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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과 대한(大韓) 본문



"三韓的大韓之也.(삼한의 대한이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中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편지)."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 직전에 고 종은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국호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대례의궤(大禮儀軌)』에 의하면 고종이 국호를 개정하려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때이니, 모든 예법도 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제부터 환구단에 첫 제사를 지내려 하는 때에, 당연히 나라의 이름을 새로 정해야 할 것이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으로서 나라의 초기에 천명을 받고 삼한을 통합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일찍이 여러 나라의 문자를 매번 보건대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으로 된다는 옛날의 징표로서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니 천하에 공포하지 않아도 천하가 모두 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알 것이다.” 하였다.
고종은 옛날 천명을 받아 삼한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였던 때처럼, 새로 천명을 받아 황제에 오르는 그 시점에서 국호를 대한으로 고침으로써 당시 이리저리 갈라진 국론(國論)을 대통합하여 새로운 도약의 전기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제안에 대신들도 모두 찬성함으로써 국호는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뀌었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던 그 시점에서 고종은 황제 였으므로 대한은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이라고 하는 국호는 조선 왕국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일신(一新)하여 새로운 통합과 도약의 전기로 삼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고종의 황제 즉위와 함께 탄생하였던 것이다.
其後致逺亦甞奉使如唐, 伹不知其歳月耳. 故其文集有上大師·侍中狀云,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적이 있으나, 다만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上太師侍中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고〔구〕려·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 오·월을 침략하였고, 북쪽으로 유주 지역의 연·제·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큰 해[巨蠹]가 되었습니다. 수(隋) 황제가 통제를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삼국사기 권46 최치원 열전-
伏以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운집 제1권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
최치원을 통해 고구려가 '삼한' 중 하나로서 '한국사'에 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 개요
"三韓的大韓之也"는 "삼한(三韓)은 대한(大韓)이다"라는 뜻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가 고대 한반도의 세 세력인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에서 유래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주요 의미와 배경:
역사적 계승: 1897년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할 때, 고대 삼한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삼한 전 지역을 아우르는 제국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삼한의 정통성: 이는 마한, 진한, 변한이 훗날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지며 한반도 정통 역사로 인식되어온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에 근거합니다.
대한(大韓)의 의미: 단군조선의 삼경(진한, 번한, 마한)에서 유래한 '한(韓)'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위대하게(大) 표현한 것으로, 삼한의 전 지역을 통치한다는 의미를 강화한 것입니다.
즉, 삼한은 대한제국을 구성하는 역사적, 지리적 기반이며, 대한은 이를 통합하고 정통성을 잇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幷馬韓酋長.(고(구)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 고연수, 대형 전부군주 고혜진은 모두 마한 추장이다.)《전당문》, 태종 황제, 645년
고려시대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는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공을세운 공신에게 주는 공신위가 있었으며 현종 이후 이에 버금가는 큰 공을 세운이에게 주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삼한벽상공신에 맞먹는 등급의 공신위도 있었다. 그 밖에 충선왕과 공민왕이 만들고 개편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라는 공신위도 있었으며,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내리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라는 작위도 있었다.
'삼한(三韓)'은 일반적으로 고대 한반도 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을 통칭하는 말이었으며, 이후에는 조선을 광범위하게 지칭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중국의 사서나 소설, 필기에서는 요동 지역의 다른 민족들을 지칭하기도 했다.
당나라 시대에는 당나라에 있었던 고구려족이나 말갈족 장수들이 역사적으로 '삼한귀종(三韓貴種)'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다조(李多祚)가 그 예시다.
《신당서》에는 이다조의 조상이 말갈족의 추장으로 후에 당나라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는 그가 말갈인이라고 기록하면서도 사후 그를 복권하는 조서에서 "삼한귀종(三韓貴種)"이라고 적고 있다.
‘고영주(古營州)’ 사람, ‘삼한인(三韓人)’은 금나라 이후 중국 동북 지방 문인들의 글에서 곧 요동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外國·삼한(三韓)》 조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요동을 삼한이라 부르는 것은… 그 까닭을 따져보면, 본래 요양을 잃은 뒤 상주문에 요동 사람을 삼한이라 일컬은 것이 그 근원이다. 이는 곧 바깥으로 내친 것이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조차 스스로 그렇게 부르니, 역시 스스로를 외부인으로 여긴 것일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이후로는 '삼한'이 요동을 대신하는 호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예컨대 조윤(曹寅)의 선조가 요양 출신이다.
삼한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2.기록
(1)금석문
A.한국
[최사전이 이르기를]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중략)
상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삼한(三韓)을 바로 되돌리고 종사(宗社)[11]를 안정시킨 것은 공의 힘으로 한 것이다."
- 《최사전 묘지명》 中.-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에 용서하시며 넉넉히 예로써 맞아주시니, 표정을 고치고 웃는 낯으로 온갖 무기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갑옷, 도성의 남녀가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께서 은사를 베푸심이라. 황제께서 군사를 물려주시니 우리 백성들 살게 되었네. 흩어진 우리 백성 불쌍히 여겨 농업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니,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단은 나날이 새로워라.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은혜로다.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 삼전도비 中
B.중국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고구려 출신《고현 묘지명》, 691년 中-
C.루추(유구국)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루추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 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 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루추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의 명문-
(2)서지문
A.한국
《고려사》
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고려사》, <예종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中.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2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의 유조(遺詔) 中.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며 왕이 있는 건 오직 삼한뿐이다.
