 이거 아니라도 먹고 살 수 있을텐데 하는 허위의식.’(『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다음날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 그의 입에서는 ‘단무지 사이소.’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판자촌 중독자

가난하지만 인간으로 남아 있는 판자촌 주민들의 삶은 그에게 ‘가난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평생을 빈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제정구의 결심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다녀온 뒤에 더욱 굳어졌다. 판자촌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철거와의 투쟁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활빈교회 일대의 판자촌에도 철거바람이 불어 닥쳤다.
당시 빈민 지역에서 진행되는 빈민 활동은 대부분 독일이나 미국 등 잘사는 나라 종교단체의 지원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신청하면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설사 철거와 함께 판자촌이 와해되더라도 서울 시내의 또 다른 빈민지역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제정구는 빈민의 삶이 프로젝트 주체자에게 사회적 명예와 영리를 가져다주는 사업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교회 측은 정부에서 100여 명의 입주권을 얻어 남양만 간척지로 이주하자고 했다. 그러나 막대한 이주비용이 드는데다, 소금땅이라 당장은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남양만에 가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주민들이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는데도 교회 유지에만 신경을 쓰는 교회 측이 못마땅했다. 그는 집단 이주를 강력히 주장하며, 56세대를 조직했다. 이주비로 받은 몇 푼의 돈과 아파트 입주권을 팔아 방이동에 2천여 평의 땅을 샀다. 그런데 도무지 건축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집단 이주를 막으려는)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방해공작 때문이었어요. 천막 치고 모기 뜯겨 가며 석 달을 버텼는데, 건축허가가 안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죠. 땅을 되팔아 동네 주민들한테 돌려주고 없었던 일로 했어요.”


방이동 집단 이주 과정을 함께 한 박재천(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회고다.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집단 이주가 좌절되자 제정구는 자책감과 패배의식으로 몹시 괴로웠다. 정일우 신부(John Daly. 한몸공동체 원장)라는 든든한 동반자를 얻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말이었지만, ‘아무 조건 없이 판자촌에서 살자.’고 의기투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정보요원을 교묘히 따돌리고 양평동 판자촌에 집을 얻은 두 사람은 네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프로젝트는 하지 않는다. 둘째, 그냥 산다. 셋째,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를 필요로 할 때마다 앞장선다. 넷째, 그들 스스로 하는 일에 함께 하고 거든다.
두 사람은 부엌과 방으로 쓸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드나들면서 사랑방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일없는 사람들이 장기를 뒀고, 오후에는 학교에 갔다 온 아이들의 공부방이 되었으며, 밤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른들이 한담을 나누는 곳이 되었다. 술을 마시다가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예사였다.
1976년 제정구가 청계천 시절에 만난 신명자와 결혼하자 양평동 둑방 동네의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적극적인 요구로 신명자는 오전에 사랑방 유치원을 열었고, 제정구는 동네 사람에게 요가를 가르쳤다. 그는 지나치리만큼 아내에게 내핍과 절약을 강요했다. 신명자는 그 시절의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하루는 제가 나가면서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운동화 뒤축을 살짝 구겨 신었던가 봐요. 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부엌문 사이가 두세 걸음이나 될까, 그 정도 거리였는데, 바로 신발짝이 날아오는 거예요. 부르조아적인 습성이 남아 있다고.”
 
