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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金首露王, 金海 金氏)과 김알지(金閼智, 慶州 金氏) 본문
김수로왕(金首露王, 金海 金氏)과 김알지(金閼智, 慶州 金氏)
CIA Bear 허관(許灌) 2026. 6. 21. 21:55
김수로왕(金首露王, 서기 42년)은 금관가야의 건국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뿌리이며, 김알지( 金閼智, 서기 65년)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이자 경주 김씨의 조상입니다
김수로왕의 탄생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 모인 아홉 명의 부족장(9간)과 백성들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에서 보라색 줄에 매단 황금 상자가 내려왔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빛 알이 들어 있었습니다
알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 머리를 드러낸 아이였기에 '제일 먼저 나타났다'는 뜻으로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단 며칠 만에 어른으로 성장해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습니다.”
김알지의 탄생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4대 탈해 이사금 재위 시절,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고 밝은 빛이 비치는 곳을 찾아가 보니 숲속 나무에 황금빛 궤짝이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왕이 궤짝을 열어보니 그 안에 총명한 남자아이가 들어있어 데려다 길렀습니다. 신라 말로 '아이'를 뜻하는 '알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황금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씨 성을 내렸습니다.
알지가 자라자 왕은 그를 매우 신성하게 여겨 벼슬을 내리고 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이후 알지가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면서 직접 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알지의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을 지내다 7대손인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 대에 이르러 신라 역사상 최초의 김씨 왕을 배출하였습니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 김해 수로왕릉(사적 제73호)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입니다. '납릉(納陵)'이라고도 부르며, 웅장한 원형 봉토분과 주변의 아름다운 전통 건축물이 어우러져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김알지의 실제 무덤(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라의 왕성인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전설 속의 인물로, 실존 인물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관가야국 시조 수로왕(首露王)[머리 首, 이슬 露(露는 나라 이름으로는 러시아를 뜻함)]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300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9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6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6개의 알은 화해서 어린 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 탕왕)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나라 고조와 같았다. 눈썹이 팔자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나라 요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재위 2년 계묘(癸卯)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신답평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9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18]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9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명 ~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 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 것을 고쳐서 새 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6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를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수로왕(首露王)
수로왕(首露王, 42년 음력 3월 4일)~ 199년 음력 3월 23일) , 또는 김수로(金首露)는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시호는 수릉왕(首陵王)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9척(약 2m)의 소년이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나, 신라의 최치원에 의하면 그가 천신 이비가지와 정견모주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150세 이상을 생존했다고 한다.
1.생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천지개벽 이후 지금의 낙동강 하류에 나라가 없던 이땅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라는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하였는데, 42년 음력 3월 계욕일, 하늘의 계시를 들은 9간과 수백명의 백성들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왕을 내려보내기 위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하늘에서 자주색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그 안에 해처럼 둥근 여섯의 황금 알이 들어있었다. 12시간이 지나 이들 금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이 자랐다. 그 중 제일 처음에 난 아이를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김해(金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伽倻)라고 하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5가야의 왕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智異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이엉으로 이은 지붕과 토담으로 된 질박하고 검소한 임시 궁궐을 세우고, 임시 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성곽을 쌓을 때도 반드시 농번기를 피하여 농한기를 이용하였으며 농한기에 시작하였던 공사라 할지라도 농번기가 되면 중단하였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들을 수집하여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의 내용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이름이 뇌질주일(惱室朱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김수로왕)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탈해가 바다를 건너와 가락국에 정박해 왕위를 두고 수로왕에게 술법 겨루기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왕은 독수리로,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수로왕은 새매로 변했다. 결국 탈해는 본모습으로 돌아와 수로왕에게 항복하고 물러났다.
102년 음력 8월, 파사 이사금의 요청으로 실직곡국과 음즙벌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한 뒤 파사 이사금이 진한(辰韓) 6부에 명해 수로왕를 위해 연회에 베풀게 하였는데, 모두 이찬을 보내 접대하게 했으나 한기부(漢祇部)만이 하급 관리를 보내 수로왕은 노하여 종 탐하리(耽下里)를 시켜 한기부주 보제(保濟)를 죽이게 했다.
『김해명월사사적비』 비문에 따르면 수로왕은 바다에 건너온 왕비 허황옥을 명월산에서 맞이하고 그 뒤 왕비를 위한 진국사(鎭國寺)와 세자를 위한 신국사(新國寺), 그리고 자신을 위한 흥국사(興國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흥국사는 이후에 지금의 명월사로 바뀌었다.
2.탄생 신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3월의 재계일(齋戒日)에 구지봉(龜旨峰)에 9간(干:족장 또는 왕)들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 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건국자가 되었다는 신화이다. 특히 이 신화는 하늘의 신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명의 간들이 부족들을 다스리는 부족(9간) 연합사회의 통치자로서 인간사회에 내려왔다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를 환영의 극치인 ‘춤과 노래’로 스스럼없이 맞아들여 왕으로 삼은 영신(迎神)신화라고 해석하고 있다.
3.신라 종묘 편입 배경
거등왕이 즉위한 199년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기간 동안에 제사를 이어 왔는데,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고 계속하긴 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할 수는 없었고 다소 소홀해져 가끔 빠트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문무왕은 661년 수로왕 묘(廟)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문무왕은 김수로왕의 15대 외손에 해당된다. 이 설에 의하면 김유신 가(家)는 "구형왕 - 무력 - 서현- 유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형왕 - 세종 - 솔지 - 서현 - 유신"으로 이어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문무대왕이 외가의 조상인 가락국의 김수로왕 제사에 관한 교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가야국 시조의 9세손인 구형왕이 신라에 편입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인 세종의 아들이 솔우공이고, 그 아들인 서운(김서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다. 때문에 시조인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 조가 된다.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묘가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하도록 하라.”
— 《삼국유사》가락국기, 문무대왕의 특별교서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문무대왕은 가야국의 태조 김수로왕을 신라 왕실의 종묘에 합사하도록 특별교서를 내리면서, 자신을 "구형왕 - 세종 - 솔지 - 김서현 - 문명왕후"로 이어지는 외가의 후손으로 칭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솔지는 세종의 아들로 구형왕의 손자가 되는데, 이는 김서현을 김무력의 아들, 세종의 조카로 보는 통설과는 상반된다.
