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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시조 신화 본문



백두산(장백산)의 동쪽에 부쿠리 산이 있고, 그 산 기슭에 못이 있었는데 부쿠리 호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그 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어떤 까치가 막내 선녀의 옷에 주과(붉은 과일)를 물어다 놓았다. 막내 선녀는 그 주과를 입속에 물고 있다가 문득 뱃속으로 들어가 곧 임신을 했다. 뒤이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자태와 용모가 기이했다.
아이가 커가자 선녀는 주과를 삼키게 된 사연을 알려주고, 이내 그에게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씨를 내려주고,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이라고 하였으며, 그에게 작은 배를 내어 주고, 다시금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시키기 위한 것이니 어서 가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 는 말을 남기고 선녀는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느 물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가지와 쑥을 꺾어 깔개를 만들고 단정히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그때 장백산(백두산)의 동남쪽 오도리라는 지역에 삼성이라는 곳이 있어 서로 추장이 되겠다고 다투면서 날마다 싸움질을 하고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곤 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물가로 물을 길러 갔다가 돌아와서 뭇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싸우지 마세요. 제가 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어떤 사내아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닌 성 싶었습니다. 하늘이 이런 사람을 허투루 태어나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아이한테 가서 물으니 "나는 선녀의 소생으로 당신들의 혼란을 평정시키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뭇사람들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성인인데 그냥 걸어가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서로 손을 잡아 가마를 만들어 집까지 데리고 왔다. 삼성 사람들은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논의하고, 결국 자기 딸을 시집보내어 버일러로 받들었다. 장백산(백두산) 동쪽 오도리성에 살았으며, 나라 이름을 만주(滿洲)라 하였는데 나라의 터전을 맨 처음 열었던 곳이므로 국서를 가지고 이를 고증하고자 한다.
만주족의 시조 신화.
청나라의 조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삼천녀 신화로 불린다. '만주 건국 신화'라는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의 시조, 즉 청시조(淸始祖)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愛新覺羅 布庫哩雍順, 애신각라 포고리옹순)이 어떻게 시조가 되었는지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만주원류고》의 제1권 부족편에는 《발상세기(發祥世紀)》라는 문헌을 인용해서 만주족이 어떻게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라는 성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력과 첫 국가인 만주(滿洲)를 건국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주션 구룬(Jušen Gurun)의 세 성씨가 어전(Ejen)의 자리를 놓고 오래도록 다투고 있었다. 이를 본 압카이 한(Abka-i Han)은 신을 보내어 주션 구룬의 혼란을 정리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려고 했다. 압카이 한은 주션 구룬으로 갈 신에게 까치로 변신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딸 셋이 부쿠리(Bukūri) 산 기슭의 불후리(Bulhūri) 연못에 목욕을 하러 갈 것이다. 이 붉은 과일을 가지고 가서 막내의 옷 위에 두고 오라."
그리고 어느 날, 백두산 동쪽에 있는 부쿠리 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 압카이 한의 딸인 선녀 세 명이 와서 목욕을 하였다. 맏이는 엉굴런(Enggulen), 둘째는 전굴런(Jengulen), 막내는 퍼쿨런(Fekulen)[8]이라 하였다.
선녀들이 목욕을 다 마치고 옷을 입으러 가는데, 신령스러운 까치(神鵲)가 퍼쿨런의 옷 위에 붉은 과일을 올려놓았다. 퍼쿨런은 그 색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놓치기 싫어서 입에 넣고 옷을 입다가 그만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이 무거워져서 하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언니들에게 얘기하자 언니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건 아마도 하늘의 뜻이다. 우리는 묘약을 먹어서 죽지 않으니, 네가 몸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서 하늘에 올라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결국 퍼쿨런은 부쿠리산에서 살다가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말을 하고 빠르게 자랐다. 퍼쿨런은 그 아이의 이름을 부쿠리용숀(Bukūri Yongšon)[9]이라고 지었다.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난다
어느 날, 장성한 부쿠리용숀을 퍼쿨런이 불러서 말하였다.
