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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 김일성前주석 다음으로 국가장의를 치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국가원수 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북한[PRK]

북한정부 김일성前주석 다음으로 국가장의를 치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국가원수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28. 19:01

오진우는 북한의 혁명 1세대로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앞장섰다
김일성 반대파 숙청에 앞장서며 권력기반을 다졌던 그는 1976년 이후 19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지내는 등 죽기 직전까지 권력의 핵심부에 마무르며 김일성과 같은 원수 칭호를 받았다
오진우는 1917년 3월 9일 가난한 농가 함경북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만주간도에서 보낸 그는 용정대성중학 중퇴했으며 16세때인 19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으며 소련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광복 후 입북하여 북한 인민군 창설에 관여하였고 한국전쟁때는 인민군 제3사단장을 지냈다
6.25전쟁 당시 766유격 부대장으로서 동부전선 상륙작전을 감행해 한국군과 국제연합(UN)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전과를 기반으로 1956년 3차 당대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8년 공군사령부 참모장등을 거쳐 1961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권력서열 24위가 되었으며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967년 3월 김일성 유일체제 구축을 위해 당시 수적으로 우세하던 박금철을 비롯한 갑산파 숙청에 앞장섰으며 1969년 1월 인민군당 제4차 확대회의에서는 군 수뇌부의 숙청을 단행했고 김창봉. 허봉학등 군부를 반당종파로 비판, 숙청한 공적으로 군참모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74년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을 겸직하여 군부의 제 1인자가 되었다
1980년 김일성. 김정일. 오진우 3인으로 구성된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권력 서열 2위를 지켜왔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 프랑스에서 폐암 치료를 받기도 한 그는 1995년 2월 8일 김정일과 함께 군선동원대회에 참석한 것이 공식석상에 보였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1995년 2월 병사로 사망했으며 북한정부 국가장의로 장례식을 치렀다
1968년 영웅칭호와 국기훈장 1급, 1973년 콩고대장교훈장, 1982년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김정일 국방위원장.김영남.조명록.홍성남. 김영주.박성철.김영춘.김일철.전병호. 백학림. 연형묵.양형섭. 계응태. 한성룡. 최태복. 김철만. 최영림. 김윤혁. 유미영등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군고위 장성 대동 조문 그리고 오진우 장례식 참석

1.성명: 오진우(吳振宇)
2.출생일: 1917년 3월 9일
3.출생지: 함남 북청
4.직책: 전(前) 인민무력부장
5.학력: 용정대성중학 중퇴
6.경력
(1)1953년 김일성 경호대장
(2)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9기 대의원
(3)1969년 2월 인민군 총참모장
(4)1970년 11월 당 정치국 위원
(5)1976년 5월 인민무력부장
(6)1980년 10월 당 정치 상무위원 겸 중앙군사위원
(7)1989년 4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8)1995년 2월 사망(병사)
7.주요동정
(1)1990년 11월 군사대표단장으로 이란. 태국등 방문
(2)1991년 1월 휴양차 중국을 경유하여 군사대표단장으로 나이제리아 방문
(3)1994년 10월 폐암 치료차 프랑스 방문
8. 오진우 전(前) 인무력무장에 관한 주요 자료
(1)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의 소련방문
-1984년 12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소련국방장관 장례식에 참가차 방문
-1988년 2월 오진우 북한 인민무력부장 소련 방문

(2)김현희 그녀는 오진우 전(前) 인민무력부장의 넷째 며느리로 혼담이 오갔다는 일화
http://news.media.daum.net/culture/book/200407/09/chosun/v6981599.html

(3)1994년 7월 프랑스 방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1994년 프랑스에서 폐암 치료를 받았다
그는 혁명 1세대로 김일성 주석에 이어 권력서열 2위에 오른 거물이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는지 북한은 프랑스행을 은밀하게 추진했다
프랑스도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한국 특파원들의 끈질긴 취재로 오진우의 방불(訪佛) 진료는 시작하는 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라에네크 병원에서 1차 진료를 마친 오진우가 승용차에 오르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잡혔다

(4)1995년 사망한 오진우 전(前) 인민무력부장의 아들 또는 손자나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의 아들등이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설이 떠오르고 있다