4.가족 관계
국왕 : 수로왕(首露王, 42~199 재위: 42~199)
왕비 : 허황옥(許黃玉, 33~189)
장남 : 거등왕(居登王, ?~253, 재위:199~253)
자부 : 모정부인(慕貞夫人)
손자 : 마품왕(麻品王, ? ~291, 재위: 253~291)
차남 : 거칠군 허석(居漆君 許錫) - 진례성(進禮城) 성주
3남 : 허명(許明)
4남 : 혜진(慧眞) - 금왕광불(金王光佛)
5남 : 각초(覺初) - 금왕당불(金王幢佛)
6남 : 지감(智鑑) - 금왕상불(金王相佛)
7남 : 등연(等演) - 금왕행불(金王行佛)
8남 : 주순(柱淳) - 금왕향불(金王香佛)
9남 : 정영(淨英) - 금왕성불(金王性佛)
10남 : 계영(戒英) - 금왕공불(金王空佛)
장녀 : 영안공주(永安公主) 옥환(玉環) - 태사 배열문(裴烈文)의 처
외손 : 배숙(裴肅)
차녀 : 태자 석구광(昔仇光)의 태자비
외손녀 : 마정부인(摩貞夫人), 김알지(金閼智)의 처
처남 : 장유화상(長遊和尙)[6] 그가 가야에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다른 이름은 보옥선인(寶玉仙人)
사돈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서기 42년부터 158년 동안은 199년까지이다. 일연 (1281) 왕력 제일(王曆第一)편 “수로왕首露王임인년 2월에 알에서 났다.壬寅二月卵生 그 달에 즉위하여 158년을 다스렸다.是月即位,在位一百五十八年,금알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이 김씨이다.因金卵而生,故姓金氏。《개황력》에 실린 바이다.開皇曆載”
- 한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남하한 고조선 준왕의 후손들이 삼한의 '한(韓)'을 따서 사용하기 시작한 성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조선 준왕의 후손들과 유민들이 남하하여 삼한(三韓) 즉 馬韓(高九麗), 卞韓(百濟), 辰韓(新羅) 등을 세웠다
금관가야 수로왕이나 사로국 혁거세, 일본 주류민족 야마토 왕국은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 유민들이 남하 하여 원주민과 융합하여 성립한 국가로 보고 있다. 마한(馬韓), 변한( 卞韓), 진한(辰韓)의 삼한(三韓) 민족이 조선(朝鮮) 민족이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김수로라 기록되어 있지만 정황상 신라처럼 금관국도 수로왕 시절에는 성이 없었다가 후세대부터 김해 김씨를 사용한 것이 소급 적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생전에는 그냥 '수로'였다는 것이다. 혁거세 거서간이 박혁거세라 불리지만 정황상 생전 혁거세가 성이 없었으리라 유력시되는 것과 같다. 학계에서는 박씨(朴氏)는 혁거세의 본명인 '밝은누리'의 '밝'을 음차한 것이고, 금관국계 김씨는 '수로'왕의 '쇠(金)'를 한자화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관가야국(가야국)이 변한(卞韓) 남방과 진한(辰韓) 서남부 지역을 장악한 세력으로 가야국 도움으로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가야국은 변한(卞韓, 백제) 남방과 동부지역 그리고 진한(辰韓, 신라) 지역에서 분포한 소국이다
6가야는 삼국시대 낙동강 유역과 한반도 남부 지방에 존재했던 6개의 가야 연맹 소국들을 일컫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표적인 6가야의 중심지와 국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관가야 (김해): 가야 연맹의 맹주로 풍부한 철과 중개무역을 바탕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습니다.
대가야 (고령):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며 철기 문화를 발전시키고 중앙집권화를 시도했으나 562년 멸망했습니다.
아라가야 (함안): '안라국'으로도 불렸으며, 뛰어난 토기 제작 기술과 독자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습니다.
소가야 (고성): 해상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해상 무역과 어업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고령가야 (상주): 경북 상주 지역(함창)에 위치했던 국가입니다.
성산가야 (성주): 경북 성주 지역에 위치했으며 벽진가야라고도 불렸습니다.
-신라의 제4대 왕인 탈해 이사금과는 티격태격했는데 《삼국유사》가 인용한 《가락국기》에는 바다 건너에서 태어난 석탈해(昔脫解)가 대뜸 수로왕에게 와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합니다."라며 하자 기가 찬 수로왕이 "좋다 나와 마술 술법 배틀해서 이기면 내주마"라고 제안했고, 결국 수로왕이 이겨서 탈해는 신라로 갔다는 기록이 나와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알이 금관국의 바닷가에 도달했다가 신라로 도착해서 그곳에서 깨어났는데 알에서 태어난 애가 석탈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 금관국을 거쳐서 신라로 오게 된 듯 하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두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ㅡ 《삼국사기》 <신라 본기>
훗날 탈해가 왕위에 오르고 가야국을 침범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 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湌 賞功也
21년 가을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加耶)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수로왕 25년(서기 77년)에 탈해 이사금이 아찬 길문에게 병력을 내주어 금관국을 치게 했고, 이를 막기 위해 병력을 황산진으로 보냈다.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황옥(許黃玉)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후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한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1.생애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양천 허씨와 김해 김씨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아버지인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로 보냈다고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왕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왕후는 태자 거등(居登)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이 먼 곳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이야기가 덧붙여졌다고 보아 본래의 시조설화가 윤색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
2.허씨
그녀는 10명의 아들 중 2명에게 허씨 성을 쓰게 해달라고 수로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 성을 사용하던 두 왕자로부터 한국의 허씨 성이 유래되어 허씨로 유래 되었다고 한다.
3.태생
허황옥의 전설은 현재 유실된 가락국기의 내용을 참고한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 왕국"의 공주였다. 현존하는 기록은 먼 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유타를 식별하지 않는다. 문헌과 대중 문화는 종종 아유타를 인도와 연관짓는다. 현재 인도 공화국에 아유타에 대한 전설이 기록된 문헌은 존재하지 않으나 유실되었을 수도 있고 역사의 모든 내용이 문헌에 적히지는 않는다. 한양대학교 인류학자 김병모 박사는 음성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아유타를 인도의 아요디아와 동일시했다. 그래프턴 K. 민츠와 하태흥은 아유타가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론했지만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아유타가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조르주 코데스(조지 코데스)에 따르면 태국의 도시들은 삼국유사가 구성된 1350년까지 건설되지 않았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불교하면 인도를 떠오르기 쉬우나, 당시 간다라와 간다라 불교 양식의 시초는 중앙아시아 월지국이였으며 월지족의 정치세력이 실크로드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후세에 배를 타고 온 것으로 각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유타 왕국의 정체가 타밀라캄(오늘날의 남인도)에 있었던 판디아의 봉신국이었던 아이라는 주장도 있다. 왕후가 배를 타고 한국에 갔을 때 그녀의 배에는 쌍물고기와 삼지창 등 판디아 왕조의 여러 상징들이 실려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후대의 각색일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자 김재원은 가야 여성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무덤 내부가 붉은 색으로 된 일본 양식(장식고분)인 것을 보고 현실적으로 가야 지배층들은 일본 여성들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한다. 적국이 된 일본을 불교 신앙으로 각색했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석이라는 것. 가야 고분 특히 여성이 묻혀있는 곳은 장식고분(裝飾古墳)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학계에서 항상 지적되어 온 일이었다. 또한 그 시절 현실적으로 배를 타고 건너올 수 있는 곳은 일본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2019년 고려대학교 등의 분석에 따르면 파사석탑에 엽납석(pyrophillite)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엽납석은 밀양시나 완도군 노화도에서 산출되지만 파사석탑에 사용된 암석은 일본 동부와 중국 동남부, 베트남 북부에서 산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 점을 보아, 허황옥은 천축국인 인도보다는 일본 동부, 중국 동남부, 베트남 북부 중 한 곳에서 석탑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 지역 출신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4.관련 설화
(1)불교 전파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함께 동행한 승려인 그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은 가야에 불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속명은 보옥(寶玉)인데, 부귀를 뜬구름같이 보고 티끌 세상을 초연하여 불모산(佛母山)으로 들어가 오래 머물며 나오지 않았으므로 장유화상이라 불렸다. 그는 말년에 수로왕의 7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3년을 수도한 끝에 신선이 됐고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고 한다.