아내에게 내핍과 절약을 강조

그는 결혼 전부터 신명자에게 이렇게 엄포를 놓곤 했다.
‘나는 평생 판자촌에서 살거야. 그러니까 행여 나중에라도 판자촌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갖지 마. 돈을 많이 벌 가능성도 없어. 그러나 당신을 굶기지는 않을 거야.’
‘호랑이’, ‘제고집’ 등으로 불리던 제정구에게 ‘판자촌 중독자’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그냥 산다.’는 모토로 양평동에 들어온 이 ‘판자촌 중독자’도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자 슬슬 끼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경비나 잡부를 뽑는 데다 이력서를 넣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될 듯하다가도 번번이 틀어지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장난이었다. 매형을 통해 전해오기를, 두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즉각 취직도 시켜 주고, 살림집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조건이란 ‘판자촌에서 살지 말 것’과 ‘정일우 신부와 함께 살지 말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갈 길이 더욱 분명해짐을 느꼈다.
‘나의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중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판자촌에 살라는 것이고, 또한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살라는 것이구나!’(『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그는 깨끗이 취직을 포기했다. 그는 가진 돈을 털어 성서를 한 권 구입했다. 그리고 거기에 썼다.
‘축 취직 기념(하느님께), 1976년 9월 1일’

 
 


 

 

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2 - 김기선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 …… 땅이 좁을수록 주거의 크기는 엄격히 제한되어야만 약자의 몫이 있게 된다. 요약하면 나의 몫을 누리는 것이 정의요, 그의 몫을 두는 것이 연대의식이다. 그러므로 나의 몫과 함께 그의 몫이 동시에 있는 것이 평화다.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 제정구, 1988)

사람의 자리

제정구에게 집이란 삶의 총체적인 자리요,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누려야 할 ‘몫’이었다. 주거가 ‘있는 자’들의 사치와 향락과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삶의 유린이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던지듯 강제철거를 자행하는 것은 삶의 말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 이주는 뿌리 뽑힌 나무들이 한데 모여 살아갈 터전(숲)을 만드는

노동과 건설의 과정이자, 철거민 스스로 패배의식과 열패감을 씻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과정이요, 이웃간에 정과 생활을 나누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양평동 판자촌에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면서, ‘복음자리’ 사랑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공동체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제정구와 주민들의 선택은 역시 ‘집단 이주’였다. 정일우 신부를 비롯한 다른 공동체 식구들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철거당하더라도 어디든 함께 이사를 가서 이웃으로 살자.’는 주민들의 성원은 집단 이주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동네에 살던 철거민들 중에 방을 얻지 못한 세대도 집단 이주 대열에 대거 동참했다.

빈민 현장 속으로


1977년 봄, 2만여 철거 세대 중에서 최종적으로 마음을 정한 170세대가 우여곡절 끝에 안착한 곳은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으로 독일 모 단체에서 융자금을 얻어 매입한 땅이었다. 부천 남부역에서 경원여객 버스를 타고 여우고개, 하오고개를 넘어 신천리까지 족히 40~50분은 걸리는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이 서울을 떠나 집단 이주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모한 모험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양평동에서 제정구 일행과 함께 한 끈끈한 삶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허허벌판에 천막을 친 제정구는 주민들과 함께 터를 고르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대역사를 감행했다.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건설 현장을 누비는 제정구의 모습은 그의 아내 신명자의 표현대로 ‘펄펄 뛰는 야생마’와도 같았다. 대학에서 제적된 후 빈민운동에 투신한 그의 동생 제정원은 총무를 보았고, 정일우 신부는 ‘브리샤’를 몰고 서울을 왕래하며 필요한 물자와 경비를 조달했다. 이들 모두는 학기가 지난 아이들의 전학, 갑작스런 이주에 따른 행정 처리, 전기와 식수 문제 등 산더미 같은 일거리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서울을 탈출하여 해방구로 간다.” (박재천,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는 희열과 낭만도 없지 않아서, 이들은 시흥으로의 집단 이주를 ‘출애굽’, ‘엑소더스’로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