《고려사》, 권 33, <충선왕 세가> 中.
(중략) 伍允孚嘗痛憤, 以爲, “此藥不宜胎産, 使三韓攴胤不蕃者, 必此人也.” (중략)
(중략) 오윤부가 분통해 하여 말하기를, “이 약은 아기를 가지는 데 좋지 못하므로, 삼한의 왕실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중략)
《고려사》, <열전>, -비-,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가 충렬왕에게 미녀를 바친 김중경을 순마소에 하옥하다. 中.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3번째 기사
B. 중국
東萊大事記曰 顔師古曰 貉在東北方 三韓之屬 皆貉類也 回曰 燕人臧荼之人也 韓信説下之者 燕與遼東接 遼東與三韓接 是時 三韓未有髙麗之名 其箕子朝鮮之國歟 亦秦滅燕 王賁得燕王喜 遼東而有遼東 遼西郡 鄰於貉者歟 中國騎兵少灌嬰追項羽五千騎耳 項羽不得 此梟騎之助 而漢得之其亦㣲盧彭濮之類歟"
《동래대사기》에 이르기를, 안사고는 ‘맥(貉)은 동북 방면에 있으며, 삼한에 속하는 자들은 모두 맥과 같은 종류’라고 하였다. 또 회(回)는 ‘연나라 사람 장도가 소속된 곳이며, 한신이 설득하여 항복한 자들이다. 연나라는 요동과 접하고, 요동은 삼한과 접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는 삼한에 고구려라는 이름이 없었고, 아마도 기자조선의 나라였을 것이다. 또한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왕분이 연왕 희를 사로잡아 요동을 차지하였고, 요서군은 맥과 인접하였을 것이다. 중국의 기병은 드물었고, 관영이 항우를 추격할 때 겨우 5천의 기병을 이끌었다. 항우는 이러한 맹렬한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으나, 한나라는 그것을 얻었다. 이는 또한 미루와 팽박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
『古今攷』
삼한(三韓)은 정말로 망하였구나.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효정경황후 대공보 1910.9.21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영사지금필: 평생을 벼르던 일이 이제야 끝났구려)
死地圖生非丈夫 (사지도생비장부: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도다)
身在三韓名萬國 (신재삼한명만국: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도다)
生無百世死千秋 (생무백세사천추: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위안스카이-
3. 기록과 용어 사용 사례
(1) 한국
况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조 기사 中-
11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高宗)이 조서(詔書)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三韓) 백성들은 목숨을 칼과 도마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갔던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 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하게 되어, 사녀(士女)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651년 당 고종이 내려보낸 조서-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민(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기사-
(2)중국
特進行右衛大將軍上柱國卞國公泉男生:五部酋豪,三韓英傑。——【泉男生墓志銘】
특진 우위대장군 상주국 변국공 천남생은 다섯 부족의 우두머리이자, 삼한(三韓)의 영웅이었다.
-고구려 출신《천남생 묘지명》, 679년 中-
公幼彰奇表 夙挺環姿 氣蓋三韓 名馳雨貊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
-백제 출신《부여융 묘지명》, 682년 中.-
고구려의 제2대 대막리지 연남생과 백제의 마지막 왕태자였던 부여융의 묘지명이다.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고구려 출신《고현 묘지명》, 691년 中. -
六師薄伐,三韓肅清,龔行天罰,赫赫明明...——【隋書 虞綽傳】
"여섯 군대가 적을 얕보고 공격하며, 삼한을 숙청하고, 하늘의 벌을 행하니 그 위엄이 빛나고 밝았다..."
《수서》
隋炀帝征高麗 反三韓之士,不易於農肆。焚榇錫爵,驅馳遼浿之間;鑿井耕田,編列弁辰之野。——【克高麗白岩城詔】
"수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삼한의 병사들은 농사일처럼 쉽게 여기지 않았다. 상여를 불태우고 잔을 내려, 요하와 패수 사이를 누비며, 우물을 파고 밭을 갈아 변진의 들판을 정리하였다".
《수서》
唐太宗散文 三韓君長,高氏為其主,誠願陛下存亡繼絕之義,復其故地,此之美名,高於堯舜遠矣。——狄仁傑 【請拔安東表】
"삼한의 군주들 중에서도 고씨(고구려)가 주도하였습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끊어진 곳을 이어주는 의미를 살려 그들의 옛 땅을 되찾게 해 주신다면, 그 아름다운 명성이 요순(堯舜)보다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3)일본
《일본서기》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 왕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 에치노 다쿠쓰(朴市秦 田来津)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 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漢字姓氏,兄弟國
한족(중국인)이나 조선족(한국인), 야마토족(일본인), 만주족 등은 한자성씨(漢字姓氏)를 사용하는 형제국(兄弟國)입니다
한자 성씨( 漢字姓氏)를 사용하는 형제국이지만 각 민족끼리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각 민족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면 중국인,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면 한국인, 일본어를 사용하면 일본인, 만주어를 사용하면 만주인이다
각 민족은 언어를 기반으로 독자적 문화를 인정하면서 경제통합에 노력해야 한다
- 三韓的大韓之也.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 朝鮮的日本之也.
日出之也(朝鮮), 日出之本(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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