일곱 왕자가 수도할 때에 어머니 허왕후는 왕자들이 보고 싶어 자주 운상원을 찾았으나 오빠인 장유화상이 왕자들의 불심을 어지럽힌다 하여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장유화상이 일곱 왕자들이 부처가 돼 승천(昇天)을 하게 됐다고 전하며 수도원 아래 연못을 가리켰다. 허왕후가 그곳을 보는 순간 연못에 일곱 왕자의 모습이 비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영지(影池)라고 한다. 수로왕이 부처가 된 일곱 왕자를 위해 그 자리에 칠불사(七佛寺)를 지었다. 이외에도 장유화상이 건립한 사찰은 밀양의 만어사, 부은암, 김해의 해은사, 흥부암, 은하사, 동림사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주세붕의 『무릉잡고』 속에 1544년에 쓴 「장유사 중창기」에 의히면 장유사를 처음 창건한 사람은 장유화상이라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 1708년에 승려 증원(證元)의 「김해 명월사 사적비」 비문에서는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전하여 가락국에 불교의 신봉이 융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 8대왕 질지왕(銍知王) 때 재건한 김해 불모산 장유사(長游寺)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현존하고 있다.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
(2)차 전래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落國記』에 따르면 수로왕비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48년에 5월에 인도를 떠나 그해 7월 27일에 김해에 도착했는데,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왔으며, 혼수품으로 금, 은, 폐물, 비단과 함께 차 씨앗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신라 30대 문무왕이 661년에 가락왕묘에 제향을 올리도록 조칙을 내렸을 때 제물로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3)인도 동부지역의 중국 남방 종족으로 추정(불교 전파 종족)
전설(가락국기)에 따르면, 허황후가 가야 땅에 도래할 때 신하 신보(申輔), 조광(趙匡)과 그 두 사람의 아내 모정(慕貞), 모량(慕良), 시종 등을 포함해 20여 명이 상륙했다고 한다. 특히, 그중 허황옥의 오빠이자 승려 장유(長有), 또는 장유화상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5.가계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이 중 남편인 수로왕에게 청하여 2명의 아들은 자신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 성을 쓰게끔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수로왕의 동의를 얻어 2명의 아들은 허씨 성을 쓰게 되었다.
남편 : 수로왕(首露王, 42?~199, 재위:42~199)
왕비 : 허황옥(許黃玉, 33?~189)
아들 : 거등왕(居登王, ? ~253 재위:199~253
며느리 : 모정부인(慕貞夫人) 천부경(泉府卿)
손자 : 마품왕(麻品王, ? ~291 재위:253~291)
차남 : 거칠군 허석(居漆君 許錫) - 진례성(進禮城) 성주
3남 : 허명(許明)
4남 : 혜진(慧眞) - 금왕광불(金王光佛)
5남 : 각초(覺初) - 금왕당불(金王幢佛)
6남 : 지감(智鑑) - 금왕상불(金王相佛)
7남 : 등연(等演) - 금왕행불(金王行佛)
8남 : 주순(柱淳) - 금왕향불(金王香佛)
9남 : 정영(淨英) - 금왕성불(金王性佛)
10남 : 계영(戒英) - 금왕공불(金王空佛)
장녀 : 영안공주(永安公主) 옥환(玉環) - 태사 배열문(裴烈文)의 처
외손 : 배숙(裴肅)
차녀 : 태자 석구광(昔仇光)의 태자비
외손녀 : 마정부인(摩貞夫人), 김알지(金閼智)의 처
오빠 : 장유화상(長遊和尙)
사돈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가락종친회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시조 기반으로 형성된 친족이다
가락종친회는 김해(金海) 김씨와 김해(金海) 허씨(陽川 허씨), 인천(仁川) 이씨를 뜻한다
川是海。
海是一個父母, 川是一個子女
海是金海,川是陽川仁川
金之中金是金海
가락종친회는 김해 김씨의 인구 445만6000명, 김해 허씨의 인구 134,068명(양천 허씨의 인구 149,505명), 인천 이씨의 인구 약 83,855명으로 한국 성씨 중 가장 많을 숫자를 가진 친족 성씨이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양천 허씨), 인천 이씨는 가락국 수로왕과 허황옥 왕후를 같은 뿌리(김수로왕의 2개 성 사용)로 두어 전통적으로는 같은 핏줄(이성동본)로 간주해 혼인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사실상 다른 성씨로 간주되어 법적인 혼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최근에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결혼하는 추세이다
허황옥(許黃玉)은 인도 동부지역의 중국 남방 종족으로 추정 되며 불교를 한반도 전파한 종족이며 , 차를 전래하고, 한자(漢字) 성씨(姓氏)를 전래한 종족이다
-전설(가락국기)에 따르면, 허황후가 가야 땅에 도래할 때 허황옥의 오빠이자 승려 허장유(許長有)와 신하 신보(申輔), 조광(趙匡)과 그 두 사람의 아내 모정(慕貞), 모량(慕良), 시종 등을 포함해 20여 명이 상륙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落國記』에 따르면 수로왕비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48년에 5월에 인도를 떠나 그해 7월 27일에 김해에 도착했는데,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왔으며, 혼수품으로 금, 은, 폐물, 비단과 함께 차 씨앗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신라 30대 문무왕이 661년에 가락왕묘에 제향을 올리도록 조칙을 내렸을 때 제물로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함께 동행한 승려인 그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은 가야에 불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속명은 보옥(寶玉)인데, 부귀를 뜬구름같이 보고 티끌 세상을 초연하여 불모산(佛母山)으로 들어가 오래 머물며 나오지 않았으므로 장유화상이라 불렸다. 그는 말년에 수로왕의 7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3년을 수도한 끝에 신선이 됐고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고 한다.