"너는 어지러운 주션 구룬을 평정하라는 천명을 받고 태어났다. 너는 이제부터 주션 구룬에서 살아야 한다. 주션 사람들이 너에게 부모와 이름을 물으면 부쿠리 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서 태어난 부쿠리용숀이며, 성은 아이신기오로(Aisin-Gioro),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는 압카이 한의 세 딸 중의 막내인 퍼쿨런이라 말하고, 나는 하늘의 신이고 내 영혼은 압카이 한께서 붉은 과일로 만들어 까치로 변한 신에게 내려보냈다고 대답하거라."
그리고 퍼쿨런은 작은 통나무배를 주면서 당부하였다.
"이 배를 타고 가거라! 나라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물을 끌어들이는 나루가 있을 것이다. 나루에서 강가로 올라가면 길이 나온다. 그 끝에 너의 나라가 있다."
부쿠리용숀은 통나무배를 타고 강의 끝까지 내려갔다. 아들이 떠나자 퍼쿨런은 하늘로 돌아갔다.
부쿠리용숀은 우거진 숲과 협곡을 지나 장백산(백두산) 동남쪽의 오모호이(Omohoi) 들판에 있는 오도리(Odoli) 성에 도착했다.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뭍으로 오른 그는 버드나무를 꺾어서 의자를 만들고 그 위를 쑥으로 덮었다. 그때 마침 물을 길러 가던 사람이 그를 보고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 어전 자리를 놓고 다투던 사람들에게 전했다.
"싸우지 마시오. 우리가 물을 끌어들인 나루에 아름답고 영리한 사내아이가 쑥을 덮은 버드나무 의자에 앉아 있소. 아무래도 주션 구룬의 아이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 같소."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 보니 과연 아름답고 영리해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의 아들이고, 성은 무엇입니까? 이름은 무엇입니까?"
부쿠리용숀이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대답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감히 걸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손을 모아 깍지를 껴서 가마를 만들고 그를 태워서 데리고 갔다. 세 성씨의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고 그를 버일러(Beile)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나트 버리 거거(Nat Beri Gege)라는 여자를 아내로 주었다. 결혼을 하자 사람들은 그를 어전으로 삼았고, 부쿠리용숀은 나라 이름을 만주(Manju)라 하였다.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은 까치를 자신의 조상이라 하여 죽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부쿠리용숀의 후손들이 주션의 백성을 괴롭히자, 압카이 한은 그들을 책망하였고 백성도 등을 돌렸다. 백성들이 부쿠리용숀의 후손이 살고 있던 성을 포위하자, 압카이 한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도망치게 하였다. 병사들이 추격하자 압카이 한은 전에 보냈던 신을 까치로 변하게 하여 그의 머리 위에 앉게 하였고, 추격하던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 철수했다. 도망친 후손의 이름은 판차(Fanca)이다.
그로부터 다시 몇 세대가 지난 뒤에 아이신기오로 먼터무(Dudu Mentemu)라는 덕을 갖춘 인물이 태어나 오모호이 들판의 오도리성에서 서쪽으로 15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숙수후(Suksuhu) 강가의 허투아라(Hetuala)라는 곳에서 살았다.