빈민 현장 속으로

1977년 봄, 2만여 철거 세대 중에서 최종적으로 마음을 정한 170세대가 우여곡절 끝에 안착한 곳은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으로 독일 모 단체에서 융자금을 얻어 매입한 땅이었다. 부천 남부역에서 경원여객 버스를 타고 여우고개, 하오고개를 넘어 신천리까지 족히 40~50분은 걸리는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이 서울을 떠나 집단 이주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모한 모험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양평동에서 제정구 일행과 함께 한 끈끈한 삶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허허벌판에 천막을 친 제정구는 주민들과 함께 터를 고르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대역사를 감행했다.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건설 현장을 누비는 제정구의 모습은 그의 아내 신명자의 표현대로 ‘펄펄 뛰는 야생마’와도 같았다. 대학에서 제적된 후 빈민운동에 투신한 그의 동생 제정원은 총무를 보았고, 정일우 신부는 ‘브리샤’를 몰고 서울을 왕래하며 필요한 물자와 경비를 조달했다. 이들 모두는 학기가 지난 아이들의 전학, 갑작스런 이주에 따른 행정 처리, 전기와 식수 문제 등 산더미 같은 일거리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서울을 탈출하여 해방구로 간다.” (박재천,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는 희열과 낭만도 없지 않아서, 이들은 시흥으로의 집단 이주를 ‘출애굽’, ‘엑소더스’로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


‘나’의 몫’과 ‘그’의 몫이 공존하는 ‘평화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순탄할 리 없었다. 주민들의 악착 같은 이기심과 싸우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언제든지 장부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제정구 형제와 정일우 신부의 생활비가 건축비에서 충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등을 조목조목 설명해도, 주민들의 의심은 끝이 없었다. 하루도 싸움 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모진 세파를 거치면서 불신을 먼저 배워버린 사람들은 ‘나의 몫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의 몫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도 공동 작업에 일당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가 ‘집장사를 한다.’느니, ‘부동산 투기를 한다.’느니, ‘주민들이 낸 돈을 마구 쓰고 다닌다.’는 말을 마구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에서 휴가 나와 보면) 매일 저녁 싸움이 벌어져요. 서로 이간질하고 고자질하고, 일 안 하려고 하고 떼어먹으려고 하고 이런 게 계속 이어지니까…… . 나는 그 현장에 없었길 다행이지, 있었으면 말라죽었을지도 몰라요.” (박재천)

 
“어느 토요일 저녁에는 네 군데에서 동시에 싸움이 벌어졌어요. 해머 들고 맥주병 깨고 그야말로 피 흘리는 싸움이었는데, 어디를 먼저 가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제가 살아온 과정에서 이런 싸움은 별로 못 봤기 때문에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었죠. 차차 익숙해지긴 했지만 처음에는 거의 지옥 같은 것이었죠.” (정일우 예수회 신부)

복음자리 마을의 탄생

흔히 제정구를 ‘빈민운동의 성자’로 부르는 이가 많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용인하고 끌어안는 유형의 성자는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죽는 날까지 ‘가난의 희망’과 ‘참 나’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였으나, 칼날 같은 현실 속에서는 단 한순간도 인간이기를, 특히 정직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는 미워해야 할 것을 지독스레 미워했고, 사랑해야 할 것을 열렬히 사랑했다.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다투고 서로를 불신하는 빈민들의 비루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미워했으며, 작은 일에 감동하고 이웃간에 정을 주고받을 줄 알며, 역동적인 생명력을 간직한 그들의 삶을 사랑했다.
“왜, 술 마시면 ‘꼬장’ 부리는 사람 있잖아요? 밤에 가지도 않고 방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개별적으로 시비 붙어 오고 그러면, 마냥 받아주지 않아요. 그냥 치고받을 때는 불 같아요. 주민들이 뭔가 술수를 쓰고 거짓말하고 그런 거 절대 못 보죠. 피하는 법이 없어요. 늘 정면 돌파지. 그런데 특별히 제 선생한테 더 많이 깨진 사람들이 그때의 정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우리 기념사업회에서 제일 열성적인 회원이죠.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는 거야.” (박재천)