일곱 왕자가 수도할 때에 어머니 허왕후는 왕자들이 보고 싶어 자주 운상원을 찾았으나 오빠인 장유화상이 왕자들의 불심을 어지럽힌다 하여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장유화상이 일곱 왕자들이 부처가 돼 승천(昇天)을 하게 됐다고 전하며 수도원 아래 연못을 가리켰다. 허왕후가 그곳을 보는 순간 연못에 일곱 왕자의 모습이 비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영지(影池)라고 한다. 수로왕이 부처가 된 일곱 왕자를 위해 그 자리에 칠불사(七佛寺)를 지었다. 이외에도 장유화상이 건립한 사찰은 밀양의 만어사, 부은암, 김해의 해은사, 흥부암, 은하사, 동림사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주세붕의 『무릉잡고』 속에 1544년에 쓴 「장유사 중창기」에 의히면 장유사를 처음 창건한 사람은 장유화상이라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 1708년에 승려 증원(證元)의 「김해 명월사 사적비」 비문에서는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전하여 가락국에 불교의 신봉이 융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 8대왕 질지왕(銍知王) 때 재건한 김해 불모산 장유사(長游寺)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현존하고 있다.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
- 대마도 8월초 열리는 아리랑 축제
대마도 8월초 열리는 아리랑 축제를 볼때 대마도 원주민들이 가야족 중 아리나(허황옥 씨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리(阿里)-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는 '크다', '밝다' 또는 '물(水)'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고구려 시절 한강을 불렀던 옛 이름인 '아리수(阿利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대 한국어에서 '고운',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쓰여 아리따운이라는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아리 지구(阿里地区)는 티베트 자치구에 위치한 지구이다. 아리 지구는 인도의 카슈미르와 접해 있다. 평균 해발 4500m로, 정치 경제의 중심 도시는 시촨허(獅泉河)이다.
옛날에는 샹슝 왕국, 구게 왕국이 있었기 때문에 서부 티베트의 중심이었다.
아리아 민족(Aryan)은 고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며, 기원전 20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와 이란 방면으로 이동해 정착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역사적·언어적 개념이다. '고귀한'이라는 뜻을 지니며, 오늘날 인도아리아인과 이란인의 조상이다.
주요 흔적: 김해 지역에 전해지는 쌍어문(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는 문양)
-漢字姓氏,兄弟國
한족(중국인)이나 조선족(한국인), 야마토족(일본인), 만주족 등은 한자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입니다
한자 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이지만 각 민족끼리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각 민족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면 중국인,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면 한국인, 일본어를 사용하면 일본인, 만주어를 사용하면 만주인이다
각 민족은 언어를 기반으로 독자적 문화를 인정하면서 경제통합에 노력해야 한다
석탈해(昔脫解, 脫解尼師今)

“나는 (금관국)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삼국유사》에서 탈해 이사금이 수로왕에게 왕위를 내놓으라고 한 말.
경주 석씨의 시조 중의 한 명이자 신라 석씨 왕조의 첫 번째 임금. 칭호는 이사금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 혹은 기원전 5년?~80년 8월, 재위: 57년 11월~80년 8월)은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1.생애
(1)이름
이병도, 한연식 등은 '吐·脫'는 둑(堤), '解'는 고대 인명에 흔히 붙는 접미사로 보았다. 고지명에서 흔히 堤 혹은 隄를 吐로 표현한 점이나, 堤와 吐의 고대 한자음의 유사성, 탈해의 거주지가 지금 남천(南川)과 인접한 월성지(月城址) 였음이 이를 방증해 준다는 것이다.
(2)출생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 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 기원전 5년이었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 먼곳에서 왔다고 하며 북방 신화가 강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 현재 함경도, 연해주 또는 우산국(울릉도)출신이라는 추측 설과 캄차카 반도 또는 인도에서 왔다는 추측 설 그리고 자신을 신성시하기 위해 동해 북쪽 멀리에서 왔다고 하며 용궁 전설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역사에 기록된 도이의 입구에서 보이듯이 고려인과 여진족 해적이 일본 큐슈 지방을 침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연해주와 중국 동북 지방의 부족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석탈해의 출신지인 다파나국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용성국은 정확히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학자들은 석탈해가 동해를 거쳐 토함산으로 오면서 철기라는 새로운 문명을 들고 왔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 한편,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국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타파나(Tapana)로 보고 허황옥 신화처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인도 불교를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전파한 것을 신화로 나타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석탈해가 백제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신라의 초대왕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수서(隋書), 북사(北史), 한원(翰苑), 양서(梁書) 등 중국 사서에 의하면 백제인이 바다로부터 신라로 도망쳐 왕이 되었고 진한왕이 마한인을 왕으로 삼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가락국기,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탈해가 바다를 통해 아진포에 상륙하여 월성의 지배자 박공(瓠公)에게서 월성을 빼앗아 지배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신라의 왕조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인물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 인물을 석탈해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이러한 도입설화(逃入說話)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공통의 동일 형태이며, 부여→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지는 도입의 역사라는 것이다.
(3)치세
24년, 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고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탈해 이사금은 즉위 초에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탈해 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땅을 개척하고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음력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에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에는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 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음력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이와 같이 탈해 이사금 치세 때, 신라와 백제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山) 봉산(烽山)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당년에 벌써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백 명정도의 군사를 내었다는 것에 의문이 있다. 또한, 두 나라가 간혹 화호(和好)한 일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큰 나라로서 늘 먼저 굴복하였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加羅) 6나라와 사벌(沙伐)·감문(甘文) 등 완충국(緩衝國)이 있었는데 백제가 가라 등의 나라들과는 한 번의 충돌도 기록이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라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7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다.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후에 뼈를 새로 수습했는데 머리의 둘레는 3척 2촌이고 몸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었다. 이 뼈들을 부수어서 소상으로 만든 뒤 동악에 안치한 후 그곳에 모셨다고 한다.
2.사후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사후 9대 왕 벌휴 이사금이 즉위하였으나 연대차이가 심하여 그의 손자 여부는 불확실하다.
3.탄생 신화
탈해 이사금은 신라 제4대 왕으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원래의 칭호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다.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 현재 영일(迎日) 지역)에서 고기잡이 할머니 아진의선이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8년(남해왕 5)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伽耶)와 싸워 크게 이겼다. 능은 양정(壤井, 경주 북쪽)에 있다.