먼터무는 함부로 날뛰는 40여 명을 오모호이 들판의 오도리 성에서 허투아라로 유인하여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포로로 삼은 다음 그들의 형제와 가족을 잡아갔다. 그는 이후에도 허투아라에서 살았다
- 만주족의 시조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성씨는 한국어(한자 성씨)로 해석하면 김(金) 씨 성씨입니다
금나라와 청나라의 시조나 국왕의 성씨는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Aisin Gioro, 愛新覺羅)로 김(金)씨입니다
만주족의 시조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 Aisin Gioro, 愛新覺羅) 김씨는 바다 속의 사금(沙金) 김해(金海) 김(金)씨 금관가야 후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까치와 주과(붉은 과일, 감 홍시)는 한반도 남방 문화를 의미합니다[까치는 한국에서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져 왔다. 아침에 집앞에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와서 길조로 여기기도 한다. 한국 농민들은 감 따위의 과일을 수확할 때에도 까치밥이라 하여 잘 익은 홍시 같은 여분의 과일을 그대로 남겨두기도 하였다. 까치 까치 설날은]
청나라(1644~1912)는 만주족이 세운 왕조로, 황실 성씨인 아이신 기오로(애신각라, 愛新覺羅)를 중심으로 구왈기야(과얼자, 瓜爾佳), 니오후루(뉴구루, 鈕祜祿) 등 만주족의 8대 성씨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만주족은 고유한 다음절 성씨를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한족식 외자 성씨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1. 주요 만주족 성씨 (만주족 8대성)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Aisin Gioro), 愛新覺羅): 청나라 황실 성씨.[한자성씨 김(金)]
구왈기야 (과이가(Gūwalgiya), 瓜爾佳):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直義公 費英東의 후손들임.[한자성씨 관(關)]
슈무루 (서목록, 舒穆祿): 티스토리 블로그에 따르면, 武勳王 楊吉利의 후손들임.[한자성씨 나(那)씨, 조(趙)씨, 엽(葉)씨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
만주족에 특히 많았던 8대성은 다음과 같다.
나라 하라 Nara hala 那拉
퉁갸 하라 Tunggiya Hala 佟佳
구왈갸 하라 Gūwalgiya 瓜爾佳
마갸 하라 Magiya 馬爾佳
소초로 하라 Socoro 索綽羅
치갸 하라 Cigiya 齊佳
푸차 하라 Fuca hala 富察
뇨후루 하라 Niohuru hala 鈕祜祿
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이 한족을 따라 성씨를 고친다. 퉁갸씨는 동(佟), 구왈갸는 관(關), 마갸는 마(馬), 소초로는 색(索), 치갸는 제(齊), 푸차는 부(富), 나라는 나(那), 뇨후루는 랑(郞)으로 바꿨다.
2. 특징
만주어 기반: 만주족 고유의 다음절 성씨를 사용.
한족식 변경: 멸망 이후 대부분 한족 성씨로 변경 (예: 아이신 기오로 -> 김(金) 씨).
명나라와의 차이: 한족 중심의 명나라와 달리 만주족의 관습을 유지.
청나라 말기에는 많은 만주족이 한족식 성씨를 사용하여, 자료에 따르면 족보를 통해 만주족 성씨를 식별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의 권력을 지탱했던 만주족의 핵심 벌족 성씨는 크게 황족인 아이신 기오로(애신각라) 씨와 그들을 보필한 '만주 8대 성씨'로 나뉩니다.
청나라 건국에 공을 세우고 고위 관직을 독점했던 주요 성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황족 성씨
아이신 기오로 (애신각라, ᠊ᠠᡝᠰᡳᠨ ᡤᡳᠣᡵᠣ): 청나라 황실의 성씨입니다. '아이신'은 금(金)을, '기오로'는 성씨를 의미합니다. 중화민국 수립 이후 대다수가 김(金) 씨로 성을 바꾸었습니다.
2. 만주 8대 성씨 (만주팔대성)
청나라 조정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대표적인 가문들입니다. 가문에 따라 이후 변경한 한족 성씨도 함께 기재합니다.