제정구가 55세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떴을 때, 가장 슬퍼한 것은 시흥에서 그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평소 제정구에게 유난히 자주 시비를 걸었던 이가 있었다. 나름대로 망자와 화해를 하겠다고 빈소를 찾아온 그는 끝내 술에 취해 유리창 몇 장을 깨는 소동을 벌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빈소에서 추태를 보인 그를 손가락질했지만, 시흥에서 고락을 함께 한 ‘공동체 식구’들은 사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만의 방식과 애정으로 제정구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제정구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일으키는 소소한 분란과 시비를 ‘처음으로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소중한 의식’으로 받아들였고, ‘함께 집을 짓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통과해야 할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다.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 그는 주민들에게 모두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바라볼 것을 끈기 있게 요청했고, 부단히 싸웠으며, 총회와 마을 잔치를 통해 이견을 좁혀 나갔다. 공동작업과 새참, 흥겨운 잔치마당은 주민들의 각박한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주민들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기 시작했고, 공공시설을 위해 푼돈을 모을 줄도 알게 됐다.


공동체를 꿈꾸며 만든 복음자리

1977년 말, 마침내 복음자리 마을의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다. 신천리 황량하던 벌판에 늘어선 집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자부심은 굉장한 것이었다. 8개월 만에 170세대가 살아갈 터전을 지었다는 긍지는 가난한 이들의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을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웃을 얻었다는 점이었다. 공사 과정은 집을 짓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사람다운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람다운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복음자리 마을은 겉모습부터가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시골 마을을 닮았다. 작은 집에는 담도 대문도 없으니, 방문만 열면 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알 수 있다. 공동 화장실과 우물, 마을회관 등 대부분의 시설을 공용으로 지어놓은 탓에, 주민들은 눈만 뜨면 이웃들과 부대끼고 정을 나누며 살게 된다. 제정구가 꿈꾸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제정구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뿌리 깊은 열망 같은 것이 있었다고 정일우 신부는 회고했다. 그는 제정구가 복음자리 마을을 짓게 된 정서적·철학적인 배경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시골 공동체에 대한 향수, 둘째는 자연에 대한 사랑, 셋째는 빈자의 자유.
“정구는 고성의 시골마을에서 자라난 어린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자연 안에서 자라난 사람은 그걸 버릴 수가 없어요. 죽기 2년 전이었던가. 내가 괴산 청천면에서 농사 짓고 있을 땐데, 정구가 놀러 온 적이 있었어요. 하루는 차를 타고 나하고 정구하고 아름이 엄마(신명자)하고 산길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야겠다는 거예요. 산길 양쪽에 숲이 있는데 정구는 그 나무숲 사이를 계속 걸어가고 있었죠. 그걸 보면서 정구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가, 그 생각을 했죠. 잊혀지지 않는,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죠.”
 
제정구는 복음자리 마을을 진정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생계대책이 없는 가난한 주민들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공동체를 구상하던 끝에 1979년에 복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아름농장, 한우협동조합 등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철거 걱정 없는 내 집, 내 땅에서 산다는 안정감 속에서 주민들도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때마침 마을 근처에 공장이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취직하는 행운도 있었다. 주민들은 불과 2년 만에, 신천리 땅을 매입하기 위해 독일에서 빌린 돈을 전액 갚게 되었다.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0년에는 제2차 정착촌 한독마을과 목화마을이 잇달아 들어서게 되었다.