4.가계
아버지 : 함달파왕(含達婆王)
어머니 : 직녀국 공주(本質國 公主)
왕비 : 아효부인 박씨(阿孝夫人 朴氏), 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의 딸
장남 : 석구광(昔仇光)
며느리 : 금관가야 수로왕(首露王)의 딸
손녀 : 마정부인(摩貞夫人)
차남 : 석구추(昔仇鄒)
며느리 : 지진내례부인 김씨(只珍內禮夫人 金氏)
손자 :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삼남 : 석구노(昔仇老)
양자 : 김알지(金閼智)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一月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호공을 대보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토함산에 오르다
三年夏五月 왜국과 우호를 맺다
三年夏六月 살별이 천선에 나타나다
五年秋八月 마한의 장군 맹소가 항복하다
七年冬十月 백제 왕의 회동 요청을 거부하다
八年秋八月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다
八年冬十月 백제의 구양성 공격을 물리치다
八年冬十二月 지진이 일어나고 눈이 오지 않다
九年春三月 알지가 태어나고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다
十年 백제에게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회복하다
十一年春一月 박씨 귀척을 주주·군주로 삼다
十一年春二月 순정을 이벌찬으로 삼다
十四年 백제가 침입하다
十七年 왜인의 침공을 막다가 우오가 전사하다
十八年秋八月 백제의 침공을 막다
十九年秋九月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다
十九年冬十月 백제가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二十年秋九月 백제에게 빼앗겼던 와산성을 회복하다
二十一年秋八月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기다
二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四年夏四月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二十四年秋八月 왕이 죽다
-수많은 김씨의 선조가 되는 김알지(金閼智)는 제4대 탈해 이사금 시기에 신라에 왔다. 탈해는 김알지를 발견한 곳을 '계림'이라 부르고, 국호도 같은 것으로 했다. 더구나 김알지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신라를 지키면서도 외부인 세력을 포용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어쩌면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김알지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묘하게 자신의 행적과 비슷하다.
김알지(金閼智, 慶州 金氏)

김알지(金閼智, 65년~몰년 미상)는 신라 김씨(新羅 金氏) 왕조(王朝)의 시조(時調)이자 탈해 이사금(脫解 尼師今)의 양자로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味鄒 泥師今)이 김씨(金氏) 최초로 왕에 즉위하였고 정식 역사에서는 실존 인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박씨 왕조의 시조 박혁거세나 석씨 왕조의 시조 석탈해와 달리 김알지 본인은 생전에 신라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고, 훗날 김알지의 김씨 후손들이 왕위에 올라 추존된 것이다. 김알지가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 편인데 이에 따르면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의 양자로 들어가 대보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1.생애
65년 탈해 이사금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재상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고 함으로써,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알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지라는 말은 어린아이, 즉 아기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에 붙인 기록이므로 당대에도 그렇게 쓰였는지는 알 수는 없다.알지는 고대에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 설화에서 혁거세거서간(居西干)이 알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 적에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로써 알지는 곡물 또는 곡물에 들어있는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고 특정의 인명이 아닌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알지의 알은 금(金)을 나타내는 말이고 지는 존장자(尊長者)에 붙이는 존칭어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그가 석씨 시조인 탈해왕에 의해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김씨의 등장과 독점이 가장 늦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거의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으며, 탈해왕이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 이사금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김씨 최초로 왕에 즉위하였다. 알지에서 미추까지의 세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세대수는 같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세조(世祖)로 추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추존왕으로 추정되는 태조 성한왕이 그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2.이름
신라에는 알지, 알영, 알평, 알천 등 '알'이 붙은 인명-지명이 많이 보이는데, '알'을 '아래·근본'을 뜻하는 말로 보고, '지(智)'는 존칭 어미이므로 '알지(閼智)'는 '시조님' 정도로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상고기 왕비의 이름 중에는 알영(閼英), 아로(阿老), 아루(阿婁) 등 '알-'계 인명이 자주 보이는데, 이를 사제의 성격을 가진 인물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며, '閼'를 'ara' 즉 백제어로 왕을 뜻하는 '어라하'의 '어라'와 같은 단어로 해석하여 '왕(閼)' + '존칭(智)'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관련 성씨
신라의 왕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김씨 왕가와 경주 김씨의 시조이자, 광산 김씨, 안동 김씨, 김녕 김씨, 의성 김씨, 청풍 김씨, 청도 김씨, 전주 김씨, 고령 김씨, 수원 김씨, 원주 김씨, 강릉 김씨를 비롯한 현대 신라계 김씨의 도시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씨에서 권씨로 환성한 안동 권씨 또한 김알지의 후예이다.
김씨 분관록,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 때 왕족의 두 형제가 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 지금의 강릉)에 살게 되었고, 동생은 동음홀(冬音忽)• 시염성(鼓鹽城. 지금의 연안군)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4.탄생 신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65년(탈해왕 9) 8월 4일 호공(瓠公)이 시림(始林) 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어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거세의 출생과 같으므로, 박혁거세를 알지라 한 선례에 따라 이름지었다. 아기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태자로 책봉하니 그가 곧 김알지이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9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출처 – 삼국사기-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 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췄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삼국유사》-
味鄒尼師今立【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 出於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일설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 이사금-
5.가계
부인 : 마정부인(摩貞夫人), 석강조(昔康造)의 딸
아들 : 김세한(金勢漢)
손자 : 김아도(金阿道)
처조부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성골(聖骨)
성골(聖骨)은 신라 시대 골품제도에서 가장 높은 최상위 신분으로, 왕위 계승권을 독점했던 신성한 혈통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모두 순수 왕족 혈통인 경우에만 성골로 인정받았습니다
신라 시대의 성골은 골품제 '뼈의 등급'을 뜻하며, 성골은 그 중 1등급에 해당했습니다.성골의 혈통 조건은 부계와 모계 모두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순수 왕족 집단입니다.
왕위 계승권: 초기 신라에서는 오직 성골만이 왕(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소멸: 성골 남성이 점차 줄어들면서 결국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즉위하였으며,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 혈통이 소멸하자 이후부터는 진골 출신의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성골은 경주 박씨(朴氏)와 경주 석씨(昔氏) 그리고 경주 김씨(金氏)입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기원전 57년에 신라(사로국)를 건국한 초대 국왕(거서간)이며, 경주 박씨 시조이다
석탈해(昔脫解, 脫解尼師今)은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경주 석씨의 시조이며 신라 석씨 왕조의 첫 번째 임금이고 칭호는 이사금이다
김알지(金閼智)는 신라 김씨(新羅 金氏) 왕조(王朝)의 시조(時調)이자 경주 김씨 시조로 탈해 이사금(脫解 尼師今)의 양자로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味鄒 泥師今)이 김씨(金氏) 최초로 왕에 즉위하였다
금관가야국(가야국)이 변한(卞韓) 남방과 진한(辰韓) 서남부 지역을 장악한 세력으로 가야국 도움으로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진골(眞骨)
진골(眞骨)은 신라의 계급체계 골품제에서 성골의 바로 아래 계층이다.