구왈기야 (과이가, ᡤᡨᠸᠠᠯᡤᡳᠶᠠ): 8대 성씨 중 으뜸으로 꼽히며, 개국공신 피용돈(費英東) 가문이 대표적입니다. (후에 관(關) 씨로 개성)
니오후루 (뉴구록, ᠨᡳᠣᡥᡠᡵᡠ): 건국 공신 에이두(額亦都) 가문과 건륭제의 총신 화신이 이 성씨입니다. (후에 랑(郞) 씨 또는 뉴(鈕) 씨로 개성)
나라 (나랍, ᠨᠠᡵᠠ): 울라, 호이파, 예헤, 하다의 4개 지파로 나뉩니다. 서태후(예헤나라 씨)가 이 가문 출신입니다. (후에 나(那) 씨로 개성)
슈무루 (서목록, ᡧᡠᠮᡠᡵᡠ): 개국공신 양기리(揚吉利)의 후손들입니다. (후에 서(舒) 씨로 개성)
둥고 (동악, ᡩᠣᠩᡤᠣ): 순치제의 총애를 받은 동악비의 가문입니다. (후에 동(董) 씨 또는 조(趙) 씨로 개성)
마기야 (마가, ᠮᠠᡤᡳᠶᠠ): (후에 마(馬) 씨로 개성)
후시할라 (부찰, ᡶᡠᠴᠠ): 건륭제의 효현순황후 가문이 유명합니다. (후에 부(富) 씨 또는 부(傅) 씨로 개성)
헤셰리 (혁사리, ᡥᡝᡧᡝᡵᡳ): 강희제의 보정대신 소니와 효성인황후의 가문입니다. (후에 혁(赫) 씨 또는 하(何) 씨로 개성)
3. 기타 유력 성씨
퉁기야 (동가, ᡨᡠᠩᡤᡳᠶᠠ): 강희제의 외가이자 효강장황후의 가문으로, '동반조(佟半朝: 조정의 절반이 동씨)'라 불릴 만큼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후에 동(佟) 씨로 개성)
장백산의 마지막 만주족 나무집 마을 금강 마을(錦江村을 찾아









금강 마을(錦江村)에 남아 만주족 나무집은 청나라 초기 장백산 기슭에 세워졌다. 만족(満族)은 그 200년 동안 황무지 개간, 사냥, 고기잡이, 나무 벌목 등으로 생계를 보존하면서 지역의 고급 조선(朝鮮) 소나무로 담과 집을 짓고 독특한 목조 주택의 마을을 형성했다. 지금은 지역 주민의 거주 조건 개선되어 약 50채의 금강(錦江) 목조 가옥이 장백산의 마지막 나무집 마을이 되었다.
사진은 약 50채의 목조 주택이 위치한 금강 마을(錦江村) 장백산 마지막 나무집 마을. 최근 몇 년간 현지 나무집 마을이 수리 되어 있다. 보호 센터, 응급 처치를 제일로 하고 민속을 발굴 진정성을 회복하고 금강 마을(錦江村)을 동북 민속 체험센터와 생태 박물관로 개관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금관가야국 시조 수로왕(首露王)[머리 首, 이슬 露(露는 나라 이름으로는 러시아를 뜻함)]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300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9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6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6개의 알은 화해서 어린 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 탕왕)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나라 고조와 같았다. 눈썹이 팔자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나라 요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재위 2년 계묘(癸卯)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신답평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9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18]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9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명 ~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 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 것을 고쳐서 새 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6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를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금관가야 수로왕이나 사로국 혁거세, 일본 주류민족 야마토 왕국은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 유민들이 남하 하여 원주민과 융합하여 성립한 국가로 보고 있다.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 민족이 조선민족이다
김수로라 기록되어 있지만 정황상 신라처럼 금관국도 수로왕 시절에는 성이 없었다가 후세대부터 김해 김씨를 사용한 것이 소급 적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생전에는 그냥 '수로'였다는 것이다. 혁거세 거서간이 박혁거세라 불리지만 정황상 생전 혁거세가 성이 없었으리라 유력시되는 것과 같다. 학계에서는 박씨(朴氏)는 혁거세의 본명인 '밝은누리'의 '밝'을 음차한 것이고, 금관국계 김씨는 '수로'왕의 '쇠(金)'를 한자화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가락종친회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시조 기반으로 형성된 친족이다
가락종친회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양천 허씨), 인천 이씨를 뜻한다
