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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공화국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제6공화국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CIA Bear 허관(許灌) 2026. 6. 29. 10:38

1975년 12월 18일 김종필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 1976년 3월 13일 최규하 국무총리 임명(1976년 3월 13일~1979년 12월 5일)-->1976 12 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임명(1976년 12월 6일-1979년 10월 26일)--> 1978 5 18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대 대의원 선거(2,581명 대의원 선출)---> 1978 7 6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9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1978 12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누리고 승리(신민당 32.8%, 공화당  31.7%)-->1979년 3월 5일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임명(1979년 3월 5일~1980년 8월 21일)--->1979.5. 김영삼 신민당 총재(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 김영삼은 267, 이기택 92, 신도환 87표를 받았다.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기택은 이를 받아들인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378, 이철승 367표로 근소한 차로 역전승을 하여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었다)--->1979 10 4일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주도 신민당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박탈 의결--->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16일 ~ 1979년 10월 20일)--->10.26 박정희 시해사건---->1979 11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김종필 총재로 선출(김종필 총재 중심으로 공화당 장악)--->1979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선출 (투표 2,549명, 찬성 2,465표, 무효 84표)-->12.12사건(정승화 중심의 舊군부와 전두환 중심의 新군부 싸움에서 신군부 승리)--->1979년 12월 21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김종필 전 국무총리 체포와 감금 그리고 공화당 인사에 대한 부정축재 수사-->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1980 5 18 ~ 1980 5 28일)--->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직 사임---> 1980 8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투표 2,525명, 찬성 2,524표, 무효 1표)--->제5공화국 성립(1981~1988, 1981 2 25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부을 전면 부정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고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3공화국, 4공화국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모식을 8년동안 금지시키고 과거 공화당 출신의 김종필 등을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 해외로 출국시키는 등 과거 3, 4공 시절과의 완전한 단절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6월 민주 항쟁과 6.29선언을 통하여 제5공화국은 소멸하였고 개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6공화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이후 공화당을 장악한 사람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1979 10월 박정희가 사망한 후 1979 11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고, 1979 11월에는 5·16 민족상 재단 총재가 됐다.

5.18민주화운동이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김종필 전 국무총리 체포와 감금 그리고 공화당 인사에 대한 부정축재 수사에 대한 대항으로  전남지역 공화당 사조직의 저항 운동으로 보는 분도 있다 10.26사건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 중심으로 신속히 유신헌법을 청산하고 새헌법을 개정하여 10,26사건 재판과 권력 이양을 했다면 5,18광주사태(5.18민주화운동)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978 5 18: 통일주체국민회의 2대 대의원 선거 - 2,581명 선출

1978 7 6: 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 - 9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578, 찬성 2,577, 무효 1)

1979 12 6: 10대 대통령 최규하 선출 (투표 2,549, 찬성 2,465, 무효 84)

1980 8 27: 11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투표 2,525, 찬성 2,524, 무효 1)

 

-일민(一民) 이기택선생의 회고록 우행(牛行)’ 책 내용 중에 '1.1% 승리'입니다

"1978 12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여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특히 사무총장인 나로서는 나이 많은 국장들을 지휘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의 승리를 일궈낸 것이기에 내심 자부심도 느꼈고 사실 칭송도 많이 받았다

신민당은 이 선거를 '유신체제 6년의 공과를 심판할 기회'로 간주하고 박정희 정권의 '10대 비정'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선거결과 신민당은 총 유효투표의 32.8%를 얻어 31.7%를 얻은 데 그친 공화당을 누르고 이른바 '1.1% 승리'를 거뒀다. 야당이 여당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것은 선거사상 초유의 쾌거였다"[牛行 187페이지 내용 일부]

야당 신민당 총선에서 여당 공화당에게 승리하지만 유정회 때문에 여당(공화당과 유정회)은 꾸회의원 재적이원 3분의 2이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야당 신민당은 승리해도 항시 재적 의원 3분의 1 이하 수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장기집권용 유신체제는 박 전 대통령이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쓰러지기 전에 스스로 출구를 찾기 어려운 체제였다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우리 국회는 지금이라도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다. 유신은 헌정사에서 제외해야 할 헌법의 진공상태였다

유신체제는 법치를 부인하고, 입법부와 국민주권을 부정했으며, 권력자(박정희)를 법과 제도 아래 두는 공화국 원리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헌정 파괴행위이다

 

-11 28일 이후 대권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정승화는 언론사 간부들을 세 차례나 육군본부로 초대하여 차기 대권을 둘러싸고 국민의 관심이 쏠린 세 사람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즉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무능력하며, 김종필은 너무 부패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당시 군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소신을 가졌던 정승화는 결국 야당 인사들에게 어떠한 협력, 인정도 거부하였다.