초기에는 왕위계승권이 없었던 고위 귀족층으로 추측되나 신라 중기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의 대가 끊기자 진골 출신인 상대등 김알천이 김춘추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왕위계승권까지 가진 통일신라시대 최고위 귀족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진골을 왕족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폭넓은 계층이었다. 진골은 왕족 외에도 중고(中古)시대의 왕비족에 해당하는 유력 가문, 신라에 병합된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주어졌다. 금관가야 왕족 후손인 김유신의 집안 김해 김씨도 진골이었다. 이처럼 왕성 이외의 다른 성씨들도 진골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국성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진골인 것은 아니었다. 김씨(경주 김씨)나 박씨 중에서도 6두품인 경우가 있었다. 진골 집안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왕실과 혈연적으로 멀어지면 족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신라 하대로 가면 왕성이라 하더라도 진골보다 6두품인 경우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김씨의 경우에도 6두품이 많았다. 이처럼 같은 성씨 안에서도 진골, 6두품 등 계층이 갈렸고, 진골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막장 상황이었던 9세기 신라 하대에는 대를 이어가며 계속된 끝에 진골의 숫자가 너무 늘어나, 특권이 군주의 근친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며 진골끼리의 동질감이 떨어지고 분화, 결국 서로간에 왕위를 두고 열심히 싸우게 된다.
대부분의 진골은 신라 초창기부터 귀족이었던 자들이 대물림하면서 내려오는 지위였지만 다른 국가 출신으로서 최상급인 진골에 편입된 인물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실이 진골에 편입되었는데, 이것이 이후 문명왕후와 김유신의 가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던 안승이 보덕국왕의 직책을 받으면서 진골이 되었다. 또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후 신라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신라가 사여한 벼슬이 대아찬으로써 진골의 품계이니 대조영을 명목상이지만 진골로 인정한 경우가 된다. 마지막으로 시골 호족[3] 출신으로 말갈족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다 전사한 소나가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잡찬을 추증받아 유일무이한 평민 출신 진골이 되었다.
-신라 992년 역사(BC 57~935년) 동안 총 56명의 왕이 배출되었으며, 왕위는 초기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가 번갈아 가며 차지하는 부족연맹체 형태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17대 내물왕부터는 김씨(金氏)가 왕위를 독점했습니다.
박씨는 신라를 건국한 시조 혁거세부터 3대 유리왕까지, 그리고 신라 말기 3명의 왕 등 총 10명의 왕을 배출한 성씨입니다
석씨는 4대 탈해왕을 시작으로 초기 신라의 왕권을 주도했던 성씨입니다. 총 8명의 왕이 배출되었습니다.
김씨는 3대 미추 이사금으로 처음 등장한 뒤, 17대 내물왕부터 본격적으로 왕위를 세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국가의 주축이 된 성씨입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 중 김씨 성의 비율은 약 21.5%로, 국민 5명 중 1명 꼴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김씨는 일본 조선족이나 미국, 중국 조선족 자치정부 등지에서 한국인의 성씨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경주 김씨(黃金의 궤)가 김해 김씨( (金盒, 金官)에서 태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장 인구가 많은 김씨 본관 상위 3곳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약 445만 명으로, 전체 김씨 중 41.7%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 성씨 및 본관입니다.
경주 김씨 (慶州 金氏): 약 180만 명으로 김씨 중 두 번째로 많습니다.
광산 김씨 (光山 金氏): 약 92만 명으로 세 번째 규모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로국( (斯盧國) 6촌(村) 성씨(姓氏)
신라 건국의 모태인 사로 6촌(6부)의 촌장들은 서기 32년(유리왕 9년) 성씨를 하사받았습니다. 하사받은 6성씨는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이며, 각 촌과 성씨의 연결은 아래와 같습니다.
알천양산촌 (閼川楊山村): 이(李)씨 (경주 이씨)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 최(崔)씨 (경주 최씨)
무산대수촌 (茂山大樹村): 손(孫)씨 (경주 손씨)
자산진지촌 (觜山珍支村): 정(鄭)씨 (경주 정씨)
금산가리촌 (金山加利村): 배(裵)씨 (경주 배씨)
명활산고야촌 (明活山高耶村): 설(薛)씨 (경주 설씨)
삼국사기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조선이란 국호만 한 차례 등장한다.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의 '신라 6촌의 주민들은 본래 조선의 유민이다.'라는 기록에서 조선이 한 번 언급된다
경주 성씨 본관 순위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순위는 경주 김씨 (약 173만 명), 경주 이씨 (약 142만 명), 경주 최씨 (약 97만 명) 순입니다. 통계청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경주 본관 성씨의 대략적인 순위와 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경주 성씨 본관 인구 순위
1위 경주 김씨(慶州 金氏) 신라 왕실의 후손 가문. 약 173만 명
2위 경주 이씨(慶州 李氏 신라 6부촌 중 알천 양산촌 유래. 약 142만 명
3위 경주 최씨(慶州 崔氏) 신라 6부촌 중 돌산 고허촌 유래. 약 97만 명
4위 경주 정씨(慶州 鄭氏) 신라 6부촌 중 취산 진지촌 유래. 약 30만 명
5위 경주 손씨(慶州 孫氏) 신라 6부촌 중 무산 대树촌 유래.
6위 경주 배씨(慶州 裵氏) 신라 6부촌 중 금산 가리촌 유래.
7위 경주 설씨(慶州 薛氏) 신라 6부촌 중 명활산 고야촌 유래.
경주는 한국에서 단일 본관으로 가장 많은 인구수와 성씨 종류를 배출한 곳입니다.
가장 많은 성씨의 고향: 대한민국에서 '경주'를 본관으로 사용하는 성씨의 종류는 총 87개로, 전국 본관 지역 중 가장 많은 성씨를 보유한 1위 도시입니다.
신라 6성(六姓): 경주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는 신라 건국 전 서라벌의 6부촌장들에게 유리 이사금이 하사한 성씨에서 유래하여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김해와 경주 중심의 한자 성씨 본관(本貫)에서 유래하여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성씨가 전체 인구 60%-70% 수준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성씨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내어 혈연을 구분하는 관습적 제도. 성과 본관이 동일해야 같은 혈연으로 본다. 본관제도는 중국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허황옥(許黃玉)은 인도 동부지역의 중국 남방 종족으로 추정 되며 불교를 한반도 전파한 종족이며 , 차 씨앗을 전래하고, 한자(漢字) 성씨(姓氏)를 전래한 종족이다
-전설(가락국기)에 따르면, 허황후가 가야 땅에 도래할 때 허황옥의 오빠이자 승려 허장유(許長有)와 신하 신보(申輔), 조광(趙匡)과 그 두 사람의 아내 모정(慕貞), 모량(慕良), 시종 등을 포함해 20여 명이 상륙했다고 한다
만주족의 시조 신화



천지(天池)는 북한 량강도 삼지연시와 중국 지린성사이의 백두산(장백산) 정상 분화구에 위치한 칼데라 화구호이다. 천지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 백두산(장백산) 천지는 마음이 밝고 착한 자가 올라왔을 경우에만 천지가 열어준다
백두산(장백산)의 동쪽에 부쿠리 산이 있고, 그 산 기슭에 못이 있었는데 부쿠리 호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그 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어떤 까치가 막내 선녀의 옷에 주과(붉은 과일)를 물어다 놓았다. 막내 선녀는 그 주과를 입속에 물고 있다가 문득 뱃속으로 들어가 곧 임신을 했다. 뒤이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자태와 용모가 기이했다.