가락종친회는 김해 김씨의 인구 445만6000명, 김해 허씨의 인구 134,068명(양천 허씨의 인구 149,505명), 인천 이씨의 인구 약 83,855명으로 한국 성씨 중 가장 많을 숫자를 가진 친족 성씨이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양천 허씨), 인천 이씨는 가락국 수로왕과 허황옥 왕후를 같은 뿌리(김수로왕의 2개 성 사용)로 두어 전통적으로는 같은 핏줄(이성동본)로 간주해 혼인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사실상 다른 성씨로 간주되어 법적인 혼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최근에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결혼하는 추세이다
* 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 滿만 州주 ) Ruler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 漢한 -한나라의 청천강 이북지역 점령과 한사군 설치 그리고 청천강 이남 고조선 유민으로 진국등장]->Goguryea[A.D 313-668, Korea People:고구려]->Tang[A.D 668-698, Han China People: 唐당 나라]->Balhae[A.D 698-926, Korea People:조선족과 여진족 연합정부]->Liao[A.D916-1125, Khitan China People: 遼요 나라-거란족:(다우르족: 達달 斡알 爾이 族족 ), 중국 소수민족의 거란족의 나라]->Jin[A.D 1115-1234,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 金금 나라-여진족 또는 만주족, 중국 소수민족 여진족의 나라]->Mongol[A.D1234-1368, Mongol People: 蒙몽 古고 나라-몽고족, 중국 소수민족의 몽고족의 나라]->Ming[A.D 1368-1644, Han China People: 明명 나라]->Qing[A.D 1616-1912,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 淸청 나라-만주족, 중국 소수민족 여진족의 나라]->Republic of China[A.D 1912-1932, Han China People:중화민국-중국 국민당, 反淸國家]->Manchukuo[A.D 1932-1945,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 滿만 州주 國국 -만주족=여진족]->People's Republic of China[1945.8~ Han China People: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만주족과 우호국가]
*Goguryea[Goryeo]-고려( 高고 麗려 )는 고구려( 高고 句구 麗려 )의 줄임
*Gojoseon[Joseon]-조선( 朝조 鮮선 )은 고조선( 固고 朝조 鮮선 )
* 三韓的大韓之也[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이 대한이다]: 三韓正統說(삼한정통설)
馬韓(마한)이 고구려이며 弁韓(변한)이 백제, 辰韓(진한)이 신라이다
* 南北統一的東北三省問題解決
*동북 3성(만주지역)은 한국인(조선족), 한족(중국인),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고족들이 자치구를 설치하여 거주하고 있다
한반도나 중국본토는 만주지역의 소수민족 즉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족등이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으며 독립국가로 등장하여 동북아 전쟁을 유발하기를 경계해오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 민족은 꾸준히 고구려 후예를 자청하여 고려국가(고구려의 줄임이 고려)를 건국이론이나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과 金( 淸 , 진한 후손론 즉 김씨 종족)을 내세워 큰 한민족의 나라 대한(大韓) 건국설로 만주지역 최대민족 여진족(만주족)과 연합을 추진해왔다
일본은 야마토 왕국 후예로 자처하면서 정명가도(征明假道) 모델 조선족(만주족)과 연합으로 중원(中原) 한족을 정벌하려는 장책을 추진하는 무인세력들이 있다 한족(중국인)이나 조선족(한국인), 야마토족(일본인), 만주족 등은 한자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이다
*고구려( 高句麗의 줄임 高麗), 조선( 朝鮮)은 일출지야(日出之也) 즉 일본(日本, 日出之本)
- 三韓的大韓之也.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漢字姓氏,兄弟國
한족(중국인)이나 조선족(한국인), 야마토족(일본인), 만주족 등은 한자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입니다
한자 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이지만 각 민족끼리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각 민족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면 중국인,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면 한국인, 일본어를 사용하면 일본인, 만주어를 사용하면 만주인이다
각 민족은 언어를 기반으로 독자적 문화를 인정하면서 경제통합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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