9.오진우와 김정일

김정일이 아무리 김일성의 후계자로 하더라도 김일성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군을 통솔하던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벅찬 상대였습니다. 남한 Daily NK의 김영환 논설위원은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오진우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영환: 오진우는 김일성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였으니까 오진우를 쳐낼 수는 없고, 쳐내기가 어렵다면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김정일한테는 중요했던 것입니다. 항일 빨치산 출신인 오진우 입장에서는 김정일이 정통 공산주의자 같아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오진우를 얻기 위해서 당근과 채찍, 즉 회유와 협박을 병행했습니다. 한번은 오진우의 집무실에서 도청기가 발견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오진우는 은밀히 진행된 색출 과정에서 도청기를 설치한 사람이 인민무력부 부부장 박중국이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박중국이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과 매일 저녁 술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입수했습니다. 오진우는 바로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박중국은 직위해제 됐습니다. 그러나 박중국은 지방으로 유배돼 가지 않고 오히려 쿠바대사로 발령이 납니다. 박중국이 쿠바 대사로 간 것은 당시 김정일의 영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김정일이 오진우의 일거수 일투족을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도청기 사건 이후 1979년 군부에 오극렬 참모총장이 등장합니다. 오극렬은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인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 된 것입니다. 그는 빨치산 시절 김일성과 가까웠던 오중성의 아들로 소련 공군대학에서 유학한 군부 엘리트 출신입니다. 오극렬은 참모총장이 된 후 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김정일에게 보고하고 그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일부 군부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정일에게 모든 것을 고해 바치는 오극렬과 이를 못마땅해 하는 오진우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김정일은 오진우를 견제하는 동시에 회유 작전도 폈습니다. 김정일이 1980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무렵 그는 오진우에게 포드 승용차와 벤츠, 그리고 사냥용 승용차등 최고급 자동차 6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또한 사회안전부 공병 1개 여단을 동원해 호화 단독 주택도 지어줬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한 Daily NK의 김영환 논설위원은 과감한 당근과 채찍을 이용한 용인술은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영환: 김정일이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면서 쓰는데 굉장히 많은 선물을 준다든지 기념일 같은 날, 생일을 기억해서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귀한 물건을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과오를 저질렀을 때 과감하게 내치는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당신을 내 손아귀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것을 각인 시킵니다.

이러한 가운데 1987년 오진우가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진우는 완전히 김정일의 사람이 됩니다.

지난주에는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어떻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정일은 오진우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그를 완전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987년 봄, 오진우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참석한 뒤 만취한 상태에서 벤츠 승용차를 몰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다 대형 사고를 냈습니다. 가로등을 받고 부서져 있는 벤츠를 발견한 안전국 교통순찰대원은 피투성이의 오진우를 급히 평양 제 1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져 있는 등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병원측 당직 의사는 이 의식불명 환자의 신원을 파악하려고 주머니를 모두 뒤졌지만 신원을 증명할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의사는 노인이 팔목에 찬 김일성이라는 빨간 글자가 새겨진 순금으로 된 오메가 시계를 언뜻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그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바로 짐작하고 중앙당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곧 중앙당에서 사람이 나왔고 그 환자는 오진우로 판명됐습니다. 오진우의 사고 소식을 듣고 김정일도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오진우는 다시 살아나기 힘들 정도로 워낙 중상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한 DailyNK의 김영환 논설위원은 당시 교통사고를 당한 오진우가 김정일의 절대적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얘기는 널리 알려진 일화라면서, 이 일 이후 오진우는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 전했습니다.

김영환: 오진우가 대단히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때 소생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김정일이 병원에 즉각 달려 와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치료해라. 그리고 오진우를 데려온 교통 순찰관에게 큰 포상금도 주고 오진우를 나중에는 프랑스, 외국 병원까지 보내서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해서 살려냈다는 잘 알려진 일화가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다시 살아난 오진우는 88년 초 퇴원한 후 다시 일선에 복귀합니다. 그리고 오진우는 95년 사망할 때까지 쭉 군부 최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오진우가 87년 교통사고로 모스크바와 유럽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김정일은 오진우의 빈자리를 오극렬에게 직무 대행하도록 맡겼습니다. 오극렬은 직무 대행 기간 동안 정치장교들에 대한 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한편, 오진우는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군 개혁을 펼치는 오극렬의 활동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88년 퇴원한 후 김일성에게 오극렬이 군에서 당을 떼어내려 했다며 그의 과오를 보고했고 김일성은 이 일로 오극렬을 전격 해임합니다. 당시 김일성과 오진우는 마우쩌뚱의 인민해방군처럼 정치장교들이 군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적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정일도 이 때 자신의 군부 오른팔인 오극렬을 잠시 버립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오극렬을 단 6개월 동안 김일성 고급 당학교로 보냈을 뿐, 다시 당 작전부장의 중책을 맡기며 복귀시킵니다. 이후 오진우와 오극렬 등 군부 실세들은 김정일이 북한 군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