아이가 커가자 선녀는 주과를 삼키게 된 사연을 알려주고, 이내 그에게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씨를 내려주고,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이라고 하였으며, 그에게 작은 배를 내어 주고, 다시금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시키기 위한 것이니 어서 가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 는 말을 남기고 선녀는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느 물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가지와 쑥을 꺾어 깔개를 만들고 단정히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그때 장백산(백두산)의 동남쪽 오도리라는 지역에 삼성이라는 곳이 있어 서로 추장이 되겠다고 다투면서 날마다 싸움질을 하고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곤 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물가로 물을 길러 갔다가 돌아와서 뭇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싸우지 마세요. 제가 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어떤 사내아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닌 성 싶었습니다. 하늘이 이런 사람을 허투루 태어나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아이한테 가서 물으니 "나는 선녀의 소생으로 당신들의 혼란을 평정시키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뭇사람들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성인인데 그냥 걸어가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서로 손을 잡아 가마를 만들어 집까지 데리고 왔다. 삼성 사람들은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논의하고, 결국 자기 딸을 시집보내어 버일러로 받들었다. 장백산(백두산) 동쪽 오도리성에 살았으며, 나라 이름을 만주(滿洲)라 하였는데 나라의 터전을 맨 처음 열었던 곳이므로 국서를 가지고 이를 고증하고자 한다.
만주족의 시조 신화.
청나라의 조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삼천녀 신화로 불린다. '만주 건국 신화'라는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의 시조, 즉 청시조(淸始祖)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愛新覺羅 布庫哩雍順, 애신각라 포고리옹순)이 어떻게 시조가 되었는지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만주원류고》의 제1권 부족편에는 《발상세기(發祥世紀)》라는 문헌을 인용해서 만주족이 어떻게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라는 성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력과 첫 국가인 만주(滿洲)를 건국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주션 구룬(Jušen Gurun)의 세 성씨가 어전(Ejen)의 자리를 놓고 오래도록 다투고 있었다. 이를 본 압카이 한(Abka-i Han)은 신을 보내어 주션 구룬의 혼란을 정리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려고 했다. 압카이 한은 주션 구룬으로 갈 신에게 까치로 변신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딸 셋이 부쿠리(Bukūri) 산 기슭의 불후리(Bulhūri) 연못에 목욕을 하러 갈 것이다. 이 붉은 과일을 가지고 가서 막내의 옷 위에 두고 오라."
그리고 어느 날, 백두산 동쪽에 있는 부쿠리 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 압카이 한의 딸인 선녀 세 명이 와서 목욕을 하였다. 맏이는 엉굴런(Enggulen), 둘째는 전굴런(Jengulen), 막내는 퍼쿨런(Fekulen)[8]이라 하였다.
선녀들이 목욕을 다 마치고 옷을 입으러 가는데, 신령스러운 까치(神鵲)가 퍼쿨런의 옷 위에 붉은 과일을 올려놓았다. 퍼쿨런은 그 색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놓치기 싫어서 입에 넣고 옷을 입다가 그만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이 무거워져서 하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언니들에게 얘기하자 언니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건 아마도 하늘의 뜻이다. 우리는 묘약을 먹어서 죽지 않으니, 네가 몸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서 하늘에 올라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결국 퍼쿨런은 부쿠리산에서 살다가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말을 하고 빠르게 자랐다. 퍼쿨런은 그 아이의 이름을 부쿠리용숀(Bukūri Yongšon)[9]이라고 지었다.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난다
어느 날, 장성한 부쿠리용숀을 퍼쿨런이 불러서 말하였다.
"너는 어지러운 주션 구룬을 평정하라는 천명을 받고 태어났다. 너는 이제부터 주션 구룬에서 살아야 한다. 주션 사람들이 너에게 부모와 이름을 물으면 부쿠리 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서 태어난 부쿠리용숀이며, 성은 아이신기오로(Aisin-Gioro),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는 압카이 한의 세 딸 중의 막내인 퍼쿨런이라 말하고, 나는 하늘의 신이고 내 영혼은 압카이 한께서 붉은 과일로 만들어 까치로 변한 신에게 내려보냈다고 대답하거라."
그리고 퍼쿨런은 작은 통나무배를 주면서 당부하였다.
"이 배를 타고 가거라! 나라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물을 끌어들이는 나루가 있을 것이다. 나루에서 강가로 올라가면 길이 나온다. 그 끝에 너의 나라가 있다."
부쿠리용숀은 통나무배를 타고 강의 끝까지 내려갔다. 아들이 떠나자 퍼쿨런은 하늘로 돌아갔다.
부쿠리용숀은 우거진 숲과 협곡을 지나 장백산(백두산) 동남쪽의 오모호이(Omohoi) 들판에 있는 오도리(Odoli) 성에 도착했다.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뭍으로 오른 그는 버드나무를 꺾어서 의자를 만들고 그 위를 쑥으로 덮었다. 그때 마침 물을 길러 가던 사람이 그를 보고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 어전 자리를 놓고 다투던 사람들에게 전했다.
"싸우지 마시오. 우리가 물을 끌어들인 나루에 아름답고 영리한 사내아이가 쑥을 덮은 버드나무 의자에 앉아 있소. 아무래도 주션 구룬의 아이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 같소."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 보니 과연 아름답고 영리해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의 아들이고, 성은 무엇입니까? 이름은 무엇입니까?"
부쿠리용숀이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대답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감히 걸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손을 모아 깍지를 껴서 가마를 만들고 그를 태워서 데리고 갔다. 세 성씨의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고 그를 버일러(Beile)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나트 버리 거거(Nat Beri Gege)라는 여자를 아내로 주었다. 결혼을 하자 사람들은 그를 어전으로 삼았고, 부쿠리용숀은 나라 이름을 만주(Manju)라 하였다.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은 까치를 자신의 조상이라 하여 죽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부쿠리용숀의 후손들이 주션의 백성을 괴롭히자, 압카이 한은 그들을 책망하였고 백성도 등을 돌렸다. 백성들이 부쿠리용숀의 후손이 살고 있던 성을 포위하자, 압카이 한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도망치게 하였다. 병사들이 추격하자 압카이 한은 전에 보냈던 신을 까치로 변하게 하여 그의 머리 위에 앉게 하였고, 추격하던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 철수했다. 도망친 후손의 이름은 판차(Fanca)이다.