정승화는 1929 2 27, 경상북도 김천출신으로 1947년에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 4월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61 5 5.16 군사 정변 때는 육군 본부 예하 방첩부대장(현재의 명칭은 기무사령관)을 역임하고, 현역 대령 계급으로써 육군 2군단 작전참모를 거쳐 육군 2군단 작전과 과장으로 재직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2] 등으로 전격 임명, 겸임되었다. 그해 8 11일 최고위원의 한 일원 시절, 드디어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2 2군단 작전과장에서 다시 방첩부대장으로 전임되었다.

1972년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부장, 1973 3 6일 육군 중장으로 특진하여 이후 육군 제3군단 군단장 등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975 9월부터 1977 12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77 12월 육군 제1군사령부 사령관, 1979 2 1일에 제22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 때에 그 장소인 궁정동 안가 ''동에 있었으며(피살장소는 ''동이었음), 이러한 사실이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10 27일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0 27일 새벽 4시부로 계엄사령관이 되어 김재규 체포 작전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정승화는 심증만 있고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김재규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1979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선출 (투표 2,549명, 찬성 2,465표, 무효 84표)

12 9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 시키겠다는 건의를 골프장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했으나, 김재규 재판이 계속중일 때 수사책임자를 전보 시키는 것은 일반의 의혹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니 일시 유보하라는 국방장관의 말에 따랐다

1979 12.12 사태 당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등에게 연행되고, 육군참모총장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국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등과 함께 고문을 받은 그는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되었고 곧이어 국방부 장관의 형량 확인 과정에서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80 6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집행유예형이 내려졌지만 81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가 1988년 군적이 회복되었다.

 

정승화 전총장의 12·12군사 정변과 관련하여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구체적 시나리오를 짠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신군부가 애초에는 군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을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하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간주 하였다

 

"巨山後廣, 後廣巨山(中山, 新民會-民主共和國)

平和大忍,信望愛.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經濟是資本主義, 政治是民主主義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獨栽主義(全體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後,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民主國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民主政府[民主國家]

  -資本主義民主主義運動聯合-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國號)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으로 건국한 대한제국을 계승하여 대한(大韓)으로 하며 국정(國政)은 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民主共和國)를 원칙으로 한다

단군왕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반일 독립투쟁 입장에서 세계정세에 순응하여 중국, 미국이나 소련, 유럽 등 지원을 받았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中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편지

- 三韓的大韓之也.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문- 민주정치의 실천 이념]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일본국 헌법]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국가(자유사회)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모범국입니다

대한민국은 자국 영토에 있는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 민주주의 파트너 국가와 함께 전 세계 자유와 법치 보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대한민국 헌법 Ⅰ.제1공화국[제헌헌법] 4281년 7월 12일 제정1948년 7월 17일 공포 전문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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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엄 포고령을 무효로 판결했기 때문에 유신헌법도 무효로 해석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구축을 위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헌법 기능 정지 등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엄 포고령을 무효로 판결했습니다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우리 국회는 지금이라도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다. 유신은 헌정사에서 제외해야 할 헌법의 진공상태였다

유신체제는 법치를 부인하고, 입법부와 국민주권을 부정했으며, 권력자(박정희)를 법과 제도 아래 두는 공화국 원리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헌정 파괴행위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헌정 중단 사태이자 친위 쿠데타로 꼽힌다.

2018년 대법원에서 1972 10 17일 비상계엄에 따라 발령된 계엄포고령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위법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남한 제4공화국 유신헌법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헌법이라면 북한 제2공화국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헌법은 세금 없는 세상을 표방한 국영자본체제 성향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극좌헌법입니다

유신헌법이나 주체헌법은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기본권을 심각히 제한하고 있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대식(군정)헌법입니다

한국 군사정부에서 볼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유신헌법 박정희정부를 교조주의 노선이라면 대통령 단임제와 자유화 개방화 정책 제5공화국 헌법 전두환정부를 실용주의 노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엄 포고령을 무효로 판결했기 때문에 유신헌법도 무효로 해석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구축을 위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헌법 기능 정지 등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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