흩어지는 공동체

복음자리 마을의 성공에는 또 다른 작은 공동체의 힘이 숨어 있다. 정일우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과 수녀들, 제정구 부부, 동생 제정원, 박재천 부부, 신명호, 김영준 등 성직자와 평신도, 비신도가 어우러진 작은 공동체가 서로 이웃한 집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공동체의 취지는 ‘그냥 함께 살아보자’는 것. 이들은 하나의 부엌에서 한솥밥을 먹었으며, 번 돈을 모두 모았다가 각자 필요한 만큼 덜어다 썼다. 타인과 한 집에서 완전히 열어놓고 산다는 것은 아픔과 불편과, 속상함과 어려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제정구는 이 공동체 생활을 ‘참 인간이 되기 위한 용광로’라고 표현했다. ‘열어놓기 위해서, 수용하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자치 능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1980년 중반에 이르자, 마을을 건설할 무렵 중·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아이들도 의젓하게 자라, 신협과 생산공동체, 작은자리 회관 등 마을의 각종 실무를 담당할 만한 유능한 일꾼이 되었다. 작은 공동체 성원들은 자연스럽게 더 낮은 자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흩어지는 공동체’. 시흥 3개 마을에서 자신들이 한 역할을 마감해도 좋은 시기가 된 것이다. 정일우 신부는 상계동 철거 현장으로, 박재천과 김영준은 각각 행당동과 무악동 빈민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제정구의 또 다른 자리는 어디였을까.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각지에서는 철거투쟁이 매우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아시안게임 개최를 앞둔 1986년의 경우, 서울 26개 지역의 주민들이 강제 철거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독점건설자본이 주도했던 이 시기의 철거는 도시 미화 차원에서 이루어진 종전의 철거와는 그 방식과 내용이 질적으로 달랐다. 용역 깡패와 전경들의 물리력에 폭력적으로 짓밟히는 빈민지역의 철거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집 안에 최루탄을 쏘는 등 비인간적인 만행이 속출했다.
제정구가 ‘빈민의 벗’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는 서울의 철거 현장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교육으로 철거민을 조직했고, 강제철거에 대응한 투쟁 방침을 세웠다. 이 시기의 철거 투쟁은 그 특성상 필연적으로 정치투쟁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농민, 노동자 단체와의 연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80년대의 제정구가 여러 시민단체에 이름을 올리며 활동범위를 넓히고, 도시빈민운동가에서 사회변혁운동가로 변모하게 된 데는 그러한 배경이 숨어 있었다.

정계입문

그가 6·10항쟁을 거친 뒤 정계에 입문하는 과정을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만,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격변의 현대사와 함께 한 그의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능히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 식구들이나 그의 지인들 중에서 그의 정계 입문에 찬성하고 나선 이는 거의 드물었다. 그의 평생 도반이었던 정일우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격상 정치할 사람이 못 돼요. 타협할 줄을 몰라요. 정치는 타협하는 거 아니예요? 그리고 거짓을 도저히 참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났어요. 복음자리 마을 지을 때 그렇게 큰 돈을 만졌는데 십 원도 일 원도 옆으로 돌아간 것이 없어요. 공과 사가 너무 구별돼 있어요. 도대체 무슨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이렇게 깨끗한가. 진리 앞에서는, ‘이것이다, 끝!’ 이런 성격인데, 정계에 들어가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구가 나한테 말하더군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독물을 마시고 가셨다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었었죠.” (정일우 신부)


그러나 제정구의 결심은 완강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로서 야권 분열이라는 뼈아픈 좌절을 경험한 그는 이미 새로운 결심을 굳힌 뒤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희망이요, 그 희망에 불을 당겨야만 온 국민이 깨어나 군사독재에 저항할 수 있다.’ 고 그는 생각했다. 마을 주민들 중에는 ‘변절자다’, ‘빈민 팔아가지고 출세하려 한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가 있었지만, 제정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유명한 ‘걸레론’으로 반대하는 입들을 틀어 막았다.
“더러운 정치판을 깨끗이 닦아 내는 걸레가 되겠다.”
1992년, 제정구는 시흥 3개 마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마침내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그는 ‘깨끗한 정치를 위한 자정 선언’을 주도하고, 민주개혁정치모임을 결성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1999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성실한 의정 활동과, 더러운 정치판에 정의를 세우고 상생의 정치 문화를 일으키겠다는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제정구의 청정한 삶을 마음으로 배우지 않고, 정치적 라이벌을 규탄하는 도구로써만 편리하게 써먹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회에서는 193명의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 나라는 잘 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 잘 되고 있다고 믿는다. 국민들이 마음으로 피워 낸 촛불이 썩은 것과 온전한 것을 여실히 비추고 있는 한은.

사진도움 / (사)제정구기념사업회

 

<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