그로부터 다시 몇 세대가 지난 뒤에 아이신기오로 먼터무(Dudu Mentemu)라는 덕을 갖춘 인물이 태어나 오모호이 들판의 오도리성에서 서쪽으로 15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숙수후(Suksuhu) 강가의 허투아라(Hetuala)라는 곳에서 살았다.
먼터무는 함부로 날뛰는 40여 명을 오모호이 들판의 오도리 성에서 허투아라로 유인하여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포로로 삼은 다음 그들의 형제와 가족을 잡아갔다. 그는 이후에도 허투아라에서 살았다
- 만주족의 시조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성씨는 한국어(한자 성씨)로 해석하면 김(金) 씨 성씨입니다
금나라와 청나라의 시조나 국왕의 성씨는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Aisin Gioro, 愛新覺羅)로 김(金)씨입니다
만주족의 시조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 Aisin Gioro, 愛新覺羅) 김씨는 바다 속의 사금(沙金) 김해(金海) 김(金)씨 금관가야 후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까치와 주과(붉은 과일, 감 홍시)는 한반도 남방 문화를 의미합니다[까치는 한국에서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져 왔다. 아침에 집앞에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와서 길조로 여기기도 한다. 한국 농민들은 감 따위의 과일을 수확할 때에도 까치밥이라 하여 잘 익은 홍시 같은 여분의 과일을 그대로 남겨두기도 하였다. 까치 까치 설날은]
청나라(1644~1912)는 만주족이 세운 왕조로, 황실 성씨인 아이신 기오로(애신각라, 愛新覺羅)를 중심으로 구왈기야(과얼자, 瓜爾佳), 니오후루(뉴구루, 鈕祜祿) 등 만주족의 8대 성씨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만주족은 고유한 다음절 성씨를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한족식 외자 성씨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1. 주요 만주족 성씨 (만주족 8대성)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Aisin Gioro), 愛新覺羅): 청나라 황실 성씨.[한자성씨 김(金)]
구왈기야 (과이가(Gūwalgiya), 瓜爾佳):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直義公 費英東의 후손들임.[한자성씨 관(關)]
슈무루 (서목록, 舒穆祿): 티스토리 블로그에 따르면, 武勳王 楊吉利의 후손들임.[한자성씨 나(那)씨, 조(趙)씨, 엽(葉)씨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
만주족에 특히 많았던 8대성은 다음과 같다.
나라 하라 Nara hala 那拉
퉁갸 하라 Tunggiya Hala 佟佳
구왈갸 하라 Gūwalgiya 瓜爾佳
마갸 하라 Magiya 馬爾佳
소초로 하라 Socoro 索綽羅
치갸 하라 Cigiya 齊佳
푸차 하라 Fuca hala 富察
뇨후루 하라 Niohuru hala 鈕祜祿
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이 한족을 따라 성씨를 고친다. 퉁갸씨는 동(佟), 구왈갸는 관(關), 마갸는 마(馬), 소초로는 색(索), 치갸는 제(齊), 푸차는 부(富), 나라는 나(那), 뇨후루는 랑(郞)으로 바꿨다.
2. 특징
만주어 기반: 만주족 고유의 다음절 성씨를 사용.
한족식 변경: 멸망 이후 대부분 한족 성씨로 변경 (예: 아이신 기오로 -> 김(金) 씨).
명나라와의 차이: 한족 중심의 명나라와 달리 만주족의 관습을 유지.
청나라 말기에는 많은 만주족이 한족식 성씨를 사용하여, 자료에 따르면 족보를 통해 만주족 성씨를 식별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의 권력을 지탱했던 만주족의 핵심 벌족 성씨는 크게 황족인 아이신 기오로(애신각라) 씨와 그들을 보필한 '만주 8대 성씨'로 나뉩니다.
청나라 건국에 공을 세우고 고위 관직을 독점했던 주요 성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황족 성씨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 ᠊ᠠᡝᠰᡳᠨ ᡤᡳᠣᡵᠣ): 청나라 황실의 성씨입니다. '아이신'은 금(金)을, '기오로'는 성씨를 의미합니다. 중화민국 수립 이후 대다수가 김(金) 씨로 성을 바꾸었습니다.
2. 만주 8대 성씨 (만주팔대성)
청나라 조정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대표적인 가문들입니다. 가문에 따라 이후 변경한 한족 성씨도 함께 기재합니다.
구왈기야 (과이가, ᡤᡨᠸᠠᠯᡤᡳᠶᠠ): 8대 성씨 중 으뜸으로 꼽히며, 개국공신 피용돈(費英東) 가문이 대표적입니다. (후에 관(關) 씨로 개성)
니오후루 (뉴구록, ᠨᡳᠣᡥᡠᡵᡠ): 건국 공신 에이두(額亦都) 가문과 건륭제의 총신 화신이 이 성씨입니다. (후에 랑(郞) 씨 또는 뉴(鈕) 씨로 개성)
나라 (나랍, ᠨᠠᡵᠠ): 울라, 호이파, 예헤, 하다의 4개 지파로 나뉩니다. 서태후(예헤나라 씨)가 이 가문 출신입니다. (후에 나(那) 씨로 개성)
슈무루 (서목록, ᡧᡠᠮᡠᡵᡠ): 개국공신 양기리(揚吉利)의 후손들입니다. (후에 서(舒) 씨로 개성)
둥고 (동악, ᡩᠣᠩᡤᠣ): 순치제의 총애를 받은 동악비의 가문입니다. (후에 동(董) 씨 또는 조(趙) 씨로 개성)
마기야 (마가, ᠮᠠᡤᡳᠶᠠ): (후에 마(馬) 씨로 개성)
후시할라 (부찰, ᡶᡠᠴᠠ): 건륭제의 효현순황후 가문이 유명합니다. (후에 부(富) 씨 또는 부(傅) 씨로 개성)
헤셰리 (혁사리, ᡥᡝᡧᡝᡵᡳ): 강희제의 보정대신 소니와 효성인황후의 가문입니다. (후에 혁(赫) 씨 또는 하(何) 씨로 개성)
3. 기타 유력 성씨
퉁기야 (동가, ᡨᡠᠩᡤᡳᠶᠠ): 강희제의 외가이자 효강장황후의 가문으로, '동반조(佟半朝: 조정의 절반이 동씨)'라 불릴 만큼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후에 동(佟) 씨로 개성)
가락종친회는 김해(金海) 김씨와 김해(金海) 허씨(陽川 허씨), 인천(仁川) 이씨를 뜻한다
川是海。
海是一個父母, 川是一個子女
海是金海,川是陽川仁川
金之中金是金海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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